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서 내내 불편하고 찜찜했다.

 

몽족이 미국의 병원에서 진료받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을 바탕으로, 문화의 충돌과 이해에 대해 얘기한다. 질문이 복합적인데, 우선 몽족 아이가 미국의 병원에서 겪어야 했던 일들이 단지 몽족에게 국한된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현대의학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책을 읽어가면서 불편했던 건, 그 문화적 차이가 여타 관계들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서술했다는 느낌때문이었다.

 

환자를 시술의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현대의학에 대한 비판이 낯설지는 않은 세상이다. 책의 한 구절처럼, 한 인간에게 생명이 우선인지, 혼이 우선인지는 가치관의 문제일 수 있다. 병원과 현대 사회는 이런 질문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비판에 동의하지만, 이게 단지 물질만능에서 벗어난 가치관을 찾는 걸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학이 아닌 생의학 패러다임이 승리하게 된 역사적 배경, 그러니까, 자본주의적인 의료의 발달을 주목해야하지 않을까. 병원에서 겪는 불편함(모멸감, 좌절감 등등 부정적인 여러 감정)은 몽족에게 더 극단적으로 표현됐을 뿐,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감정이다. 내국인이 의료를 이용하며 겪은 그 불편함은 책임의 화살을 문화의 차이에게 돌릴 수 없듯이, 몽족 또한 오히려 다른 갈등요소를 찾아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약간 이어지는 맥락에서, 미국 문화와 몽족 문화를 대립시키며 설명하는 방식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미국은 개인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데 반해, 몽족은 공동체를 우선적인 가치로 둔다는 식의 설명 말이다. 미국에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더 많을지는 모르지만, 그 사회에도 공동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의학 패러다임이 현대의학의 주류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한국의 세태가, 모두가 지극히 경쟁을 강요받고 분자화된 개인으로 쪼개져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럼 이게 한국의 문화인 것일까.. 문화와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함께 묶여 있는 것인가? 아니, 그러니까, 대체 문화란 무엇인가? 

책에서 대비한 몽족과 미국의 차이는 오히려 그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의 상이함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한국을 보자면 1900년 조선과 2000년 한국 사이에서 차이를 문화의 차이라고 볼 것인지, 다른 요소들의 차이로 볼 것인지, 그런 질문이다. 당연히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는 없다. 난 몽족과 미국의 생활양식 차이를 '문화'라는 단어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공백이 많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모습을 봐도 그렇지만, 과학기술이 세계 여느 나라에 뒤지 않는 한국에도 점집과 굿은 흔하고, 얼마나 신뢰하든 대개 사주 한 번쯤은 보러간다. 미국의 합리성에 기반한 문화와 몽족의 비합리적인 문화의 충돌이라는 관점은 허구적이라고 말하려는 건데, 책 각주에도 몇 사례가 소개되어 있지만, 미국 내에도 종교적인 의식으로 병을 치료하려는 시도는 광범위하다. 소위 서구문명은 '합리성'을 다른 가치보다 우선하는 가치로 삼지만, 이게 그 사회가 얼마나 합리적이느냐와는 전혀 별개이다. 자본주의만 봐도 비합리의 극치인데. 그 합리성이 다른 문명에는 부재하다고 믿는 게 서구문명의 오만함이다. 이걸 비판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것도 훌륭한 가치라고 설명해버리는 류가 있지만, 난 맥을 잘못 짚었다고 생각한다. 몽족이 자신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나름의 합리적인 사고가 있기 때문이다. 왜 병이 생기는지, 어떻게 할 때 병이 낫는지 등에 대한. 그런데, 비합리적인 것도 훌륭한 가치라고 설명하는 류들은 비슷한 접근으로 서구문명과 구별되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문화들을 모조리 긍정해버리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의학에도 역사가 있고, 2천년 전의 것이 결코 그대로 이어져 오지 않는다. 그 안에서 많은 경험과 비판이 축적되고,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계승하는데, 오히려 최근에 전통이라면 무엇이든지 긍정하려는 반역사적인 태도가 널리 승인받고 있다. 이런 게 문화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 않나 싶다. 어떤 문화가 서구문명과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들은 순일할 수도 없고 나름의 방식으로 투닥거리고 있을 게다.

 

역시 이어지는 맥락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문화상대주의는 사회의 여러 모순을 문화로 환원하는 효과를 가지지 않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은 '차이'일 뿐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계급적인 불평등도 노력하면 해소가능한 '차이'가 되버린다.

