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로 간 코미디언_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소설집에 실려 있는 걸 읽었다.

 

우연과 우연의 중첩이, 실은 한치의 어긋남 없는 필연이라는 것.

그래서 1982년 권투선수의 죽음과 2001년 쌍둥이빌딩이 무너진 일은,

모든 이의 삶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

누군 가의 고통은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것이 웃을 일이 아니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우리 인생의 이야기'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 기침이나 한숨 소리, 혹은 침 삼키는 소리 같은 데 담겨 있다는 것.

듣는 사람이 없으면, 세계는 침묵이고 암흑이라는 것.

보이지 않으면,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그리하여 세계의 그 어느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해한다는 건, 세계 그 자체. 세계의 전부라는 것.

그곳에는 나 혼자뿐이지만, 혼자뿐이지 않다는 것.

그것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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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 실린 다른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살이 됐을때'에서는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아빠,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 지금은 이 마음 하나 뿐이야.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꿈속에서라도 한 번 나와줘. 나는 아빠를 힘껏 끌어안고 놔주지 않을 거야. 떠나지 못하게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빠한테 말할거야.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로 끝나는 편지의 구절들,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어떻게 자신을 위로했는지, 어느 날 새벽에 본 불길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얼마나 참혹했는지, 또 자신의 미래는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서, 얘기한다.

저 편지는 윤용헌 열사의 아들이 쓴 편지글..

용산참사가.. 3주기가 내일인가.. 읽으면서 울컥거렸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지만, 역시 김연수 어법에 따르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으려고 무척 귀를 기울이며, 또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살만한 곳이다.

 

소설집 제목과 같은 단편, '세상의 끝 여자친구'는, 세상의 끝 메타세쿼이어 이야기다. 함께 보냈기에, 그곳은 세상의 끝. 그 메타세쿼이어는 수 억년을 살며, 이야기를 기억할 게다.

 

 

작가는 누군가를 사랑하는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고 얘기한다.

이해라는 건, 죽을만큼의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의 사랑이란 건, 내 감정의 도취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자각에 깊숙이 아리다.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다.

 

김연수의 소설은 눈으로 훑듯이 읽어서는 뭉텅뭉텅 찢겨진 책을 읽는 기분이 든다.

단어 하나 허투로 쓰는 게 없어서 꼼꼼히, 기억하며 읽어야 아귀가 맞춰진다.

하지만 아무리 꼼꼼히 읽어도 그 활자를 다 외울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최소한 한 번은 다시 읽게 된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역시, 허투로 쓰인 단어가 없었구나,라는 감탄이 나온다.

음..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김연수는 똑똑하다. 많이. 부럽도록.

 

 

 

 

세계의 끝 여자친구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문학동네, 2009
2012/01/20 11:06 2012/01/20 11:06

밤은 노래한다 _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에서와 비슷한 느낌이다.

 

김연수 작가의 어법을 이제 조금 알 듯하다.

 

밤은 노래한다에서도 나는 내가 만난 이들이 누구인지, 무엇이 진짜인지 알지 못한다. 누가 민생단인지, 민생단이 정말 밀정인지,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 자신도 알 수없다. "그 시절의 진실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 지금은 과연 이 세계에 객관주의라는 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도 든다. ...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주관으로 결정되는 가혹한 세계뿐이었다."

 

톨스토이의 책을  버렸지만, 톨스토이를 버릴 수 없었다던 이의 이야기가 깊이 와닿았다. PT독재가 와닿지 않는 주인공은 "용용한 강물 되어 ... 나 어찌 가느다란 실개천에 그치랴"며 시를 읊지만, 주인공에게 PT독재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며 설명해주는 이는 "엄마 없는 새 헤매이는 새 눈 오는 날에 발가벗은 나무에 혼자 앉아서 적은 고개 숙이고 눈물 흘리며 엄아 엄마 보고파 슬피 웁니다"라고 읊는다.

마르크스를 택한다는 것은 세계가 변화하는 것임을, 그 변화를 멈추는 것이 오히려 인간을 더 잔혹하게 만드는 것임을, 인간에게는 그 잔혹함을 넘어설 힘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톨스토이와 함께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를 택한다는 것은 세상의 잔혹함이 진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힘과 세상의 잔혹함. 비극. 다시.. 비극. 그래서 소설 속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음으로써 세계가 조금 변화한다면 그 이상 아쉬움은 없소." 다른 장면, 다른 사람, "사람이란 자기 인생 행로에서 잊기 어려운 추억을 갖게 마련이지요. 이런 추억은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심금을 울려주면서 떠오르는 것이에요."

