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관련

봉건제론:역사학 비판

한국사

한국역사(한국역사연구회, 1992)는 한국 역사 입문(한국역사연구회, 1995-1996)의 축약본. 한국사강의(한국역사연구회, 1989)를 대체한 것. 한국역사는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에 주목, 한국사강의는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운동에 주목. 한국역사연구회가 개정판 준비하고 있지는 않음.

다시 찾는 우리 역사(한영우, 1997)의 축약본인 간추린 한국사(한영우, 2011) 같은 한국 통사 참고할 필요. 시민을 위한 한국역사(한영우 등, 1997)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통사.

한국사학사

한국사학사의 대표작은 역사학의 역사(한영우, 2002). 한국사학사 대요(박인호, 1996)도 참고.

한국역사연구회는 한국사학사에 대한 입장을 제시한 적 없음. 20세기 한국사학사에 대한 입장은 한국사 연구와 과학성(이세영, 1997) 참고.

한국사에서 사관수사(史館修史) 전통은 고려왕조에 의해 확립. 고려왕조가 편찬한 정사는 신라주의와 고구려주의의 논쟁을 해결하지 못함.

사관수사(史館修史) : 관찬사서 지향. 고려는 삼국시대 이래의 개인편찬사서체제(個人編纂史書體制)를 지양하고, 국초부터 당제(唐制)를 본받아 사서분찬제(史書分纂制)를 시행하였다. 사서분찬제란 사관(史官)이 사관(史館)에 모여 사서를 나누어 편찬하는 체제이다.

기전체 정사의 효시는 삼국사였는데 실전됨. 삼국사는 고구려주의를 복권시켰다는 특징. 광종이 칭제한 사실과 관련.

삼국사를 대체한 새로운 기전체 정사는 신라주의를 부활시킨 삼국사기. 삼국사는 묘청의 입장을 정당화한 반면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입장을 정당화한 것. 김부식은 사마광의 영향을 받음. 묘청은 풍수도참설을 신봉한 승려.

원과의 대결 지향한 무신정권은 고구려주의를 주장. 불교를 존숭하는 입장에서 팔만대장경을 간행. 원간섭기에 고조선, 발해, 말갈까지 포함한 삼국유사를 사찬. 신화와 전설을 집대성.

고조선-고려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편년체 통사는 동국통감. 동국통감은 삼국사절요, 고려사절요를 계승. 삼국사절요는 신라주의와 고구려주의를 절충. 고려사절요는 신권주의적 기전체 정사 고려사와 왕권주의적 용비어천가를 절충.

중종 때 박상은 동국통감을 1/10로 축약한 동국사략을 사찬. 신라주의를 채택. 정도전이 아닌 정몽주를 중심으로 사림의 계보를 정리. 이익, 성혼, 송익필, 윤근수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의 역사관은 동국사략으로 소급.

왜란 직후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만주의 고조선과 한반도의 삼한이 병존했다는 주장을 제기(북자북남자남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반면 백제, 가야, 신라는 각각 마한, 변한, 진한을 계승했다는 설을 주장. 그 자신은 고구려주의를 주장.

호란 직후 서인이 조선중화주의를 창도하면서 신라주의가 강조됨. 유계가 고려와 요금원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사제강을 사찬. 제강은 강목과 동일한 의미로 자치통감강목(조사연)에서 유래. 주희, 조사연은 춘추의 경과 전처럼 강과 목을 구별하면서 정통론의 관점을 강조.

김성일, 유성룡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남인, 정구의 학통을 계승한 기호남인도 서인과 거의 동일한 입장.(김성일, 유성룡, 정구는 이황의 수제자) 영남남인 홍여하는 신라 중심으로 고려 전사를 정리한 동국통감제강을 사찬. 기호남인 이익은 고조선-한-삼국-통일신라-고려라는 계보를 제시했는데, 그의 제자 안정복이 사찬한 동사강목이 강목체 통사였음.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북자북남자남설을 계승하지만, 고조선보다 한(마한)이 발전한 사회라고 주장. 고구려가 쇠퇴한 것은 상무(尙武)정신이 해이해진 탓이라고 주장. 모순적.

기호남인 중 고구려주의를 주장한 대표적 경우는 유득공. 발해고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남북국시대라는 관점을 제시.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이라고 주장.

기호남인 한치윤이 해동역사(海東繹史)를 사찬. 동국문헌비고, 중국 일본의 사서를 토대로 한 고려왕조까지의 기전체 통사. 繹史는 역사에 대한 고증이라는 의미. 성혼의 학통을 계승한 소론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사찬. 기사본말체를 기사체로 보충한 조선왕조의 야사.

메이지유신 이후 동경제국대학에서 식민사관 출현.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경성제국대학과 조선사편수회에서 발전하여 조선사로 완성.

식민사관에는 일선동조론, 만선동조론, 유교망국론, 당쟁망국론이 포함. 식민사관의 핵심은 봉건제결여론, 조선정체론. 이는 독일역사학파 후예인 후쿠다(福田三德)가 제기한 주장. 봉건제가 결여되어 조선이 정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식민사관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신라주의와 고구려주의의 논쟁 지속. 신채호는 강유위, 양계초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면서도 독일의 낭만주의적 민족주의를 채택. 정신적 유기체로서 국수라는 민족(Volk) 개념을 고수. 신채호는 신라주의를 비판하고 고구려주의를 복권시키기 위해 한국사를 만주의 부여족(主族)과 한반도의 한족(客族)의 투쟁으로 서술. 1910년대에 대종교를 수용하면서 배달겨레(단군족)에 예맥족(부여족), 한족, 말갈족도 포함. 왜(倭)만 배제한 것은 일선동조론 주장 때문. 식민사관에는 만선동조론도 있었으므로 그의 비판은 정곡을 찌르지 못한 것. 1920년대에 아나키즘으로 전향한 다음에도 사회진화론과 국수주의를 고수.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 

최남선은 단군을 단국의 군주가 아니라 무당으로 해석. 인도-유럽문화권, 중국문화권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불함문화권이 발칸-중앙아시아-만주-한반도-일본열도까지 존재했다고 주장. 이는 식민사관과 친화성이 있는 일만선동조론.

안확은 조선문명사에서 부족-국가-통일국가라는 정치적 발전을 기준으로 한국사의 시대를 상고-중고-근고-근세로 구분. 안확은 조선이 일종의 입헌군주정인 제한군주정이었다고 평가. 붕당정치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서 신권주의를 주장한 서인은 자유주의정파, 왕권주의를 주장한 남인은 보수주의정파였다고 주장. 탕평정치의 귀결로서 외척세도정치가 망국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셈.

안확의 후예인 이병도, 김상기, 이상백이 주도한 진단학회와 신채호의 후예인 문일평, 안재홍, 정인보가 주도한 조선학이 1950년대 남한사학계 주류의 연원. 그들은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 정약용이 집대성한 실학을 강조함으로써 문화주의적 민족주의를 창도.

신채호, 안확의 식민사관 비판은 역부족. 가장 유력한 비판은 후쿠다의 제자 백남운(연희전문학교 교수)이 조산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에서 제시. 백남운의 평전은 한국 근현대사상사 연구:1930-40년대 백남운의 학문과 정치경제사상(방기중)을 참고. 백남운의 부친은 송시열 후손 송병선의 제자.

백남운에 따르면, 삼국은 노예제, 통일신라-조선은 봉건제. 고려가 가장 전형적인 봉건제. 고조선은 원시공동체에서 노예제로의 이행기였는데 확정적 판단은 유보. 유럽적 봉건제와 차별화된 아시아적 봉건제의 특징으로 토지국유제와 그 결과로서 지대와 조세의 통일성을 강조.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분단정국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백남운의 시기구분을 둘러싸고 사회사 논쟁 전개. 이청원은 삼국부터 고려까지는 노예제, 조선은 봉건제였다고 주장. 일본공산당 주류 강좌파와 친화성 가졌던 그는 아시아적 원시공동체론을 수용하여 아시아적 봉건제론 기각.

강좌파는 1868년 이래의 메이지유신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봉건적 또는 반봉건적 관계가 존속하고 있다고 봤다. 따라서 절대주의 천황제를 타도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 당면한 과제라며 2단계 혁명노선을 제출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코민테른의 정치방침과 이를 추수하는 일본공산당의 입장 즉 정통파를 대변하는 것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209232058325

전석담(경성고등상업학교 교수)은 노예제의 존재를 부정. 노예제의 부재로 인한 원시공동체의 장기적 존속으로 인해 삼국부터 시작된 봉건제로의 이행이 완만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 백남운의 아시아적 봉건제론을 지지.

1960년대 이후 등장한 신세대는 서울대 한우근, 김철준 교수. 그들의 후계자가 한영우 교수. 김철준 교수가 '한국적 민족주의론'으로 유신을 정당화한 대가로 박정희가 한국사학계를 물심양면 지원.

진단학회 핵심성원 이상백 교수는 미국의 원조로 서울대 사회학과 창설. 그의 학통은 최문환 교수를 거쳐 김진균, 신용하 교수로 계승.

북한사학계를 주도한 사람은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출신 김석형과 박시형. 1960년대 북한사학계는 고조선은 노예제, 삼국시대 이후는 봉건제였다는 결론 도출. 백남운, 진석담의 아시아적 봉건제론은 견지. 1970년대에는 주체사상이 득세하면서 고조선-고구려-발해 계보 강조하는 주체사관 출현. 역사의 추동력을 계급투쟁, 민족해방투쟁에서 발견하면서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 개념은 상대화.

1975년, 사회경제사를 거부하던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연세대 사학과로 이적한 김용섭 교수가 백남운 학통을 계승하여 조선후기 사회경제사를 연구. 한국사 인식과 역사이론(김용섭교수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간행위원회, 1997) 참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경제학부는 전석담의 학통 계승하지 못함. 박현채 선생 교수로 부임하지 못했고, 안병직 교수는 전향. 이대교, 진백달 같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가 부재.

고려대 사학과 강만길 교수가 분단사관, 민족통일사관을 제기. 한국사회성격 논쟁에서 민족해방(NL)론의 일각으로 계승. 민족해방론의 주류는 주체사관에 충실.

깅용섭 교수 입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한국역사연구회는 PD론적 입장과 친화성을 갖는 한국통사를 집필. 통일신라 이후에 봉건제 출현했다고 주장. 한국사에서는 노예제 발견할 수 없음을 인정. 주체사관, 분단사관 아닌 사회경제사관 타당하다는 것이 내(윤소영) 생각.

 

이처럼 정여립 사건과 관련되어 등인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에 대한 선조의 분노가 어떠했는지는 동인의 엉수인 이발이 뚜렷한 연루 혐의도 없이 조사를 받다가 죽은 데서도 알수 있다. 뚜렷한 물증은 없었지만 사건은 날로 확데되었고 억울한 희생자는 크게 늘어 갔다. 이 사건은 정철과 이발, 그리고 류성룡 등이 모두 죽고 난후에도 남인과 서인 사이의 끝없는 논쟁거리가 되있다. 이발이 죽을 당시 정철이 위관이었는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서인들이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라 동인인  류성룡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남인측은 정여립 반란 사건 내내 위관은 정철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럼 정여립 사건 당시 위관은 누구였던가? 류성룡이 위관이있던 적이 있있을까? 류성룡이 위관이었나는 증거는 없다. 다만 정여립 사건의 수사기록인 기축옥안已丑獄案이 임진왜린 때 불타버린 것을 이용해 서인들이 자기들이 살육한 정치보복을 동인 류성룡에게 뒤집어 씌운 정치공세였다. 이 사건은 조선의 당쟁이 피행으로 가는 첫 관문이었다. 사건의 진상은 모호한채 뚜렷한 물증도 없이 수많은 동인들이 죽어 갔다.

