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에서 왕으로 / 나카자와 신이치

근 10년전에 읽었던 책, 문득 떠올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근래에 나카자와 신이치의 어떤 책을 읽으면서, 아스트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카자와 신이치에 대한 호감은 대단히 맹목적이었던 것 같다.

 

다윈의 대답2를 읽으면서, 신화가 인류의 장기적인 기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화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책을 훑었다.

 

먼저 요약하면

 

나카자와 신이치는 후기구석기를 지나면서 인간의 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 현재 인류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됐을 거라고 추측한다. 이 변화를 거치며 언어가 탄생하는데, 태초의 언어는 시나 음악과 같이 비유(은유, 환유)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최초의 의식은 시를 감상하듯이 세계를 이해했고, 세계는 '상징의 숲'이다. 

 

신화는 바로 이 '시'와 같은 차원에 있다. 저자는 세계를 비유와 상징으로 인식했던 것이 신화라고 바라본다. 신화시대에는 문화와 자연이 구분되어 있고, 문화 덕분에 인간은 욕망을 억누르고 절제된 행동을 한다. 이 때에는 문화와 자연 사이에 대칭성이 유지되고 있지만 자연의 힘을 흡수하면서 문화는 문명으로 변한다. 이제 문명에 미달하는 것을 야만으로 몰아부치지만, 실상 대칭성의 사회에서는 현재의 문명이야말로 야만이다.

 

털가죽을 뒤집어 쓰면 동물로도 사람으로도 변할 수 있는 세계에서는 사냥으로 식량을 얻더라도 선물 받은 것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 세계에 예리한 검, 총이 들어오면서 자연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이 비대칭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약자의 테러가 행해진다.

 

대칭성의 사회에서는 문화 안에 자연이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장벽을 두는데, 제의/식인은 이런 절차를 표현한다. 사회의 수장은 자연의 권력을 가진 샤먼, 전사와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 내부로 자연의 권력이 들어오게 되면서 수장을 대체하는 '왕'이 등장하고 국가가 만들어진다.

 

식인은 문화가 부여해주는 인간의 의미를 먹어치우는 것인데, 자아를 부정하는 불교의 공(空)은 그런 의미에서 엄청난 식인이다. 불교에는 국가와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있고,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윈의 대답2와 연관지어서 생각났던 게,

전업사냥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피식자의 개체수를 유지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점과 파트타임 농부가 등장한 뒤에는 수렵 이외의 다른 생존방법이 생겼기 때문에 더 잔혹한 포식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든 생각은, 결국 대칭성의 사고라는 것도 토대에 기반하지 않느냐는 거다. 곰을 과하게 사냥해서 절멸시킨다면, 인간도 죽는다. 소위 대칭성이 깨진 사건도 파트타임 농부의 출현에 대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새로이 자연의 권력을 획득했다기 보다, 그것을 제한할 필요가 없어진 인간의 살육. 

 

이렇게 보면, 나카자와 신이치가 대칭성의 사고를 회복하자고 주문을 외는 것은 대단히 허망하다. 대칭성의 사고가 깨진 것은 생존양식이 변한 데 따른 결과인 것이지, 원인이 아니다. 야만적인 사회를 바꾸기 위해 대칭성의 사고를 회복시켜야 겠다면, 사고의 전환이 아니라 토대의 전환을 도모해야하지 않을까.

 

결국 결과를 원인으로 두고 분석하는 꼴이다 싶은데, 이런 게 관념론의 한 형태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2/05/11 11:56 2012/05/11 11:56

희랍어 시간 _ 한강

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

하지만 그 꿈은 이토록 생생해,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다.

 

언어는 정점을 찍었을 때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을 갖는다.

하지만, 그 정교함이 완전한 전달을 보장하진 못한다.

세상은 희랍식 논증 방식으로 증명되지 않고, 삶은 매순간 성립 불가능한 오류.

 

말은 얼마나 불완전한지.

언어가 세계와 결합하는 회로는 아슬아슬하다.

 

술어가 주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희랍어의 중간태.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문장은,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 영향을 받아 변한다는 의미이기도.

 

언어 이전-

 

말이 사물과 대응하기 이전-

숱한 감각들.

그 모든 감각들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순간- 이데아.
 
