지나간다누구를 위한 교육, 무엇을 위한 시험?(2008.12.)

또 한 번의 수능시험이 지났다. 시험을 치르는 당사자들에게 수능은 괴로운 과정이지만, 정작 사회는 그들의 고통에 아랑곳없이 수능을 통과의례쯤으로 이야기하며 그 선을 넘으면 축하해주자고 얘기한다. 그래서 수능시험은 수험생들에게 일종의 축제가 된다. 그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신문에는 스치듯 올해도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학생이 있다는 기사가 실릴 것이다. 수험생들은 누구를 위해 공부했고, 무엇을 달성했기에 격려와 위로를 받는 것일까. 수능 때문에 고통 받는 데에도, 수능을 마치고 조금은 홀가분해지는 데에도 학생들은 주체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르고, 합격선을 넘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봐도, 자신의 미래는 공부나 시험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을 획득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명확하다.

따라서 수험생들의 공부는 그 가치가 그대로 실현되는 과정이 아니다. 수능시험은 학생이 스스로 원서를 제출해야 하므로, 원하지 않는 학생은 얼마든지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이 땅의 학생들에게는 학교․사회가 시키는 공부를 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공부하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배제될 자유. 그 학생들에게 시험을 강제하고, 또 시험을 잘 마쳤다고 격려하는 것은 재주 부리면 살코기 한 점을 더 던져주는 조련사의 태도와 얼마나 다를까?

고등학교 시절, 패닉을 좋아했다. 답답한 현실을 공감하는 가사들이 참 좋았다. 그런데 해마다 이적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수험생 응원글을 올린다. 그 글에 많이 실망해서, 요샌 이적의 노래를 듣지 않는다. ‘조금만 견디면 돼. 힘들겠지만 이건 원래 견뎌야 하는 거야.’ - 수험생을 응원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견뎌야 하는 것 자체에 어떠한 질문도 허락하지 않고, 무조건 그 아귀다툼에 학생을 몰아넣는 학교․선생들에 비해 이적의 메시지는 그 고통을 공감해주니 참 따뜻하다. 하지만 결국 같은 결론이다. 넌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교육에 대한 인도적인 접근은 이런 한계를 가진다. 비인간적인 학교나 교육환경 자체의 현상적인 조건들에 시선을 고정시켜, 그 이상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사랑으로 감싸는 교육현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더욱 열심히 수능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수능시험의 목표는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것이다. 수험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대학교 입학자격을 획득해야 하지만, 그 표는 한정되어 있다. 그것도 등급이 또박또박 나뉘어서. 내가 한 등수 올라가면 누군가는 한 등수 내려가야 한다. 내가 한 등급 높은 표를 얻을 때, 다른 누군가는 그 표를 놓치게 된다. 이런 시험을 찬양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을, 그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삶을 내놓은 이들을 직접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애초 자기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그 미래와는 동떨어진 것을 획득하도록 강요받아 따른 사람들이, 그 순간을 넘겼다고 자기가 원하는 가치를 실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끊임없이 지금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통해 자기 삶을 메우려 하게 된다. 중고등학교의 교육과 수능시험은 현실에서 추구하고픈 가치를 미래로 유예하는 법(다른 말로 옮기자면, 현실에 체념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배우는 것이 그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길 바란다. 사회적 소통과 활동을 하기 위해서이든, 자신의 지적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든, 배우는 것은 지금 당장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육이 사회적 성원으로 참여하는 자격조건으로 작용하여 포함과 배제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배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수능시험이 보여주듯, 그 배제에 포함되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유예해야 하게 된다. 그 유예는 결국 그 사회를 그대로 유지하길 바라는 이들에게 이득이 될 뿐이다.

 

교육이 그 자체로 자기실현이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시험은 자신의 이해정도를 점검하고, 이해를 늘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 시험은 강제가 되지 않아야 하고, 그 시험의 결과는 서열화되어서는 안된다. 등수의 고저로 그 사람의 성취도가 평가될 수는 없다. 또한 성취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등수가 필요하지 않다. 등수를 매기는 것은 교육 외적인 잣대를 도입하여 배움을 그 잣대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잣대가 필요한 것은 배움 그 자체를 목적을 삼지 않고, 교육을 다른 떡밥(학벌? 성공? 돈? 기타 등등)을 위한 도구로 삼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지만, 교육현실은 모든 게 전도되어 있다.

