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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군산시가 1024, GM군산공장에서 군산형 일자리협약식을 열었다. 군산형 일자리 협약에는 사측으로 GM군산공장을 인수한 ()명신 외 에디슨모터스, 대창모터스, MPS코리아, 군산상공회의소가 참여했다. 노동자 측은 민주노총 군산시지부, 한국노총 군산지역지부가 참여했다.

협약의 주요 내용

협약의 주요 내용은 군산/새만금 지역을 전기자동차클러스터로 삼고 협약참여 기업과 노동조합이 적정임금, 적정납품단가, 임금격차 축소를 위한 협력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상생협의회 내에 갈등조정 중재 특별위원회’, ‘임금관리위원회등을 설치한다.

군산형일자리 협약에서 적정임금은 각 기업의 고용 규모별 전북지역 제조기업 임금의 평균 수준으로 정의되었다. 호봉제 대신, 직무, 직능,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를 적용한다는 내용도 명시되었다.

임금관리위원회의 역할은 매년 적정 임금구간과 임금상승률을 결정하여 참여기업에 제시하는 것이다. 참여기업은 임금관리위원회에서 제시한 적정 임금구간, 상승률 범위 내에서 임금수준을 결정하여야 한다.’ 클러스터 내 협약 참여기업들의 원하청 노사가 집단교섭을 하고 여기에서 임금을 결정한다.

교섭에서 이견이 발생할 경우 협의회 내 갈등조정중재특별위원회에 조정, 중재를 요청하고 생산개시 후 5년 동안은 위원회가 제시한 안을 수용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였지만 초과노동시간에 대한 수당은 주당 4시간까지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근로시간저축계좌에 저축하게 하였다. 물량 감소 등으로 감축근무가 발생할 경우 시간저축계좌에 저축된 시간을 차감한다.

유연한 인력운영도모를 위해 클러스트 내 집단적 전환배치 등 노동자는 기업 경쟁력 향상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노조의 합의가 필요한 경우는 클러스터 밖으로의 전환배치일 경우만이다.

전라북도는 취득세를 85% 감면하고, 군산시는 재산세를 75% 감면한다.

참여기업에 대한 의무조건은 본사 또는 공장이 군산/새만금 지역에 소재할 수 있도록 이전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이행하는 것, 노동자들의 경영참가를 위해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거나 이사회에 참관하게 하는 것 등이다.

협약의 문제점

간추린 협약 내용에서 보듯이 상생협약의 주된 내용은 노동자의 권리 제한이다.

임금의 경우 상한선을 전북 제조업 평균급여로 정했는데, 100인 이하 사업장의 경우 초과급 등을 제외한 상용정액급여는 전라북도 전산업 평균에 비해서도 낮다. 전국 평균과 비교하면 격차는 훨씬 크다. 20194월 기준, 전라북도 제조업 중소규모 정액급여는 261만 원인데, 전국 제조업 전규모 정액급여는 285만 원이다. 결국 가뜩 벌어지고 있는 지역간 격차를 그대로 둔 채 전북은 값싼 노동력 공급처로 삼겠다는 뜻에 불과하다.

교섭의 틀을 협의회 내로 제한시키고, 5년 간 중재조정안을 무조건 수용하도록 한 것은 명백한 노동3권 제한이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산별노조로서, 산별 교섭 제도 확립을 줄기차게 추진하고 있는데 협의회의 교섭방식은 산별교섭과 양립 불가능하다. 애써 긍정적으로 해석해보면 지역을 단위로 한 초기업단위 교섭으로 볼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지역협약이 확대 적용되었을 때 미조직 노동자에게 노동조건이 상승해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섭의 상한선이 전북 제조업 평균임금으로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노동조건 하향화가 뻔하다. 노동3권 제한은 이 상한선을 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노동시간저축제는 사업자 입장에서는 보다 유연한근무 형태를 도입할 수 있게 하는데 그 효과는 탄력근로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통상 물량 감소로 인한 휴업 시에는 평균임금의 70% 이상을 휴업수당으로 지급받는다. 그러나 사측이 시간저축제를 이용하면 물량이 많을 때에는 연장, 야간 근무에 대한 초과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물량이 없을 때에는 휴업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임금 총액으로 따지면 분명히 노동자의 손해이고 사측의 이익이다.

자유로운 인력 전환배치는 고용 신축성을 최대한 높인다는 것인데 노동자 입장에서는 고용 불안정화다. 노동력은 자본의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기계, 장비가 아니다.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는 국면 속에서 기업 간 노동력 전환은 노동자 입장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군산 협약에서처럼 노동조합의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자유로운 전환을 허용해 놓는 것은, 극단적으로는 클러스터가 일종의 파견업체화 되는 결과로 갈 것이다.

노동권 침해는 대단히 방대하고 구체적인 반면 참여기업에게 부과된 의무는 형식적이고 추상적이다. 공장이 군산/새만금 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있으나 마나한 문구고, 노동자 대표를 이사회에 참관시키기만 하면 회사의 의무는 사실상 끝이다. 그 노동자 대표가 자주적으로 선출된 대표일지, 이사회 참관이 회사 투명경영에 얼마나 실효성 있을지 모두 물음표다.

사업의 주축인 명신의 사업계획에도 우려가 있다. 생산차종에 상용트럭, 파생차, 버스가 추가되었다. 모두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의 생산품목이다. 완성차 대기업의 위탁생산공장으로 활용되지 않겠느냐는 의혹이 보다 현실에 가까워진 셈이다. 이를 의식해서 명신은 국내 자동차 대기업이 자본을 투자하여 위탁생산 할 경우 임금과 복지 수준을 자본투자 기업 수준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은 별도 협약서를 작성했지만 자본을 투자하여라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투자만 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신기루 지역형 일자리

지역형 일자리 협약식은 군산 이전에도 이미 광주, 밀양, 대구, 구미, 횡성 등 다섯 곳에서 체결되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출발했고 가장 떠들썩했던 광주는 여태까지 신설 법인 출자금 문제조차 정리되지 않은 채라 사업의 시작 여부도 불투명하다. 광주 일자리 협약을 비롯해 나머지 지자체들의 소위 상생협약도 노동권 양보를 주된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정부는 협약체결을 대가로 기업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준다. 권리를 뺏긴 건 노동자인데 말이다. ‘지역형 일자리’, ‘상생형 일자리로 포장된 일자리 정책의 실상은 기업 지원 정책에 불과하다.

정부의 일자리 정책 기조가 보조금 투하 식의 기업 지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란 이가 기존 산업의 개념과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톨게이트 수납원이 없어지는 직업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나라고 말했다는 데서 청와대의 경제관과 노동관을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허울에 불과한 4차 산업혁명을 좇으면서 노동권의 포기가 4차 산업혁명의 전제조건이라는 인식 말이다. 몰 노동적일 뿐 아니라 몰 경제적이다. 건설업으로 경기부양을 모색했던 이명박 정부와도 차별점을 찾을 수 없다.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기업을 양(+)적으로 지원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각 지역별로 일자리 유치 경쟁이 치열해진 데에서 보듯이 지역형 일자리는 노동권 훼손을 보다 수월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가뜩이나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임금 조건인 전라북도는 아예 그 수준을 최고 수준으로 제한하면서 기업을 유치하게 됐다. 전북에서 이렇게 나섰으니, 이후 지역형 일자리에 뛰어드는 지자체에서는 이 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임금을 제약할지도 모르겠다. 청와대 · 정부가 나서서 바닥을 향한 경쟁을 유도하니 배겨낼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이미 노동권을 향한 공격은 충분히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기업의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충분한 자본소득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장기저성장 자체가 문제다. 노동권 제약, 보조금 투하는 본질을 외면한 채 단기 지표에만 매달리는 행위이다. 이 정도 조치는 있으나 없으나, 투자할 기업은 투자를 한다. 그것을 청와대 · 정부가 모를 리는 없다. ‘지역형 일자리는 그 자체로 정치적 목적이 다분한 정책이다.

정부가 지역의 경제상황에 조금이라도 진지한 관심을 갖는다면 중장기적인 산업정책을 내놓는 등 보다 적극적인 개입에 나서야 한다. 지금과 같이 시장에 맡겨놓은 지역 일자리 정책으로는 중복 투자를 피해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도

올해 초 청와대가 지역형 일자리 추진을 발표한 이후 지역형 일자리 정책에 대한 문제는 산발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하나로 모아지지는 못했다.