이덕일, 조선 선비 당쟁사


정철과 유성룡의 대화를 기록한 김장생의 ‘송강행록’이 조작이라고 이 소장은 주장했습니다. 선조 23년에 위관(委官)은 정철이었는데, 마치 유성룡인 것처럼 김장생이 기록하여 이발의 노모와 아들을 유성룡이 죽인 것처럼 덮어씌웠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이 일이 선조 23년이 아닌 선조 24년의 일이었다고 바로잡아 그의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광해군 9년(1617) 생원 양몽거(楊夢擧)의 상소’와 ‘아계 이상국(이산해) 연보’를 근거로 선조 23년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조반정 이후의 서인들 기록에서부터 ‘선조 24년’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몽거의 상소는 광해군 9년이 아니라, 60년 뒤인 숙종 3년(1677)의 일이었습니다. 그 뒤 이 양몽거의 상소에 대해, 신묘년(선조 24년)을 경인년(선조 23년)으로 잘못 보았다는 다른 이들의 비판이 이어집니다. ‘아계 이상국 연보’도 광해군 때가 아니라 인조반정 이후에 편찬된 것입니다. 이것이 ‘장황한 판본 조사’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들이 죽은 시기는 분명 선조 23년 5월이 아니라 유성룡과 이양원이 위관을 맡았던 선조 24년 5월입니다.

이덕일 소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논조를 바꿉니다. 아니지요. 기본 성격은 바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에서 도출되는 것입니다. 이 소장과 같은 방식으로 사료를 인용하면서 주장하는 ‘기본 성격’을 저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덕일 소장에게 편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편견의 기반은, 식민사관에서 시작되어 근대주의적 역사관, 즉 ‘자본주의맹아론-실학’ 구도에서 강화된 당쟁론입니다. 제가 ‘콩쥐-팥쥐’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한국지성사의 안타까운 일면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장은 비장하리만큼 자신과 ‘주류학계’를 구별하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주류학계’의 충실한 일원입니다.

- 오항녕, http://m.hani.co.kr/arti/culture/book/369753.html

 

 

2019/07/21 15:46 2019/07/21 15:46

스티브 제이 굴드, 리처드 도킨스, 테리 이글턴

스티브 제이 굴드를 비판하는 글들을 더러 읽었다.

이덕하라는 사람이 쓴 글은, 자신의 몰이해를 알아차리지 못한 비방에 가까웠고 -

어쨋든 굴드와 도킨스의 가장 큰 갈림은 '적응'에 있을 터다.

굴드는 삼각소간과 같이 의도치 않은 부산물이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라면, 도킨스는 모든 게 적응의 결과라는 입장이다. 유전자가 진화의 기본단위라고 치더라도, 한 유전자가 한 표현형만 발현시키는 게 아니라는 것은 진즉 규명되었다. 한 표현형을 발현시키는 유전자가 단수가 아니라는 사실도 규명되었다.

한국의 무당개구리가 전세계에 퍼져나가면서 같이 퍼진 곰팡이균 때문에 각지 양서류가 많이 죽는다 한다. 아마 몇 세대가 지나면 그 곰팡이균 면역을 획득한 개체들이 다수를 점하게 될 것이다. 그 면역과 관련된 유전자가 단순히 곰팡이균 면역 형질만 발현시킬까? 이건 너무 단선적인 시각이다.

'핀치의 부리'를 계속 읽고 있는데, 우선 미세한 변이를 추적하고, 종분화가 어느 시점에 일어나는지 추적하는 부분까지 읽고 있다. 읽는 속도가 잘 안나는데, 굴드의 책일 읽으며 익숙했던 진화의 개념과는 확연히 달라서다.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어떤 대목에서 어떤 쟁점이 있다는 걸 정밀하게 서술하지는 못하겠는데, 진화를 적응의 결과로 전제하는 데에 가장 큰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생존에 유리한 형질이 더 많이 살아남는다는 건데, 부리의 길이에 초점을 맞춰서 연구한다. 표현형과 유전형이 1:1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 생존에 영향을 미친 부리의 길이 외 다른 표현형(부리의 길이와 상관관계가 높은)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등이 의문이다. 지금 읽는 대목은 변이의 축적이 종분화로 도약하는 신비에 관한 것인데, 생각해보면 변이의 축적과 종분화는 특별한 관계가 있긴 어렵다. 새롭게 탄생한 종이 갖고 있는 형질이 그 시점의 환경에서 생존하는데 유리해서 더 많이 생존했다는 게 자연선택의 결론일 것이다.

나머지는 더 읽고나서 보충해야지.

테리 이글턴의 도킨스 비판과 스티브 제이 굴드-리처드 도킨스 사이의 의견 차이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예전에도 이걸 정리해보고 싶다는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여전한 바람이다.

2019/04/27 23:29 2019/04/27 23:29

2019/03/16

'과학적 속물주의'에 반대하는 '황빠'식의 데마고기

-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황빠가 과학적 속물주의에 반대한다는 유언비어가 있다는 뜻일까? 그런 유언비어가 있었나? 이거야말로 데마고기인데..

아니면 '황빠'라는 게 데마고기였고, '과학적 속물주의 반대'가 황우석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황빠'라는 담론과 유사한 유언비어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과천은 황우석의 작업을 과학으로 인정하는 것인가?

이것도 아니면, '과학적 속물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황우석에게 맹목적이었던 '황빠'들 식의 유언비어와 비슷하다는 것일까? 당시 맥락상 이쪽일거라고 짐작해 보는데, 정말 이런 의도로 쓴건지 확신이 안선다. 하도 괴랄한 입장을 많이 봐와서.. 과학적 속물주의에 반대한다는 건 당시 한겨레 신문엔가 실렸던 칼럼일 거다. 

그리 중요한 맥락은 아니긴한데, 아무튼 도통 이해가 안돼서.

출처는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대안노조 p17.

 

그리고 p18에서는 리민치를 참고하라고 각주를 달아놓는데, 리민치의 분석은 노동자연대의 평대로 상당히 어설프고, 난 읽으면서 중화주의가 이런것인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중국에 대한 과도한 무게중심을 두는 결론들이다. 이 중에도 참고할 부분은 있겠으나, 제로 이윤율이라는 전제도 그렇고 현실에 발딛지 않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종말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종말
리민치
돌베개, 2010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대안노조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대안노조
윤소영
공감, 2008

 

2019/03/16 09:49 2019/03/16 09:49

한국자본주의의 역사 : 한국사회성격 논쟁 30주년

통합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자산이 아니라 시가총액에 따른 합병비율을 허용하는 국내법을 악용하여 삼성물산의 합병을 강행. 이 대목에서 엘리엇이 이의를 제기. 삼성은 엘리엇을 유다투기자본이라고 비난하면서 국민연금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엘리엇의 공세를 물리침. 김상조 교수는 이재용 씨의 의사에 반한 미전실(이건희 회장 가신그룹)이 주도한 것으로 이재용 씨는 결국 글로벌 스탠다드를 수용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추측을 제시.(진보주의자들은 김정은 씨도 국제주의자로 간주.) 삼성이 발런베리 같은 국민기업이어서 국민연금의 무리수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 발런베리는 비영리 법인을 통해 지배를 재생산. 삼성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반면 발런베리는 비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차이에 주목할 필요. 헤지펀드는 투자신탁기금의 일종으로 기관투자자. 법인의 대주주는 대체로 그런 기관투자자인데, 기관투자자를 투가지본으로 규정하는 것이 온당한지. 합병의 결과로 지배구조 변경.

삼성에버랜드 -> 삼성생명 -> 삼성전자 -> 삼성카드 -> 삼성에버랜드

=>

통합삼성물산 -> [삼성생명 ->] 삼성전자 -> 삼성SDI -> 통합삼성물산

삼성전자와 관련해서 삼성생명을 통한 간접 지배에 직접 지배가 추가. 지주회사로의 전환에서 장애요인인 금산분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차적 시도. 삼성카드를 삼성SDI가 대체. 

 

김성수, 윤치호

보성전문학교에서 경성제대와 경쟁하기 위해 좌파 경제학 교수 대거 임용. 보전 사학파. 사학파는 연희전문학교로 소급하는 것. 연전은 윤치호의 영향력이 강했음.

윤치호 복권 필요. 박노자, 강준만이 윤치호 변호한 적 있음. 민족 부르주아로서 그들(김성수, 윤치호)의 사고와 행동은 모순적이었지만 매판 부르주아는 아니었음. 윤치호의 결함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는데 있음. 김성수는 마르크스주의자를 후원한 적이 있지만 윤치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음.

 

소비

19세기 자본주의와 비교할 때 20세기 자본주의의 특징은 소모성 필수품의 생산에서 내구성 필수품의 생산으로 전환한 데 있음. 그리하여 소비혁명이 발생한 것. 산업혁명은 '생산의 기계화'를 의미하는 반면 소비혁명은 '소비의 기계화'를 의미. 내구성 필수품은 결국 기계임.

'엥겔의 법칙'은 소비지출에서 식품비의 비중이 점차 하락하는 대신 주거비의 비중이 점차 상승한다는 것. 그런 법칙을 상징하는 것이 소비의 기계화. 의류비 비중은 19세기에는 주거비 비중처럼 상승한 반면 20세기에는 식품비 비중처럼 하락.

고전파는 '편의성 필수품'과 '낭비성 사치품'을 구별. 동시에 안락과 낭비로 구별하기도 함. -> 낭비성 사치품과 편의성ㆍ안락성 필수품을 구별. 나아가 통속성과 구별되는 세련성, 농촌성과 구별되는 도시성 까지 고려. 도시적으로 세련된 것(respectable, decent, proper)은 '관습적으로 적절하다'는 의미. 한자어로 통속성과 농촌성을 합쳐서 野卑라고 함. 실질임금의 기준으로 도시적 세련성까지 고려한 셈.

밀은 정상상태에서는 고전파의 주장과 정반대로 저축이 아니라 소비가 중요하다고 주장. 그는 과시적 소비와 자기실현적 소비를 구별. 후자의 소비는 촉진하는 반면 전자의 소비는 부유세 등을 통해 억제해야한다는 것.

앨런은 임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사용가치라는 의미에서 실질임금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제시. 앨런은 생활수준과 생계비의 비율을 생계비율이라고 부름. 기준이 되는 생계비인 최저생계비가 세계은행의 빈곤선임.(溫飽 : 덩샤오핑) 산업혁명 직전에 영국 노동자의 생계비율을 4로 추산.(小康 : 덩샤오핑)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부르주아화된 노동자(노동귀족)의 생계비율은 8을 달성.(富裕) 산업혁명이 영국보다 1세기 늦은 미국은 1830~40년대 8로 상승.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도쿄는 3. 서울은 잠시 2까지 상승. 현대화로 볼 수 없음.(차명수) 소비가 기계화된 20세기에는 4나 8의 생계비율을 소강, 부유라고 할 수 없음. 현재 중국의 생계비율은 6. 20세기적 의미의 소강과 부유에 대한 분석 없음. 

 

노동자운동의 소멸

2008-09년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PRC) 위기, 2009-12년 프랑스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새로운반자유주의정당(NPA) 위기, 2008-13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위기.

남한은 노동자의힘 그룹의 전위정당 空約과 분열. 다함께 그룹의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탈당과 분열.

사회진보연대는 1998년 창립 이후 과천연구실과의 관계에서 세 번의 전환점 있었음. 첫번째는 초기 사회진보연대 내부에 혼재되어 있던 반제반독점(AMC) PD와 반제반파쇼(제파)PD가 분리정립되는 상황에서 진행된 2003년 합정동 토론회. 그 성과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두번째는 07-09년 금융위기가 폭발하기 직전의 정세 속에서 사회운동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생운동편향적 해석(최원, 장진범)으로 초래되 혼란을 불식하는 것. 2008년 갈월동 토론회. 그 성과가 <금융위기와 사회운동노조>. 세번째는 현재진행형. 노동자운동연구소 지지부진한 가운데 박하순 소장 사퇴. 90년대 선배 그룹이 대거 민주노총으로 이전하면서 00학번대 후배 그룹에게 사회진보연대에 대한 책임을 전가한 상황. 2015년 초 정동에서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세미나>를 텍스트로 해서 토론회 진행.