 

교육은 기회의 평등이 아닌 결과의 평등이어야 한다. 또한 그 교육과정 내적인 기준에 달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여야 하고, 따라서 시험은 성취도를 평가하되 P/F로만 매겨져야 한다. F는 결코 낙오가 아니라, P의 기준이 되는 점까지 자신의 학업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하나의 지침일 뿐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생활하기 위해 교육을 시키는 거라면, 그 결과의 평등이 하향평준화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열외자도 없도록 해야 한다. 이 나라 모든 학생의 교육수준을 어떻게 획일화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고 싶다면, 많은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지 않은 교육과정을 사회에서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따라야 한다는 현실부터 지적해야 한다. 고등학교, ․대학교가 다른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발판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육의 줄 세우기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모든 학교를 평준화시키고, 그 배움의 기회를 ‘평등’하게 해야 한다. ‘기회의 평등’은 인정하지만 ‘결과의 평등’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는 ‘기회의 평등’을 부정하는 언술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시철폐, 대학평준화를 외친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요구’한다. 알량한 인도주의는 집어치우라고. 수험생들을 진정으로 걱정하겠다면, 수능을 견디라고 주문할 게 아니라 이 땅의 교육을 바꾸기 위해 행동하라고. 그렇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래 유서를 남긴 학생들을 죽인 공범이다.

2020/03/04 11:21 2020/03/04 11:21

지나간다2008 노동자대회 참가 후기 _우리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2008.12.)

노동자대회 전날, 전국의 투쟁사업장을 돌며 연대하고 있던 ‘노동해방선봉대’가 강남성모병원을 들러 집회를 한다는 공지를 듣고 그 시간에 맞춰 강남성모병원을 찾았다. 근 한달만에 연대를 위해 강남성모병원을 찾았다. 우리가 찾았던 10월 4일 이후에도 병원직원들이 폭력적으로 로비농성장을 철거했었고, 병원장은 형식적인 대화조차 응하지 않고 있다. 누구를 탓해야할까? 어떻게 병원이 그러느냐, 가톨릭재단이 그러느냐는 비난은 오히려 현상을 정확히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병원을 택한 것이고, 가톨릭을 택한 것일 뿐이니까. 중요한 건 그들이 ‘병원’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아프면 선택의 여지없이 이용해야 하는 시설말이다.

 

병원 앞 집회를 마치고 노동해방선봉대는 다음 장소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 안에서 주위에서 다른 노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새로 지어진 건물은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번듯해져 있었는데, 그 건물에는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병실이 하나도 없다 한다. 세상은 갈수록 살기 좋아진다는데, 어째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갈수록 적어지는 것일까. 다음에 도착한 곳은 콜텍․하이텍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하는 곳이었다. 실제 송전탑 위 고공농성 현장은 ‘송전탑’이란 단어를 통해 얻는 느낌보다 훨씬 아찔했다. 저 높은 곳에, 저 좁은 곳에 사람이 올라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거기다 그 위에서 단식을 하고 있다 한다. 벌써 15일이 넘었다는데, 덜컥 겁부터 났다. 저 위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저분들은 목숨을 걸고 올라가 있는데 밑에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회사를 폐업하면서 까지 노동조합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기업주의 태도는 ‘나쁜 자본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게 싸울 수 있는 기반이 주어지는 것 자체로 자신들이 노동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나쁜 자본가’에 대해 투쟁이 ‘인도적인 자본가’를 요구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섬세해야 한다.