민주노총은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광주본부, 울산본부 등과 광주형 일자리 대응기획회의를 운영하고 있다. 청와대가 광주형 일자리의 전국화를 선포하고, 군산형 일자리, 구미형 일자리 등이 향간에 오르내리면서 대응기획회의의 범위를 지역형 일자리로 확대하고 민주노총의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5월에 개최된 민주노총 8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지역 상생형 일자리 협약 체결 추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민주노총의 방침을 분명히 한다고도 결정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기획회의는 그대로 광주형 일자리 대응기획회의였고, 이미 청와대 · 정부가 적극적으로 광주형 일자리을 다른 지역으로 확산시키려 힘을 쏟는 시점인 7월에도 민주노총은 광주형 일자리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광주 외에도 네 곳의 지자체에서 지역형 일자리 협약을 체결하면서 선제적 대응은 시기를 놓쳤다.

민주노총 군산시지부가 군산형 일자리 협약에 참여한 것도 큰 문제다. 민주노총 산하조직이 민주노총 · 민주노총전북본부의 방침과 배치되는 의사결정을 한 것이다. 조직 내적으로 충분한 공유와 검토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경제위기 현실과 담론 앞에 민주노총이 쉽게 흔들리고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군산시지부가 끝이 아니라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민주노총은 이제 지역형 일자리 대응 T/F를 만든다. 지금이라도 그간의 경과를 총 점검하고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군산형 일자리 협약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정의당 심상정 대표까지 참여했다. 심상정 대표는 행사 참여 후 노동권 침해가 우려된다는 글을 SNS에 남겼다. 핵심을 비껴갔다. 지역형 일자리가 경제위기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점, 오히려 지역 간 격차, 노동자 간 격차를 확대시킬 것이라는 점 등은 고려되지 못한 듯하다. 군산형 일자리 협약식을 참여하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이 필요했다. 진보정당은 특히 경제정책에서 대안이 되어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의당의 대안적 경제정책, 산업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지역형 일자리 문제를 다루는 데 여러 곤란이 있다. 노동조건의 상한선을 정해놓는 지역형 일자리는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핑계 삼아 중위 계층 이하 노동자를 공격하는 비열한 방법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다른 조건들이 그대로일 때 그 상한선 이상이 가능할 방법이 마땅찮다. 알면서도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운, 문제의 핵심이다. 보수언론, 경총 등은 이 지점을 물어뜯는다. 이러다 보니 광주형 일자리 대응에서 민주노총은 귀족노조라는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노동자 간 양극화라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 진영도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일자리 문제에 대한 대응은 노동시장 내 격차를 어떻게 축소할 것인지 대안을 마련해 가는 작업과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역형 일자리 같은 문제들이 닥쳤을 때 수세적인 대응으로만 내몰릴 뿐이다. 이런 준비 없이, 일단 일자리위원회에 참여하고, 일자리 협약에 참여하는 식으로는 결국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더욱 확대시킬 것이다.

2019/11/05 00:29 2019/11/05 00:29

지나간다아기 똥에서는 왜 요거트 냄새가 날까? - 인류와 미생물의 공진화

아기 똥에서는 왜 요거트 냄새가 날까? - 인류와 미생물의 공진화

-육아하며 알게 된 이야기들

 

다인이와 세상에서 만난 지 어느새 여섯 달이 지났다. 다인이와 조리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던 날이 떠오른다. 안는 것도 서툴러 행여나 놓칠 새라 온 몸에 힘을 주고 엉거주춤 걸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오니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재우는 모든 일들이 곧바로 실전이 되었다. 똥기저귀를 가는 것도 처음 해보는 일이니 매번 여기저기 묻히고 흘릴까봐 머리칼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예전에 얼핏 흘려들었던 ‘애기 똥은 냄새도 향기롭다’던 어른들의 이야기는 똥기저귀를 가는데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기고 나서야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똥 기저귀에서는 향기라기엔 좀 과해도 기분 나쁘지 않은 시큼한 냄새가 났다. 익숙한 냄새인데.. 이게 뭐였더라.. 그렇다, 딱 요거트 냄새다. 애기가 먹는 게 모유밖에 없으니 모유가 발효되어서 난 냄새일터다. ‘우유 -> 발효(유산균) -> 요거트’라는 익숙한 과정을 떠올리며 세상사 참 단순명료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인이 뱃속 유산균은 대체 어디서 온 거지? 가물가물한 생물학 수업을 되짚어보면, 산모의 양수 안은 완전한 무균상태인데다 정자와 난자가 만난 수정란이 분열 · 성장하는 과정에 유산균이 끼어 들 자리는 없다. 찾아보니 호기심에서 출발했던 이 질문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이런저런 글과 논문을 찾아본 결과 신생아 장내미생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관심가지고 연구 중인데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가장 널리 회자되는 가설은 신생아들이 질식분만(산모의 질을 통해 신생아를 분만하는 것으로 자연분만을 포함한다.) 과정에서 산모의 질을 지날 때 질/항문 등에 있던 미생물과 최초로 접촉한다는 것이다. 질식분만한 신생아의 장내 미생물무리는 엄마의 질 미생물무리와 유사하고, 제왕절개로 태어난 신생아의 경우는 엄마의 피부 미생물무리와 유사하다. 질식분만 과정에서 신생아 장내에 정착한 미생물들은 산소를 소모하여 무산소 환경을 만들고 비피도박테리움과 같은 무산소균이 정착하도록 돕는다. 이 때문에 질식분만으로 출생한 신생아들의 장내 미생물무리가 제왕절개에 의해 태어난 신생아들보다 더 다양하고 많다. 가설이라고 언급한 것은, 유럽에서는 한동안 이런 가설에 근거해 제왕절개 분만한 아이들에게 산모의 질액을 발라주는 처치가 시행되었는데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그래도 자연분만한 아이들과 장내미생물 구성이 다르더라는 거다. 아기가 좁은 산도를 통과하는 과정에 아직 우리가 모르는 작용이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영아의 장내미생물총은 출산 방법뿐만 아니라 섭취하는 음식에 따라서도 변화가 크다. 모유를 먹고 자란 아기는 분유를 먹은 아기들에 비해 비피도박테리움 비율이 더 높다. 모유에 함유된 여러 종류의 올리고당 중 HMO라는 올리고당은 신생아가 분해효소를 만들지 못한다. 이 올리고당은 비피도박테리움의 먹이가 된다. 비피도박테리움 중 HMO를 가장 잘 분해하는 인판티스라는 균은 아기의 면역계를 교육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신생아가 획득한 장내미생물무리는 단지 모유를 소화시키는 데에만 이점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연구는 질식분만, 모유수유를 한 경우가 제왕절개, 분유수유한 경우 보다 알러지 질환과 아토피피부염 발생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보고한다. 분만 방식의 차이에 따른 아토피 피부염 위험도는 청소년기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가 있다. 출산 과정에서 획득한 장내 미생물 생태계가 면역체계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측된다.

 

출산, 수유과정과 연결된 아기의 뱃속 미생물 생태계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인간과 미생물이 공진화해온 과정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인간의 출산, 수유 환경에 적응한 미생물무리가 있고, 그 미생물무리가 제공하는 이점에 적응한 인간이 있다.

 

최근 발표되는 연구들을 살펴보면 장내 미생물 구성이 미치는 영향은 보다 전신적이고, 상시적이다. 식습관이 바뀌자 장내미생물 구성이 바뀌었고, 그것이 비만을 유도했다는 보고가 있다. 그래서 유산균은 다이어트 보조제로도 활용되고 있다.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유산균 제품을 먹고 아토피 피부염이 나아졌다는 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정확한 기전까지야 아직 알 수 없지만 장내미생물 생태계가 면역 질환에 영향을 미칠 개연성도 충분하다. 최근에는 우울증 환자와 보통 사람들 사이에 장내미생물 생태계가 달랐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되었다. 한의학에서는 대장이 피부와 연관되어 있다고 바라보고, 피부질환의 치료에 소화기 약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오랜 기간 쌓인 경험에서 나온 통찰인지도 모르겠다.

 

약간 비틀어 보면, 최근 쏟아지는 이러한 연구 결과는 사실 ‘유산균’을 상품화하려는 식품·제약 기업들의 연구 펀딩 덕분이다. 각종 연구로 장내미생물의 다양한 효험을 증명하는 통에 어느새 ‘유산균’이 만병통치약으로 등극 중이다. 당장 상품화하기 쉬운 제품에 연구비가 집중되다 보니 장내미생물 연구가 대부분인데 인체 곳곳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미생물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고, 이 녀석들도 지금 내 몸과 모종의 영향을 주고받는 중 일터다.

