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보고서 영화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들의 저항은 지금도 계속된다'는 포스터 표제와는 달리 과거의 운동을 청산하는 시각에서 영화는 전개된다. 청산은 아니라 할지라도, 영화는 너무 모호하다. 어느때에는 너희는 헛것을 보고 싸운거라는 얘기를 하는데, 그들이 정말 그랬을까?
테러리즘이, 혹은 그들의 저항이 자기 모순이었다면 그것을 들추면 될 일인데, 영화는 개인들이 어떠한 모순도 느끼지 않는 것 마냥 그리고 있다. 이건 애초에 피를 즐기는 인종이 테러를 한다는 식이다. 오히려 테러의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공권력이 스스로 던진다. 적군파 스스로는 그것에 대한 질문도 못던질만큼 폭력에 미친 집단이었던 걸까. 아니면 관객들이 동기 정도는 이해할 거라 생각해서 언급하지 않는 걸까. 물론 초반에 어떤 꿈이 있었는지는 소개되지만, 바더-마인호프 그룹이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고민으로 테러를 선택했는지가 빠져있다. 그들의 군사훈련 장면은 실제와 너무 달랐을 것 같은데, 자신의 저항을 하나의 놀이쯤으로 생각한 것 처럼 그린 게 싫다.
그런데, 불쾌감을 유발한 장면들이 실은 현실에 판박이로 재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걸 감독의 악의로 볼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진다. 테러리즘은 애초에 그렇다. 사회의 토대와 관계를 뛰어넘어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일텐데, 그런 태도들이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배어있다. 음.. 더 생각해보니, 감독이 여기까지 고려하지 않고 만들진 않았겠구나 싶네.. 모호할 수 밖에. 자신에게서 괴물이 나왔고, 자신이 그 괴물의 존재이유일 때 선택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다. 영화는 최소한 그런 정도의 진정성은 부여해줬다.
테러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혁명을 하자는 것 만큼이나 반혁명적인 것이 없다. 하지만 그 같은 상상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해.. 참 많은 사람이 죽어왔고, 눈에 보이는 테러 이상으로 잔혹하고 은밀한 죽음들이 이어지는데, 이런 유혹을 떨치기 쉽지 않다.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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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사나? 뭔 잡념이 그리도 많냐?
백수로 잉여생활을 하고 있으니 생각만 가득 찼어요..ㅋ
밥 잘 먹어요. ㅎㅎ
시대정신이라는 뉴라이트 잡지에 실린 글. 평가는 개떡같지만, 읽어보니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오른다.
적군파, 그 좌절의 역사
"1968년의 위대한 꿈이 실현될 수 없게 되자, 급진적 학생들은 자기들의 혁명을 위하여 작은 테러조직들의 건설을 시도했다. 이것이 언론들에서는 많은 주목을 끌기는 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선진국에서 게릴라 방식을 통해 혁명을 관철하려는 시도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이 세계의 문제의 뿌리가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16세기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제 3세계 정복에 있다라고 하는 세계체제 이론가들의 주장을 믿었던 사람들은 20세기에 이러한 역사적 과정의 역전이 1세계의 무기력한 혁명가들에게 자신의 무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방향의 가장 강력한 논거들이 미국에 뿌리박은 사회주의적 역량의 승리를 거의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좌파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주1) ― 에릭 홉스봄 ―
"잘못된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일들을 우리는 충분히 오랫동안 해왔다. 바아더 구출작전은 지식 수다장이와, 겁쟁이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하는 자들에게 설명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민의 잠재적인 혁명적 부분을 위한 것이었다. '좌파'의 수다는 결과와 행동이 없기에 아무 것도 가져올 수 없다....... 우리는 충돌을 최고의 정점까지 밀어붙이기 위해 적군파를 건설한다."
