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완전 의욕상실 상태로 뻗어서, TV에 지나가는 드라마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재밌네? 드라마 제목도 모르고 배우 이름도 몰라서 유일하게 이름을 아는 배우 한명과 온갖 조합을 다해 검색했더니 굿바이 솔로였다. 단막극 정도로 생각했더니, 16화나 되네..
어쨋든, 다 보았고, 재밌었다.
영숙: 사랑할땐 왜 그렇게 빈말들을 잘 하는지,
순진한 애도 사기꾼처럼 말을 번지르르르.
수희: 적어도 그 순간엔 진실 아닌가?
영숙: 그럼 지금 이 순간 니가 내 전부고,
지금 이 순간 너만을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 미치게 사랑한다고 해야지,
왜 건방지게 영원히를 앞에 붙여들.
이런 대사들 참 좋다. ㅋ
내가 한 번쯤 내뱉었던 말들, 가졌던 마음들이 화면에 흐른다. 드라마 인물이야 당연히 현실이 아니겠지만, 그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판타지스럽지 않다. 곳곳에 내 모습이 투영된다. 대부분의 다른 드라마 속 사랑이야기들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다. 감정이 아예 동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건 공감이 아니라, 과잉된 감정들에 취하는 것일 뿐이다.
보기에 아름답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야기들은, 되려 뱃속을 허기지게 만들고, 모든 인간을 외롭게 만들 뿐인데, 이 드라마는 그렇지 않았다. 노희경 작가와 박경리씨와 비슷한 느낌이 있다. 너무 뜬금없나.(생각해보니, 다른 작가와 겹치는 부분이 더 많을 것 같다. 요즘 박경리씨 생각을 많이 해서 그렇게 느끼나 보다.. ㅎㅎ) 누구나 아픔 하나씩은 갖고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누구도 비범하지 않다는 것.
지금까지 내 연애는 수희나 건달 사이의 어디쯤이었을 것 같다. 민호, 미리와는 좀 다른 것 같아. 때론 모든 것 다 걸지만, 싫은 거 좋다고 하지는 못한다. 드라마를 보다 보니 며칠전에 서점에 서서 대충 훑었던 고미숙씨의 '호모에로스'가 떠올랐다. 영원이란 말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기- 이런 책 내용은 나도, 항상 고민하는 주제이고, 그 말처럼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의 지향이다.
누구를 만나든, 그 만남은 유일한 것이고, 특별한 것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것은 함께 삶을 나누는 동안 만큼이라는 걸 안다. 그 만남의 길이를 연장하기 위해, 결혼을 택하고, 거기에 '운명'이란 수사를 붙이기도 하나본데, 난 그렇게 서로의 삶을 얽어 관계를 유지해야할만큼, 마음이 절실하지 않다. 누군들 절실할까? 그것도 결국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판타지가 소환한 허깨비. 그 순간순간이 운명일뿐, 난 당장 10년 뒤 내 모습을 기약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삶 전체를 기약하나. 혹여 서로의 삶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그저 '너만 있으면 돼'는 우습다. 내 삶의 방향이 세워지고, 너의 삶의 방향이 비슷한 즈음이면, 연인이자 동지의 관계로 살아가겠지-그래도, 또 누군가에게 찌릿해지는 걸 피할 수 있을까? 많은 예술가, 혁명가들의 연애가 그러했듯.
날내나는 내가 이렇게 주절거린 것들을 체화하는데 까지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처음 연애를 할 때에도,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는,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마음이 변하는 걸 직접 겪어보니,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는 것과 체화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아득하다.
'호모에로스'의 글들은 드라마 속 영숙에게 입혀져있다. 대사처럼의 연애라면 참 편할 것 같다. 하지만 드라마 속 대사처럼,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 순간에는 영원하길 바라며 사는 건 건전하다. 삶은 언제나 미끄러진다.