 

나도 이런 저런 논문, 기사들을 찾아보고 나니 귀가 얇아져 유산균 제품을 하나 구입하게 됐다. 하지만 웬걸, 한 2주일 쯤 먹고 나니 뱃속이 수시로 부글거리는 덕분에 잠도 편히 못 자게 되어 복용을 중단했다. 특정 유산균을 섭취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장내미생물 생태계가 인류와 공진화했던 조건에 맞게 조정하는 게 중요한 것인데 얄팍한 마음에 곁가지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공진화는 현생인류가 출현한 20만 년 전에 완료된 게 아니다. 헬리코박터균은 각종 위 질환과 위암 유발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 출신이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헬리코박터 균을 보유한 경우 오히려 위암 발생률이 낮았다고 한다. 인류와 미생물은 서로 적응하기 위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유럽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효과가 있던 유산균이 한국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인간과 미생물의 공진화와 비슷한 사례는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소와 같은 반추동물은 초식동물이지만 체내에서 많은 단백질을 생성해 저장한다. 엄밀하게는 소의 위에 살고 있는 미생물들이 생성하는 것이니 체내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입~항문은 공간적으로 체외다.) 소는 많은 풀을 먹고 되씹으며 미생물들에게 영양분을 제공하고, 미생물들은 풀의 분해를 돕고 단백질도 제공한다. 진딧물은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작은 동물이지만 그 진딧물 한 마리의 몸 안에는 100만 마리 이상의 부크네라라는 미생물이 거주한다. 진딧물의 먹이는 식물의 수액인데 이걸로는 필수 아미노산을 생성할 수 없다. 부크네라는 진딧물의 특정 세포 안에 거주하면서 진딧물과 협동하여 필수 아미노산을 생산한다.

 

생태계에 존재하는 공진화 사례는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더 많고 인간과 미생물의 관계 역시도 이제 탐구를 시작하는 단계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적응해온 공진화의 결과는 최근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변화를 따라잡기에 벅차다.

 

그래서 진화의학에서는 인간이 진화의 결과로 적응한 환경과 최근 변화된 환경 사이의 미스매치에 주목한다. 10만 년 전의 생활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인간을 닫힌 계(系)로 사고하는 데서 벗어나 현생 인류로의 진화가 주변 생태계와 어떻게 적응한 결과인지를 성찰해보는 게 여러모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항생제를 복용하고서 변비나 설사로 고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변비, 설사가 항생제의 주요 부작용 중 하나인 이유는 항생제가 장내미생물 생태계를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미생물의 역할을 참고하면 항생제가 장기적으로 인체에 뜻밖의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는 점까지도 고려해볼 수 있다. 게다가 항생제의 남용은 항생제내성균의 출현을 늘리는 방향으로 공진화를 촉진하고 있다.

 

자연분만, 모유수유가 제왕절개, 분유수유보다 무조건 낫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자연분만을 택할 수도, 제왕절개를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인류가 진화의 과정에서 적응했던 환경을 참고하여 도움이 되는 조치를 모색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아기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때로는 여간 더디 가는 게 아니다. 하루 종일 생각이 꼬리를 무니 아기 똥 냄새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제 이유식을 시작하면 요거트 냄새는 없어지고 익숙한 똥 냄새가 난다고 한다. 어른들은 그 똥 냄새도 향기롭다 하셨던 걸까? 수 만겁 이어져온 어머니의 어머니들과 아버지의 아버지들을 떠올려본다.

2019/10/30 17:03 2019/10/30 17:03

지나간다방법비판(方法批判)과 정치적 맥락주의(脈絡主義)


<방법비판과 정치적 맥락주의를 읽으실 독자들에게>

 

 

 

금민

 

어떤 글이든 그것은 독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 점은 최소한 17세기 이후의 합의, 시민혁명이 이룩한 합의이다. 이 시기 이후로 평균적 교양시민이 읽어서 이해할 수 없는 글은 아예 수준이 없는 글로 취급되게 되었다. 이 사실은 그 이전과 비교해 볼 때 하나의 거대한 변화이다. 중세에는 모든 중요한 글들이 라틴어로 쓰여졌고, 더군다나 고전 라틴어와 비교할 때 문법이 맞지 않는 속류 라틴어(Vulgata)로 쓰여졌다. 그것은 오랫동안 라틴어가 사어(死語)였고, 그저 글을 쓸 때에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말 근대 초의 저자들은 스스로 라틴어의 문법에 정통하지 못했으면서도 라틴어로 글을 썼다. 이는 그들이 글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글의 주인은 독자가 아니라 저자라는 편견! 글의 주인이 독자가 되고, 좋은 글의 심판관이 독자가 된 근대는 분명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발전을 의미한다. 물론 독자 대중의 낮은 수준이 거꾸로 글에 대한 부당한 평결의 원인이 되는 현상도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현대를 수사학의 시대라고들 하는데, 고전적 체계에서는 진리, 정의, 도덕 등 - 언설(言說)의 가치가 수사(修辭)의 치졸(稚拙)에도 불구하고 인정될 수 있는 영역들 - 의 하위 분과에 불과하였던 수사학이 몇몇 현대적 이론가들로부터 심지어 고전적 학제체계에서의 상위 분과였던 윤리학과 정치철학의 영역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붕괴에 원인이 있겠지만, 독자 대중이 글의 우열을 판단하게 된 시대적 합의와도 관련이 있다. 물론 시민혁명의 이상적 인간관이었던 교양이 있고 학식을 갖춘 독자 대중은 학문의 전문화와 학문 내부의 사상적 분열 때문에 모든 분야 모든 입장들에 대한 공정한 심판관으로 역할을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의 전문분야에 언제나 작은 의미의 독자들의 사회가 형성되듯이, 하나의 사상적 운동에도 작은 의미의 독자들의 사회가 있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 글은 잘못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하향 평준화, 통속화를 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좋은 글은 언제나 독자들이 논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어떤 장비들을 새로 갖추어야 할 것인가를 친절히 알려 주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글의 근본 내용을 훼손함이 없이 통속화를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는가는 그 글의 깊이를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하다. 이미 전제된 {방법비판(方法批判)과 정치적 맥락주의(脈絡主義)}라는 글은 이 점에서 아직 글이 아닌 것이 게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게재된 것이 너무나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분량에 서술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는 점은 처음부터 문제였다. 그러나 저자들이 독자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점은 내용보다도 졸속의 문장에 있다. 저자들은 편집진에게 문장의 교열을 위촉하였으나 편집진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고 오자(誤字)라고 생각한 몇몇 단어만을 고쳤는데 그것은 불행히도 오자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이해의 곤란함이 잘못된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결여에 있다고 그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의 심판관은 독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이 게재된 신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판관인 독자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이고, 설사 그렇지 못할 경우에도 좋은 글은 그런 독자들이 어떻게 심판관이 될 수 있는가를 알려주어야 한다. 편집진은 당연히 이해되지 않는 문장에 대하여 질문하였어야 한다. 그러나 글은 게재되었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 시간의 촉박이 그 이유였다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글을 대대적으로 재편성하든지 보충하든지 하는 것은 현재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사과하면서 몇몇 애매한 문장만은 고쳐서 올리기로 하였다.

 

                                                                                                  (필자를 대표하여 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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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비판(方法批判)과 정치적 맥락주의(脈絡主義)

 

 

 

 

                                                                                                           금민/김태호

 

이 글에서는 우선 지난 세기의 비판적 전통들을 개관하고자 한다. 먼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하여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맑스가 헤겔로부터 물려받은 <서술과 비판의 통일>을 문제삼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상의 서술을 통한 비판>이라는 방법의 숙명적 아포리, 대상의 사각(死角) 또는 주체의 맹점(盲點)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맹점 또는 사각이라 할 때, 그것은 <비판적 서술>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결코 서술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눈(眼)이 눈 안의 맹점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비판적 서술>에 의하여 대상의 어떤 부분이 서술될 수 없는 까닭은 그 부분이 바로 대상에 대한 서술 자체가 구성되기 위한 전제, 인식 대상과 인식주체가 구성되기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곳, 서술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서술이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비판 또는 사회비판이 단순한 인식비판, 잘못된 인식에 대한 정정을 넘어서서, 방법비판으로 나아가야 함을 암시한다.
이 글에서 맑스와 맑스의 지적 유산을 다루는 목표는, 맑스의 <비판적 서술>이 서술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따짐으로써, 즉 <비판적 서술>이 불가능한 조건에 대한 질문을 통하여, 맑스의 인식비판을 방법비판적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방법비판이란, 대상 서술의 가능성의 조건들, 인식주체의 불가결한 조건에 대한 비판을 뜻한다. 이 글에서는 우선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방법비판적 문제제기를 시도하겠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맑스를 계승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많은 시도들, 맑스를 극복하고자 했던 시도들, 맑스와 단절했음을 선포함으로써 새로운 좌파 이론을 세우고자 했던 시도들을 살펴보겠다. 우리는 여기서 그런 모든 시도가 맑스를 비속화하고 축소하였거나, 또는 맑스에게 은폐되어 있는 것과 동일한 문제를 그저 재생산하였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끝으로 맑스 및 지난 세기의 비판적 전통에 대한 방법비판적 독해가 어떠한 실천철학적 결론을 함축하고 있는가를 개략적으로 밝히도록 하겠다.