 

1992년 전환점

<기적에서 성숙으로>가 1972년 이후 남한 경제의 이윤율(자본수익률)을 분석. 이를 토대로 경향성을 그래프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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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이 전환점. 이윤율이 1980년 수준까지 하락한 1991-92년이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통해 이윤율을 반등시킬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 사공일 박사는 당시의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두환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 전두환 정부의 정책개혁이 중도반단된 한가지 이유는 정치적 정당성의 부재. 김영삼의 3당합당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음. 김영삼 정부의 정책개혁은 김대중이 지도하던 야당의 방해로 좌초.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남한경제를 외국인에게 통째로 팔아넘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에 대한 외국인 지분은 1/2, 7대 은행에 대한 외국인 지분은 최소 2/3 내지 최대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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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에서 성숙으로>에서 분석한 한국 GDP 성장 곡선.

 

 

윤소영이 인용한 논문

<Technology and the great divergence: Global economic development since 1820>, 앨런

[1-s2.0-S0014498311000416-main.pdf (1.25 MB) 다운받기]

https://penguinslibrary.tistory.com/175

 

<Technological Change, Technological Catch-up, and Capital Deepening: Relative Contributions to Growth and Convergence>, Kumar, Russell

[Technological Change, Technological Catch-up, and Capital Dee... (935.52 KB) 다운받기]

https://penguinslibrary.tistory.com/174

 

세계경제사
세계경제사
로버트 C. 앨런
교유서가, 2017

 

2019/02/05 23:25 2019/02/05 23:25

중세의 토지제도(『한국역사』 p184~197)

중세의 토지제도
(『한국역사』 p184~197)

1. 우리나라 봉건적 토지소유의 특징
토지의 소유 여부는 사회계급을 구분하는 지표가 되며, 토지소유를 둘러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사회의 기본모순관계를 표현한다. 중세사회의 농업경영 형태는 다양하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소농경영이 기본적인 형태였다. 소농경이란 노동주체인 농민이 자기 가족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노동 전과정을 수행하고 노동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경영형태를 말한다.
중세사회에는 이러한 소농경영을 바탕으로 하여 대토지소유가 발달하였다. 대토지소유자들은 토지소유를 매개로 하여 농민의 소경영을 지배하고 잉여생산물을 지대의 형태로 수취하였다. 대토지소유자와 생산과정에서 개인적 성격을 갖는 소경영 농민 사이에 맺는 관계를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라고 한다. 봉건적 토지소유는 역사발전의 특정 단계에 출현하는 토지소유의 역사적 한 형태이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토지에 대한 사적인 소유권이 발달하였다. 토지사유는 어느 신분에게나 개방되어 있어, 대토지소유가 발달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농민들의 소토지소유도 널리 존재하였다.
대토지소유자들이 토지가 부족하거나 없는 소농민들에게 토지를 빌려주어 경작하게 하는 관계를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 줄여서 ‘지주제’라고 한다. 중세 초기의 지주제는 신분제를 비롯한 경제외적 강제를 강하게 받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경제외적 강제는 약화되고 경제적 관계가 강화되었다. 지주제는 본질이 대토지소유자에 의한 소경영 농민의 지배라는 점에서 봉건적 토지소유였다.
지주제에 포섭되지 않는 광범위한 소토지소유 농민이 존재했으나 농민들의 토지소유는 국가에 의해 강한 제약을 받는 형태로 존재했다. 국가는 봉건적인 신분, 수취관계를 통하여 소토지소유 농민들을 지배했고, 봉건지배층에게 일반 토지에서 전조를 거둘 수 있는 권리(수조권)를 지급함으로써도 소토지소유 농민을 지배하였다. 이처럼 수조권을 기초로 형성되는 관계를 ‘전주전객제(田主佃客制)’라고 한다. 전주 : 수조권을 가진 자, 전객 : 소토지소유 농민
전주의 수조권은 사적 소유지의 소유권과는 성질이 달랐다. 이렇게 봉건지배층은 소유권에 기초하여 소농경영(전호)을 지배할 뿐 아니라 수조권에 기초하여서도 소농경영(전객)을 지배할 수 있었다.
봉건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수조권·전주전객제는 점차 약화 소멸의 과정을 겪었고, 소유권·지주전호제는 점차 발전 확대의 과정을 겪었다. 지주제는 비옥한 농지나 자연재해의 영향을 덜 받는 농지에서 성행하였다. 지주제는 생산력이 발전함에 ᄄᆞ라 확대되었으며, 16세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임진왜란 무렵에는 토지지배관계에서는 지주전호제만 남게 되었다.
토지에 대한 수조권분급은 모든 토지는 국왕의 토지라는 관념을 전제하여 이루어졌다.토지의 소유권이 수조권의 강한 제약을 받았다는 점에서 일물일권의 원칙에 기초한 근대적 토지소유와는 구별된다. 지주제가 지배적인 형태였던 점에서 영주적 토지소유가 지배적이었던 서구의 유형과도 구별된다. 서구의 봉건적 토지소유에서는 토지에 대한 지배적 권리는 영주에게 귀속되지만 농노 또한 영구 경작권을 비롯하여 토지에 대한 실제적인 권리를 갖는다. 지주제에서 전호는 토지에 대한 실제적인 권리가 매우 약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봉건적 토지소유가 지주제를 중심으로 한 점에서는 중국과 비슷하나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일본은 영주적인 토지소유가 강력하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2. 중세 토지제도의 성립
우리나라의 중세사회는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성립하였는데, 그 과정이 완만하고 장기간에 걸친 것이 특징이다.
4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었으며, 신라는 6세기 초 우경이 적극 장려되었다. 수리 관개시설이 많이 만들어져 홍수의 피해를 덜 받는 농경지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농업생산이 늘어났고 논농사가 차츰 중시되었다.
경작과정에서 개인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농가의 경제적인 자립도가 높아졌다. 토지는 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생산수단이 되고, 예속 농민을 직접 노예로 부리는 것보다 토지를 빌려주고 대신 생산물의 일부를 받는 방식이 우세하게 되었다. 인두세 중심에서 토지와 인구를 배개로 호별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등급을 매겨 거두는 쪽으로 바뀌었다. 지배층에게 봉호를 지급하던 식읍제가 약화되어 가고 토지를 분급하는 제도가 자리 잡았다.
7세기 중엽 삼국이 통일되기까지 경제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긴요하였다. 이에 소농민 보호정책을 펴게 되었으며 농민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개선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군현제와 관료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국가가 전국의 토지와 호구를 파악하여 공전과 양민을 확대하였다. 사회적 생산력이 발전함으로써 토지가 중시되었고 경장과정에서 가호 중심의 농업경영이 자리 잡은 것을 바탕으로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신장되었다.
통일을 전후하여 왕실, 귀족, 불교사원은 토지소유를 크게 확대하였다. 이를 흔히 전장으로 불렀는데 전장에는 장사를 설치하고 지장 등의 관리인을 파견하여 많은 경우 지주제 경영을 하였다. 전장주가 전호농민을 지배하는 형태는 노비나 하호를 노예적으로 지배하던 전시기의 모습과는 달랐다. 전호농민든 간섭을 종전보다 덜 받으면서 개별적으로 경작하게 되었다.
소토지소유 농민들은 가족노동을 바탕으로 소경영을 하였는데 이들은 전호농민보다 더 자율성이 컸다. 국가에서는 정전을 지급하기도 하였는데 농민의 소유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토지에 대한 이러한 사적인 소유를 전제로 하여 수조권분급제가 시행되었으나 아직 관료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서 정연하게 분급하지는 못하였다.
통일신라에서 토지분급은 녹읍과 관료전으로 이루어졌다. 녹읍제는 689년에 혁파되어 세조로 대치되었다가, 757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관료전은 687년에 지급되었다. 관료전과 녹읍은 관료들에게 토지를 떼어주고 거기서 조를 거두도록 한 제도였다.
신라 하대에 농민항쟁이 전개되면서 신라의 사회체제는 급격하게 붕괴되어 갔다. 이 시기 호족들은 지방의 독립된 세력이 되어갔는데, 그들은 국가의 전조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녹읍의 외피를 쓰고 지배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발달하면서 소토지소유 농민이 늘어나고 지주제가 발달하였다. 그 위에서 지배층의 직역봉공職役奉供에 대한 대가로 수조지를 분급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중세토지제도의 특징이 나타났다. 그러나 농민을 노예에 준하는 처지에 두고서 지배하는 형태도 남아있었다. 녹읍은 식읍과 비슷한 점도 남아있었지만, 녹읍민은 식읍민보다는 부담이 헐하였다. 이 시기에는 중세의 토지지배관계가 성립하였으나, 아직 그 특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3. 중세 토지제도의 발전
고려시기는 봉건사회의 발전기로서 봉건적 성격이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토지소유관계면에서 소유권과 수조권의 조화·대립이 두드러지고, 토지지배관계와 신분제의 유기적인 관련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고려는 양전을 실시하여 토지소유관계를 조정하고, 노비안검법을 통해 노비를 양인으로 되돌렸다. 이는 국가가 공전을 확대하는 동시에 양인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농민들은 지방 호족들이 자의적으로 수탈하던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
고려시기에는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한층 성장하여, 매매·상속·증여·양도의 권리가 인정되었다. 농민의 대부분은 소토지를 소유하거나 토지가 없는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경지를 넓히기 위해 진전(陳田)이나 산전(山田)을 개간하였다. 고려의 북진정책도 농지의 확대라는 시대적 요청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귀족이나 사원의 대토지는 대개 지주전호제로 경영하였다. 전호는 일반적으로 1/2의 현물지대를 부담하였으나, 국·공유지를 개간하여 경작하는 전호는 수확량의 1/4을 지대로 바쳤다.
지주는 토지 뿐 아니라 농우農牛나 종자와 같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호는 그들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전호는 지주에게 신분적인 지배를 받는 처지에 있었다.
지주제 경영이 일반화되고 개별 소농민들이 영농과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던 것은 당시 생산력 수준에 따른 것이었다. 평지에서 상경常耕화는 보편화되었고, 세역歲易농법은 주로 산전에서 성행했다.
12세기 이후에는 농업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향약의술의 발달로 유아사망이 현저히 줄어 인구가 크게 늘어나, 집약적인 영농의 확대를 뒷받침하였다.
농장의 예속농민의 경우 강제로 종속되기도 하였지만(壓良爲賤) 용조庸租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탁投托인 경우도 많았다. 이를 배경으로 지주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고려 초기 지방의 호족을 지배층으로 편입하면서 수조지의 분급규정으로 전시과(田柴科)를 마련하였다. 976년에 만들어진 시정전시과에서는 관료집단을 복색에 따라 네 등급으로 구분하여 각각 서로 다른 토지분급 규정을 두었다. 관품(官品) 뿐만 아니라 인품(人品)도 지급기준이었다.(役分田 성격) 그러나 관료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998년에 실시된 개정전시과에서는 관직체계를 기준으로 토지를 분급하였다.
전시과에서는 전지와 시지가 분급되었다. 전지는 수조지였는데 전주는 국가를 대신하여 소출의 1/10을 전조로 징수하였다. 시지는 땔감을 얻는 땅으로서 개경에서 왕복 2일 이내의 지역에 분급되었다.
국가가 전조를 거두고 수조지를 분급할 때는 양전의 결과를 기초로 하였다. 양전을 하여 작성하는 양안에는 매필지마다 전품(田品), 양전척(量田尺), 결수(結數), 사표(四標), 기·진(起 ·陳)여부와 함께 그 토지의 소유권자를 명시하였다.