'호모에로스'의 글쓴이가 말하는연애도 애초 불가능한 형태에 불과할지 모르는데, 혹은 여러 다양한 관계중 하나일지 모르는데, 좋은 연애/나쁜 연애를 가르는 것 같아 책을 읽으며 좀 불편했다. 드라마에서는 현실의 연애를 보여주지만, 책은 어떤 것이 좋은 연애라고 가르친다. 안타까움 보다는 깔봄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드라마 영숙이 내 동경이지만, 어쨋든 영숙도 판타지에 불과할지도.
(건달은 극중에서 끊임없이 주전부리를 하고 있다. 민호도 외로워졌을 때 주전부리를 한다. '호모에로스'에 외로우면 야식이나 야동에 빠진다는 내용이 있는게 떠오른다. 마치 노희경 작가가 그 책 읽고 대본 썼을 것 같단 느낌이 들정도로 책에 있는 내용이 드라마에 보인다. 그런데 드라마가 책보다 2년은 빠르다.; 비슷하게 경험하고 살았나?)
그리고 드라마가 좋았던 건, 누군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줘서다. '사랑'을 남녀간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로만 그리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이라는 것을 함께 보여주는 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이다. 끊임없이 상처받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상처를 서로 내보이며 치유하고 치유받는다. 특히 그 역할을 도맡는 게 영미할머니인데, 눈이 촉촉하지 않은 장면이 별로 없다.ㅋ 평생 그런 장면을 몇번이나 겪을까마는, 그 순간의 감정들이 생생해져 가슴이 따뜻했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 참 싫어하는데, 드라마 속 그 인물은 미워지지 않았다. 이해해달라고 칭얼거리는 통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것도 아프겠구나 싶었다. 미워지지 않게 인물을 만들어 놓은 것도 놀라워. 하지만, 할 말은 정확히 한다.
왜 세상 사람 모두가 널 이해해야 되는데? 세상 너만 힘든거 아냐.
너는 왜 언제나 너만 아퍼, 혼자 외로운 척하지마.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보듬어 주는 게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조금씩 알아간다. 그렇다고 아직은, 내가 잘 안아주는 것도, 다른 이에게 보듬어 달라고 열어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노력하고 있다. 동정받는 게 두렵고, 또 나의 위로는 동정이 될까봐 망설인다. 그 두려움에, 나를 내보이지 못하면, 나 또한 다른 누군가를 보듬을 수 없다. 진심을 다해 말하면, 위로가 위로로 전달된다. 하지만, 진심을 다하기 위해 때론 죽을 힘을 다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배우고 있다.(위로가 이럴진대, 사과는 어떠한가.)
나, 매일매일 기도해,
이 세상 모든 상처받고 힘든 사람들에게,
등 뒤에서 안아줄 사람, 단 한사람이라도 있기를
그 단 한사람을 만나는 게 참 어렵다. ㅎㅎ, 단 한사람이라도 있기를. 내가 누군가에게 그 한사람이 될 수 있기를.
대사 옮겨 적고 보니, 극 초반부와 마지막회 밖에 없네. 가운데에도 주옥같은 말들이 많았는데, 어떤 내용이이었는지도 잘 생각이 안난다. 옮겨온 대사도 어떤 내용이었는지만 간신히 기억했뒀다, 게시판을 뒤져 찾아 옮겨온 것. 이런 것들을 정확한 문장으로 기억해내는 사람들 참 부럽고 신기하다. ㅠ
그런데 이 드라마도 초반, 중반 까지 참 맘에 들었는데, 마지막으로 가니 내용이 좀 억지스러워진다. 뭐 그래도 좋았다.
노희경 작가의 아래 글을 읽은 적 있는데, 이 드라마에 그대로 녹여놓은 것 같다.
버려주어 고맙다
내 순정에 다쳤을 첫사랑 그대에게.