― 바아더(A. Baader) 구출에 즈음한 적군파 건설선언 중에서(주2) ―
1.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앞둔 98년, 독일은 이 해에 많은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지난 9월 27일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이변 아닌 이변이 연출되었다. 변화를 두려워하기로 유명한 독일 사람들이 최초로 의회내의 표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투표에 의해 현직 수상을 갈아치운 것이다. 사민당(SPD)의 승리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만, 이들의 압도적 승리와 집권 여당의 엄청난 패배는 그야말로 '정치적 지진'이었다. 그만큼 안정을 원하는 독일 국민들의 변화에 대한 욕구가 컸던 것이다. 그러나 연정이 마치 전통처럼 되어 있는 독일에서 독일인들은 이번에도 사민당의 단독집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현재 가장 유력한 사민당의 연정파트너로 녹색당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커다란 이변이 없는 한 연방차원에서의 최초의 적-녹 연정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제도권속으로 돌진'(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을 외치며 20년 전 창당의 기치를 들었던 녹색당은 이제 '대안의 주장' 에서 '대안의 현실화'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시점에 서 있다. 녹색당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68년 학생운동 출신들, '68' 세대들은 30년만에 비록 연정의 파트너일지라도 권력을 넘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녹색당의 미래와는 달리 68 학생운동의 또 다른 흐름이었던 적군파는 98년 '건군'된지 근 30년만에 해체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다른 운명의 길을 걸었다. 녹색당과 적군파,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흐름들이었지만 이들의 정치적인 성격과 내용은 물과 기름처럼 융화될 수 없었으며, 30년이 지난 오늘 이들의 역사적 운명 또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녹색당이 녹색과 평화, 직접민주주의를 주창했다면, 적군파는 적색과 테러, 군대와 같은 규율을 강조했다.
마르쿠제의 '위대한 거부'의 자손들이었던 이들의 역사는 오늘 이렇게 다른 길을 밟고 있지만 이들의 발전역사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적군파의 공세는 녹색당의 창당과, 녹색당의 발전은 적군파의 변화와 뗄 수 없는 것이었음을 독일의 현대사는 보여주고 있다.
아일랜드공화군(IRA)의 평화협상 참여, 바스크민족해방조직(ETA:바스크어 뜻으로는 바스크 조국과 해방)의 정전협정 선언, 적군파의 해체선언으로 도시게릴라를 혁명의 프로젝트로 추진했던 유럽의 3대 무장투쟁조직은 이제 새로운 역사적 변화에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는 듯 하다.
2.
적군파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68년 독일은 물론 전 세계를 휩쓴 학생운동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68년 세계는 엄청난 반란에 직면했다. 워싱턴, 파리, 베를린, 도쿄 등 세계의 중심지들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는 '황금기'를 구가하던 서구세계에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반전시위가 미국을 휩쓸고, 파리의 공장과 밀라노의 대학이 점거 당하고, 베를린의 대학에 붉은기가 오르고, 도쿄의 거리가 학생들의 시위로 온통 소란스러웠다.
독일에서 학생시위는 60년대 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SDS)(주3)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 운동의 중심지는 베를린의 자유대학이었다. 68년 독일의 학생운동에 불을 붙인 것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67년 6월 2일 베를린에서 이란의 팔레비국왕 방문 반대시위 도중, 학생 벤노 오네조르그(Benno Ohnesorg)가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기 시작하면서였다. 학생들은 각처에서 대학을 점거하고 기존의 강의를 거부하며 '비판대학'을 만들고, 자유발언(free speech)으로 밤을 세웠다. 이들의 시위는 68년 학생운동에 대해 연일 격렬한 비난기사를 내보냈던 독일최대의 언론재벌인 슈프링어 출판사(Springer Verlag)에 대한 항의시위 이후 점차 시들어져 갔다.
당시 학생운동이 정점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다. 일단 독일 국내에서 학생운동 발단의 직접적인 계기는 기민련/사민당의 대연정(63∼69년)에 의해 추진되었던 비상입법의 관철과 교육비용의 인상시도였다. 학내투쟁으로 시작된 학생들의 관심은 그러나 점차 사회문제로 옮아가 베트남전 반대시위 등 국제연대투쟁으로 지평을 넓혀갔다.