 

4. 중세 토지제도의 재편
고려 말에는 전제의 문란으로 인한 토지문제를 수습하기 위하여 여러 방안이 모색되었다. 그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는데, 수조권을 근거로 한 불법적인 토지 겸병을 없애고 수조권자를 단일하게 하려는 방안과 사전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는 방안이다. 두 주장이 서로 맞서는 가운데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후자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사전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이들은 새로 양전을 하여 옛 토지문서를 모두 불태워 없앴으며, 1391년 과전법을 공포하여 새로운 토지분급법을 마련하였다.

전시과제도에서는 사전이 외방에도 분급되었으나 과전법에서는 외방의 사전을 혁파하고 기내에 집중하여 재배분하였다. 그 결과 전주의 전객농민지배는 국가에 의해 강한 통제를 받게 되어 자의적인 수탈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천자문의 순서만으로 전정을 구별하는 자정제가 시행되어 전정에 전주명이 기재되던 방식이 폐지되었다.
과전법 제정 이후에도 정부는 소농민 보호시책을 추진하였다. 조선 초 정부는 토지소유 규모에 제한을 가할 수 없는 형편에서 경영관계에 제약을 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 일시 금지) 세종 말년부터 공법(貢法)을 시행함에 따라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수취하여 비교적 객관적인 기준과 타당성을 갖게 되었으며, 수취율도 1/20로 경감되었다.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산지에서도 세역전이 줄어들어 세종 때 편찬된 농사직설에서는 세역농법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아가 하삼도에서는 보리와 콩의 1년 2작이나 조, 보리, 콩의 2년 3작이 자리잡아 갔다.
농민들은 개간을 통해 경작지를 확대하였다. 정부에서는 개간을 장려하기 위해 면세 조치를 취하였다. 비교적 후진지역이었던 중부 이북지역에서도 개안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농민들이 한층 자율적으로 농업경영을 하게 되면서 지주제도 더욱 발달하였다. 노동지대를 수취하던 지주제 경영형태는 사라져갔으며, 지주가 직영하는 경영형태는 크게 축소되어 갔다. 노비전호보다는 양인전호가 크게 증가하였다. 병작(幷作)은 민간의 상사(常事)로 여겨졌다.
한편 이 시기에 전주전객제는 최종적인 단계에 있었다. 전주가 직접 답험踏驗하던 것이 관 답험으로 바뀌고, 직전법의 시행으로 사전의 영대 점유가 부정된데다 직접 수조가 차단되어 관수관급으로 바뀌었다.
수조권은 중앙과 지방의 국가기관에도 분급되어 각 기관이 독자적으로 수조해왔는데, 1445년 국용전제가 시행되어 국가가 직접 수조하는 것으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통일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전주권이 약화되어 전주전객제가 해체됨으로써 15세기 후반 이후 수조권을 매개로 한 토지지배가 무너지고 소유권에 바탕을 둔 지주전호제만이 남게 되었다. 전객으로 파악되던 농민은 명실상부한 소유자가 되었다. 반면 지주전호제도 한층 더 발달하게 되었고, 토지소유를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지고 토지 집적이 심해지면서 농민의 토지상실도 심각해졌다.
16세기 이후에는 지주층과 전호의 관계에서 신분적인 주종관계가 점차 배제되어 갔다. 지주제에서 경제외적 강제가 퇴색하고 경제적 관계가 크게 부각되었다. 지주경영이 활발해짐에 따라 유통경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농민층은 자신의 생계를 확보하기 위해서 단위면적당 소출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참여함으로써 문제를 타개하려 하였다. 18세기 이후에는 토지의 상품화가 진전되어 토지매매도 활발해지는 가운데 양반 작인이나 임노동자가 출현하였다. 지대의 형태도 타조제(打租制)에서 도조제(賭租制)로 변화하였으며 일부지역에서는 화폐지대도 등장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바탕으로 농촌사회가 급속히 분화되는 가운데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던 중세사회는 근본적으로 동요하였다.

 

 

사전 : 수조권이 개인, 사원에게
공전 : 수조권이 국가에게
병작 : 토지를 빌려 경작
답험 : 경작지의 작황을 조사
타조 : 분익소작. 예 - 병작반수제
도조 : 정액소작

직접생산자의 부담 정도
식읍>녹읍>전시과>과전법

2018/11/06 22:50 2018/11/06 22:50

금융 위기 이후의 자본주의

금융 위기 이후의 자본주의
금융 위기 이후의 자본주의
김성구 외
나름북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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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위기 이후:자본주의 위기 및 붕괴 논쟁 평가

 

김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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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위기는 구조 위기만이 아니라 순환적 공황이 중첩된 위기로 양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구조적 위기로부터 벗어난 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금융 위기는 일단 극복되었다. 2010년을 전후로 미국 자본주의는 회복 국면으로 넘어섰고, 지금은 이미 호황 국면에 진입한 상태다. 지난 위기에 대해 여러 좌파 논자들이 더블딥이나 신자유주의의 종말 또는 케인스주의의 복귀, 심지어 자본주의의 붕괴까지 전망했으나 이들의 전망은 빗나간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 위기론은 자본주의의 상이한 발전 단계에서 나타나는 위기의 구체적 형태와 성격을 규명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지난 금융 위기는 구조 위기의 관점에서 보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의 관철과 케인스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모순이 결합하여 발생한 1970-80년대의 현대불황에 대한 독점 자본의 대응책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전환(세계화와 금융화)이 가져온 직접적 결과다.(신자유주의 금융위기) 마르크스주의 좌파라면 자본주의의 모순이 마르크스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 왜 스태그플레이션의 위기와 금융위기라는 형태로 변용, 심화되어 나타나는가를 분석해야 한다. 여기에서 독점자본주의론과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요구된다.

 

2. 위기 이후 자본주의 전개 과정과 현 상태

 

1) 금융 위기의 전개와 봉합

위기 이후 금융시장과 실물 경제 전개의 주요 국면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제1국면 : 글로벌 금융위기(2007-2008), 제2국면 : 금융위기로부터 실물경제위기/채무 위기로(2008-2010), 제3국면 : 실물 경제의 회복 국면으로의 전환과, 채무 위기와 금융위기의 상호작용(2010-2012), 현 국면 : 회복 국면을 넘어 호황으로?

위기 이후 국면 중 주목할 것은 금융 위기와 국가 채무 위기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위기가 폭발적으로 전개됐지만, 미국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실물 경제가 회복되고 호황으로 진입한 제3국면이다. 많은 논자가 전자의 측면에만 집중했다. 한편 2013년 이래 금융 위기가 완화되고 진정되는 결정적 계기는 자본주의 국가의 위기 개입이었다. 재정 개입으로 금융 위기가 국가 채무 위기로 발전하는 상황에서 돋보인 건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주목받은 중앙은행의 개입이었다. 국가 개입 프로그램은 케인스주의와는 별 관계가 없고,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재건 프로그램이었다. 중앙은행의 유동성 지원, 재정 지출의 압도적 부분은 금융 자본의 회생과 금융 안정화에 돌려졌다.

 

금융 위기, 국가 채무 위기가 심화되던 와중에도 새로운 경기 순환이 진행되었고, 2012년 이래 미국 경기가 호황 초기 국면으로 진입한 것도 금융 위기와 채무 위기가 안정되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2) 위기 이후의 경기 순환

 

나가시마 세이이치에 따라 살펴보면, 공황과 불황은 GDP가 감소하는 국면이다. 공황은 (-)성장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국면, 불황은 더욱 완만하게 진행되는 국면이다. 저점에서 경제는 (+)성장으로 돌아서서 경기 회복 국면이 전개된다. 경기 회복이라는 의미는 이전 경기 순환의 고점을 회복한다는 말이다. 이전 순환의 고점을 돌파하면 호황 국면으로 진입한다. 호황 국면은 ‘과도한 긴장과 과잉 투기의 시기’(Marx)를 지나 공황으로 급전한다. 공황으로 하나의 경기 순환이 종료하고 이 공황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순환이 시작된다. 평균 10년 기한의 하나의 순환이 공황-불황-경기회복(활황)-호황-공황 4개의 국면으로 구성된다.

 

자본주의에서 공황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 자체에 공황을 일으키는 내재적 원인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의 과잉 생산 공황론을 계승한 것은 일본 마르크스주의 구 정통파의 경제학이다. 영미권의 공황론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으로 공황을 설명하는 이론적 오류에 빠져있고, 산업 순환론으로까지 전개하지 못하는 한계도 노정하고 있다.

 

<미국 경제>

공황/불황 : 2007년 4/4분기~2009년 2/4분기

경기 회복(활황, (+)성장으로 전환) : 2009년 3/4분기~2011년 4/4분기

호황 : 2012년 1/4분기~

 

<유럽 경제>

공황/불황 : 2008년 2/4분기~2009년 2/4분기

경기 회복(활황) : 2009년 3/4분기~2011년 3/4분기

더블딥 : 2011년 4/4분기~2013년 1/4분기

경기 회복(미약한 활황) : 2013년 2/4분기~

 

*주가지수는 경기 선행지수, 실업률은 경기 후행지수, 이자율/물가지수는 경기 동행 지표

 

유로존이 국가 채무 위기와 더블딥의 후폭풍을 맞은 것은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유럽통화동맹의 신자유주의 교조 때문이다. 유로존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이라는 국제법에 묶여 신자유주의 교의를 그대로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오히려 신축적으로 위기 시 국가 개입을 강화했다. 위기 후 세계 경제의 회복은 불안정하고 불균등하게 진행되는 상황이다.(미국:취약한 호황국면, 유로존:취약한 회복국면)

 

3. 자본주의 위기 및 붕괴 논쟁의 이론적 문제들

 

마르크스주의 위기론은 10년 주기의 주기적 공황과 주기적 공황들 속에서 관철되는 장기적 위기, 그리고 다음 사회로의 이행과 관련한 이행의 위기를 설명할 수 있도록 중층적으로 구성된다. 시도 때도 없이 공황과 위기, 붕괴만 주장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경제 정세와 정치 정세 분석의 무능력을 표현할 뿐이다. 당면한 국면이 경기 순환상의 어떤 국면인지, 장기 발전상에서는 어떤 단계인지, 경기 순환적으로 또 중장기적으로 어떤 국면으로의 변화가 전망되는지, 자본주의 이행이 정치적으로 현질적으로 임박했는지 여하를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1) 주기적 공황과 구조 위기의 혼란

 

김수행 : 세계대공황은 자본주의적 축적 양식의 변화를 포함하는, 특별하고 드물며 구체적인 공황 국면. 1930~1938년, 1974~1982년, 2008~현재 세 시기로 국한

=>1930~1938년은 1974~1982년과 마찬가지로 주기적 공황을 포함한 하나의 산업순환이며, 각각 구조 위기 국면을 구성하는 특정 시기. 제2차 구조위기는 1930년으로부터 제2차 대전 기간을 포함하고, 제3차 구조 위기는 1970~1980년대 혹은 1970/1974년 이래 현재에 이르는 시기. 제1차는 1873~1895년 대불황. 지난 위기를 자본주의 축적 체제가 변모한다는 의미에서의 구조위기(자본주의 역사상 제4차 위기)로 규정하기는 어려움.

 

윤소영 : 1969~70년은 순환적 위기, 1973~75년은 구조적 위기, 1980년은 순환적 위기, 1981~82년은 구조적 위기, 1990~91년은 순환적 위기.

=> 이윤율 추세선이 하락할 때 이윤율이 하락하면 구조위기라는 주장은 근거 없음. 이는 10년 주기 반복되는 마르크스의 공황론을 부정하는 것. 1973~75년 위기, 1980~82년 위기 모두 순환적 위기. 현대 구조 위기란 1970~80년대 이래의 자본주의의 장기 침체.