하지만 말은 불가피한 매개이지 않을까.
...듣고 있나요? 
 
//
 
이런 정도 머리에 남는다.
보이지 않는 이와 말을 잃은 이가 만나려면?
 
한강 소설은 이게 처음.
 
2012/04/25 20:20 2012/04/25 20:20

화차

영화를 보기전에 소설을 읽었다.

 

음.. 재미있게 읽었다.

차근차근 접근해가는 게, 그리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

 

소설 전반에 대해서보다,

'신용'에 대해 좀 이런저런 생각들이 있었는데,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는 애초에 생산과 소비에 시차가 있기 때문에 미래의 팽창을 담보로 부채는 필연적이라고 설명한다.(자본주의를 끝장내기 위한 투표, http://blog.jinbo.net/neoscrum/524)

저 역자 블로그 말미에 달려있듯이, 부채의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하느냐는, 계급 역관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실물영역에서 이윤율 저하 때문에, 금융부문으로 자본이 집중되는 것으로 설명하곤 한다. 미래를 담보로 부채는 계속 늘어가는데, 실물영역이 뒷받침되지 못하니, 그만큼 거품은 가속화되는 것. 그 과정에서 '강탈에 의한 축적'. 일본은 버블이 꺼지면서, 한국보다 10년일찍 그 과정을 겪은거고, 소설은 그 시기가 배경이다. 팽창한 부채를, 개개인-그러니까 노동자계급에게 책임을 넘기는 게, 또 하나의 핵심. 

 

그러니까, 화차에서 다른 이의 신분을 뺏었던 그 사람의 동기를, 행복해지고 싶었다,라는 일반적인 욕망, 혹은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외로운 투쟁으로 접근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지 않나. 더욱 역사적, 경제적 접근이 필요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드는건데,

그냥 소실이니까, 싶기도 하고..;;;;

 

 

 

화차
화차
미야베 미유키
시아출판사, 2006
2012/04/05 15:44 2012/04/05 15:44

다윈의 대답2 : 왜 인간은 농부가 되었는가

'다윈의 대답' 시리즈를 읽어보고 있다.

죽 읽어보니 엄밀한 증명이 실려 있지는 않다. 특히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의 가설을 소개하는 것이다. 여타 내용을 잘 모르니, 이 책만 읽기로는 가설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얼핏드는 의문이 목축농과 경작농의 갈등은 수렵/채집과 농업의 갈등과 유비되는 건가? 경작농과 목축농의 갈등을 소개한 이유를 잘 모르겠네.

페르시아만 바닷물이 그렇게 빨리 상승했을까?)

 

아무튼, 가장 최근의 빙하기가 1만년이라는, 머리속에서 어느정도 짐작이 되는 꽤나 가까운 시간안에 있었다는 것도 몰랐었고, 인류의 두 종이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는 것도 몰랐었고, 신화 속 존재들이 기억의 전승일 수 있다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런 이야기들이 호기심을 막 자극한다.

 

그리고 홍적세 살육 부분을 읽으면서, 아, 웃을 일은 아닐텐데, 뭔가 너무 웃음이 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 음..;;

 

책 내용을 전체적으로 요약했고, 소제목은 내 맘대로 내가 알아볼 수 있게 붙인 것. 더 나누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중동에서 농업이 시작되고, 다양한 석기들이 제작되며 최초의 도시가 출현한 일련의 '신석기 혁명'에 대한 생각은 고고학적 기록의 해석에 근거한다. 하지만, '왜 1만 년 전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신석기시대에 농사를 짓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었는데, 그렇다면 농업의 기원에 대한 진짜 문제는 왜 농업을 도입한 시기가 지역에 따라 다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왜 시작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가설로, 신석기혁명 이전에 이미 농사가 정착되어 있었다고 제안한다.

 

농사는 원예농, 경작농, 목축농으로 나눌 수 있는데, 특히 경작농과 목축농 사이의 갈등은 구약성서에서도 볼 수 있다.

목축농은 야생식물들을 그대로 두기를 바라지만 경작농은 그것들을 제거해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경작농이 비옥한 지역을 선택하기 때문에 목축농은 주변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다. 목축농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지역을 이동해야하는 반면 경작농은 막대한 노력을 들인 땅을 버리고 떠날 수 없기 떄문에 한 장소에 머물고 싶어 한다. 