이제야 그대에 대한 무수한 원망을 내려놓고 비로소 참 많이 미안했었다. 참회할 용기가 난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난 왜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자만이 뿌리깊었나, 아니다 자기연민이 독했다. 나이가 들면서 늘어가는 건 주름만이 아니다. 살면서 홍역처럼 반드시 거쳐야 할 경험과 남과 별다르지 않게 감당했어야 할 상처들이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대와 주고받았던 모든 것들이 마냥 별스러워 엄살인 줄도 모르고 악을 쓰듯 독하게 킁킁거렸다. 그때 그대는 참으로 냉정했었다. 원망스러웠던 그 순간이 이제야 맞춤맞은 순리였음을 알겠다.
나를 버려주어 고맙다, 그대.
순간 이 글을 쓰면서 겁이 난다. 나만큼 설레지 않고 나만큼 애타하지 않고 나만큼 절절하지 않은 그대에게 나는 늘 이런식으로 상처를 주었다. 잘났나봐, 무시하나봐, 그런 직설을 내려놓고, '고맙네, 정말' 웃으며 칼 주는. 꼬여진 실타래처럼 정말 난감하게 엉켜서 그대를 몰아붙였던 한때를 그대여 지금은 떠올리지 마라. 그리하여 이 글을 읽지 않고 서둘러 덮지 마라. 세월이 변하듯 사람도 변했다. 그대, 이제 엉킬 기운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들어라, 고맙다, 정말 버려주어.
그대와 헤어져 20년이 흘렀다.
그 20년의 세월 안에서 나는 정말 뚜렷이 알아차린 것이 있다. 진실이나 사실이란 말은 함부로 써선 안 된다는 것, 모든 기억은 내 편의대로 조작될 수 있다는 것. 하여, 이제 내가 말하려는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는 어쩌면 또다시 나만의 기억일 뿐 그대와는 무관한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혹여 내 서술이 그대의 마음과 아랑곳없더라도 웃으며 봐달라. 이 사람은 이리 생각했었구나 하고.
그대가 나를 일방적으로 버린 스무 살 겨울,
나는 그대를 배신자로 낙인찍었었다.
매일 전화하고 하루걸러 한 번씩 만나고 서로의 속살도 아닌 드러난 살이 스칠 때에도 머리끝까지 삐죽하던 그때, 그대는 돌연 모든 걸 멈추었다. 전화도 받지 않고, 편지해도 답이 없고, 만나도 확연히 시들해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내 드라마 주인공은 참으로 상대에게 용기 내어 잘도 묻는데 나는 그대에게 묻지 못했다. 내 잘못을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어리석다. 사랑한 대상을 미워할 대상으로 바꿀 오기는 있으면서.
모든 겨울처럼 밤이 깊은 겨울이었다. 며칠째 몇 주째 연락이 안 되던 그대를 찾아 나섰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얇은 추리닝 바람이었다. 20년간 나는 그때의 내 행색을 다급함이라고 애절함이라고 포장했지만, 이제야 인정한다.
상처주고 싶었다.
니는 이렇게 너보다 순정이 있다. 그런데 너는 나를 버렸다.
그렇다면 무참히 무너져주겠다. 내 옆에 머물러 있어야 할 네가 기어이 날 그냥 스쳐만 지나가겠다고, 네가 상처준 어린 이사람을 똑똑히 기억하렴. 나는 눈 오는 그대의 집 앞에서 밤을새워 오들거렸다. 그대는 이층 창문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 커튼을 쳤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대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대학을 갔어.
말해주고 싶었어.
뚝.
그대 목소리는 나데 대한 죄책감으로 작고 의기소침했다. 반면 내 목소리는 얼마나 당찼던가.
잘됐군.
웃음이 난다. 좀 더 나중까지 사랑한 게 뭐 그리 대단한 유세라고. 이후의 내 행동은 더욱 우스꽝스럽다. 그대랑 헤어지고 나는 이내 A, B를 만나놓고, 7,8년 뒤 다시 그대를 만서서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나"라고 말했던 거 같다. 그때 그대는 참으로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책했었다.
