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대답' 시리즈를 읽어보고 있다.

죽 읽어보니 엄밀한 증명이 실려 있지는 않다. 특히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의 가설을 소개하는 것이다. 여타 내용을 잘 모르니, 이 책만 읽기로는 가설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얼핏드는 의문이 목축농과 경작농의 갈등은 수렵/채집과 농업의 갈등과 유비되는 건가? 경작농과 목축농의 갈등을 소개한 이유를 잘 모르겠네.

페르시아만 바닷물이 그렇게 빨리 상승했을까?)

 

아무튼, 가장 최근의 빙하기가 1만년이라는, 머리속에서 어느정도 짐작이 되는 꽤나 가까운 시간안에 있었다는 것도 몰랐었고, 인류의 두 종이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는 것도 몰랐었고, 신화 속 존재들이 기억의 전승일 수 있다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런 이야기들이 호기심을 막 자극한다.

 

그리고 홍적세 살육 부분을 읽으면서, 아, 웃을 일은 아닐텐데, 뭔가 너무 웃음이 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 음..;;

 

책 내용을 전체적으로 요약했고, 소제목은 내 맘대로 내가 알아볼 수 있게 붙인 것. 더 나누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중동에서 농업이 시작되고, 다양한 석기들이 제작되며 최초의 도시가 출현한 일련의 '신석기 혁명'에 대한 생각은 고고학적 기록의 해석에 근거한다. 하지만, '왜 1만 년 전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신석기시대에 농사를 짓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었는데, 그렇다면 농업의 기원에 대한 진짜 문제는 왜 농업을 도입한 시기가 지역에 따라 다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왜 시작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가설로, 신석기혁명 이전에 이미 농사가 정착되어 있었다고 제안한다.

 

농사는 원예농, 경작농, 목축농으로 나눌 수 있는데, 특히 경작농과 목축농 사이의 갈등은 구약성서에서도 볼 수 있다.

목축농은 야생식물들을 그대로 두기를 바라지만 경작농은 그것들을 제거해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경작농이 비옥한 지역을 선택하기 때문에 목축농은 주변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다. 목축농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지역을 이동해야하는 반면 경작농은 막대한 노력을 들인 땅을 버리고 떠날 수 없기 떄문에 한 장소에 머물고 싶어 한다. 

성서는 목축농을 더욱 호의적으로 그리며 경작농 카인을 살인자로 묘사한다. 출애굽기에 묘사된 이집트의 경작농은 노예의 상황이며, 예수가 탄생했을 떄에도 곁에 목동들이 있었다.

 

원시농부, 홍적세 살육

 

인류와 호미니드 친척들은 경쟁 식물을 제거하는 작물 보호(개미들이 아카시아나무에서 다른 곤충을 쫓아내고, 물고기가 산호초 위의 해조 조각에서 다른 동물들을 쫓아낸다), 사냥감 통제(북미 사우스다코다주의 배들랜즈 원주민들이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해 들소를 절벽으로 몰아간 흔적이 있다. 이러한 '몰이'가 울타리 설치로 발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등을 했다는 관점에서 '농사'를 지어왔다.

 

이러한 원시농업은 기원전 4만년 경(후기 구석기)에 출현했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원시농부들은 풀타임 농부는 아니었다. 최근까지 남서 아프리카의 호텐토트족들은 수년간 염소를 키우다가도 마음 내키는 대로 염소들을 버리고 사냥을 나서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취미로 농사를 짓는 동물은 오직 사냥만 하는 동물보다 더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사냥꾼이 될 수 있다. 

작은 규모라도 농사를 지은 인류는 어떤 동물의 수가 상당히 감소한 후에도 계속 그들을 사냥하여 멸종시키기가 쉽다. 하지만 풀타임 사냥꾼은 피식자가 줄어들수록 스스로도 멸종의 위기에 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인간은 약 4만년 전 보트를 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호주로 이주했고, 적어도 약 3만년 전에 이르러서는 태평양 제도에 정착했으며, 약 1만 3천 년 전에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가는데 이것은 항해가 아니라 해수면이 지금보다 200m 까지 낮았던 빙하기에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에 형성된 육교, 베링기아를 걸어서 당도한 것이다.

인간이 각 대륙으로 처음 들어가자마자 그 지역의 동물군들이 멸종하기 시작했는데 그 피해는 몸집이 클수록 더 심했다.

 

호주에서는 4만년 전 이래 자이언트캥거루, 자이언트뿔거북, 디프로토돈이라고 불리는 코뿔소 크기의 원뱃 친척-호주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만들어진 '버닙 호주 도깨비' 신화의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을 잡아먹었던 유대류 '사자' 등등 대형 동물 13개 속이 사라졌다.

북미 대륙에서는 약 1만 3천년 전에 인간이 도착한 후 몇 백년 만에 대형 포유류 45속 중 33속 이상이 사라졌다. 여기에는 낙타, 자이언트비버, 페카리, 매머드와 마스토돈을 포함한 코끼리 종류들, 자이언트 땅늘보, 빵 배달 화물차 크기의 아르마딜로인 글립토돈, 그리고 이들을 잡아먹었던 검치호 다이어 울프, 자이언트 러닝 베어 등이 포함된다.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나 인간이 남하를 계속하면서 남미의 대형 동물들에게는 더 큰 재앙이 닥쳤다. 58개 속 중에서 46개 속이 수백 년 내에 멸종되었다. 짧은 몸체를 가진 큰 낙타처럼 생긴 마크라우체니아 속을 포함한 유제류 동물 두개 목 그리고 하마 크기의 기니피그 처럼 생긴 톡소돈 등이 여기 포함된다.