로자 룩셈부르크. "인간답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화창한 날을 맞을 때마다, 아름다운 구름을 볼 때마다 그것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소설 속 누군가는 공산주의자들은 진짜 세계가 어떤 것인지 한번쯤은 경험해본 사람들이다, 그래서 변절하지 않는다면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겪은 세계가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한단 말인가. 김연수의 소설에는 양발을 위태하게 딛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부연하자면, 그 위태함이 생명이다. 톨스토이와 마르크스를 양손에 들고 고민하는 것, 레닌과 마야코프스키를 함께 끌어안는 것. 생산력으로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다. 진짜세계를 안다는 건 어떤 세상의 한 단면이 아니라, 무엇이 역사를 바꾸는지 보는 것이다.

 

민생단에 대해선 질문이 끝을 문다.

얼마전 읽은 문화대학명 이야기도 떠오른다. 균일하지 않은 덕에 보황파가 조반파가 맞바꾼 입장을 가진 지역도 있었다고.. 당장 한국에 존재하는 운동 단위 중 자신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는 곳이 없을텐데, 정말 누가 진짜일까? 오히려 진짜는 이 혼탁함 또한 세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망설임 또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을까?

 

마지막, 편지를 읽으면서 좁은 문이 떠올랐다. 좁은 문을 읽으면서 주체할 수 없었던, 어느 날. 그리고, 사랑, 사랑, 사랑.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그 유일한 순간. 세상의 모든 의미를 설명하는 유일한 의미. 심지어 죽음 마저도.

2011/08/26 13:05 2011/08/26 13:05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것, 그 이야기들에 삶의 한편을 담아내는 것, 표현들 모두 놀랍다. 숨막히게 읽었다.

 

 

내가 만난 사람이 남파공작원인지 안기부 직원인지, '원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경험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일까. 내가 보았던 야바위꾼은 애초 그곳에 없던 게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를 확인할 수 없는 존재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 고문을 받으며 호접지몽을 떠올렸다면, 일상이 호접지몽이 아니어야 할 필연은 없다. "인생이 이다지도 짧은 건 우리가 항상 세상에 없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이 외로운 사람들은 서로에게 손을 내뻗고 있다. 보아줄 이를 만나기 위해 수십억 광년을 건너온 별빛처럼, 들어줄 이를 만나기 위해 산과 바다를 넘어온 라디오 전파처럼. 하지만 이 손들은 서로 맞닿지 않아 엉뚱한 곳에 가닿기도 한다. 우주는 손들이 빈틈없이 가득차 허허로운 공간이다. 손과 손이 엇갈려 스치기도 맞닿기도 하는 곳. 우리의 인연은 애초 그런 것일지 모른다. 방향을 잃은 내 빛과 너의 빛이 우연히 만난 것. 하지만 그 우연은 입체누드사진으로 이어지기도 하니, 애초 어느것이 우연이고 어느것이 필연일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순수한' 개인이란 이데올로그들의 강변에 불과하므로" 누군지 알 수 없는 나와, 우연인지 필연인지도 모를 관계들이 오히려 나에 대한 본질에 더 가깝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나를 나라고 정의해주던 모든 것들이 의미없는 것임을 깨달을 때, '마치 지금 막 태어나 처음으로 그것들을 느끼듯이', '막 태어나 바다를 마주한 갓난아기처럼' 나의 감각만으로 나를 둘러싼 세상을 느끼고, 새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든 세상은 오롯이 내 것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것이 우연이었든, 필연이었든,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어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평생을 내달린다. "우리의 감각은 가끔씩 우리 자신의 바깥에 존재한다." 그 순간을 기약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우리. 아무리 내 정체가 의심스러워도, 보증해 줄 이 하나 있다면. 그 끈과 끈들이 얽히면 살아갈만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평생 540000번 웃고, 3000번 운다. 우리의 삶을 있는대로 그린다면, 180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빼먹어서는 안된다. 김하경씨의 '송어의 꿈'을 덧붙이자면.

 

노동현장 얘기만 나오면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표정이 굳어진다…… 나도 그랬다. 살림살이가 스산한 철거현장을 찾아가기 전에도 그랬고, 구사대에게 두들겨 맞은 조합원들을 방문하기 전에도, 열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전에도 그랬다. 솔직히 피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참 묘하다. 막상 현장을 찾아가보면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참담한 비극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붕대 감은 손으로 여전히 먹고 마신다. 다리를 절룩이며 웃고 떠들고 농담까지 나눈다. 슬픔, 분노, 절규만이 가득 차 있을 거라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다. 

 

 

다음으로 '밤은 노래한다'를 읽어야겠다. 김연수 작가, 훌륭해. ㅠ

2010/09/06 14:18 2010/09/06 14:18

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우연과 우연이 만나면 필연이 되는걸까?

필연으로 보이는 것들은 실상 우연에 불과할 뿐.

어쩌면 우연으로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필연이었을지도.

기표가 기의에 미끄러지듯,

내가 닿고자 했던 필연은 다른 우연으로 미끄러지고,

그 우연은 다시금 필연으로.

 

내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오만일 뿐,

내 마음도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서로 사랑했어요, 하지만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

그러나, 난

죽을만큼 노력하면 한덩이 진심은 전달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죽을만큼.

2010/05/08 00:16 2010/05/08 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