성서는 목축농을 더욱 호의적으로 그리며 경작농 카인을 살인자로 묘사한다. 출애굽기에 묘사된 이집트의 경작농은 노예의 상황이며, 예수가 탄생했을 떄에도 곁에 목동들이 있었다.

 

원시농부, 홍적세 살육

 

인류와 호미니드 친척들은 경쟁 식물을 제거하는 작물 보호(개미들이 아카시아나무에서 다른 곤충을 쫓아내고, 물고기가 산호초 위의 해조 조각에서 다른 동물들을 쫓아낸다), 사냥감 통제(북미 사우스다코다주의 배들랜즈 원주민들이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해 들소를 절벽으로 몰아간 흔적이 있다. 이러한 '몰이'가 울타리 설치로 발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등을 했다는 관점에서 '농사'를 지어왔다.

 

이러한 원시농업은 기원전 4만년 경(후기 구석기)에 출현했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원시농부들은 풀타임 농부는 아니었다. 최근까지 남서 아프리카의 호텐토트족들은 수년간 염소를 키우다가도 마음 내키는 대로 염소들을 버리고 사냥을 나서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취미로 농사를 짓는 동물은 오직 사냥만 하는 동물보다 더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사냥꾼이 될 수 있다. 

작은 규모라도 농사를 지은 인류는 어떤 동물의 수가 상당히 감소한 후에도 계속 그들을 사냥하여 멸종시키기가 쉽다. 하지만 풀타임 사냥꾼은 피식자가 줄어들수록 스스로도 멸종의 위기에 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인간은 약 4만년 전 보트를 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호주로 이주했고, 적어도 약 3만년 전에 이르러서는 태평양 제도에 정착했으며, 약 1만 3천 년 전에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가는데 이것은 항해가 아니라 해수면이 지금보다 200m 까지 낮았던 빙하기에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에 형성된 육교, 베링기아를 걸어서 당도한 것이다.

인간이 각 대륙으로 처음 들어가자마자 그 지역의 동물군들이 멸종하기 시작했는데 그 피해는 몸집이 클수록 더 심했다.

 

호주에서는 4만년 전 이래 자이언트캥거루, 자이언트뿔거북, 디프로토돈이라고 불리는 코뿔소 크기의 원뱃 친척-호주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만들어진 '버닙 호주 도깨비' 신화의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을 잡아먹었던 유대류 '사자' 등등 대형 동물 13개 속이 사라졌다.

북미 대륙에서는 약 1만 3천년 전에 인간이 도착한 후 몇 백년 만에 대형 포유류 45속 중 33속 이상이 사라졌다. 여기에는 낙타, 자이언트비버, 페카리, 매머드와 마스토돈을 포함한 코끼리 종류들, 자이언트 땅늘보, 빵 배달 화물차 크기의 아르마딜로인 글립토돈, 그리고 이들을 잡아먹었던 검치호 다이어 울프, 자이언트 러닝 베어 등이 포함된다.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나 인간이 남하를 계속하면서 남미의 대형 동물들에게는 더 큰 재앙이 닥쳤다. 58개 속 중에서 46개 속이 수백 년 내에 멸종되었다. 짧은 몸체를 가진 큰 낙타처럼 생긴 마크라우체니아 속을 포함한 유제류 동물 두개 목 그리고 하마 크기의 기니피그 처럼 생긴 톡소돈 등이 여기 포함된다.

살육의 규모는 전 세계적이었다. 기원경 마다가스카르에 사람들이 도착하자 자이언트거북이, 하마, 여우원숭이, 에피오르니스가 사라졌다.(에피오르니스는 신드바드의 이야기에 나오는 로크 신화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멸종의 원인이 기후라면 작은 동물들이 더 타격을 받았을 텐데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대량 멸종을 설명할 만한 기후 변화의 증거도 거의 없다.

