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의 대표값을 정하기 위해 평균값을 선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최빈값, 중간값, 평균값을 구분해야 한다. 대칭적 분포에서는 세 값이 일치하지만 기울어진 곡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또한 당연히 최대값은 개체를 대표할 수 없다.
개체의 분포에서 오른쪽 꼬리를 분리시켜 특정한 속성으로 규정해서는 안된다.
- 오른쪽 꼬리는 전체 분포 속에서 읽혀야 하고 그 속성은 전체에서 분리되어 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저자는 전체 분포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뜻에서 이 세계를 '풀하우스'라고 이름짓고 있다. 따라서 '진보'는 기존에 있던 개체에서 분리되는 과정이 아니라 전체 개체의 분포가 함께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는 진보와 동의어가 아니다.
-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진보를 향한 내재적인 경향 같은 것은 없다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다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개체의 평균 복잡성은 전체적으로 증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분포가 왼쪽 벽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넓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왼쪽 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빼먹으면 오른쪽으로의 분포 확장이 어떤 경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최소복잡성의 왼쪽 벽 바로 옆에서 박테리아 형태로 시작된 생명은 지금도 같은 위치에 남아있다. 무작위적인 운동의 결과인 오른쪽 꼬리는 전체 개체를 추동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운동의 효과(굴드는 결과와 효과를 구분한다)이다.
그래서 굴드가 요약한 걸 옮기면,
1. 생명은 왼쪽 벽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2. 초기 박테리아 형태의 장기적인 안정성
3. 생명이 성공적으로 팽창해 감에 따라 분포 곡선은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갈 수 밖에 없다.
4. 분포 전체의 꼬리에 불과한 최대값으로 분포 전체의 성질을 규정하려는 것은 근시안적인 경향이다.
5. 원인은 벽과 변이의 확장이다.
6. 한 시스템에 진보를 슬그머니 끌어들이는 방법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경험상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7. 오른쪽 꼬리에만 주목하는 편협한 시도를 결해한다고 해도, 전반적인 진보에 대한 절망을 제거했으면 하는 심리적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원하는 결론, 즉 인간처럼 의식을 가진 생물이 지배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진화의 결과라는 결온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문화에서의 진화와 다윈적 진화는 서로 다르다.
- 문화는 어떤 방향성을 축적할 수 있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문화에는 계통의 융합과 라마르크적 유전이 작용한다. 문화의 진화와 다윈의 진화를 서로 섞어 쓰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인식을 심는다.
변이와 다양성을 그 자체로 존중하라.
정해진 중력의 법칠을 따라 이 행성이 끝없이 회전하는 동안, 아주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경이로운 무한한 생물종들이 진화해 왔고, 진화하고 있고, 진화해 갈 것이다.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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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에서
-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한 경계(하이젠베르크의 '분과 전체')
- 단속평형론
- 도킨스와 굴드의 논쟁 : 삼각소간spandl은 원형 돔을 설계할 때 아치가 만나는 부분에 생긴 삼각형 공간을 말하는데 보통 장식적인 구조물로 꾸며 메워진다. 따라서 삼각소간은 건축상의 부차적 산물이다. 현재 장식적 용도로 훌륭하게 쓰이고 있으나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생긴 것은 아니다. 굴드의 생각에 따르면 생물의 뇌도 삼각소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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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를 진보로 동일시하고, 인간을 진화의 목적지로 상정하는 태도는 사실 얼마나 같잖은가? 총개체수로 보나, 총량으로 보나, 역사로 보나, 영향으로 보나 인간은 박테리아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굴드는 이런 목적론에 대항해 싸우는 것을 관념론과 투쟁하는 유물론자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알튀세르가 떠오른다. ㅋ 이 책과 함께 존 벨라미 포스터 등이 쓴 다윈주의와 지적설계론 논쟁을 읽고 있는데, 포스터는 결정론에 굴복하기 보다는 신의 간섭을 택하겠다고 까지 말한다. ㅎㅎ 목적도 기원도 없는 역사.
다윈 200주년이라는데, 진화론에 관심이 생겨 이런저런 책들을 들춰보고 있다.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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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디선가 퍼놓은 글, 이 글 읽고서 확 깨졌었다.