 

I. 20세기의 신조류(新潮流)들과 {자본}에 대한 '논리적 독법(讀法)'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에 입각한 사회비판은 제2차 대전 이후로 사활적 질문에 직면해 있었다: 근본적인 사회비판이 가능한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사실 지난 50년간 좌파이론의 지적 자화상이란 이 질문과 이에 대한 궁색한 답변으로 가득 차 있다. 노동자운동과 맑스주의의 20세기 전반기(前半期)적 전통인 사회민주주의와 맑스․레닌주의(후주1)에 의하여 행해진 자본주의 비판이 - 그것이 기초해 있는 것이 진화론적․경제결정론적 관점이건 주의주의적․정치주의적 관점이건 간에 - 맑스의 <역사유물론>에 근거하는 어법체계에 기초하고 있었던 반면, 대전 이후의 신조류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밀과 자본주의 사회의 해소에 대한 과학적 인식가능성에 의문을 던짐으로써 자신들의 어법체계를 구성한다. 물론 이 신조류는 이 의문에 대한 빈곤한 답변의 체계로서 등장한다: 50년대의 '실존주의적 또는 신학적으로 채색된 경향'[알프레드 슈미트(Alfred Schmitt)는 사르트르(J. P. Sartre), 메를로 퐁티(Merleau Ponty), 르페브르(Lev bre), 블로흐(Bloch) 등을 이와 같이 특징짓고 있다] 또는 60년대 독일의 '비판이론'[호르크하이머(Horkheimer)와 아도르노(Adorno)], 영국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할(S. Hall)과 톰슨(E. P. Thompson)], 이탈리아의 델라 볼페(Della Volpe)와 콜레티(L. Colletti), 그리고 오페라이스모(operaismo 노동자주의) 및 아우토노미아 운동[네그리(A. Negri), 라차라토(M. Lazzarato), 베레디(F. Beradi)], 프랑스에서는 상황주의(situationisme)[특히 드보르(G. Debord)], 70년대의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알뛰세(L. Althusser), 발리바(E. Balibar), 랑시에르(J. Ranci re)], 그리고 80년대 이후로 좌파이론의 지적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탈근대적․해체주의적․후기 구조주의적․라캉주의적 이론들[데리다, 푸코, 들뢰즈(G. Deleuze), 가타리(F. Guattari), 버틀러(J. Buthler), 지젝(S.  i ek) 등등]. 이와 같은 신조류들은 맑스의 맹점에 대한 답변의 차이들을 통하여 분류될 수 있다: 역사철학적이고 인간적인 청년 맑스와 {자본}의 맑스('경제학 비판'의 맑스)를 통일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또는 그 사이에 '인식론적 단절'(알뛰세)을 인정할 것인가, 또는 맑스의 체계 속에 침투해 있는 헤겔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 두 가지 문제는 특히 이들 신조류 사이의 차이들을 결정한다. 첫 번째 문제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를 중심으로 하여 그 이외의 다른 입장들을 가르는 기준이 되며, 두 번째 문제는 비판이론적 입장과 그 이외의 입장들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 그가 헤겔의 논리학을 올바로 이해했는가와 관계없이 - 분명히 헤겔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비판이론의 반(反)헤겔주의는 다른 입장들의 반(反)헤겔주의 - 과연 그러한 입장들이 진정으로 헤겔의 극복에 성공하였는가의 문제와 관계없이 - 와 비교할 때, 분명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 신조류들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각각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선 맑스에 대한 체계적 독해가 68년을 전후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가, 그리고 맑스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이들 신조류들의 성립과 전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맑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의 분기점도 역시 1968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해는 학생운동의 해였을 뿐만 아니라 로만 로스톨스키의 저서 {맑스 '자본'의 성립사(Die Entstehungsgeschichte des Marxschen Kapital)}, 알프레드 슈미트의 저서 {'자본' 100주년(100 Jahre Kapital)}이 출판된 해이기도 하다. 이 저서들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요강(Grundrisse)}의 수용이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요강}의 수용이 끼친 영향은 다음의 두 가지 점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로 {요강}은 맑스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촉발시켰다.(후주2) 둘째로, 화폐로부터 출발하는 {요강}의 체계는 상품으로부터 출발하는 {자본}의 체계와 비교되었고, {자본} 형성사에 관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그리고 이 논쟁은 맑스의 가치형식론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의 계기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맑스의 가치형식(價値形式) 분석은 {자본}의 해석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지 못하였고, {자본}의 비판적 핵심은 단지 잉여가치 비판 - 착취, 계급지배,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 그리고 시장의 무정부성에 대한 비판 - 으로 축소되어 이해되었다. 노동자계급은 시민적 유통관계 및 생산관계들에 대하여 파괴적인 힘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생산적 내용으로 파악되었고, 노동은 이미 객관적 성격, 그 자체로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받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노동의 사회적 성격은 당의 지도를 통하여 대자적 계급의식으로 조직되어야 하고, 국가를 통하여 사회주의적으로 일반화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었다. 맑스의 '비판적 핵심' - 특히 '화폐의 수수께끼'와 '상품의 물신성'에 대한 인식비판적 분석 - 은 1968년 이전의 해석들에서 무시되었거나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는 것은, 소위 '논리적 독해'의 등장이다.(후주3) '논리적 독해'는 가치형식의 논리적 전개에 실제 역사적 발전을 대응시키는 '논리역사적 독해'에 반대하여 논리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논리적 독해'는 이것을 가치형식 분석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독법이라고 본다. 그러나 '논리적 독해'는 앞서 언급한 신조류들이 맑스의 {자본} 이해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20세기에 맑스에 의거하여 또는 맑스를 비판하며 성립한 신조류들은 1968년 이후에 이루어진 연구들, 맑스 연구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과들을 전혀 검토하지 않았다. 그들이 수행한 맑스의 전화, 맑스 비판 또는 맑스주의의 극복은 그러므로 맑스의 '비판적 핵심'과의 대결이라고 볼 수 없다.

 

후주

 

1) 여기에 대해서는 {청년좌파} 42호, 신석준의 글, 10면-12면을 참조하라.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S. Breuer, 혁명이론의 위기, 프랑크푸르트 1977; M. Postone, 시간, 노동, 사회적 지배, 캠브리지 1996, 특히 1부를 참조하라.

 


2) {요강}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상가는 안토니오 네그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요강}에 입각하여 자본과 노동의 적대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 주체적 노동과 대상화된 노동의 대립으로 규정한다.

 


3) 헬무트 라이헬트(Helmut Reichelt), {자본개념의 논리적 구조에 대하여(Zur logischen Struktur des Kapitalbegriffs}, Frankfurt/M. 1970; 한스-게오르그 바크하우스(Hans-Georg Backhaus), {가치형식의 변증법(Dialektik der Wertform. Materialien IV)}, Freiburg 1997. 그 외 H.-J. Krahl, R.-W. M ller, B. v. Greiff, E. Jacoby, C. Seel, H. Brethel, K.-D. Oetzel, D. Behrens의 저작들. 가장 최근의 문헌으로는 나디아 라코비츠(Nadja Rakowitz, {단순 상품생산(Einfache Warenproduktion)}, Freiburg 2000.

