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에서와 비슷한 느낌이다.

 

김연수 작가의 어법을 이제 조금 알 듯하다.

 

밤은 노래한다에서도 나는 내가 만난 이들이 누구인지, 무엇이 진짜인지 알지 못한다. 누가 민생단인지, 민생단이 정말 밀정인지,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 자신도 알 수없다. "그 시절의 진실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 지금은 과연 이 세계에 객관주의라는 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도 든다. ...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주관으로 결정되는 가혹한 세계뿐이었다."

 

톨스토이의 책을  버렸지만, 톨스토이를 버릴 수 없었다던 이의 이야기가 깊이 와닿았다. PT독재가 와닿지 않는 주인공은 "용용한 강물 되어 ... 나 어찌 가느다란 실개천에 그치랴"며 시를 읊지만, 주인공에게 PT독재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며 설명해주는 이는 "엄마 없는 새 헤매이는 새 눈 오는 날에 발가벗은 나무에 혼자 앉아서 적은 고개 숙이고 눈물 흘리며 엄아 엄마 보고파 슬피 웁니다"라고 읊는다.

마르크스를 택한다는 것은 세계가 변화하는 것임을, 그 변화를 멈추는 것이 오히려 인간을 더 잔혹하게 만드는 것임을, 인간에게는 그 잔혹함을 넘어설 힘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톨스토이와 함께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를 택한다는 것은 세상의 잔혹함이 진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힘과 세상의 잔혹함. 비극. 다시.. 비극. 그래서 소설 속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음으로써 세계가 조금 변화한다면 그 이상 아쉬움은 없소." 다른 장면, 다른 사람, "사람이란 자기 인생 행로에서 잊기 어려운 추억을 갖게 마련이지요. 이런 추억은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심금을 울려주면서 떠오르는 것이에요."

로자 룩셈부르크. "인간답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화창한 날을 맞을 때마다, 아름다운 구름을 볼 때마다 그것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소설 속 누군가는 공산주의자들은 진짜 세계가 어떤 것인지 한번쯤은 경험해본 사람들이다, 그래서 변절하지 않는다면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겪은 세계가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한단 말인가. 김연수의 소설에는 양발을 위태하게 딛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부연하자면, 그 위태함이 생명이다. 톨스토이와 마르크스를 양손에 들고 고민하는 것, 레닌과 마야코프스키를 함께 끌어안는 것. 생산력으로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다. 진짜세계를 안다는 건 어떤 세상의 한 단면이 아니라, 무엇이 역사를 바꾸는지 보는 것이다.

 

민생단에 대해선 질문이 끝을 문다.

얼마전 읽은 문화대학명 이야기도 떠오른다. 균일하지 않은 덕에 보황파가 조반파가 맞바꾼 입장을 가진 지역도 있었다고.. 당장 한국에 존재하는 운동 단위 중 자신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는 곳이 없을텐데, 정말 누가 진짜일까? 오히려 진짜는 이 혼탁함 또한 세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망설임 또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을까?

 

마지막, 편지를 읽으면서 좁은 문이 떠올랐다. 좁은 문을 읽으면서 주체할 수 없었던, 어느 날. 그리고, 사랑, 사랑, 사랑.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그 유일한 순간. 세상의 모든 의미를 설명하는 유일한 의미. 심지어 죽음 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