피라미드는 없다
- 진화론 150년, 오해의 역사
“생명의 역사엔 스펙트럼만 존재한다”
김우재 (http://my.dreamwiz.com/korean93)
전 세계 생물학자들의 영웅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출판한지 백년이 훨씬 지났지만, 다윈과 그의 진화론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진화론의 역사는 많은 오해들로 점철되어 있는데 이 중 ‘계층화’에 얽힌 오해보다 더 지독한 것은 없을 듯 하다. 다윈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회학자 스펜서(Herbert Spencer)는 이를 사회적 진화론으로, 프랑스의 신부이자 고생물학자였던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은 이를 오메가 포인트로, 히틀러(Adolf Hitler)는 이를 게르만 민족주의로 표현했다. 하지만 유전학자 멀러(Hermann Joseph Muller)의 말처럼 “다윈에 대한 몰이해는 1백년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의 두뇌는 이러한 ‘계층화’에 능하고 익숙하다. 얼마 전 타계한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테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이를 “모든 사물을 선형으로 증가하는 가치로 서열화 시키려는 경향”이라고 정의했다. 굴드에 따르면 서구의 네 가지 나쁜 지적 전통은 환원주의, 계층화, 물화, 이분법이며 진화에 대한 오해도 이 네 가지 전통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내기를 하나 걸자.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진화를 ‘진보의 사다리’ 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여러분의 잘못은 아니다). 아마도 그런 분들에겐 박테리아로부터 원형동물, 무척추동물, 척추동물, 포유류, 영장류, 인간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를 오르는 과정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진화엔 목적이 없다. 진화는 환경에 맞추어 그때그때 땜질하는 식으로 조잡하게 이루어져 온 생명체들의 서사시다. 그래서 고래는 다리로, 펭귄은 날개로 ‘헤엄’친다. 굴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화란 “사다리가 아니라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진 나무”에 비유할 수 있는 과정이다. 진화의 무목적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교과서에 그려진 계통도를 머릿속에서 과감히 지우고 모든 생물을 원시 박테리아를 중심으로 둥글게 나열시켜보라. 인간은 그 가장자리의 약간을 차지하고 있는 영장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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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계층적 사유는 차이를
우열로 해석하고,
계층화시키는 이데올로기에서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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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간의 우수성은 진정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여러분과 나의 작은 만족감을 위해 흔히 인간만이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인간을 가장 우수한 종이라고 오해?만드는 사실들을 분석해 보자. 우선 두뇌의 절대 크기에 있어서 인간은 코끼리나 고래의 1/4에 불과하다. 이를 신체크기에 대한 두뇌크기의 비율로 환산할 경우 고래나 코끼리보다 인간은 월등히 낫지만, 다람쥐보다는 못하다. 그래도 인간의 두뇌에는 뭔가 더 복잡한 비밀(아! 예를 들어 대뇌피질의 주름)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면, 주름 수에 있어서도 인간은 돌고래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인간의 직립보행은 이미 수백만 년 전부터 캥거루도 해오던 것이고, 도구의 사용도 많은 동물, 심지어 곤충들에서도 발견되는 행동양식이다. 굳이 인간의 우수성을 꼽자면 손을 잘 사용한다는 점과 다른 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복잡한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지만 이런 특징들도 인간에게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만약 인류가 ‘의식’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진화의 정점에 선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군함조는 그 빠른 비행속도로, 박쥐는 초음파로, 바퀴벌레는 질긴 생존능력으로 진화의 정점에 서 있다고 말해 주겠다. 인간은 조금 더 영리한 동물에 불과하다. 우리가 인간의 척도 이외의 것으로 우리를 바라볼 수 없는 한 이러한 오해는 계속될 것이다(화성인이 되어보라!).
최근 IQ와 국가소득간의 상관관계를 다룬 논문 한편이 등장했다. 언제부터 IQ가 인간의 우수성을 설명해주는 지표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지능으로 사람을 서열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지능의 차이는 주로 집단 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집단 내의 차이는 집단 간의 차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백인종 집단내의 IQ 빈도차이가 흑인종이나 황인종과의 비교로 이어질 수는 없다는 뜻이다. 집단간의 차이가 집단내의 차이보다 커지는 것을 종분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류가 각 인종으로 나뉘어진 것은 수 만년도 안 된 최근의 일이며, 그 시간은 종분화가 일어나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우리는 희거나 검거나 노랗거나 모두 같은 종이다(백구도 점박이도 검둥이도 모두 개인 것처럼).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의 말처럼 “뉴기니의 깊은 삼림 속에 사는 작은 부족이 유일한 생존자로 남았다 해도 오늘날 50억 인구의 무수한 집단들 속에 표현되어 있는 모든 유전적 변이는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비슷하다.
지능의 일부는 유전되고 개인간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화의 추진력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극복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것은 아니다. 지능에는 유전적 소인만큼 환경적 소인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환경에 반응하며 발달할 수 있는 가소성을 지닌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다. 두뇌는 모든 것을 프로그래밍 해두기에는 너무나 좁은 장소이며, 자연선택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능이 높은 사람이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지능은 자연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운 형질이다. 게다가 지능에 대한 명확한 정의조차 없다.
인간은 자연에 존재하는 차이에 주목하고 이를 분류하는 습성을 가진, 호기심 많은 동물이다. 린네(Carl Linneaus)는 모든 생물들을 분류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종들을 서열화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최초의 지능연구자들은 지능에 따른 인종의 서열화를 주장했다.
이 모든 것들이 차이를 우열로 해석하기 좋아하고, 차이를 단선적으로 계층화시킨 후에야 만족하는 우리의 정신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이 틀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산이 산이고 물은 물이듯, 다른 것은 그저 다른 것일 뿐이다(개그는 개그일 뿐이다). DNA라는 불멸의 나선이 이룬 생명의 역사엔 피라미드가 아닌 스펙트럼만이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