사민당의 대연정 참가는 학생들에게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사민당의 좌파인 빌리 브란트가 수장으로 참가한 대연정하에서 비상입법의 추진은 학생들의 배신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오네조르그의 사망은 학생들의 이런 불만에 기름은 끼얹은 격이 되었다.
당시 세계적인(특히 서구) 차원에서 학생들의 반란은 학생 수의 급증(주4)에 비한 교육시설의 미비와 무관하지 않다. 전후 경제복구에 성공한 서구의 나라들은 경제발전에 따른 고급인력의 확충이 필요했으며, 대학은 엘리트의 교육에서 이러한 고급인력의 대량확충이 가능하도록 바뀌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따라 전전에는 대학의 문턱에 접근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자녀들도 대학입학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대학 취학 연령층의 대학입학도 전쟁 직후 5%미만에서 60년대 말로 접어들면 10%이상으로 상승하게 된다. 그러나 대학생 수의 폭증에 비한 교육시설의 증가는 너무나 더디게 전진하고 있었고, 전전 1% 미만의 교육대상을 상대로한 교육자의 숫자는 확실히 덜 '근대적'이었다.
더욱이 독일에서 대학은 나치시대의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전후 60년대에 입학하기 시작한 세대에게 대학은 아직도 과거의 유산으로 비추어졌다. 나치시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대학에 들어간 이들에게 과거의 전력에 당당하지 못했던 전전세대로서의 부모들은 낡은 세대로 인식되었다. 또한 당시 대연정의 수상을 담당했던 키싱어(Kiesinger)의 나치전력은 서독이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한 사회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학생운동이 촉발될 수 있었던 또 다른 동기는 세계사적 사건들과도 관련이 있다. 67년에는 당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사망하고, 68년 체코에서는 소련군에 의한 '프라하의 봄'의 진압이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10년간의 동란'으로 규정된 '문화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또한 북베트남 폭격에 대한 항의와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면서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정책수정이 일어나고 68년 5월 미국과 베트남이 파리에서 첫 협상을 시작하였다. 60년대 후반은 이른바 현존 사회주의와 서구사회의 모순이 가장 폭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때였다. 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의 무기였던 마르크스주의는 동구권 현존 사회주의의 일당독재에서 질식하고, 사회주의는 더이상 자본주의에 대한 유일하게 현존하던 대안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현존하는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실망한 학생들에게 당시 강력한 비판의 무기를 제공했던 것은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과 비판이론에 깊은 영향을 미친 루카치(Lukcas)였다. 루카치와, 호르크하이머(Horkheimer), 아도르노(Adorno), 그리고 마르쿠제(Marcuse)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1세대 비판이론가들의 사상이 당시 학생운동의 이념형성에 강력한 기반이 되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동구의 공산당에 의해 화석화된 마르크스주의와 사변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행동과 실천을 필요로 했던 당시의 학생들에게 루카치의 사상과 비판이론은 역사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적합한 것이었다. 루카치의 대표적 저작인 [역사와 계급의식](Geschichte und Klassenbewu tsein)은 마르크스주의가 아직 '공식 이데올로기'로서 굳어지기 전인, 그리고 실천 과정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던 20년대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die Dialektik der Aufkl rung)은 아우슈비츠의 참혹함과 미국 자본주의의 풍요속의 모순이라는 경험에 기초한 저작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정신을 복원하며, 근대의 계몽이 가진 이중성을 날카롭게 분석한 것이다.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핵심을 총체성(Totalit t)에 두고 이 총체성을 파악하는 주체와 객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강조했으며, 주객관,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하에서의 물화(Verdinglichung)현상과 물신숭배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였다. 호르크하이머의 [권위주의국가](der Autorit re Staat)와 그가 아도르노와 같이 저술한 [계몽의 변증법]은 당시 학생들의 사회 인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호르크하이머는 권위주의 국가(자본주의적인)는 지배로부터 경제적 중재를 박탈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경제적 위기를 회피하며, 시장을 제거하며, 완전한 국가주의(intergraler Etatismus, 현존 사회주의적인)는 모든 사적 자본의 종속으로부터 자유롭기에 가장 철저한 권위주의 국가라고 비판한다. 그는 완전한 국가주의는 이른바 작업장 규칙을 전 사회에 퍼뜨리면서, 자유주의적 단계를 생략한 산업화에 집중한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독일의 민족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와 소련의 국가사회주의(Staatssozialismus)는 경제적인 전제만 다를 뿐 억압적이다. 그러나 그는 루카치와 달리 변혁의 주체는 이미 객관적으로 결정된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없으며, 이들은 체제 내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은 마르쿠제에 있어서 혁명의 주체가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심부사회의 주변세력과 3세계 민중이라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호르크하이머의 이러한 인식은 독일 학생들의 당시 정부와 사회주의의 비판, 그리고 학생대중투쟁에 근거를 제공했다.