살육의 규모는 전 세계적이었다. 기원경 마다가스카르에 사람들이 도착하자 자이언트거북이, 하마, 여우원숭이, 에피오르니스가 사라졌다.(에피오르니스는 신드바드의 이야기에 나오는 로크 신화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멸종의 원인이 기후라면 작은 동물들이 더 타격을 받았을 텐데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대량 멸종을 설명할 만한 기후 변화의 증거도 거의 없다.

파트타임 농부들은 훨씬 파괴적인 포식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농사가 홍적세 대량 살육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은 최소한 5천년 혹은 1만 년 동안 같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심리학자 스탠구치가 1970년대 말에 '옛 지혜의 수호자'에서 주장하듯이 네안데르탈인들은 낭만적인 달 숭배자들인 데 반해 크로마뇽인들은 더 현실적으로 실용적이었으며 이들간의 갈등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전통과 아폴론 전통의 갈등, 혹은 서양문화 전반의 낭만파와 고전파이 갈등이 구석기시대에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리브 갬블은 실제 크로마뇽인이 더 현실적이며 스스로의 사냥 전략을 개선해나갈 만큼 실용주의적이었다고 주장한다.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간의 충돌은 농사 대 사냥이라는 전혀 새로운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농부는 사냥꾼의 먹이 기반을 침식시킴으로써 사냥꾼을 절멸시킨다.

 

농업혁명과 악순환

 

고생물학자들은 화석화가 극히 드문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만약 어떤 동물의 화석이 발견된다면 과거의 한 시점에 그 종이 흔했으며 이것은 다시 더 오랜 과거부터 그 동물이 존재해왔다는 것을 뜻한다. 구석기 시대에 사람들은 식물과 동물을 통제하여 생태적 성공을 거두고 또한 다른 동물들의 생태를 아주 크게 바꾸어놓았지만 고고학적 기록에 나타날 정도로 대규모로 이러한 작업을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석기 혁명은 농업의 시작이 아니라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행해지는 농업의 규모 확대였다.

 

사람들이 취미로라도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인구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수준으로 증가하게 된다. 농사의 장점은 식량이 늘어나도록 환경을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이고, 식량 공급을 늘리면 인구가 늘어난다. 농사를 많이 지을수록 인구가 증가하는데 이렇게 늘어난 여분의 입은 농사에 의해서만 먹여 살릴 수 있기 때문에 농부는 더 많은 농사일에 매달려야 한다.

 

사냥은 그것에 들이는 노력이 많아질수록 노력 대비 수확의 비율은 급격히 감소한다. 육식동물이 게으른 것은 이 때문이다. 농사는 삶의 규칙을 바꾸는데, 농부는 더 열심히 일할수록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게으름은 절대 선호되지 않는다. 농부는 농사가 즐겁거나 그 일이 수렵과 채집보다 쉬워서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찌 보면 자기 성공의 희생자일 뿐이다.

 

고고학적 기록이 보여주는 명백한 농사의 첫 신호는 약 1만년 전 중동에서 시작되는데, 이 때는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시기이다. 가장 최근의 빙하기 동안 알라스카와 시베리아 사이의 육교인 베링기아는 폴란드만큼 컸고,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에 있는 천해가 없었으며, 페르시아 만도 마른땅이었다.

 

당시 페르시아 만 지역에 있던 땅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함께 흘러들어와서 아라비아 해로 들어가는 아주 비옥한 장소였음이 분명하다. 이곳의 후기 구석기인들은 과일 나무와 식물들, 냇물의 물고기와 조개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재배하면서 낙원에 있는 것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빙하기가 끝나갈수록 해수면이 상승함에 따라 바닷물이 육지로 흘러들어오는데, 이러한 변화는 수십 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일어났다. 사람들은 과거 고지대였던 곳으로 이동해야 했고, 인구는 그동안의 풍족한 환경과 취미 농사 덕분에 이미 많아진 상태였다. 그들은 이제 훨씬 좁은 공간에 밀집된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미국 미주리대학교의 주리스 자린스는 페르시아 만의 범람과 그 이후 사건들이 바로 창세기에 묘사되어 있는 에덴동산의 이야기라고 제안했다. 8천 년 전 페르시아 만 지역의 대부분은 마른땅이었다. 창세기가 기원전 1500년경에 씌어졌고 거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그보다 약 4500년 전에 일어났으므로 기억이 충분히 전승될 수 있는 기간이다.(호주 원주민들도 8천 년 전에 있었던 홍수를 기억하고 있는데, 현대 잠수부들은 원주민들이 묘사하는 것과 똑같은 장소를 실제 바다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신석기인들이 경작농의 삶을 시작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원하거나 곡물의 장점을 꺠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낙원에서 쫓겨났을 때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초기 경작시대에는 그전의 수렵인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던 질병과 상처의 고고학적 증거들이 남아 있다.(테이야 몰리슨은 초기 농경인들에게서 발과 무릎에 관절염이 생기고 허리에 변형이 오는 독특한 형태의 질병을 찾아내었다.)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 신은 그들을 저주했다 :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에덴의 종말 - 왜 인간은 농부가 되었는가?
에덴의 종말 - 왜 인간은 농부가 되었는가?
콜린 텃지
이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