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행 때, 박헌영 평전을 읽었다.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는데, 박헌영에 대해 모르고서는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어 읽어봐야겠다 맘을 먹었다.
박헌영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 모진 시기를 생존한 것 만으로도 경이로웠다.
무엇이 그 사람들을 버티게 했을까? 무엇이 사람을 그토록 잔혹하게 만드나..
버티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오류를 남겨선 안되었을테고, 자신이 믿고 있는 것 역시 오류여서는 안되었겠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만큼의 신념을 갖고 그것에 헌신하는지가 항상 궁금하다. 나에게 불신이 배어있다.
그 조그만 자리를 두고도 파벌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서글프다. 그런데 그 파벌싸움 또한 진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해보면 힘이 빠진다. 인간이란 서로 속을 완전히 내보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어긋날 수 밖에 없는걸까? 이렇게 근본적으로 이러저러하다는 답을 구하려 하면 지금 발딛고 있는 것 모두가 무가치해진다. 스탈린은 스탈린 나름의 진심이었을까? 김일성은? 아니었을거야. 그러니 선을 긋는 건 가치없는 게 아니야. 정말? 모르겠다..
숙청은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는 단어다. 나름 명망가들도 숙청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사람들, 어느 길거리에서 변명한 번 못해보고 죽었을 사람들, 이름조차 남아있지 못한 사람들.. 한 사람의 생명이 개미만큼 가벼워진다. 그런 작아짐은 또 한 번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대의를 위해서 라든지, 그런 거 아니라는 거 다 알잖아..
해방 이후 오히려 더욱 운신할 폭이 좁아지고, 일제강점기보다 더한 절멸의 위기 앞에서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었을까? 남로당.. 이현상.. 빨치산.. 올해 지리산을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빨치산이다.
한국전쟁을 결정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떠나, 그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해방을 위한 전쟁으로 생각했으리라는 것, 최소한 빨치산들은 자신들이 구조되기를 바랬으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가르는 정도에서만 찾고, 침략 자체가 비윤리적인 일이었다고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여왔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어느 쪽이 먼저 침공했느냐는 무자르듯 판단할 수 없고, 핵심적인 문제도 아니다. 당시 정세에서는 조건에 따라선 정말 계급투쟁으로서 내전이 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래서 필요한 질문은 이런 계급투쟁으로서의 전쟁은 올바른가? 저 사람들이 죽어야만 혁명을 할 수 있다면 그 혁명을 해야하는 건가? 저곳을 거치지 않는 길은 없는 걸까? 누구 말마따나 계급투쟁은 장난이 아닌데, 그곳에서 평화를 이념으로 가진다고 대항폭력이 아닌 다른 정치가 가능할까?
북에서도 버림받은 채 지리산에 최후까지 고립되었던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한사람, 한사람 삶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을까. 하지만 또, 이런 이야기들이야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앞으로도 많을 것인가.
박헌영 평전을 읽고나서, 우연히 책을 들추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얼핏 읽게 되었는데 이현상이란 이름이 나온다. 그 내용들이 예사로 읽히지 않았다. 알고 읽어야 그만큼 보인다.
여운형에 대해서도, 조봉암에 대해서도 읽어봐야겠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는 논문 모음인데, 무턱대고 읽기엔 너무 난해하다. 논문 형식이라 어떤 하나의 입장으로 죽 서술하지 않고 비교를 위해 다른 입장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애초 그 시기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뭐 어쩌라고'만 연신 튀어나온다.
우선 사람 중심으로 읽는 게 더 좋겠다.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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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국립공원 제1호가 되어 사시사철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지리산 구석구석에는 지금도 이현상과 동료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토벌대에 쫓기느라 제대로 파묻지도 못한 채, 꽁꽁 언 땅을 숟가락으로 긁어 눕히고 눈과 낙엽으로 덮어놓았던 시신들은 오십 년 세월 동안 부패하여 흙이 되었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나무 부스러기처럼 산화된 뼛조각들이 발견된다. 그들이 사용하던 식기도구며 등사기의 잔해가 발견되기도 하고 삭아버린 종잇장에 그들의 혼이 담긴 구호들이 희미하게 남아있기도 한다. 조국통일, 민족해방, 노동계급의 영용한 전사들이라는 그 빛바랜 단어들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영하 이십 도가 넘는 혹한의 산중에서 보온장비라곤 없이 맨몸으로 총을 끌어안고 졸음을 쫓던 이들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현상과 동료들의 전쟁은 이제 끝났는가? 아니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가?
- 프롤로그, 이현상 평전, 안재성
지리산에 간다 해서 답이 나오지는 않더군요. 그저 숙연해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