파트타임 농부들은 훨씬 파괴적인 포식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농사가 홍적세 대량 살육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은 최소한 5천년 혹은 1만 년 동안 같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심리학자 스탠구치가 1970년대 말에 '옛 지혜의 수호자'에서 주장하듯이 네안데르탈인들은 낭만적인 달 숭배자들인 데 반해 크로마뇽인들은 더 현실적으로 실용적이었으며 이들간의 갈등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전통과 아폴론 전통의 갈등, 혹은 서양문화 전반의 낭만파와 고전파이 갈등이 구석기시대에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리브 갬블은 실제 크로마뇽인이 더 현실적이며 스스로의 사냥 전략을 개선해나갈 만큼 실용주의적이었다고 주장한다.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간의 충돌은 농사 대 사냥이라는 전혀 새로운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농부는 사냥꾼의 먹이 기반을 침식시킴으로써 사냥꾼을 절멸시킨다.

 

농업혁명과 악순환

 

고생물학자들은 화석화가 극히 드문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만약 어떤 동물의 화석이 발견된다면 과거의 한 시점에 그 종이 흔했으며 이것은 다시 더 오랜 과거부터 그 동물이 존재해왔다는 것을 뜻한다. 구석기 시대에 사람들은 식물과 동물을 통제하여 생태적 성공을 거두고 또한 다른 동물들의 생태를 아주 크게 바꾸어놓았지만 고고학적 기록에 나타날 정도로 대규모로 이러한 작업을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석기 혁명은 농업의 시작이 아니라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행해지는 농업의 규모 확대였다.

 

사람들이 취미로라도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인구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수준으로 증가하게 된다. 농사의 장점은 식량이 늘어나도록 환경을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이고, 식량 공급을 늘리면 인구가 늘어난다. 농사를 많이 지을수록 인구가 증가하는데 이렇게 늘어난 여분의 입은 농사에 의해서만 먹여 살릴 수 있기 때문에 농부는 더 많은 농사일에 매달려야 한다.

 

사냥은 그것에 들이는 노력이 많아질수록 노력 대비 수확의 비율은 급격히 감소한다. 육식동물이 게으른 것은 이 때문이다. 농사는 삶의 규칙을 바꾸는데, 농부는 더 열심히 일할수록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게으름은 절대 선호되지 않는다. 농부는 농사가 즐겁거나 그 일이 수렵과 채집보다 쉬워서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찌 보면 자기 성공의 희생자일 뿐이다.

 

고고학적 기록이 보여주는 명백한 농사의 첫 신호는 약 1만년 전 중동에서 시작되는데, 이 때는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시기이다. 가장 최근의 빙하기 동안 알라스카와 시베리아 사이의 육교인 베링기아는 폴란드만큼 컸고,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에 있는 천해가 없었으며, 페르시아 만도 마른땅이었다.

 

당시 페르시아 만 지역에 있던 땅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함께 흘러들어와서 아라비아 해로 들어가는 아주 비옥한 장소였음이 분명하다. 이곳의 후기 구석기인들은 과일 나무와 식물들, 냇물의 물고기와 조개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재배하면서 낙원에 있는 것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빙하기가 끝나갈수록 해수면이 상승함에 따라 바닷물이 육지로 흘러들어오는데, 이러한 변화는 수십 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일어났다. 사람들은 과거 고지대였던 곳으로 이동해야 했고, 인구는 그동안의 풍족한 환경과 취미 농사 덕분에 이미 많아진 상태였다. 그들은 이제 훨씬 좁은 공간에 밀집된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미국 미주리대학교의 주리스 자린스는 페르시아 만의 범람과 그 이후 사건들이 바로 창세기에 묘사되어 있는 에덴동산의 이야기라고 제안했다. 8천 년 전 페르시아 만 지역의 대부분은 마른땅이었다. 창세기가 기원전 1500년경에 씌어졌고 거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그보다 약 4500년 전에 일어났으므로 기억이 충분히 전승될 수 있는 기간이다.(호주 원주민들도 8천 년 전에 있었던 홍수를 기억하고 있는데, 현대 잠수부들은 원주민들이 묘사하는 것과 똑같은 장소를 실제 바다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신석기인들이 경작농의 삶을 시작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원하거나 곡물의 장점을 꺠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낙원에서 쫓겨났을 때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초기 경작시대에는 그전의 수렵인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던 질병과 상처의 고고학적 증거들이 남아 있다.(테이야 몰리슨은 초기 농경인들에게서 발과 무릎에 관절염이 생기고 허리에 변형이 오는 독특한 형태의 질병을 찾아내었다.)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 신은 그들을 저주했다 :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에덴의 종말 - 왜 인간은 농부가 되었는가?
에덴의 종말 - 왜 인간은 농부가 되었는가?
콜린 텃지
이음, 2011
2012/04/02 20:15 2012/04/02 20:15

라틴아메리카 신화와 전설

제목만 보고 빌려왔다.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고,

비슷한 감정들을 겪으며 산다.