왜 너는 그렇게 순정적인데,
나는 이 모양이냐고,
지금 사랑하는 누군가와도 나는 또 시들해진다고.
나는 기뻤다.
그대가 나랑 헤어져 계속 휘청대서, 그리고 내가 순정적으로 보여서, 그리고 다시 5,6년 뒤, 그대를 보았다. 그대는 여전히 휘청대고 여전히 나에게 미안해하고 여전히 또 누군가와 시들한 상태였다. 그때 나는 이제는 우린 친구야 하며 내가 그대를 극복하고 우정으로 승화시킨 단계를 서술하며 넌 왜 그렇게 살아,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없어 하며 훈계하고 의기양양했던 거 같은데 기억하는지. 그리고 다시 5,6년이 흘러 지금이다.
미안하다, 그대여.
이제야 고백건대, 나는 그대에게 바쳤던 순정을 스무 살 무렵에 이미 접었었다. 그런데 왜 말 안 했냐고? 나는 마음이 변하는 게 큰 죄라 생각했다. 그 어리석은 생각은 참으로 오래갔다. 그래서 그대를 괴롭히고 그대보다 나를 더욱 괴롭혔다. 그대와 헤어지고 누군가를 다시 만나서도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그대에게 바쳤던 순정만을 내세우며 유치한 대사를 남발했다.
나에겐 네 자리가 없어
젠장이다.
그러면서 왜 그들과 여행은 가고, 설레는 눈빛을 주고받고, 짜릿하기까지 했었는지.
그대 나는 그런 아이였다.
그대여.
이제 부디 나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라. 사랑에 배신은 없다. 사랑이 거래가 아닌 이상, 둘 중 한 사람이 변하면 자연 그 관계는 깨어져야 옳다.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게 후회로 남으면 다음 사랑에선 조금 마음을 다잡아볼 일이 있을 뿐, 죄의식은 버려라. 이미 설레지도 아리지도 않은 애인을 어찌 옆에 두겠느냐. 마흔에도 힘든 일을 비리디 비린 스무 살에, 가당치 않은 일이다. 가당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린 모두 오십보백보다. 더 사랑했다 한들 한 계절 두 계절이고, 일찍 변했다 한들 평생에 견주면 찰나일 뿐이다. 모두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다 괜찮다.
이제 나는 다시 그대와 조우할 날을 기다린다. 그때는 그대와 웃으며 순정을 포장한 가혹한 내 행동들을 맘 아프게가 아닌 웃으며 나눌 수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만약 볼 수 없다면, 잘 살아라, 그대. 그리고 내 걱정은 하지 마라. 나는 행복하다.
( 노희경 에세이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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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국립공원 제1호가 되어 사시사철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지리산 구석구석에는 지금도 이현상과 동료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토벌대에 쫓기느라 제대로 파묻지도 못한 채, 꽁꽁 언 땅을 숟가락으로 긁어 눕히고 눈과 낙엽으로 덮어놓았던 시신들은 오십 년 세월 동안 부패하여 흙이 되었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나무 부스러기처럼 산화된 뼛조각들이 발견된다. 그들이 사용하던 식기도구며 등사기의 잔해가 발견되기도 하고 삭아버린 종잇장에 그들의 혼이 담긴 구호들이 희미하게 남아있기도 한다. 조국통일, 민족해방, 노동계급의 영용한 전사들이라는 그 빛바랜 단어들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영하 이십 도가 넘는 혹한의 산중에서 보온장비라곤 없이 맨몸으로 총을 끌어안고 졸음을 쫓던 이들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현상과 동료들의 전쟁은 이제 끝났는가? 아니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가?
- 프롤로그, 이현상 평전, 안재성
지리산에 간다 해서 답이 나오지는 않더군요. 그저 숙연해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