 

Ⅱ. 인식비판과 방법비판

 

방법비판은 맑스의 {자본}에 대한 인식비판적 성과들에 대한 재검토, '논리적 독법'으로부터 끌어져 나오는 철학적 문제에서 출발한다. 방법비판이 비판적으로 의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지적유산은 알프레드 존-레텔(Alfred Sohn-Rethel)의 {상품형식과 가치형식(Warenform und Denkform)} 그리고 맑스에 대한 최근의 칸트주의적 독해들 - 특히 프랑크 쿠네(Frank Kuhne) - 이다. 그러므로 방법비판은 칸트․헤겔․맑스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이며, 동시에 이들을 넘어서고자 했던 모든 신조류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들 대가들을 넘어서지 못했는가를 밝혀보고자 하는 작업이다. 아래에서는 우선 맑스의 가치형식분석의 인식비판적 수준을 살펴보고, 왜 이것이 방법비판으로 전화하여야 하는가를 가능한 한 쉽게 서술해 보고자 한다.

 

맑스의 가치형식 분석에 대한 '논리적 독해'는 <역사적 재구성>의 문제를 제기하게끔 만든다. '논리적 독해'에 따라 {자본}의 가치형식의 단계들이 논리적 발전의 순서를 보여주는 것이고, 역사적 단계들이 아니라고 할 때, 역사적 서술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어떤 것의 기원과 성립의 역사는 그 자체로서 이미 '형성된 것, '있는 것', 즉 현재적 효력을 전제로 할 때에만 비로소 재구성될 수 있다. 어떤 것이 서술되기 위해서는, 현재까지의 발전과 전개가 현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는 이미 이 구성적 작업에 대하여 전제된 것으로서 거꾸로 현재까지의 발전 전개를 구성할 수 있게끔 하는 조건이다: '인간의 해부학은 원숭이의 해부학의 열쇠'(MEW 42, 39면)이다. 그러므로 화폐형식의 논리는 그 발전을 역사적으로 기술하고자 할 때조차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고, 역사적 서술은 논리적 서술 이외에 별도의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 즉 논리적 서술을 벗어난 역사적 서술은 없는 것이다. 논리적 분석이 없다면 대상(자본주의․가치)의 현재적 효력수준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다면 대상의 발생과 전개를 역사적으로 기술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맑스의 가치형식 분석은 화폐(효력)를 이미 전제하고 있는 분석이며, 추상적 시간은'직관형식'(Anschauungsform)으로서 대상을 가치로서 파악하기 위하여 전제된다. 사회적 필수노동 또는 평균노동이라는 척도는 따라서 가치분석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가치분석에 의하여 척도가 무엇인가가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척도가 무엇인가가 이미 전제되었기 때문에 가치분석이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품의 '역사적 가치', 즉 투하된 노동시간은 '사후적'으로만 가능한 재구성인 것이다. 투하된 노동시간, 즉 구체적이고 선형적(線型的)인 시간은 오직 유통에 의한, 화폐매개적인 사회적 종합(Synthesis)을 통해서만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후주4) 그래서 역사란 그 서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언제나 종국에 도달해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국과 함께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효력과 기원은 동시적으로 탄생하는 것이다.(Gleichurspr nglichkeit von Genesis und Geltung). 역사 - 화폐형식의 성립사 - 는 거꾸로 그것의 현재적 효력 - 화폐형식 - 속에서만 '깨어난다'. 그래서 맑스는 '매개하는 운동은 그 자신의 결과들 속에 소멸하며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MEW 23, S. 107)라고 쓴다. '한 상품에 다른 상품들이 전면적으로 그들의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에 그 상품이 비로소 화폐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같은 면)은 화폐성립의 기원에 관한 역사가 화폐라는 효력을 전제하지 않는 한에서 기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 역사에 관한 기술은 화폐, 즉 현재의 효력에 대한 순전히 논리적인 서술에 불과하다. 맑스는 '거꾸로 하나의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그들의 가치를 그 상품에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같은 면)라고 쓴다. 여기서 '보인다(scheinen)'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뜻인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를 밝히는 작업은 화폐의 기원과 성립에 관한 역사적 서술을 통해서 수행될 수 없다. 그 작업은 거꾸로 화폐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맑스가 가치형식의 논리적 단계에 대하여 역사적․경험적 교환형태를 대비시키는 것은, 여기에 대한 수많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서술'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적 서술'이 아니기 때문이고, 논리적 전개와 관계없는 '역사적 전개'는 서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리와 역사의 동일성을 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 1권의 제2판에서 1867년 초판과 {요강}의 서술방식을 통속화하였고, 분명히 엥엘스의 집요한 설득에 따라 이를 역사화 하였다. 물론 이 경우에도 역사적 서술의 위상은 불명확하게 남겨져 있다.

 

이상에서 밝힌 바들은 좀더 날카롭게 표현될 수 있다: 역사적 전개는 현재의 효력 속으로 함몰하거나 전이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해서 현재의 효력 속에 침몰해 있을 때, 효력 속에 전이된 것으로서 존재할 때에만 비로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화폐의 역사는 화폐의 효력 속에서만 나타난다는 점, 현재만이 과거가 탄생하며 존재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은 그러나 거꾸로 현재의 효력논리에 입각한 서술, 역사가 유일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서술이 가지고 있는 맹점(盲點), 이러한 서술 방식에 있어서 드러나지 않는 대상의 사각(死角)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효력은 비시간적인 것이 되고 역사적 기원을 가지지 않은 것이 된다: 헤겔에서 정신의 기원은 운동 속에 있듯이 자본의 기원은 재생산 속에 있다. 탄생하지 않은 것, 자신의 탄생을 오직 자신의 현재 속에서만 구성할 수 있는 것, 그래서 그 자체로 비시간적인 것이 <화폐-상품-화폐'>의 시계열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모순. 바로 자본에 있어서 역사와 논리의 모순은 그래서 시간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순수 논리적인 것, 초시간적인 것, 그래서 시간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현상하게 된다.

 

분명히 역사와 논리의 모순은 서술의 수준에서 생기는 문제이다. 맑스의 가치형식 분석에 대한 '논리적 독해'는 역사적․발생적․기원적 수준의 서술이 독자적으로 구성될 수 없음을 밝혔다. 이러한 확인들은 맑스의 <대상에 대한 비판적 서술>이라는 방법에 대하여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발생논리적 구성이 효력논리의 재진술에 지나지 않는 한에서, 대상의 효력논리적 수준에서의 서술을 통하여 대상을 비판한다 함은 무엇을 뜻하며, 그것은 과연 진정으로 비판적인가? 맑스의 '비판'이 역사적 결정론과 목적론의 모든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것, 또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현실을 단지 설명하기만 하는 이론'도 아니면서 미래에 대한 '선형적 결정론'도 아니라면, 현실의 서술을 통한 현실의 관계들에 대한 비판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좀 더 치밀하게 전개시키기 이전에 헤겔과 맑스를 비교해보는 것은 이후의 논의를 위하여 유익할 것 같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현재의 상태'라는 역사의 종결에서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그의 {논리학}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논리적․초시간적 재구성이다. 이 점에서 맑스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점은 맑스가 절대정신이 자본이었음을 밝혔다는 데(유물론적 전도)에 있다. 그러나 나아가서 이 점만으로 그와 헤겔을 구별할 수는 없다. 양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맑스가 자본(서술대상)의 구성적 전제가 인식주체(서술자)의 구성조건과 동일한 것임을 밝혔다는 데에 있다. 그는 물신성의 분석에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관계를 물신적으로 나타나게끔 만드는 원인은, 한편으로 주체의 인식조건 - 칸트에게서 순수오성 개념처럼 모든 경험적 대상이 인식되기 위한 조건이 되는 것 - 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대상의 구성조건 - 자신의 재생산 속에서만 총체성인 자본, 스스로 초시간적이지만 오직 선형적 시간계열(화폐-상품-화폐')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자본의 모순된 운동이 대상세계를 구성하는 조건이다 - 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래서 맑스는 물신적 인식과 그 인식의 주체․객체적 구성조건 사이의 필연적 관계를 말한다: '서로 독립된 사적 노동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은 그 사적 노동이 인간노동으로서 동등하다는 데 있고, 이 사회적 성격이 노동생산물에서 가치의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은, 특수한 생산형태, 즉 상품생산에만 타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품생산의 관계에 파묻힌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의 발견 이전이나 이후에나 절대적 타당성으로 나타난다.'(MEW 23, 88면) 그러나 맑스의 물신성 비판은 - 위에 인용한 구절(1권 88면)에 나타나는 통찰에도 불구하고 - 인식비판적 차원에 한정된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행한다'(같은 면) 이 구절은 '만약 그들이 그것을 안다면 달리 행할 것이다'를 함축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그들이 그것 - 독립적 사적 상품생산자의 사회라는 주어진 사회적 관계 하에서 상품교환은 필연적이라는 것 -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 - 상품교환 - 은 상품생산이라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중지될 수 없다'라고 고쳐 쓰여져야 할 것이다.