 

잉카, 마야, 아즈텍..

시대도 잘 모르고..

지역도 잘 모른다.

그냥 이야기만 읽었다.

 

인신공양 제물로 자식을 바친 어미의 슬픔..

언약을 했지만, 전쟁에 나가 죽게된 이를 기다리는 슬픔..

벌레가 되어서, 곁에 있겠다는 언약을 지켜내는 이들..

등등등

 

음..

소개된 신화와 전설들이 굵직한 줄거리만 담겨있어서,

상상력을 막 자극하진 않았다.

이런 고담의 재미는 깨알 같은 묘사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

너무 듬성듬성이다.

현대어로 다 해석해 놓은 대화들.

옮겨 놓은 이의 상상 만큼 밖에 볼 수 없다.

 

예를들면, 쌍둥이 형제가 지하세계 시발바 신들을 물리친 이야기는,

그 과정에서 어떤 말들과 내기가 오갔는지만 풀어써도 책 한권 나올 것 같은데,

그냥 많은 시발바 신의 요구를 쌍둥이 형제가 무사히 수행했다는 식의 한 페이지 정도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라틴아메리카 신화와 전설 - 고대 문명의 수수께끼에서 신화적 상상력까지
라틴아메리카 신화와 전설 - 고대 문명의 수수께끼에서 신화적 상상력까지
박종욱
바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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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폴부 라는 책이 있나보다.

전마야문명 키체족이 남긴 역사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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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도서

아즈텍과 마야 신화 / 범우사

마야인의 성서 : 포폴부 / 문학과 지성사

 

 

아즈텍과 마야 신화 - The Legendary Past
아즈텍과 마야 신화 - The Legendary Past

범우사, 1998

 

마야인의 성서 - 포폴 부
마야인의 성서 - 포폴 부

문학과지성사, 1999
2012/03/15 14:16 2012/03/15 14:16

레미제라블

완역본을 읽어보고 싶어서,

어떤 번역이 괜찮나 찾아보고 있었다.

범우사, 금성, 펭귄 등이 나온다.

동서 번역본은 일본어 중역이라는 이야기가..

 

 

http://dvdprime.donga.com/bbs/view.asp?major=ME&minor=E1&master_id=149&bbsfword_id=&master_sel=&fword_sel=&SortMethod=&SearchCondition=&SearchConditionTxt=&bbslist_id=2038222&page=3

 

금성과 펭귄을 비교해 놓았다.

음.. 글에선, 금성의 번역이 더 유려하다고 말하는데,

난 아무리 봐도 펭귄사의 번역이 훨씬 눈에 잘 들어온다.

금성 번역본에 번역투가 더 많이 쓰인 것 같은데.. 아닌가..

나의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인가 ㅠ

아무튼 도서관에 펭귄사 거이 있으면 빌려와야지.

2012/03/13 14:48 2012/03/13 14:48

단순한 열정 _ 아니 에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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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로 간 코미디언_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소설집에 실려 있는 걸 읽었다.

 

우연과 우연의 중첩이, 실은 한치의 어긋남 없는 필연이라는 것.

그래서 1982년 권투선수의 죽음과 2001년 쌍둥이빌딩이 무너진 일은,

모든 이의 삶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

누군 가의 고통은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것이 웃을 일이 아니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우리 인생의 이야기'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 기침이나 한숨 소리, 혹은 침 삼키는 소리 같은 데 담겨 있다는 것.

듣는 사람이 없으면, 세계는 침묵이고 암흑이라는 것.

보이지 않으면,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그리하여 세계의 그 어느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해한다는 건, 세계 그 자체. 세계의 전부라는 것.

그곳에는 나 혼자뿐이지만, 혼자뿐이지 않다는 것.

그것은 사랑?