 

박승호, 뒤메닐/레비는 각각 4차 구조 위기, 4개의 구조위기를 말함. 4차 구조 위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축적 체제의 등장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하 장기 번영도 전제하지 않으면 안됨. 성장이 계속 둔화하고 있다면 제3차 구조 위기 지속임. 박승호는 1982~2007년까지의 신자유주의 팽창기를 주장하는 데이비드 맥널리에 기대면서 만성적 위기론과 구별. 다카다 타쿠요시에 따르면 2008년 금융위기를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위기와 관련하여 어떤 맥락에서 파악하는가를 둘러싸고 두 개의 견해가 있다고 함. 두 개의 위기를 밀접하게 연관된 연속된 위기로 포착하는 것, 두 개의 상이한 순환의 종결 국면으로 파악하는 것.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케인스주의의 위기를 극복해서 장기 성장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음.

 

2)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과 주기적 공황 그리고 구조 위기의 관계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는 장기적 축적 둔화를 설명할 뿐이고 직접적으로 주기적 공황이나 금융 위기를 설명하는 게 아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금융 위기 간에도 양자를 매개하는 이론적 고리들이 설명되어야 한다. 장기 위기는 ‘생산 가격=시장 가격’의 전체 위에서 구성된 (생산 가격)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에서 비롯되는 것인 반면, 주기적 공황은 현실 경쟁과 불균형, 과잉 생산에 따른 시장 가격 이윤율의 하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윤율 장기적 저하의 원인을 과잉 설비, 과잉 생산으로 파악하는 것(브레너)은 이윤율 경향적 저하 법칙이 시장 문제를 추상한 전제 위에서 구성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윤율 경향적 저하법칙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잉여가치율의 변화 등이 이윤율에 미치는 장기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3) 마르크스의 붕괴론, 마르크스주의 붕괴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생산양식의 발생, 발전, 소멸이라는 역사 유물론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은 자본주의의 체제의 위기와 붕괴론의 토대를 이룬다. 궁극적으로 이윤율 저하가 관철되는가 여하가 자본주의의 붕괴 여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 법칙의 핵심은 저하 경향이 관철되는 국면은 자본주의의 장기 위기를 가져오고, 이 국면에서 체제의 존망과 재편을 둘러싸고 정치, 경제, 사회적 대변혁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 붕괴 논쟁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 아니라 주로 공황과 재생산 표식에 근거해 전개되었다. 자본주의 붕괴 논쟁의 토대로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에 주목한 것은 1929년 그로스만의 공헌이지만, 정작 그로스만 자신도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에 근거해 자본주의의 붕괴를 논증한 것은 아니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의 관철과, 그에 따른 구조 위기와 자본주의 단계 이행에 따라 자본주의 붕괴는 보다 구체적인 범주에서 포착할 수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점자본주의 단계로의 이행과 제2차 대전 이후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성장 전화와 함께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로의 이행 단계로 들어섰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케인스주의 형태로부터 신자유주의 형태로 전환했다. 현대 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것, 이행기의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라는 규정은 여전히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언제 붕괴하는가를 예측할 수는 없다. 로지스틱 축적 모델이나 그로스만 모델로 자본주의의 종말론을 펴는 것은 과학적 이론이 아니다.

 

4. 맺음말

 

2015년 12월 미 연준이 기준 금리 인상을 시작한 건 미국 경제가 호황 국면에 진입했다는 것의 표현이다. 금융 위기와 채무 위기의 후유증이라는 제약 조건으로 현재의 순환이 통상적인 순환처럼 호황다운 호황 국면을 맞이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미국 경제가 설령 본격적인 호황으로 발전한다 해도 근원적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건 아니다. 현재의 경기 국면을 감안하면 새로운 세계 공황은 2018년쯤으로 예상할 수 있다. ‘실물 부문 축적 둔화-금융 부문 팽창과 투기-금융 위기’라는 신자유주의에 고유한 위기 메커니즘은 앞으로도 작동될 전망이다. 이제는 국가 채무 위기를 배경으로 신자유주의 위기 메커니즘이 작용할 것이므로 자본주의 구조위기는 이전보다 심화되었다. 그래도 현재의 자본주의는 아직 최종적 위기를 말하기에는 대처할 수 있는 여러 개입 수단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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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 교수는 2007/2009 경제위기를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첫째, 7-10년 주기로 발발하는 주기적 과잉생산 공황, 둘째, 신자유주의에 특유한 금융 위기라는 구조적 성격의 위기와 결합, 셋째, 자본주의의 구조 위기 또는 장기 불황에 관한 이론, 넷째,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매개, 다섯째, 이 위기가 새로운 회국 국면으로 넘어갈 것이며 위기에 대한 국가 개입은 신자유주의 재편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지속을 전망.

 

2. ‘주기적 공황’과 ‘구조적 위기’의 구별

 

김성구 교수는 주기적 공황과 구조적 위기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고 있다.

(1) 주기적 공황은 10년 주기의 산업 순환의 일 국면으로서 마이너스 성장을 동반하는 축소 재생산 국면인 반면, 구조적 위기는 2-3개의 특별히 심각한 산업 순환이 진행하는 국면, 즉 장기 성장의 둔화 또는 정체 국면

(2) 주기적 공황은 또 다른 산업 순환을 인도, 구조적 위기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또는 국면을 인도

(3) 주기적 공황은 과잉 생산 공황, 구조적 위기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즉 과잉 축적으로 인해 발생하며 주기성을 확인할 수 없음

(4) 구조적 위기는 주기적 과잉 생산 공황의 반복 속에서 모순이 심화된 결과로 발생. 주기적 공황을 통해 자본 축적의 모순이 해결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구조 위기 발생.

(8) 실현의 곤란으로 공황을 맞게 되지만 공황을 통해 이 모순을 해결하고, 장기 성장의 모순과 한계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에서 표현되고 구조적 위기로 표출.

 

주장의 핵심은, 주기적 공황은 과잉 생산에 의해 발생하고 공황을 통해 제거되지만, 구조적 위기는 일반적 이윤율의 저하에 의해 발생하므로 구조 재편이 필요하고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열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구조적 위기가 “주기적 과잉 생산 공황의 반복 속에서 모순이 심화된 결과로 발생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TRPF 법칙이 주기적 공황을 설명할 수 없고 구조적 위기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TRPF 법칙은 일반적 이윤율이 선험적으로 하락한다고 예측하고 있지 않다. 자본론 제3권 제3편 제15장은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 사이의 모순, 자본의 집적/집중과 새로운 독립 자본 형성 사이의 모순, 생산 확대와 가치 증식 사이의 충돌, 과잉 인구와 나란히 존재하는 과잉 자본 등 일반적 이윤율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TRPF 법칙은 공황 요인도 지적하고 있다.

 

3. 케인스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김성구 교수는 자본주의의 일반 이론, 독점자본주의론,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라는 중층적 이론 구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이행 과정에서 일정한 단계적 발전을 거쳐야 한다는 ‘단계 이론’과 결부되어 있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생산의 무정부성을 완화하면서 계획성을 도입하는 경향’에서 파악하는 방법과 비슷하다. 이 공식은 새로운 사회를 ‘계획경제’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며,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관점은 무시되고 있다.

 

김성구 교수는 자본주의의 단계적 성장 전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경쟁자본주의로부터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가져온 제1차 구조위기가 일반적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에 비롯된 것이었다면, 독점자본주의로부터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성장 전화를 가져온 제2차 구조 위기는 한편에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 다른 한편에서 독점자본주의의 만성적 정체 경향이 단독으로 또는 함께 작용한 결과. 이러한 연장선에서 파악하면 제3차 구조위기는 한편에서 일반적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다른 한편에서 독점자본주의의 만성적 정체 경향, 또 다른 한편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에 고유한 재생산의 조절 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199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는 시기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로서 파악. 이전 체제들의 구조 위기와 달리 이 체제 자체의 성립과 함께 시작된, 이 체제 자체의 구조화된 위기.

 

김성구 교수는 ‘제3차’ 구조 위기는 케인스주의적 형태로부터 신자유주의적 형태로 변형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이야기 한다.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라고 못 박아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단계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현재의’ 자본주의에서 자유 경쟁, 독점적 경쟁, 국가와 독점 자본의 유착 등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고찰하는 것이 더욱 큰 분석적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김성구 교수는 케인스주의를 대신하여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윤율 저하와 구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평균 이윤율의 회복과 새로운 조절 체계의 확립이 필요. 새로운 조절 체계는 케인스주의보다 더 사회화된 형태여야 했음. 그런데 이런 조절 체계는 평균 이윤율을 더욱 저하시킬 것이므로, 평균 이윤율을 회복시키기 위해 “케인스주의라는 제한된 국가 규제와 사회화마저 해체시켰고, 노동시장․자본시장․금융시장의 전면적 자유화를 추진했으며, 이를 세계 시장의 개방과 자유화에 결합.”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국가 개입주의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었고, 다만 국가 개입주의의 한 변종을 다른 변종으로 변화시켰음.

 

4. 신자유주의적 위기를 해결하는 방안

 

김성구 교수는 “마르크스주의 위기론은 주기적 공황과 구조 위기, 그리고 체제 이행의 분석을 포괄하는 것이며, 실로 그 중층적 연관하에서 현실의 경제 위기를 분석한다”고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김성구 교수는 현재의 위기에 대한 좌파의 대안이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에 의해 뒷받침되지는 못하지만, 대안은 여전히 사회운동과 정치 운동을 동원하는 주요한 요소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하는데, 대체로 수용할 수 있다.

첫째, 단기적으로는 경기 안정화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재정과 금융의 확장 정책이다.

둘째, 중장기적으로는 은행의 사회화와 금융 개혁이 요구된다. 금융 개혁은 은행을 본래의 신용 기관의 기능에 전념하게 하는 것으로 투자 은행 업무를 대폭 축소하고 이익 추구 구조를 해체해야 하며 공공의 신용평가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

셋째, 사회 서비스의 사유화, 민영화는 중지되어야 한다.

넷째, 외환 거래세를 비롯하여 금융 거래에 대한 과세, 조세 피난처의 폐쇄, 금융 감독에서 국제적 협력의 증대, 국제적인 고정 환율제도 또는 목표 환율제도의 확립도 필요하다.

 

5. 맺음말

 

김성구 교수는 현재의 주기적 공황과 구조적 위기를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케인스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전 단계 이론과 일반 이론 사이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으며,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최종 단계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2017/08/08 22:21 2017/08/08 22:21

문명이 낯선 인간

진화는 환경에 적응한 개체의 특성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과정을 일컫는다. 많은 오해와는 달리, 진화에 특정한 목적이나 방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진 환경에서 번식에 성공하며 생존하기에 적합하느냐, 적합하지 않느냐가 유일한 질문이다. 인간을 적응에 성공한 종으로 평가하려 한다면, 반드시 지금 현재 지구의 기후, 생태 등 여러 조건에서만 그러하다는 단서를 달아야 한다. 현생인류가 분기한지는 고작 4만 년이 지났고, 진화의 전체 역사에 비교해 볼 때 인류의 역사는 한없이 짧다. 머지 않은 시간(그렇다해도 역사시대보다는 길수도 있다)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어떤 변화가 발생할 지 예측할 수 없으며, 인류의 적응이 이런 환경변화까지 예비하고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환경에 적응한다고 표현할 때, 이 환경에는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변화까지 포함된다. 현생인류는 지구의 환경에 의해 자연선택의 압력을 받아 진화해온 결과이지만, 동시에 인류는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변화된 환경은 인류를 비롯한 지구 상 여러 종들의 자연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문명이 낯선 인간'은 어긋남(미스매치)으로 설명.
- 진화의 과정에서 선택되는 것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한 '표현형'인 게 아니라, 환경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 즉 가소성일 수 있다
- 본성:양육이라는 오래된 논쟁 : 본성과 양육으로 전환해야. 많은 유전적 차이는 환경과 결부되어야 드러날 수 있음. 실상 제한된 환경 조건 안에서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유전적 차이가 더 많을 것. 이는 진화 과정의 부산물과 연관. 굴드는 삼각소간을 예로들며 뜻하지 않은 부산물이 적응에 도움을 주는 사례가 있음을 설명. 인간의 뇌 또한 삼각소간일 수도 있음. 지금은 쓸모 없어 보이는 부산물들이 특정 환경에서는 역할을 할 수도.
- 환경의 문제. 가깝게는 인간이 개, 고양이 등 가축의 진화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음. 인간의 인위적인 선택? 인간 자체가 진화의 산물이고,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또한 자연선택.