 

맑스의 인식비판은, 그가 '틀린 인식'은 그 인식이 생성되는 사회관계하에서 필연적이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올바른 인식'이 획득된다면 '틀린 인식'을 생산해내는 관계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포함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지당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참과 거짓'의 준별, 인식과 실천의 연관 - 그것이 마치 투입-산출적, 일면적 관계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 은, 그러나 '참된 인식'이 어떻게 서술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자마자 매우 복잡한 문제로 바뀌고 만다. <대상의 서술을 통한 비판>은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서술)을 통해서 잘못된 인식(서술)을 바로잡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맑스는 스미스와 리카도의 잘못된 인식(노동가치론)을 비판하고 올바른 인식(맑스의 새로운 노동가치론)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올바른 노동가치론을 제시하기 위하여 '상품' 장을 쓰지 않았다. 맑스는 과학적 가치론을 수립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가치비판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리고 {자본}의 집필 목표는 자본주의에 대한 서술을 통하여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첫째로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자연법칙처럼 절대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고, 나아가서 자본주의적 관계들은 이 관계들의 붕괴를 촉진시킬 기제를 만들어 내며(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의 법칙), 이 관계들을 해소할 사회적 세력을 생산해낸다는 것(노동자계급의 궁핍화 명제, 상대적 과잉인구 생산의 법칙)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가장 최소한의 목표인 첫 번째의 것마저 그것이 어떻게 서술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직면하여 곤란에 부딪힌다: 추상의 결과물은 구체로부터의 추상에 의하여 얻어진 것인데, 거꾸로 구체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의 구성적 조건이 된다. 부정(Negation)은 규정(Bestimmung)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평균 개념은 평균으로 산정되기 이전의 어떤 것을 전제해야 하는데, 거꾸로 평균 개념은 평균을 포함하는 전체를 인식하기 위한 전제가 된다. 물신성은 - 그것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인 한에서 - 주체에 대해서도, 주체가 오인하는 것(대상)에 대해서, 그리고 이 오인 자체에 대해서도 구성적(konstitutiv)이다. 물신적 인식은 단지 '틀린 인식'이 아니라 '필연적' 나타나는 '틀린' 인식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고정불변의 상태가 아니며, 그리고 이에 기초하는 물신적 행동과 의식, 나아가서 이 관계들을 서술하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물신적 방법은 모든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밝히고자 하는 서술은 따라서 스스로 방법비판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지극히 우연적이며, 논리적으로 아무런 필연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의 사회 또는 그 사회의 형식원리들의 '성립의 역사'가 그 사회에 대한 논리적 분석에서 서술되지 않는 문제, 대상에 대한 서술의 사각(死角), 논리적 서술의 결여(缺如)로 나타나는 문제 자체를 비판하여야 한다. 그것은 방법 - 헤겔에 의하자면 '형식 속으로 해체된 내용의 내부' - 이 대상에 대한 서술 속에서 최후로 만족하는 곳, 대상과 최종적으로 화해하는 지점을 파괴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스스로를 세계와 일치시키고자 하는 시도 - 마치 헤겔의 절대정신이 주체이자 세계인 것처럼 - 에 대하여 대결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궁극적으로 올바른' 방법에 대한 욕망, 즉 더 이상 주체-객체 관계 속에 물신적으로 해소되어 나타나지 않으며, 스스로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며 - 마치 십자가의 예수에게서 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듯 - 스스로 이외에 어떠한 타자도 산출하지 않으며, 총체성을 더 이상 대립들 속에 둘로 쪼개지 않으며, 어떤 생성에 의해서도 매개되지 않으려는 욕망을 비판하는 일이다. 비판한다 함은 여기에서 이러한 욕망 - 그것은 실제로 니체가 말하는 바 '권력의지'이다 - 을 전적으로 포기하라는 것도 아니고, 이러한 욕망으로 무장하라는 것도 아니다. 방법비판은 그러므로 절대정신과 자본의 내재성(Immanenz)으로부터, 자본의 자기구성원칙(selbstkonstitutionsprinzip)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방법은 스스로를 대상 속에, 현실의 관계들의 효력 속에 침몰된 것으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방법이 <대상의 서술을 통한 대상의 비판>이라는, 물신적 방법 이상의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는 점을 서술 또는 서술적 이론이 가지는 하나의 필연적 숙명이라고 생각한다.(후주5)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방법비판은 대상에 대한 서술의 이와 같은 물신적 전개를 뛰어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것은 물신적 서술의 - 특정한 사회관계 하에서의 - 필연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의 이 물신적 성격을 반성적으로 의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법비판은 맑스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내재성(또는 내재화)의 철학'에 대한 비판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내재화의 조건적 필연성'을 인정한다.
맑스가 {자본}의 상품장에서 수행한 '인식비판'에 대한 '방법비판적 독해'의 결론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특정 유용노동들의 동등화는 독립된 사적 상품생산자들 상호간의 교환을 불변의 사회적 사실로서 이미 전제하고 있다. 맑스가 1권 1장 2절에서 설명하는 생리학적 개념의 인간노동으로의 환원은 교환이라는 사회적 사실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즉 이 환원은 생산과정에서 미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환과정에서만 이루어진다. ② 질적 동등화는 양적인 비교와 평가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사적 상품생산자들의 사회에서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 비교는 각각의 상품의 가치크기를 계산하는 단위로서 '개별적 유용노동의 사회적 평균시간'에 의해서 수행된다. 이 사회적 '평균'의 상품가치 크기에 대한 계량 기준으로서의 역할은 상품생산 사회에서 사적 유용노동은 사회적 총노동의 일부로 수행된다는 상품생산 사회의 구성원칙에 근거한다. 즉 상품가치는 그것이 상품의 사회적 가치를 의미할 뿐인 한에서 사회적 평균노동시간에 의해서만 계량될 수 있다. ③ 이 평균은 물론 사전에 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전적(事前的)․선형적(線型的) 평가가 다른 구성원리를 가진 사회에서 불가능한가라는 문제는 분석수준과 관계없다. 사후적 평가라는 제도는 {자본}의 분석 대상인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사회의 구성원리이고, 이미 이 제도 자체가 분석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균'은 또한 이미 현실적으로 존재하는데, 그것은 교환을 통해서 상품의 사회적 가치 크기의 평가가 상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어서 실재적이다. ④ 사회적 평균노동 시간 또는 필수 노동시간은 '선험적' 척도(das aprionsche Ma )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교환 - 질적 동등화와 양적 비교 -을 개념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선험적' 척도는 화폐상품을 통하여 '경험적인' 특수한 척도로 나타난다: '가치척도로서의 화폐가 상품들에 내재하는 가치척도, 곧 노동시간의 필연적인 현상형태'이다(MEW 23, 109면). 추상적․선험적 척도가 구체적․경험적 척도로 현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상품사회의 물신적 성격으로 파악된다.(후주6) ⑤ '화폐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명은 그러므로 <추상적 척도가 구체화되는> 사회에서, 그것이 어떤 사회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가, 즉 그것이 어떤 사회적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에 대한 해명이어야 하며, 동시에 이러한 구체화에 대한 비판, 척도 자체에 대한 비판이어야 한다. 그래서 척도에 대한 비판은 그런 척도를 스스로의 구성적 전제로 하는 사회(상품생산 사회)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⑥ '척도'에 대한 비판은 <대상에 대한 서술>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추상적 척도의 구체화>는 상품생산이라는 사회적 관계 하에서는 필연적이지만 자연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연적인 사실, 특수한 사회의 조직원리일 뿐이다. '인식비판'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구성원리가 인간의 전역사를 지배하는 원칙이 아니며, 그래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대상을 대상에 대한 서술을 통하여 비판하는 작업>은 반드시 <서술 자체에 대한 비판>(방법비판)을 포함하여야 한다. 양자는 긴장관계에 서 있지만 그러나 '반성적 균형'을 배제하는 관계는 전혀 아니다.