 

집회를 마치고 노동자대회 전야제가 열리는 곳으로 이동해, 전야제 장소 옆에서 열린 사회공공성 쟁취 촛불문화제에 함께했다. 도착이 조금 늦어 이미 문화제는 진행 중이었다. 2008년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담긴 영상이 상영되었다. 이 땅에는 거의 매일같이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한 채 공중에 올라가 있다. 어째서 우리네 삶은 그렇게 처절해야 할까. 왜 이 절실함은 저 경찰차 벽을 넘어가지 못하는 걸까. 그 시간에도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해 발길을 옮기는 사람들이 슬펐다. 이 세상은 다른 이의 싸움에 대한 무관심이 스스로의 삶을 옥죄게 되리라는 사실을 감추고 보이지 않게 만든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높은 빌딩들은 그대로 나를 땅 밑으로 짓누를 것처럼 위압적이었다. 나 혼자서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묻혀버릴지도 모른다. 김소연 기륭전자 분회장의 발언도 있었다. 비정규직이 대세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대세가 아니라 없어져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 투쟁하는 사업장들의 연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회공공성 촛불문화제라고 해서, 현재 수돗물사유화 등의 쟁점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곳곳에서 싸우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노력하는 것이 반가웠다.

 

사회공공성 촛불문화제가 끝난 후 전야제는 생략하고, 바로 강남성모병원의 농성장으로 이동해 함께 참석한 사람들과 노동자대회의 의미와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노동자대회가 처음 열린 88년을 떠올려본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그토록 많은 것에 감격, 자기만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위로감, 그곳에 있던 것은 현실의 모순에 저항해 싸우려는 힘과 그 힘을 모아 함께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는 지향이었다. 자기 삶의 조건을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요구야 말로 노동자의 요구이고, 혁명적인 요구이다. 노동자의 요구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본질론적 접근에 매몰될 때, 현실의 투쟁에서 노동자정신을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지금 민주노총의 집행부가 내세워야 할 노동자대회의 기조가 ‘민생’이어야 하는지, 종부세 등 세제 개편에 대한 반대여야 하는지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정신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2008년의 전태일열사정신이 무엇일지 고민할 때, 그것에는 이런 투쟁성과 연대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고, 이 투쟁성과 연대성이 현재 강남성모병원, 기륭전자, 동희오토, 콜텍, 하이텍, 그리고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업장들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얘기를 나눴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님 이소선씨가 전태일정신은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 깊숙이 와 닿았다.

이후, 로비 침탈로 선전물을 다 뺏긴 농성장에서 피켓을 만들었다. 강남성모병원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유인물을 읽었는데, 강남성모병원에서 노동자들의 월급에는 부가가치세를 붙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회계상으로 파견 노동자들은 아예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이 노동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있는 대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싶어 차라리 속 시원했다. 물건에게서 연금과 각종 세금을 뜯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이율배반인지. 비정규직법 개정으로 파견기간을 연장한다는 논의가 한창 진행된다고 한다. 유통기한 2년을 4년으로 늘린다고 이들의 삶이 나아질 수 없는 것은 확연하다. 상품이 될 수 없는 것들을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이렇게 노동자를 팔고, 물을 팔고, 의료를 팔고, 교육을 판다. 사회공공성을 쟁취하는 투쟁에 노동자들이 함께하는 것은 삶의 조건을 위협하는 시도에 대한 저항인 것뿐만 아니라, 팔 수 없는 것들을 팔지 못하도록 하는 싸움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노동의 불안정성을 증가시켜 노동을 쉽게 사고팔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노동자대회 당일 아침, 일본의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 활동가들이 강남성모병원을 방문하여 노동자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우리도 그곳에 끼어 일본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활동이 이루어지는지, 무엇이 쟁점이 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의 병원들도 보통의 회사와 비슷하여 돈벌이를 위해 운영되고, 적자가 나면 휴업을 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하여, 병원의 노동자와 지역 주민들이 함께 싸운 사례도 있다고 한다. 병원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을 때, 그곳의 노동자들도 ‘병원’파업이라는 데 큰 부담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준비했는데 의외로 지지와 격려를 많이 받은 경험이 있다 한다. 그 노동자들이 싸우며 요구한 것은 정시에 출근하는 것, 점심시간 1시간을 확보하는 것 등 이랬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강남성모병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도 똑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주어진 일을 마치려면 9시가 출근시간 이어도 매일 7시에 출근해야 하고, 간호사들은 아예 점심시간이 없다. 간호보조 업무를 하는 자기들은 잠깐 짬을 내서 식사를 하지만 호출이 있으면 그대로 중단하고 일을 하러 가야 한단다. 싸움의 과정과 요구가 한국에서와 너무 비슷해 한마디 한마디 주고 받을 때마다 돌아가며 한숨을 쉬고, 무릎을 치며 자기 일처럼 공감했다.