 

문명이 낯선 인간 1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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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매우 극단적인 환경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적응능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고, 환경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살려고 시도한다면 값을 치러야 한다. ‘설계’와 잘 맞물리는 환경에 있을 때 종은 번성하고, 환경과 생물학적 설계가 어긋날수록 비용도 커진다. 이렇게 생물의 삶을 어긋남의 틀로 바라보는 것을 이 책에서는 ‘미스매치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이 책의 가장 큰 주제는 초기 발생 과정에서 노출되는 환경이 장기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생 과정에서 환경 신호들에 응답하여 미래를 대비하는 것을 ‘예측’이라고 일컫는다. 잘못된 예측은 부적절한 전략으로 이어진다. 이런 맞물림과 어긋남을 다루는 학문이 생태발생생물학, 즉 이코디보라는 새로운 과학 영역이다.

생물은 어느정도는 자연선택에 의해 환경에 적응한다. 자연선택은 ‘형질’이라고 불리는 특질의 변이들 사이에 선택이 일어남으로써 생물이 진화하는 과정이다. 특정 환경에서 생물학적으로 유리한 특질들을 발현시키는 유전자들은 다음 세대로 전달될 확률이 높다. 따라서 한 개체군 내의 유전자 구성(유전자 풀)에서 유전적 변이의 양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고, 종의 특질들은 서서히 환경과 맞물리는 쪽으로 가다듬어진다. 그런데 한 생애 내에서도 환경은 각 개체의 유전자들이 꺼지고 켜지는 데 영향을 미친다. 특히 발생 과정(가소성이 있는 배, 태아, 유아 단계)에서 환경의 영향은 특질들이 어떻게 발생하는 가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 결과는 영구적이다. 우리는 발생 중의 환경에 반응하는 특정한 방식들을 갖추도록 진화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잘 맞물리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고,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어긋남의 틀, ‘미스매치 패러다임’은 지금의 우리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1부 맞물림에서 어긋남으로

생물학자들이 생물의 생애가 성공적이었는지 평가하는 기준은 그들의 자손이 무사히 살아남아 번식에 성공했느냐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번식에서의 성공을 ‘적응도’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진화생물학의 기본 원리는 개체군 내에 존재하는 형질 변이를 바탕으로 진화가 일어난다는 것이고, 이 차이는 생존과 번식에서의 차등적인 성공으로 이어진다. 모든 새끼가 번식기까지 살아남는 종은 없고, 바다거북의 경우 1만 마리 중 오직 1마리만이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것으로 추정된다. 갓 태어난 개체가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 확률이 25%가 넘는 종은 인간과 고래, 몇몇 다른 대형 포유류들 뿐이다.

종의 형질들 ‘대부분’은 종이 진화할 때 각 세대에 걸쳐 종의 모든 구성원에게 일어나는 맞물림 과정이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형질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어떤 특질들은 개체들에게 이익도 불이익도 주지 않는 돌연변이의 결과로 우연히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조가비들은 일생 동안 진흙 속에 파뭍혀 사는데도 선명한 색조를 띤다. 이 경우 선명한 색조는 중립적인 특질로 볼 수 있다. 수컷이든 암컷이든 섹스의 성공에 기여하는 특질들 중 다수는 목숨을 부지하거나 포식자를 물리치는 일들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

생물학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적응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어떤 특질들은 관계없는 다른 적응의 우연한 부산물로 생겨날 수 있다.

'유전자형'은 크고 작은 모든 돌연변이를 포함해 한 생물이 지닌 유전자들의 전체 구성을 뜻한다. 한 종의 모든 개체는 매우 비슷한 유전자형을 갖고 있지만, 이 유전자형 내의 각각의 유전자는 개체마다 약간씩 다를 수 있다. DNA를 복제하고 유지 관리하는 생화학적 과정들이 그리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염기서열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 오류가 정자와 난자에서 일어나면 이 오류들은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다. 이런 오류를 '돌연변이'라고 부른다. 어떤 돌연변이들은 현저한 영향이 없고, 어떤 돌연변이들은 개체에 큰 결과를 초래한다.

'표현형'은 '유전자형'이 그 생물의 실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이른다. 그런데 특정 유전자형이 딱 한 가지 표현형으로만 발현되지는 않는다. 많은 생물들은 발생 도중에 일어나는 일군의 상호작용들이 한 개체의 표현형 뿐 아니라 적응도와 생존을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과정들을 '발생가소성'이라고 부른다.

개체의 유전자들은 표현형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 과정에서 표현형이 환경과 조응하도록 도구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은 유전자형을 지닌 생물들조차 환경의 영향에 따라 일부 표현형 특질이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자연선택은 표현형(겉모습, 구조, 기능 등)에 존재하는 변이를 바탕으로 일어나지만, 이 차이는 어느 정도는 그런 표현형들을 만드는 유전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변이가 없다면 자연선택도 존재할 수 없다. 변이 때문에 후대로 가면서 한 개체군의 유전자 풀이 변할 수 있다. 만일 유전체에 일어난 변화의 정도가 너무 커서 개체들이 더 이상 애초의 시조 계통이나 후손 개체군들과 교배를 할 수 없을 정도이면 새로운 종이 생겼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종 분화의 기본 개념이다.

모든 종에는 숨겨진 유전자형의 변이가 많이 있는데, 이런 ‘침묵하는’ 유전자들은 특정한 상황에 놓이는 경우에만 표현형의 변이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예컨대 사막메뚜기(Schistocerca gregaria)는 이용할 수 있는 먹이가 풍부하면 한 지역에 머무르고, 개체군의 밀도가 높고 먹이가 풍부하지 않으면 이주형이 된다. 이주형은 단서형과 서로 다른 종으로 보일만큼 겉모습이 매우 다르다. 이런 표현형 선택에 영향을 주는 신호는 발생과정에 어미로부터 온다. 어미는 알을 둘러싸고 있는 점액질 차단막에 개체군 밀도에 관한 화학 신호를 분비하고, 메뚜기들은 다른 메뚜기들이 보내는 화학 신호와 촉각 신호에도 영향을 받는다. 두가지 표현형은 모두 유전체의 유전 정보 안에 들어있지만, 먹이 공급 상태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
러시아 유전학자 벨라예프는 러시아은여우를 연구했다. 러시아은여우는 야생에서 은빛 털색을 갖는다. 일부 은여우들은 다른 은여우들에 비해 더 고분고분했는데, 그는 한 집단의 여우들을 고분고분함의 수준에 따라 분류하고 가장 고분고분한 개체들끼리만 교배시켰다. 8세대에 걸친 인위선택의 결과, 여우들은 애완견 같은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이들은 구부러진 꼬리를  갖고 태어나 그것을 흔들었고, 심지어 흑백 얼룩 같은 털색 패턴을 발달시키기까지 했다. 즉 유전체에 있는 것이 틀림없지만 표현형으로 발현되지 않고 있던 유전자들이 겉으로 드러났다.

인간 역시 환경이 크게 달라지면, 현재 인간 유전자 풀에서 예상 밖의 표현형이 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전자형과 표현형이 1:1로 대응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종은 진화적으로 결정된 생존 전략들을 갖고 있다. 어떻게 성장하는가, 언제 어떻게 번식하는가, 얼마나 오래 사는가 같은 생애과정의 핵심 요소들을 ‘생활사 전략’이라고 부른다. 태평양 연어 수컷은 알래스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짝짓기 경쟁을 하고 나서 죽는다. 사마귀 수컷은 교미가 끝나면 자기 짝에게 잡아먹힌다. 아귀의 한 종류는 몸집이 더 큰 암컷에게 잡아먹힘으로써 암컷의 몸에서 피를 섭취하고, 적절한 시기에 정자를 뿌리는 기생하는 고환으로 살아가게 된다.

포유류 암컷들은 새끼들이 독립생활을 할 때까지 새끼를 길러야 한다. 새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독립할 때까지 사냥하는 법과 먹이 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따라서 포유류 암컷의 궁극적 성공은 새끼가 얼마나 많은가, 이들을 얼마나 잘 먹이는가, 얼마나 많은 새끼가 성체에 이르는가, 이 새끼들이 짝짓기에서 얼마나 성공하는가에 달려있다. 더 오래 살면 암컷은 분명 여러 차례 임신을 할 수 있을 테니 살아남는 새끼의 수가 많아질 것이다.

영장류에는 모든 사회적 가능성과 관계가 존재한다. 오랑우탄은 홀로 생활하는 종이다. 성체는 자기 고유의 영역을 갖고, 수컷과 암컷은 짝짓기할 때만 함께한다. 비비는 여러 마리의 암수 성체와 그들의 새끼들이 큰 집단을 이루고 여러 마리의 수컷이 일부다처제를 행한다. 침팬지도 여러 마리의 암수가 집단을 이루고 산다. 짝짓기 패턴은 다양한데, 침팬지 암컷들은 여러 수컷들과 짝짓기를 하는 듯하다. 아마 누가 아비인지 헷갈리게 함으로써 새끼 살해를 막는 전략일 것이다. 긴팔원숭이는 성체 수컷과 암컷이 새끼들을 부양하며 장기적인 짝결합을 이루는 일부일처제를 행한다. 고릴라는 한 마리의 우두머리 수컷, 서열이 낮은 수컷 몇 마리, 많은 암컷과 그 새끼들로 구성되는 일부다처제 집단을 이룬다. 마모셋원숭이는 한 마리의 성체 암컷이 자신의 새끼들과, 자신과 짝짓기하는 여러 성체 수컷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일처다부제를 행한다. 이런 상황에서 수컷들은 새끼들이 자기 자식인지 알 수 없지만,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암컷과 새끼를 부양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장기적인 짝결합을 이루는 일부일처제를 행한다. 하지만 영장류 동료들이 채택하는 전략들의 대부분을 금방 찾아낼 수 있기도 하다.

인간의 생활사 전략은 한 번에 한 명의 자식을 낳는 것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상적인 전략은 자식을 오랜 기간 키우는 것과, 자식에게 공동으로 투자하는 양친이 안정된 짝결합을 맺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 특히 모친이 막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오래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전쟁과 종 내 폭력 등 종 내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환경에서 진화했는데, 사회생물학자들은 이런 위협을 줄이기 위해 이타주의 같은 행동이라든지 도덕감각과 윤리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이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는 입장이다.