 

후주

 

4) 추상적 노동은 그래서 실제로 투하된 노동시간으로 계산되지 않고, '분석적 개념'이라기보다 하나의 '종합적 개념'이다. 이 개념은 칸트적으로 말하자면 '선험적 종합판단'이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추상적 노동개념은 구체적 노동의 추상 또는 생리학적 노동으로의 환원을 통해서 구성되지만, 거꾸로 구체적 노동 - 칸트적 용어법에 따르자면 경험성 - 은 추상적 노동을 전제하지 않고는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 노동은 자본주의 이전의 노동도 아니고, 자본관계가 해소된 다음에도 영속할 생산적 활동도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 노동이라는 구성적 전제 하에서만 파악되는 자본주의적 관계 하에서의 상이한 경험적 활동이다. 다른 한편으로 추상적 노동은 교환과 화폐 - 경험성의 영역 - 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노동으로의 환원은 교환의 순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개념의 기능은 거꾸로 이 개념을 통해서만 생산과정에서의 가치형성을 역사적․선형적으로 재구성하고 교환과 생산을 연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추상적 노동은 가치생산을 설명하기 위한 조건이 되는 개념이지만 그 자체로 교환을 전제하고 있다. 

 


5) 방법은 서술적인 양극성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지만, 거꾸로 이 양극성은 그 생성(werden) 속에서 이미 매개된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이 양극성은 반드시 어떤 척도(Ma )를 통하여 - 이 척도란 구체적 대상들에 대하여 그저 후자를 확정하기 위한 하나의 임시보관소(Leerstelle)와 같은 관계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이미 상호연관된 것으로 나타난다.

 


6) 금태환 제도가 폐지된다 하여도 화폐상품을 통한 추상적 척도의 구체화가 종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구체화는 상품사회의 일반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태환 지폐는 불특정의 유용노동들의 총체, 또는 발행국 국민경제의 유용노동의 생산력들의 총체를 표현한다. 즉 교환에서 양적비교를 수행하는 척도가 구체적 대상으로 현상하여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 구체화는 이제 특정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금이라는 특정한 구체화는 오히려 예외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맑스가 이러한 특정한 구체화의 필연성을 말한 바는 없다. 지폐가 가치척도라고 했을 때, 그것이 어떤 사용가치 형태와 결부되어 있는가가 특정되지 않은 불태환 제도 - 이 지폐와 교환될 수 있는 '사회적 사용가치'가 석유일 수도 있고, IT산업에서의 기술력일 수도 있고, 또는 또 다른 어떤 알려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는 제도 - 는 그러므로 전혀 <척도의 구체화>라는 상품생산 사회의 일반 원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Ⅲ. 20세기 신조류(新潮流)들에 대한 방법비판

 

시민사회의 내재성(Immanenz)을 혁파하려는, 맑스 이후의 시도들 중에서 ①루카치, ②알프레드 존-레텔, ③아도르노, ④데리다에 대하여 검토해보는 것은, 비판이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부정(否定)의 내재화를 통하여 무비판적-옹호론적으로 종결될 수 있는가를 예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①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사회의 선험적 형식원리를 생산력, 그리고 생산적 계급과 일치시키려는 시도를 행한다. 당의 과제는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 그리하여 구체적인 노동자계급(조합주의적 계급)을 자본주의 시대 전체에 있어서 보편적인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혁명적 계급)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본이라는 절대정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는 절대정신으로 대체되고, 당은 이 절대정신의 자기현현(自己顯現)의 과정에서 기껏 의식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조합주의적 노동자계급의 자기의식으로서 나타난다. 이와 같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적 체계에 의지해 있는 루카치의 시도는 사실상 맑스․레닌주의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가 간과한 것은 자본의 총체성에 대한 비판의 준거점이 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동시에 자본이라는 절대정신의 매개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물론 루카치가 이 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곤란함을 '혁명적 비약', 현실적 상태로부터의 '결단론적 절연'을 통하여 돌파하려 한다. 이로써 그는 또한 실존주의적 맑스주의의 효시로도 이해될 수 있다. 루카치와 정반대에서의 시도는 알뛰세에게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점은, 탈(脫)역사화는 효력논리에 입각한 서술이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맹점(盲點)이며 따라서 이와 같은 서술의 사각(死角)을 방법적으로 문제삼지 않을 때 구조 분석은 비판적일 수 없다는 점이다. 또 다른 면에서 루카치와 대각을 이루는 입장은 가타리이다. 그가 시도하는 루카치와 달리 주체형성은 탈보편적․주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횡단성(transversalit )과 분자혁명 - 탈주와 '되기' - 이라는 전략은 {정신현상학}적 발전의 서열을 깨는 리비도의 경제학이다. 그런데 이 경제학은 맑스에 대한 루카치의 {정신현상학}적 독법이 {논리학}적 체계에서의 시간개념, 추상적 시간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과 매우 동일한 오류를 저지른다. 가타리는 맑스에게서 다양한 질의 시간이 양적으로 비교될 수 있는 동등한 물리학적 시간으로 환원되는 것, 그리고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시간이 추상적인 사회적 시간으로 재구성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사회의 사회적 사실이고 따라서 이 환원은 사회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자혁명} 중에서 특히 '권력구성체의 적분으로서의 자본'을 보라).

 

② 알프레드 존-레텔은 가치형식을 '선험적 주체'(Transzendentalsubjekt)로 간주하고 가치형식과 사유형식(Deukform)의 통일을 상품교환에서 일어나는 '실재적 추상'(Realabstraktion)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존-레텔은 선험적 주체는 가치형식이라고 말함으로써 맑스에 의거하여 칸트를 비판하고 유물론적 칸트주의를 재전개한다. 그러나 그의 칸트 비판은 경험적․역사적 성격을 띠게 됨으로써 맑스를 재해석하기 위하여 칸트로부터 끌어와야 할 중요한 유산을 간취하지 못한다. 즉 역사 형이상학의 극복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존-레텔은 오성개념의 기원과 효력의 문제를 양자의 동시적 발생으로서 이해하지 않았으며, 이를 불필요하게 역사화하고 경험화했다.

 

③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Negative Dialektik)은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와 실증적 종합의 현실옹호적 본질에 대한 의혹을 표현한다. '부정변증법'은 매개에 대한 부정, 동일자에 대한 부정이다. 그런데 아도르노에게 정신의 변증법(또는 자본의 변증법)을 포섭논리적으로(subsumtionslogisch) 이해되기 때문에 비동일자는 무매개적인 '어떤것'(Etwas)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비동일자가 동일자로 귀결되는 매개 속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다는 입장은 - 매개의 결과물들은 매개되는 양극성을 구성하는 전제라는 방법비판적 입장에서 판단할 때 - 사용가치 물신주의, 기원(Ursprung)의 물신주의로 파악될 수 있다. 사용가치는 가치체 이외에 '어떤 것'으로 존재할 수 없고,(후주7) 주체는 주체를 구성하는 조건인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 있을 수 없으며, 시원은 효력 속에서만 현상하기 때문이다.(후주8)

 

④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의미생산의 문제를 '차이'(differance)라는 개념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한다. 데리다는 그래서 무엇이 무엇을 표현하는가의 문제를 어떻게 어떤 과정에 의해서 표현되는가의 문제로 전환하고자 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전환을 통하여 과연 의미생산에 대한 서술적 이론이 구성될 수 있는가이다. '총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식'에서처럼 의미표현의 무한계열이 구성된다고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다른 것들의 의미를 정해주는 척도(화폐)가 이미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형식은 의미의 생산과 표현에 대한 완성된 이론이 될 수 없다. 데리다도 이 점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differance라는 조어(造語)를 통하여 의미의 연관체계에서 화폐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을 도입한다. 물론 differance는 difference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지시대상(의미)을 가지지 않고 다만 의미생산에서의 기능만을 가진다. 맑스가 화폐상품론의 입장을 취하는 반면에 데리다는 매우 단호하게 반(反)실체주의적이다. 화폐상품의 가치가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교환시점에 있어서 금상품 생산에 투하되는 '사회적 필수노동시간'에 의해서 계량되는 것과는 달리 차이(differance)는 어떤 실체와도 관련되지 않으며 그저 '흔적들'의 연관에 의한 의미생산 기능만을 표시한다. 데리다는 이러한 점에서 명백히 '척도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척도 비판은 그가 해체를 의미생산에 대한 서술적 이론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한에서 본격적인 방법비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방법비판은 화폐표지론적 척도비판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방법비판은 가치척도의 물신적 현상 형식으로서 화폐상품(금)의 존재가 필연적이라는 인식을 한편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와 같이 내재화된 척도를 상대화하고 우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해체를 수행한다. 그래서 해체는 대상에 대한 서술(이론)이 아니라 서술의 해체가 되어야 한다.