이렇게 현실에 대한 저항이 한국과 일본에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언어를 뛰어넘어 서로의 삶에 대해 공감했다. 저 곳에도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구나, 같은 꿈을 꾸는 우리는 같은 요구를 하고 있구나, 비슷하게 싸우고 있구나,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저들은 때때로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런 것들이 말을 통하지 않고 서로 이해되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일본의 상황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은 학교 내 유인물 선전이 금지되어 있어서 전학련 학생들은 유인물을 돌리는 투쟁을 격렬하게 진행 중인데, 이 투쟁을 하느라 2년 동안 88명이 연행되고, 4명이 퇴학당했단다. 한국의 대학에서도 머지않아 이런 싸움을 진행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뻑뻑했다. 일본의 공공재 사유화는 87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일본에서 가장 큰 노조인 JR총련이 고용승계를 대가로 철도 사유화에 합의해서, 배신자 노조로 불린단다. 해마다 노동절이나 노동자대회에는 JR총련의 노동자들이 참석하여 국제연대를 외쳤는데, 이런 이야기를 듣더니 웃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이런 철도매각에 대항해 끝까지 싸운 노동자들도 있는데 1047명이 해고되어 22년이 지난 지금도 복직투쟁을 하고 있었다. 일본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한국보다 10년 쯤 빨라 보였는데, 일본에서는 90년대 중반 파견법이 통과되었고, 지금은 계약기간이 한 달 단위여서 한 달 일한 뒤 해고당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 워낙 해고가 자유롭고, 임금이 적다 보니 이래 잘리나 저래 잘리나 똑같다는 생각에 1인 파업 형태로 산발적인 저항이 일어나고 있단다. 일본 내 노동운동에서는 1047명의 해고자를 놓아두고 새로운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편과, 1047명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편으로 입장이 갈려있는데, 전학련 활동가들은 ‘자신들은 당연히 후자’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 노동자정신을 계승하고, 또한 앞으로 어떠한 싸움을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일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고민을 했다.

간담회가 끝난 후 노동자대회 장소로 이동했다. 여러 단체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신문이나 유인물을 나눠줬고, 길 좌우에 다양한 주제로 가판이 있었다. 하지만 앞 무대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뒤까지 들리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들은 신문과 유인물들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들렸다 하더라도 듣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대회는 아예 행진도 없었고, 명망가들의 발언과 공연으로 채워졌다. 이것을 듣고 보기 위해 이렇게 1년 중 하루 모이는 것이라면, 일회성 기념일이 되는 것이다. 그나마 여러 가판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기 위해 나온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했는데, 이런 생각에 서글퍼졌다.

하지만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어떤 분이 전화를 하며 전국에 우리 같이 싸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고 느끼고 돌아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지금 난, 그곳에 모인 이들이 정말 싸우고 있는 사람들일까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 연대감을 얻지 못하고 시니컬하게 바라보고 있던 것일게다. 하지만 이런 나의 재단과는 달리 싸우고 있고,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 그 곳에 있었다. 노동자대회는 그렇게 다른 세상을 꿈꾸고 만드는 이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자리여야 한다. 첫 노동자대회가 열리던, 일본의 활동가들과 서로의 고민을 나누던, 전화하던 노동자의 이야기를 듣던, 바로 그 순간처럼.

그 만남이 노동자대회 전체를 메우는 것이 노동자정신의 실현일 것이다.

 

2020/03/04 11:20 2020/03/04 11:20

지나간다등록금으로 땅 사지 마세요(2008.12.)

해마다 등록금을 올리며 학교가 내세우는 논리는 간단하다. 물가가 인상되었고, 교육시설을 확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와 등록금협상을 하는 총학생회 또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낸 등록금만큼 제대로 해택을 받을 수 있을 지에 대해 얘기한다. 많은 등록금을 냈으니, 더 많은 혜택을 달라는 요구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역으로 더 많은 혜택을 얻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내야한다는 것이고, 돈을 내지 않으면 교육받을 수 없다는 논리와 같다.