‘본성 대 양육’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인위적인 이분법적 개념이다. 본성을 유전자로 등치시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를들어 단풍나무시럽병은 아미노산의 대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유전자 결함 때문에 생긴다. 이 질환은 치료하지 않으면 뇌 손상과 사망으로 이어지지만, 문제가 되는 아미노산들을 뺀 음식만을 먹이면 아기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다.(문제가 되는 아미노산이 없는 식이를 하는 환경이라면 단풍나무시럽병이 발병하지 않는 것.) 이 병은 유전 질환인 동시에 환경 질환이기도 하다. 모든 생물은 두 요인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에 의존한다. 환경은 DNA의 화학 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유전자의 발현 여부와 발현 정도를 바꾸는 것이다. 이 효과는 일생 동안 지속될 수 있다.(후성유전적 변화)‘본성 대 양육’이 아니라 ‘본성과 양육’으로 접근해야 하고 ‘발생’ 같은 전일적인 개념에 주목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미분화된 수정란이 성체의 특질들을 모두 갖춘 성숙한 유기체로 분화하는 방법을 어떻게 아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이 얼마만큼이나 유전적으로 결정되는지, 환경의 영향이 발생 경로를 얼마만큼이나 바꿀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러시아의 이반 이바노비치 슈말하우젠과 영국의 콘래드 워딩턴이 실험적,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지만, 그들의 개념들은 유전체 지식이 폭발하면서 거의 묻혀버렸다. 유전체 혁명이 일어나면서 발생 초기의 유전자들을 조사하는 다양한 방법이 발견됐고, 발생생물학은 발생을 순수한 유전 프로그램으로 보고 초점을 맞추었다. 진화론, 유전학, 발생생물학, 생태학이 합쳐진 새롭고 통합적인 이해가 출현한 것은 몇 년 지나지 않았다.

많은 경우 선택이 작용하는 대상은 특질 그 자체가 아니라 환경에 반응하여 변할 수 있는 능력, 즉 생물의 적응 능력(가소성)이다. 슈말하우젠, 워딩턴 등 학자들은 이 대목을 강조했다. 선택이 적응 능력에 작용한다는 이 개념은 ‘안락 지대’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안락 지대란, 한 생물이 적응할 수 있고 여전히 번식 적응도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 범위를 말한다.

호랑뱀은 오스트레일리아와 인근 섬에 서식하는 파충류로 턱에 일종의 이중 경첩이 있어서 작은 포유류, 알, 새 들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다. 어떤 호랑뱀은 큰 턱을 지니고 있고 어떤 호랑뱀은 작은 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큰 덕과 작은 턱 돌연변이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산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들이 호랑뱀의 서로 다른 유전 계통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최근 실험 결과들에 따르면, 초기 환경이 턱 크기에 영향을 미친다. 턱이 작은 호랑뱀 개체군의 새끼들에게 큰 먹이를 주면 자라면서 턱이 커진다. 앞으로 연구가 더 이루어지면 턱 성장의 속도와 크기를 결정하는 유전자가 밝혀질 수도 있고, 환경에 의해 유발된 DNA 구조상의 후성유전적 변화들이 이런 결과를 낳는 것으로 밝혀질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진화는 호랑뱀이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호랑뱀 유전체를 선택했다.

인간의 역사에도 비슷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부정교합은 아래턱이 위턱과 모양과 비율이 맞지 않을 때 생기는 문제다. 이 문제는 인간 집단에서 비교적 새롭게 생겨난 현상이다. 17세기까지는 골격에서 이 문제를 찾아볼 수 없다. 그 이후에는 유입되는 이주자들에 의한 변화가 없었던, 유전적으로 안정된 집단들에서도 이 문제가 나타난다. 이 사실에서 부정교합의 출현이 새로운 유전적 돌연변이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정교합의 출현은 갓난아이의 음식이 거친 물질에서 현대의 유아식과 같은 부드러운 물질로 바뀌었기 때문인 듯하다.

‘가소성’은 형태와 구조의 유연성을 이르는 생물학 용어다. 어떤 조직들은 일생 동안 가소성을 유지한다.(예-근육의 크기) 하지만 심장에 있는 근섬유의 수는 태아 단계에 결정되고 그 이후로는 바뀌지 않는다. 생애 초기의 중요한 시기 동안에만 나타나는 유연성을 ‘발생가소성’이라고 한다. 발생가소성 덕분에 같은 구조들이 서로 다르게 발달할 수 있고, 생물이 발생 도중에 감지하는 환경에 따라 후성유전적 수단에 의해 유전자 발현이 조정될 수 있다. 몇몇 종들에서는 유전적으로는 동일한 같은 생물이면서도 형태가 전혀 다른 개체들이 생겨날 수 있다. 이것을 ‘다형성’이라고 부른다.

꿀벌은 일벌과 여왕벌이 같은 유전적 계통에서 나오고 둘 다 암컷이지만, 한 개체가 어떤 유형의 성체 벌이 되는가는 유충일 때 뭘 먹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들은 발생 과정에서 탄력적으로 유도되기 때문에 해마다 환경 변화에 부응하여 여왕벌과 일벌의 수를 변경할 수 있다. 쟁기발두꺼비는 뜨겁고 건조한 지역에서 살아간다. 쟁기발두꺼비들은 일시적으로 생성되는 연못에서 번식을 하고, 한 해의 나머지 기간은 특수하게 적응된 뒷다리로 고랑을 파서 뜨거운 낮의 열기를 이겨낸다. 두 종의 쟁기발두꺼비가 애리조나 치와와 사막의 똑같은 연못에 산다. 이들은 발생하면서 육식성 혹은 잡식성에 더 적합한 구기를 발달시키는데, 전자는 서로를 잡아먹기 위한 것이고, 후자는 연못 속의 유기물 쓰레기를 먹기 위한 것이다. 높은 개체군 밀도 같은 스트레스 상황에 처할 때 한 종은 육식성 형태가 우선적으로 유도되고, 다른 종은 그 반대다. 이것은 두 종 모두에게 효과적인 상호 생존 전략이 된다.

따라서 선택되는 것은 단지 겉모습만이 아니다. 적응 능력, 발생 중에 환경 변화에 반응하여 가소성을 보일 수 있는 능력 역시 선택된다. 환경이 안정되어 있거나, 혹은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변하는 한(예를 들면 계절에 따른 변화), 선택 과정들은 한 개체군의 개체들이 지닌 표현형과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 사이의 빈틈없는 맞물림을 꾀한다. 검은머리물떼새는 모래를 헤집기에 알맞은 길고 날카로운 부리를 갖고 있고, 독수리는 시체에서 고기를 뜯어내기 좋은 무디고 단단한 부리를 갖고 있다. 갈라파고스핀치들의 서로 다른 종과 아종들은 그들이 먹는 서로 다른 유형의 나무열매 및 씨와 딱 맞는 서로 다른 부리 모양을 하고 있다.

슈말하우젠과 워딩턴이 제기한 근본적인 쟁점들은 아직 현 생물학에 완전하게 통합되지 않았으며, 표현형 형질에 대한 선택과, 결국에는 표현형의 변화로 이어지는 환경 도전에 적응하는 능력에 대한 선택이 어떻게 다른지 우리는 모른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토끼들은 모두 과거 18세기에 영국에서 이주해온 초기 정착민들의 식량원으로 풀어놓은 단 하나의 혈통에서 유래했다. 이 토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 퍼졌는데, 북부의 토끼들은 남부의 토끼들보다 귀가 더 길다. 이 차이는 합리적은 적응으로 볼 수 있는데, 귀는 열을 방출하는 좋은 수단이라서 더 긴 귀는 더 뜨거운 기후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과연 토끼들이 북부로 이주했을 때 긴 귀 유전자를 지닌 토끼들이 더 잘 살아남았던 것일까, 아니면 따뜻하면 더 긴 귀를 발생시키고 추우면 더 짧은 귀를 발생시키는 발생가소성을 통해 적응 능력을 부여하는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었을까? 자연선택은 어떤 상황에서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에도 일어날 수 있지만, 무엇이 선택되고 있는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귀가 긴 토끼들을 남부로, 귀가 짧은 토끼들을 북부로 데려가서 그 자손들의 귀 길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조사해봐야 한다.

생물이 환경에 잘 적응할수록 생물의 삶은 그 환경에 구속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많은 생물들이 매우 특수한 생태적 지위에서 살도록 진화했다. 환경과 생물이 빈틈없이 맞물려 있어서 매우 좁은 환경 범위에서만 번성할 수 있는 종을 ‘특수주의자’라고 이른다. 그 종은 환경의 작은 변화들에는 대응할 수 있지만, 예기치 못한 큰 변화가 일어나면 재앙을 맞을 수 있다. 반면 매우 광범위한 환경에서 어떤 식으로든 살 수 있는 생물들이 있다. 우리 인간은 그런 생물들을 흔히 유해생물로 생각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예가 바퀴벌레와 쥐다. 하지만 ‘일반주의자’ 종의 최고봉은 뭐니 뭐니 해도 호모 사피엔스다. 인간은 안데스 산맥, 사해 근처, 열대우림과 사막에서도 살아간다. 뉴욕의 고층 건물 대 몽골의 유르트보다 더 서로 다른 환경을 상상할 수 있을까?

‘환경’은 물리적 환경(습한 곳, 건조한 곳, 더운 곳, 추운 곳, 고위도, 저위도, 산, 평야 등) 뿐 아니라, 광범위한 유기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도 환경이다. 예를 들면, 이용할 수 있는 먹이의 유형, 포식자의 유형과 수, 다른 종들과의 경쟁, 인구밀도, 사회구조, 배우자를 찾는 능력, 기생충 적재량 등이 있다.

인간 같은 일반주의자 종은 광범위한 환경에 적응하거나 대처하는 전반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만, 특수주의자 종만큼 특정 환경에 대한 준비를 잘 갖추고 있지는 않다. 한 환경에서 ‘번성’하는 것과 그 환경에서 ‘생존’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팬더는 런던동물원에서 살 수는 있지만, 중국의 대나무 숲에서만큼 번성하지는 못한다. 북극곰은 온대지에서 살 수는 있지만 번성하지는 못한다. 일반주의자 종 인간은 히말라야 산맥 4,200미터 고도에서 일할 수는 있지만 그 환경이 쾌적하다고는 못한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산의 비탈을 힘겹게 오르는 등반객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면 인도기러기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에게 성공적으로 사는 것의 의미는 다른 종에서와 마찬가지로 환경과 잘 맞물리는 것이다. 인간이 물리적 환경을 다루는 방식은 주로 그것을 변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하는 유일한 종은 아니다. 흰개미가 지은 흰개밋둑은 외부 온도의 큰 변동에서 내부 온도가 잘 유지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비버의 굴은 단열이 잘되어서 겨울에 따뜻한 집 역할을 한다. 

많은 환경 변화는 진화가 대처할 수 있는 것보다 짧은 기간에 일어난다. 생물은 변화에 최선을 다해 대처해야 한다. 생물이 환경에 자기 몸을 맞추는 것을 돕는 많은 구조적, 생리적 장치를 갖고 있을 수도 있다. 더 잘 맞는 환경으로 이주해야할 수도 있다. 혹은 환경을 바꾸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인간이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되어 있느냐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 전략들 각각을 차례로 살펴야 한다.

인간은 다양한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행동과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안락지대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잠재적 비용은 올라간다. 환경 변화가 생물을 안락지대 밖으로 내몰 경우, 생물이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한 종류의 방식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환경을 바꾸는 가장 분명한 방식은 이주하는 것이다. 인간은 뛰어난 이주자들이다. 인간의 이주는 대부분 환경 변화 때문이었다. 폴리네시아인의 대이주도 주로 인구 과밀과 제한된 식량 공급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움직이지 않고도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기술 진보(불, 옷, 집, 사냥 도구)를 겪었다. 인간이 성공적인 일반주의자 종인 것은 상당부분 기술 혁신 능력 덕분이다. 인간이 환경을 다룬 또 하나의 방식은 우리가 가진 사회구조들과 관계가 있다. 이런 사회구조들은 농경이 도입됐을 때 극적으로 바뀌었는데, 농경을 하기 위해서는 정착 생활, 특수 기술의 발달, 다른 집단과의 무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환경이 지우는 부담이 종의 적응 능력을 능가하는 순간 멸종이 일어난다. 인간의 사냥으로 도도새는 발견된 지 83년 만에 멸종했다. 최근에 일어난 다른 많은 종의 멸망은 환경의 영향-세계의 모든 지역으로 인간이 퍼져나간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현재의 멸종 속도는 화석 기록에서 추산해낸 ‘자연적인’ 속도보다 약 천 배나 빠르다. 특수주의자 종은 다른 생태적 지위로 이동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주의는 내재적 위험, 혹은 감추어진 비용을 수반한다. 찰스 라이엘이 처음 제기한 점진론(동일과정설)은 다윈에게 환경 변화가 생물 집단들을 격리시키고 분기와 새로운 종의 기원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진화적 변화의 속도와 시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진화의 과정이 점진적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진화는 오랜 정체 상태 중간중간에 일어나는 급속한 변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인간도 다른 생물들처럼 환경과 더 이상 맞물리지 못할 때 멸종하지 않으려면 적응하거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비용은 많은 경우 질병으로 나타난다. 몸과 환경의 어긋남은 많은 질환의 주된 원인인데,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몸과 맞물리지 않는 환경(인간이 만든 일부 환경도 포함된다)에 사는 비용을 치르고 있다.