 

후주

 

7) 맑스가 '가치가 되지 않으면서도 사용가치일 수 있다'({자본} 1권 1장 1절)라고 쓸 때 그는 서문에서 약속한 '자본주의의 이념적 평균'에 대한 분석이라는 집필 목적으로부터 벗어난다.자본주의가 영역적으로 전지구화, 보편화한 시대에 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용가치 물신주의는 맑스의 이와 같은 구절들에게서 전거를 찾을 수 있다.

 


8) 사용가치 물신주의의 또 다른 형태로서 안토니오 네그리를 들 수 있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 권력과 역능의 대립은 이러한 양극성이 오직 자본운동이라는 생성 속에 매개되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을 그는 간과한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의 역동성에 대한 강조는 단순한 노동자주의, 노동자계급 물신주의로 귀결된다.


Ⅳ. 방법비판과 정치적 맥락주의

 

방법비판은 대상에 대한 서술적 비판의 맹점(盲點)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러한 비판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확증하는 일이다. 이 확증은 그러나 서술 자체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와 같은 서술, 가능한 서술은 필연적으로 물신적일 수밖에 없고, 방법비판적 단서가 없이는 언제든지 현실옹호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자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서술이 요구되는 한에서 물신적 서술은 회피될 필요도 없으며 극복될 성격의 것도 아니다. 대상에 대한 서술을 통하여 대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에는 서구 형이상학의 오래된 전통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전통 - 이 좌파적․전복적 형태로 재현된다고 본다. 그래서 방법비판은 철저히 탈형이상학적이고 반(反)실체주의적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을 비판적으로 전도시키는, 이론의 외재적 장치들 - 형이상학적 전제들 -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신(神)을 통한 현실비판을 거부한다. 방법비판은 한편으로 사회의 주어진 조건하에서 그 선험적 형식원리들이 내재화하는 필연성을 인식하며, 그래서 이 원리들에 반대하는 운동들도 내재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종류의 내재성의 철학 - 20세기 좌파의 철학 - 이 간과한 문제, 모든 내재화는 현실옹호적으로 끝난다는 문제를 망각하지 않는다. 모든 비판적 서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방법비판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입장들로부터 나오는 실천철학적 결론을 - 물론 성급한 시도이겠지만 - 통속적으로 써 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정치적․실천적 맥락주의로 표현될 수 있다. 방법비판적 실천은, 어떠한 실천도 주어진 구체적 맥락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 맥락을 떠나서는 비판적 실천이 정의될 수 없다. 그러나 방법비판은 아울러 이렇게 정의된 '비판적 실천'이 보편적 비판으로 위장하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서술 불가능한 '보편적 비판'이 내재화하는 것을 부단히 경계하며, 언제나 '현실의 상태를 극복해 가는 운동' 그 자체이고자 한다. 방법비판은 그래서 '있는 것'(현실의 맥락)과 '없는 것'(현실의 효력논리의 수준에서는 서술 불가능한 대안사회) 사이의 긴장이며, 실천적․반성적 균형(equilibrium)이다. 방법비판적 실천은 현실의 맥락에서 출발하고, 현실의 운동 속에서 대안사회를 본다. 대안사회는 그래서 결코 역사의 목적론적 도달점이 아니며 현실 속에 부단히 생성되고 정정되어 가는 과정이다. 방법비판은 대안사회를 공간적으로 내재화하려는 시도(일국 사회주의)도, 또는 시간적으로 내재화(歷史內化)하려는 시도 - 목적론적 시간기획에 입각한 과학적 이행이론 - 도 철저히 거부한다. 방법비판은 한편으로 부단히 이러한 내재화를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루어진 내재화를 재파괴한다.
 


1) 여기에 대해서는 {청년좌파} 42호, 신석준의 글, 10면-12면을 참조하라.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S. Breuer, 혁명이론의 위기, 프랑크푸르트 1977; M. Postone, 시간, 노동, 사회적 지배, 캠브리지 1996, 특히 1부를 참조하라.

 


2) {요강}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상가는 안토니오 네그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요강}에 입각하여 자본과 노동의 적대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 주체적 노동과 대상화된 노동의 대립으로 규정한다.

 


3) 헬무트 라이헬트(Helmut Reichelt), {자본개념의 논리적 구조에 대하여(Zur logischen Struktur des Kapitalbegriffs}, Frankfurt/M. 1970; 한스-게오르그 바크하우스(Hans-Georg Backhaus), {가치형식의 변증법(Dialektik der Wertform. Materialien IV)}, Freiburg 1997. 그 외 H.-J. Krahl, R.-W. M ller, B. v. Greiff, E. Jacoby, C. Seel, H. Brethel, K.-D. Oetzel, D. Behrens의 저작들. 가장 최근의 문헌으로는 나디아 라코비츠(Nadja Rakowitz, {단순 상품생산(Einfache Warenproduktion)}, Freiburg 2000.

 


4) 추상적 노동은 그래서 실제로 투하된 노동시간으로 계산되지 않고, '분석적 개념'이라기보다 하나의 '종합적 개념'이다. 이 개념은 칸트적으로 말하자면 '선험적 종합판단'이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추상적 노동개념은 구체적 노동의 추상 또는 생리학적 노동으로의 환원을 통해서 구성되지만, 거꾸로 구체적 노동 - 칸트적 용어법에 따르자면 경험성 - 은 추상적 노동을 전제하지 않고는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 노동은 자본주의 이전의 노동도 아니고, 자본관계가 해소된 다음에도 영속할 생산적 활동도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 노동이라는 구성적 전제 하에서만 파악되는 자본주의적 관계 하에서의 상이한 경험적 활동이다. 다른 한편으로 추상적 노동은 교환과 화폐 - 경험성의 영역 - 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노동으로의 환원은 교환의 순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개념의 기능은 거꾸로 이 개념을 통해서만 생산과정에서의 가치형성을 역사적․선형적으로 재구성하고 교환과 생산을 연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추상적 노동은 가치생산을 설명하기 위한 조건이 되는 개념이지만 그 자체로 교환을 전제하고 있다. 

 


5) 방법은 서술적인 양극성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지만, 거꾸로 이 양극성은 그 생성(werden) 속에서 이미 매개된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이 양극성은 반드시 어떤 척도(Ma )를 통하여 - 이 척도란 구체적 대상들에 대하여 그저 후자를 확정하기 위한 하나의 임시보관소(Leerstelle)와 같은 관계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이미 상호연관된 것으로 나타난다.

 


6) 금태환 제도가 폐지된다 하여도 화폐상품을 통한 추상적 척도의 구체화가 종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구체화는 상품사회의 일반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태환 지폐는 불특정의 유용노동들의 총체, 또는 발행국 국민경제의 유용노동의 생산력들의 총체를 표현한다. 즉 교환에서 양적비교를 수행하는 척도가 구체적 대상으로 현상하여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 구체화는 이제 특정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금이라는 특정한 구체화는 오히려 예외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맑스가 이러한 특정한 구체화의 필연성을 말한 바는 없다. 지폐가 가치척도라고 했을 때, 그것이 어떤 사용가치 형태와 결부되어 있는가가 특정되지 않은 불태환 제도 - 이 지폐와 교환될 수 있는 '사회적 사용가치'가 석유일 수도 있고, IT산업에서의 기술력일 수도 있고, 또는 또 다른 어떤 알려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는 제도 - 는 그러므로 전혀 <척도의 구체화>라는 상품생산 사회의 일반 원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7) 맑스가 '가치가 되지 않으면서도 사용가치일 수 있다'({자본} 1권 1장 1절)라고 쓸 때 그는 서문에서 약속한 '자본주의의 이념적 평균'에 대한 분석이라는 집필 목적으로부터 벗어난다.자본주의가 영역적으로 전지구화, 보편화한 시대에 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용가치 물신주의는 맑스의 이와 같은 구절들에게서 전거를 찾을 수 있다.

 


8) 사용가치 물신주의의 또 다른 형태로서 안토니오 네그리를 들 수 있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 권력과 역능의 대립은 이러한 양극성이 오직 자본운동이라는 생성 속에 매개되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을 그는 간과한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의 역동성에 대한 강조는 단순한 노동자주의, 노동자계급 물신주의로 귀결된다.


 

2019/10/13 17:58 2019/10/13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