 

 

//

 

 

이 소설집에 실린 다른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살이 됐을때'에서는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아빠,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 지금은 이 마음 하나 뿐이야.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꿈속에서라도 한 번 나와줘. 나는 아빠를 힘껏 끌어안고 놔주지 않을 거야. 떠나지 못하게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빠한테 말할거야.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로 끝나는 편지의 구절들,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어떻게 자신을 위로했는지, 어느 날 새벽에 본 불길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얼마나 참혹했는지, 또 자신의 미래는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서, 얘기한다.

저 편지는 윤용헌 열사의 아들이 쓴 편지글..

용산참사가.. 3주기가 내일인가.. 읽으면서 울컥거렸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지만, 역시 김연수 어법에 따르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으려고 무척 귀를 기울이며, 또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살만한 곳이다.

 

소설집 제목과 같은 단편, '세상의 끝 여자친구'는, 세상의 끝 메타세쿼이어 이야기다. 함께 보냈기에, 그곳은 세상의 끝. 그 메타세쿼이어는 수 억년을 살며, 이야기를 기억할 게다.

 

 

작가는 누군가를 사랑하는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고 얘기한다.

이해라는 건, 죽을만큼의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의 사랑이란 건, 내 감정의 도취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자각에 깊숙이 아리다.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다.

 

김연수의 소설은 눈으로 훑듯이 읽어서는 뭉텅뭉텅 찢겨진 책을 읽는 기분이 든다.

단어 하나 허투로 쓰는 게 없어서 꼼꼼히, 기억하며 읽어야 아귀가 맞춰진다.

하지만 아무리 꼼꼼히 읽어도 그 활자를 다 외울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최소한 한 번은 다시 읽게 된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역시, 허투로 쓰인 단어가 없었구나,라는 감탄이 나온다.

음..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김연수는 똑똑하다. 많이. 부럽도록.

 

 

 

 

세계의 끝 여자친구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문학동네, 2009
2012/01/20 11:06 2012/01/20 11:06

리아의 나라

읽으면서 내내 불편하고 찜찜했다.

 

몽족이 미국의 병원에서 진료받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을 바탕으로, 문화의 충돌과 이해에 대해 얘기한다. 질문이 복합적인데, 우선 몽족 아이가 미국의 병원에서 겪어야 했던 일들이 단지 몽족에게 국한된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현대의학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책을 읽어가면서 불편했던 건, 그 문화적 차이가 여타 관계들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서술했다는 느낌때문이었다.

 

환자를 시술의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현대의학에 대한 비판이 낯설지는 않은 세상이다. 책의 한 구절처럼, 한 인간에게 생명이 우선인지, 혼이 우선인지는 가치관의 문제일 수 있다. 병원과 현대 사회는 이런 질문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비판에 동의하지만, 이게 단지 물질만능에서 벗어난 가치관을 찾는 걸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학이 아닌 생의학 패러다임이 승리하게 된 역사적 배경, 그러니까, 자본주의적인 의료의 발달을 주목해야하지 않을까. 병원에서 겪는 불편함(모멸감, 좌절감 등등 부정적인 여러 감정)은 몽족에게 더 극단적으로 표현됐을 뿐,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감정이다. 내국인이 의료를 이용하며 겪은 그 불편함은 책임의 화살을 문화의 차이에게 돌릴 수 없듯이, 몽족 또한 오히려 다른 갈등요소를 찾아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약간 이어지는 맥락에서, 미국 문화와 몽족 문화를 대립시키며 설명하는 방식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미국은 개인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데 반해, 몽족은 공동체를 우선적인 가치로 둔다는 식의 설명 말이다. 미국에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더 많을지는 모르지만, 그 사회에도 공동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의학 패러다임이 현대의학의 주류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한국의 세태가, 모두가 지극히 경쟁을 강요받고 분자화된 개인으로 쪼개져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럼 이게 한국의 문화인 것일까.. 문화와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함께 묶여 있는 것인가? 아니, 그러니까, 대체 문화란 무엇인가? 