 

2015/07/06 00:40 2015/07/06 00:40

도쿄대학 불교학과 / 정상교

자꾸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글을 쓰게 되는데,

그만큼 재밌고 좋아서다.

할 일 없는 놈들이 밀짚모자 쓰고 수염 기르고는 세상 고민 전부 짊어진 것처럼 불교 한다고 지랄하더라. 그리고는 어디서 주워들은 쓰레기 같은 말들 가지고 장난만 치고... 그런 놈들이 '불교 하면', '중 되면' 나무 그늘에 붙어서 노래만 부르는 매미처럼 산다고 생각하고... 느리게 산다? 지랄들하고 자빠졌네. 그렇게 게으르게 살아가 도를 깨치겠나? 그런 소리 하는 놈들은 정신 차리게 뺨따귀나 몇 대 때리면 속이 다 시원하겠다. - p91-92

이런 구수한 입담이 계속 이어진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버려라, 버려라",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멈춰라", "일체유심조" 등등 이성을 포함 해 모든 걸 놓는 게(정확하게는 포기하는 게) 수련의 방편인 것처럼 소비되는 '구도' 상품들에 대한 비판이다. 이성을 직관의 반대말 쯤으로 여기는 풍토가 있는데, 엉뚱하게 짚은 거다.(MBTI에서는 직관-감각이 쌍이다.)

류시화를 비롯해 구도를 상품화시키는 일련의 무리들에 대해 불편함이 있었는데, 나의 불편함은 "깨달음의 길이라는 게 원래 그런건데, 나는 분별지를 버리지 못해 따라가지 못하는 건가"라는 자책과 의문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상교 씨는 불교가 철저한 논증에 기반한 '이성'과 누구가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경험'에 기반한 종교라고 설명한다. 제8식인 아라야식이라는 게 추상적으로 개풀 뜯어먹는 소리가 아니라, 수행을 통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식'의 하나라는 거다.

나에게도 학승을 선승보다 낮게 자리매기고, 돈오의 순간이 깨달음의 전부라고 멋대로 그려놓은 상이 있어왔다. 문제는 내가 그려놓은 그 상에, 나는 도무지 부합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건데, 언젠가부터 내가 부당한 대립쌍을 만든 것이라는 걸 깨닫기는 했지만, 마음 속 깊숙이 자리잡은 선입견을 지우는 게 여전히 쉽지 않다.

불교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내가 접하는 건 한국-중국 선불교 언저리일 뿐이었다. 불교의 역사, 갈라짐과 논쟁에 궁금한 게 많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풀리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입문서이고, 내 궁금증을 풀려면 어떤 책을 더 찾아서 읽어봐야할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는 의미다.

내가 막연히 인도철학-사상에 느끼던 불편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도 고민해보게 됐다. 따지고 보면 내가 처음 읽었던 불경, 금강경에서 느꼈던 감동은 내 멋대로 노장 식의 해석을 덧씌우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 땐 노장과 선불교를 구분해낼 수 없었고, 지금은 중국 불교가 노장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렇다해도 중국 불교와 인도불교, 티벳불교가 어떻게 다른지 접해볼 기회가 없었고 막연하다. 되짚어보면, 인도불교에서는 소승이 대세고, 중국-한국에서 대승불교의 꽃이 피었다는 식(대승이 소승보다 우월한 것)의 편견도 있었고, 티벳불교를 영성의 가르침 정도로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있었다. 이러니 무지는 죄악이다.

1차결집 부터 시작된 불경의 성립, 상좌부와 대중부의 갈라짐,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여러 학설, 중관불교, 유식불교 등 불교 학파의 차이 등등, 내 의식을 열어주는 이야기들이었다. 어떤 책을 읽든 매번 느끼는 바지만, 우리의 의식은 유한하여 아는 만큼만 생각할 수 있고, 여기에 경험이라는 재료가 없으면 생각은 몽상이 되기 십상이다.

나머지는 다 읽고나서 쓰련다.

도쿄대학 불교학과 - 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 공부
도쿄대학 불교학과 - 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 공부
정상교
동아시아, 2014

 

2014/06/29 10:06 2014/06/29 10:06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한 번, 두 번, 

세 번 쯤 다시 뒤적거리고서 전체 얼개가 얼추 맞춰지는 구성.

이런 구성이 좋은데, 아주 좋은데,

그냥 무협지나 읽고 싶은 마음상태일 땐, 좀 번거롭게 느껴지네 ㅋ

 

주제들이 연달아 너무 비슷한 거 아닌지 싶다.

이전 작에서도, 그 이전 작에서도,

관계에서 소통의 불가능성과 그것을 뛰어넘는 가능성으로서 사랑.

내가 보는 게 전부이진 않겠지만,

큰 줄기에서 그다지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순간은 가능하기도, 가능하지 않기도 한데,

김연수의 작품은 가능하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실상, 우리는 매 순간 이별하며 살아가는데.

 

이런 생각이 들지만, 어쨋든, 좋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자음과모음, 2012

 

2014/02/18 16:55 2014/02/18 16:55

마오쩌둥 실천론 모순론 / 프레시안북

슬라보예 지젝이 서문을 달았다. 슬라보예 지젝의 서문과, 마오쩌둥의 본문에 대해 각각 적어야할 것 같다.

 

슬라보예 지젝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되짚어보니 글 하나를 온전히 다 읽은 것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당췌 번역이 그런건지, 쓰는 말이 그런건지, 못알아들을 말이 많다.(이를테면 '마오쩌둥의 변증법은 이해, 즉 고정된 관념적 대립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말하자면 관념적 결정의 변증법적인 자기동일화를 형식화하지 못한 것이다.'-이게 무슨 말일까?)

 

 

  •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은 언제인가? 후기의 엥겔스가 역사적 유물론을 실증주의적 진화론으로 변질시켰을 때인가? 제2인터내셔널의 수정주의와 정통주의였는가? 레닌이었는가? 아니면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수십 년 전에 주장했듯) 젊은 시절의 인간주의를 저버린 만년의 마르크스 자신이었는가? [...]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은 이론의 여지 없이 애초부터 각인된 것이다(좀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원래의 모델을 오염시키고 타락을 일으킨 침입자를 찾는 행위는 반유대주의의 논리를 재생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는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를 가차없이 비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을 비판하고 그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두 번의 중요한 전치가 일어났는데 한 번은 마르크스에서 레닌, 그리고 한 번은 레닌에서 마오쩌둥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운동은 아시아적인 '근본적 낯섦'에 기반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이 보기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승리는 '자본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반세계화 운동은 오히려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을 '제국주의 비판으로 변형하려는 유혹'에 굴복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반자본주의'라는 기표는 전북의 힘을 잃었고, 오히려 민주주의(정치)를 문제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마오쩌둥이 상부구조를 주요모순으로 제기한 것을 유비시키는 듯하다.
 
이어서 지젝은 마오쩌둥이 변증법을 기각하며 '악무한' 개념에 사로잡힌다고 비판한다. 마오쩌둥이 보기에 모든 물질은 무한히 분열될 수 있고, 인간은 무한히 광대한 우주(시공간)안에 존재하는 보잘것 없는 존재일 뿐이다. 지젝은 마오쩌둥이 이런 사상이 중국의 인민들이 기근으로 굶어죽는데 일조했다고 본다. 그래서 홀로코스트는 '비이성적'이었지만, 마오쩌둥-스탈린의 공산주의는 '이성적'인 '죽음의 공업적 생산'이라고 묘사한다.
 
'악무한' 개념의 귀결은 '부정의 부정'을 거부하는데 이르는데, 이제 '종합'은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라 한 측면이 다른 측면에게 승리하는 것이다. 헤겔식의 '부정의 부정'은 낡은 질서가 스스로의 형식 내에서 부정되고, 다음으로 형식 자체의 부정된다. 반면 마오쩌둥은 '부정의 부정'이 진정한 부정인 것을 파악하지 못했고, 끝없는 부정/둘로의 분열/하위 구분의 '악무한'에 빠졌다.
 
그래서 지젝은 문화혁명이 무한한 '부정'에 불과했고, 스탈린의 숙청과 사실상 동일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문화혁명의 최종적인 결과는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역동성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자본주의는 시장의 자유로운 지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장애물로 인해 자유로운 지배가 제한될 때 발전하는데,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이런 역동성과 마오쩌둥 식의 영원한 자기혁명화, 영원한 투쟁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조적 상동성이 있다. 그렇다면, 끊임없는 자기혁명화를 원칙으로 하는 질서를 어떻게 혁명할 것인가? 지젝은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라는 마오쩌둥의 말을 가져오며 글을 마무리한다.
 
 
지젝은 형식논리로 역사를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형식마저 부정하는 '진정한' 혁명!, 선언하기는 쉽지만 구체적 현실에서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농민과 노동자의 갈등, 전민소유와 인민공사소유 사이에서의 진동을 극복하기 위해서 숱한 시행착오와 시간이 걸릴 것은 너무 당연하다. 다시 말해서 역사에는 구체적인 분석과 실천이 필요한데, 지젝은 논리에 갇혀 역사를 방기하는 것이지 않나 싶다.
 
또한 자본주의의 근본적 원리가 끊임없는 자기부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과 실천이 자본주의적 논리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을 하는데에는 유용할 수 있겠지만, 실제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지젝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선을 긋고 싶어하는 것은 알겠는데, 정말 긋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고작 '담대하라'라는 훈계라면, 이건 너무 허망하다. 우리는 겁이 많아서 세상을 바꾸지 못했던 것인가?

 

 

모순론/실천론 본문에 관해서는, 기억나는 걸 옮겨놓으면

 

6억을 다 죽일 수 있겠느냐는 배짱. 생태계가 진화의 과정에 있다는 마오쩌둥의 시각은 타당하다.(지젝은 서문에 이 부분을 동물도 의식을 갖게 될 것이라고 오독해서 옮겼다.) 다만 그곳에 사는 민족이 그 환경에 가장 적합한 민족이라는 인식은 재고해야할 것이다.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계획, 이전 실천에 대한 평가를 얘기한다. 일반적인 원칙보다는 매순간 정세에 따른 전술을 제출하자고 요구한다. 지식분자와 간부들이 현장으로 내려갈 것을 주문한다. 좌익맹동주의와 우익기회주의 양편향을 동시에 경계한다. 

 

낮은 단계의 인식은 감성적인 반면 높은 단계의 인식은 논리적/이성적이다. 높은 단계의 인식을 갖추면 진짜 세상을 볼 수 있다.

 

역시 눈에 띄는 것은 모순을 여러 층위로 나눈다는 것이다.

사물의 양측면을 모두 모순으로 설명하는 것이 좀 견강부회로 느껴진다. 아무튼 마오에게 적대적인 모순과 비적대적인 모순의 층위도 정세에 따라 변한다.

그러보고니 난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스탈린, 엥겔스의 글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다. 

 

 

 

마오쩌둥 : 실천론.모순론
마오쩌둥 : 실천론.모순론
마오쩌둥
프레시안북, 2009
2013/02/18 17:02 2013/02/18 1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