이 사회에서는 교육을 ‘이용’하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게 통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우선 그 논리에 따라 얘기를 해보겠다.

학교는 학생들을 위한다며 쉴새없이 새 건물을 짓고 학습기자재를 구입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충당한다. 원광대, 우석대, 전주대 등과 같은 사립대학의 경우 대학교 운영이 학생들의 등록금과 재단의 전입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대학별로 정도의 차이가 잇지만, 많은 대학에서 전체 운영비용 중 70% 이상을 등록금으로 충당한다. 이에 비해 재단전입금이 한자리수를 넘는 대학은 거의 없다. 도내 대학 또한 마찬가지이다.(원광대의 경우 순전입재단금이 1%에도 못미친다.)

현행법 상 교육기관은 ‘비영리’법인이다. 영리법인과 달리 비영리 법인은 자신이 거둔 수익을 재단 외부로 현금화 시켜서 내보내서는 안되고, 모두 재단의 운영을 위해 쓰여야 한다. 다시 말해 학교는 학생들의 등록금을 반드시 학생들의 교육에 모두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법률로 의료·교육과 같이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생활하기 위해 필수적인 분야(다른말로 공공성이 높은 분야)에서는 영리법인을 설립할 수 없다.

학교가 건물을 늘리고 기자재를 충당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니 법률상으로는 비영리법인의 규정에 맞게 돈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건물·땅과 같은 부동산과 고가 기자재들은 사용함으로써 그 가치가 사라지는 소비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학교로 귀속되어 재단의 재산을 불려주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사회에서 부동산은 다른 종류의 동산과 비교할 때,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보통의 상품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저하되거나 소멸되는데 반해, 부동산은 소유하고만 있어도 그 자치가 경제규모에 발맞춰 계속 상승한다.

법의 목적상 교육기관을 비영리법인으로 규정한 것은 그곳에서 ‘돈벌이’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재산으로 귀속되는 물건을 구입하는 돈은 자신이 지불해야 한다. 쉽게 표현해보자면, 내 집을 사면서 친구에게 ‘널 재워 줄테니 네가 돈 다 내라’는 것과 같다. 혜택을 보는 사람이 비용을 지불한다는 수익자부담원칙에 따른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지불해야 할 돈은 그 시설의 이용료이지, 시설의 구입비가 아니다. 법률상으로는 위법이 아닐지 모르지만, 학교의 땅·건물 불리기는 명백히 법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학교시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는 있는가? 강의실의 기자재를 보호해야 한다며 수업시간 외에는 강의실을 잠궈놓고, 건물 출입시간마저 통제하는 게 많은 대학의 현실이다. 1주일에 1~2시간 수업만 있고 나머지 시간에는 잠겨있는 강의실이 태반이고, 1년 내내 아무도 들리지 않는 교수연구실이 명패만 달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 준비했다는 시설물들을 정작 당사자들이 원할 때 이용하지 못하고 학교직원에게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해마다 건물은 늘어나지만 어째서 동아리 공간 및 학생자치 공간은 줄어가고, 세미나 할 공간하나 변변치 못해 대학로 카페로 나서야 하는 걸까?

이쯤되면, 1년 365일 공사 중인 학교를 보며 마냥 흐뭇해할 게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봐야 하지 않을까? 학교의 시설이 늘어나도, 그것이 학생들의 ‘혜택’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학교의 재산만 불려주는 꼴이니 말이다.

 

학교가 이미 지었고, 구입한 건물·시설에 대해 이용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학교의 거의 모든 땅과 건물이 그동안 학교를 졸업한 수많은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늘어난 것인 이상, 그 건물을 학교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그 소유권을 바탕으로 또 다른 돈벌이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 재단이 맨 처음에 지분으로 갖고 있던 부분 외의 것들은 졸업한 학생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에 기부하여 공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등록금으로 불린 재산, 모두 뱉어라. 그렇지 않겠다면, ‘교육’ 운운하며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자신이 장사치임을 고백하라.

2020/03/04 11:18 2020/03/04 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