책에서 대비한 몽족과 미국의 차이는 오히려 그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의 상이함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한국을 보자면 1900년 조선과 2000년 한국 사이에서 차이를 문화의 차이라고 볼 것인지, 다른 요소들의 차이로 볼 것인지, 그런 질문이다. 당연히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는 없다. 난 몽족과 미국의 생활양식 차이를 '문화'라는 단어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공백이 많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모습을 봐도 그렇지만, 과학기술이 세계 여느 나라에 뒤지 않는 한국에도 점집과 굿은 흔하고, 얼마나 신뢰하든 대개 사주 한 번쯤은 보러간다. 미국의 합리성에 기반한 문화와 몽족의 비합리적인 문화의 충돌이라는 관점은 허구적이라고 말하려는 건데, 책 각주에도 몇 사례가 소개되어 있지만, 미국 내에도 종교적인 의식으로 병을 치료하려는 시도는 광범위하다. 소위 서구문명은 '합리성'을 다른 가치보다 우선하는 가치로 삼지만, 이게 그 사회가 얼마나 합리적이느냐와는 전혀 별개이다. 자본주의만 봐도 비합리의 극치인데. 그 합리성이 다른 문명에는 부재하다고 믿는 게 서구문명의 오만함이다. 이걸 비판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것도 훌륭한 가치라고 설명해버리는 류가 있지만, 난 맥을 잘못 짚었다고 생각한다. 몽족이 자신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나름의 합리적인 사고가 있기 때문이다. 왜 병이 생기는지, 어떻게 할 때 병이 낫는지 등에 대한. 그런데, 비합리적인 것도 훌륭한 가치라고 설명하는 류들은 비슷한 접근으로 서구문명과 구별되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문화들을 모조리 긍정해버리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의학에도 역사가 있고, 2천년 전의 것이 결코 그대로 이어져 오지 않는다. 그 안에서 많은 경험과 비판이 축적되고,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계승하는데, 오히려 최근에 전통이라면 무엇이든지 긍정하려는 반역사적인 태도가 널리 승인받고 있다. 이런 게 문화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 않나 싶다. 어떤 문화가 서구문명과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들은 순일할 수도 없고 나름의 방식으로 투닥거리고 있을 게다.

 

역시 이어지는 맥락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문화상대주의는 사회의 여러 모순을 문화로 환원하는 효과를 가지지 않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은 '차이'일 뿐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계급적인 불평등도 노력하면 해소가능한 '차이'가 되버린다.

근래 읽은 이글턴의 책이 계속 떠올랐는데, 이글턴은 기독교/이슬람 급진주의는 종교로 정치를 대체하려는 시도이고 문화주의자들(문화상대주의, 뉴에이지 등)은 문화로 정치를 대체하려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꼴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보편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읽는 내내, 이 이야기들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이글턴이 우려하는 게 이런 접근이겠구나 싶었다. 모든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 이야기는 듣기 좋지만, 보편성을 전제하지 않는 차이는 오히려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서로의 문화를 지키는 게 우선이라면 소통을 지연하는 게 최선이니까. 이 책의 저자가 이런 보편성을 찾아낼 가능성을 완전히 외면하고 있지는 않다. 인간으로서 겪는 고통을 서로 이해하는 장면들이 실려있다. 다만, 그런 공감에 둘러쳐진 장벽을 압도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어떤 이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둘 다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고, 상대방에게는 한국인 동행이 있었다. 대화는 동행을 가운데 두고 진행되었다. 상대방은 자신의 말을 모국어로 삼지 않은, 그래서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동행에게 말을 하고, 동행은 나에게 한국어로 말을 해준다. 상대방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다 할 수가 없고, 나는 한국인 동행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한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최대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들을 선택하기 위해 마치 어린아이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태도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쨋든 나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어휘들로 말을 하고 있었고 상대방은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어휘 중 극히 일부만 골라쓸 수 밖에 없던 거였다. 상대방이 자기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있다면, 나보다 뭘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상대방도 느꼈을 것 같은데 순식간에 위계가 만들어지는 걸 경험했다. 지금도 떠올려보면 답답하고, 어떻게 했어야할지 잘 모르겠다.

몽족이 미국 병원에서 부딪힌 여러 문제 중 언어 문제가 큰 문제였으리가 생각한다. 책 저자는 통역자가 아닌 문화중개인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내 경험에서 그 사람과 대화 중 위계 관계가 만들어졌던 건, 서로 문화가 달라서가 아니라 언어라는 실물적인 장벽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장벽 너머에서 내가 더 대화의 주도권을 가진 건, 이곳이 한국이기 때문일텐데, 한편 만약 그 사람이 미국인이었다면, 절대 그런 상황이 되지 않았을거다. 그러니까, '문화', '언어'라는  어떤 독립적인 요소가 장벽인 게 아니라, 그 요소들이 장벽이게 하는 정치/사회적 맥락이 존재한다.