근래 읽은 이글턴의 책이 계속 떠올랐는데, 이글턴은 기독교/이슬람 급진주의는 종교로 정치를 대체하려는 시도이고 문화주의자들(문화상대주의, 뉴에이지 등)은 문화로 정치를 대체하려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꼴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보편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읽는 내내, 이 이야기들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이글턴이 우려하는 게 이런 접근이겠구나 싶었다. 모든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 이야기는 듣기 좋지만, 보편성을 전제하지 않는 차이는 오히려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서로의 문화를 지키는 게 우선이라면 소통을 지연하는 게 최선이니까. 이 책의 저자가 이런 보편성을 찾아낼 가능성을 완전히 외면하고 있지는 않다. 인간으로서 겪는 고통을 서로 이해하는 장면들이 실려있다. 다만, 그런 공감에 둘러쳐진 장벽을 압도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어떤 이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둘 다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고, 상대방에게는 한국인 동행이 있었다. 대화는 동행을 가운데 두고 진행되었다. 상대방은 자신의 말을 모국어로 삼지 않은, 그래서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동행에게 말을 하고, 동행은 나에게 한국어로 말을 해준다. 상대방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다 할 수가 없고, 나는 한국인 동행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한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최대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들을 선택하기 위해 마치 어린아이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태도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쨋든 나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어휘들로 말을 하고 있었고 상대방은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어휘 중 극히 일부만 골라쓸 수 밖에 없던 거였다. 상대방이 자기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있다면, 나보다 뭘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상대방도 느꼈을 것 같은데 순식간에 위계가 만들어지는 걸 경험했다. 지금도 떠올려보면 답답하고, 어떻게 했어야할지 잘 모르겠다.

몽족이 미국 병원에서 부딪힌 여러 문제 중 언어 문제가 큰 문제였으리가 생각한다. 책 저자는 통역자가 아닌 문화중개인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내 경험에서 그 사람과 대화 중 위계 관계가 만들어졌던 건, 서로 문화가 달라서가 아니라 언어라는 실물적인 장벽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장벽 너머에서 내가 더 대화의 주도권을 가진 건, 이곳이 한국이기 때문일텐데, 한편 만약 그 사람이 미국인이었다면, 절대 그런 상황이 되지 않았을거다. 그러니까, '문화', '언어'라는  어떤 독립적인 요소가 장벽인 게 아니라, 그 요소들이 장벽이게 하는 정치/사회적 맥락이 존재한다.

 

대충 할 말은 거의 다 했는데, 읽으면서 가장 크게 꺼끌렸던 걸 마저 짚어야겠다. 저자는 몽족이 미국으로 이주해오게 된 배경을 마치 중립적인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 마냥 서술한다. 베트남 전쟁안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세력이 후방을 교란시킨다. 이건 마치 게임 중계와 비슷하다. 미국과 월맹이라는 두 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고, 서로 동맹세력을 많이 끌어들여 전쟁에서 이기려 하는 거다. 한국전쟁을 서술할 때도 대개 이런 식이잖은가. 이런 서술에서는 미국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 했던 베트남 민중의 항쟁이 온데간데 없고(한국전쟁을 얘기할 때 미군정에 맞서 정치파업을 하고 게릴라 항쟁을 벌이던 이들의 역사가 사라진 것처럼), CIA의 지원을 받은 몽족 전투부대가 베트남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데 협조한 것임을 삭제한다. 라오스 인민전선이 라오스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라오스 민중이 미국과 맞서 싸우는것을 몽족이 깨트리려 했던 것임을 서술하지 않는다. 물론 그 안에 더 역사 깊은 갈등들이 담겨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베트남 전쟁을 스타크래프트 같이 그려서는 안되는 거다. 저자는 부정적인 의미로 라오스 정부측 입장을 인용한다.

"미국은 태국의 반동분자들과 공모해 메오족에게 압력을 넣어 라오스를 탈출하여 태국으로 가도록 하고 있다. 이 일의 목적인 인도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들의 노동력을 싼 값에 착취하고, 그들을 병사로 키워 나중에 이 나라로 돌려보내 평화를 깨기 위함이다."

하지만 난 이 인식에 공감한다. 

여기까지는 참고 읽었다. 그런데 저자는 몽족이 고난을 겪으며 피난 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듣자니 어느 이스라엘 아기에 대해 쓴 글이 떠올랐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피해 숨어 있었는데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당황한 엄마가 아이의 입을 너무 틀어막는 바람에 아기가 질식사하고 만 것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 구절을 읽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더 읽지 못하고 한참 덮어뒀다가 나중에 다시 펼쳤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떠오른 가장 큰 고민은, 저자의 정치적 태도와 문화상대주의에 인과가 있기 않을까,라는 질문이었다. 문화상대주의가 착취를 은폐하며 자본주의를 공고하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고, 저자는 그런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한국에도 '다문화'라는 얘기가 많이 흘러나온다. 조심스럽다.

 

 

리아의 나라 - 몽족 아이, 미국인 의사들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
리아의 나라 - 몽족 아이, 미국인 의사들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
앤 패디먼
윌북,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