 

대충 할 말은 거의 다 했는데, 읽으면서 가장 크게 꺼끌렸던 걸 마저 짚어야겠다. 저자는 몽족이 미국으로 이주해오게 된 배경을 마치 중립적인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 마냥 서술한다. 베트남 전쟁안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세력이 후방을 교란시킨다. 이건 마치 게임 중계와 비슷하다. 미국과 월맹이라는 두 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고, 서로 동맹세력을 많이 끌어들여 전쟁에서 이기려 하는 거다. 한국전쟁을 서술할 때도 대개 이런 식이잖은가. 이런 서술에서는 미국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 했던 베트남 민중의 항쟁이 온데간데 없고(한국전쟁을 얘기할 때 미군정에 맞서 정치파업을 하고 게릴라 항쟁을 벌이던 이들의 역사가 사라진 것처럼), CIA의 지원을 받은 몽족 전투부대가 베트남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데 협조한 것임을 삭제한다. 라오스 인민전선이 라오스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라오스 민중이 미국과 맞서 싸우는것을 몽족이 깨트리려 했던 것임을 서술하지 않는다. 물론 그 안에 더 역사 깊은 갈등들이 담겨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베트남 전쟁을 스타크래프트 같이 그려서는 안되는 거다. 저자는 부정적인 의미로 라오스 정부측 입장을 인용한다.

"미국은 태국의 반동분자들과 공모해 메오족에게 압력을 넣어 라오스를 탈출하여 태국으로 가도록 하고 있다. 이 일의 목적인 인도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들의 노동력을 싼 값에 착취하고, 그들을 병사로 키워 나중에 이 나라로 돌려보내 평화를 깨기 위함이다."

하지만 난 이 인식에 공감한다. 

여기까지는 참고 읽었다. 그런데 저자는 몽족이 고난을 겪으며 피난 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듣자니 어느 이스라엘 아기에 대해 쓴 글이 떠올랐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피해 숨어 있었는데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당황한 엄마가 아이의 입을 너무 틀어막는 바람에 아기가 질식사하고 만 것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 구절을 읽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더 읽지 못하고 한참 덮어뒀다가 나중에 다시 펼쳤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떠오른 가장 큰 고민은, 저자의 정치적 태도와 문화상대주의에 인과가 있기 않을까,라는 질문이었다. 문화상대주의가 착취를 은폐하며 자본주의를 공고하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고, 저자는 그런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한국에도 '다문화'라는 얘기가 많이 흘러나온다. 조심스럽다.

 

 

리아의 나라 - 몽족 아이, 미국인 의사들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
리아의 나라 - 몽족 아이, 미국인 의사들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
앤 패디먼
윌북, 2010
2012/01/11 22:38 2012/01/11 22:38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의 역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933년 법으로 금융을 통제했고,

70년대 볼커반혁명 이후 규제를 점차 풀어왔다.

난 도무지, 파생상품이 수익을 얻는 방법이 아리송한데,

아마, 이게 나만 그런 게 아닐테고,

그러니까.. 이런 국면이 됐겠지..;

 

더 구체적인 내용은, 뒤메닐의 '자본의 반격' 읽어보면 좋을 듯.

동의 여부를 떠나, 이 만화가 다루는 내용이 '자본의 반격'에서 다룬 내용과 거의 같은 듯.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야기 할 때,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모순을 우선 꼽잖아, 보통.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생산된 부는 어느 한편으로 전유되는 것.

 

이 책 말미에 보면,

모기지 상환을 못해 집을 빼앗기게 된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사람 집에 대한 증권은 1만명이 넘는 교사들이 만든 마이애미교원퇴직연금기금에 소유권이 있다고 한다.

금융의 팽창으로, 소유의 사회화가!?

 

다른 세상으로의 힌트는 곳곳에 있다..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
세스 토보크먼 & 에릭 라우센 & 제시카 베를레
미지북스, 2011
2012/01/04 11:34 2012/01/04 1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