호르크하이머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혁명개념과 객관적 혁명개념을 거부하면서, 마르크스가 초기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강조한 '주체적인'(Subjektiv) 혁명개념을 도입한다. 사회적 변혁은 개체 자체의 변화와 자각된 의지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주5) 그에게 있어서 객관적 혁명과 주체의 변혁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그와 아도르노는 근대화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던 계몽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면서, 근대는 전체주의와 물신숭배가 도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물화현상은 그러나 루카치를 넘어 단지 상품의 교환과정에서 제기되는 자연성장적인 것이 아니라 조직화된 사회의 조직화된 의식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비판은 경제적 차원을 넘어 문화로까지 확장된다.
이러한 비판이론의 영향은 당시 독일 학생운동을 지도했던 두취케의 의식에서도 뚜렷이 보여진다. 이것은 이른바 '직접행동구상'(direktes Aktionskonzept)으로 분출되었다. 두취케에 따르면 혁명은 어떤 새로운 조직된 정당에서 기대할 수 없으며, 직접적으로 정치적 계몽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행동이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의 선동, 국가적인 행정권력과 대립하는 조직된 개별 투쟁가들의 감각적 경험은 급진적 반대세력의 확산 속에서 활력적인 요소들을 형성하며 수동적이며 고통받는 대중들 속에서 행동하는 소수에게 점차적으로 자각과정을 가능케 한다. 대중들의 의식은 명확한 비정규적인 행동을 통하여 체제의 추상적인 폭력으로부터 감각적 확실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주6) 비정규적인 행동은 기존의 정당에 의해 조직되었던 정규적인 권위주의적 행동과 행사에 대립되는 반권위주의적인 것이며, 그의 인식 속에는 행동과 계몽이 동시적인 과정 속에서 융합된다.(주7) 두취케를 비롯한 당시 학생운동의 지도부에 비판이론이 남긴 흔적은 일단 철학적으로는 수탈이나, 잉여가치의 축적보다 소외라는 개념이 중심이 되었고,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나 다른 사회적 대립보다는 소비테러에 대한 중산층의 고통이 핵심이 되었으며, 대중들의 조작된 의식은 스펙타클한 그리고 계몽적인 행동을 통해 각성될 수 있고, 기존의 프로레타리아트 정당들의 후진성에 대해 사회운동의 선진성을 부각시키며 반레닌주의적인 노선을 취했으며, 마르쿠제의 주변그룹이론(Randgruppen-Theorie)에 따라 투쟁의 중심을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 두면서(주8) 중심부의 활동은 '행위의 선동'에 제한했다.
68 세대는 이렇게 비판이론을 실천적 차원에서 재구성하게 되며, 이는 각각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하게 된다. 적군파의 흐름도 이러한 비판이론의 재구성과 무관하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상과 마오주의적 실천을 기본으로 했던 적군파의 흐름에서 비판이론은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이것은 1) '총체성'의 문제이다. 즉 다양한 문제들이 총체성으로 해소된다. '제국주의 중심부의 총체성'과 '소외'는 핵심적 개념으로 작용하여 독일은 단지 '제국주의 전체시스템'의 일부로 격화된다. 2) 이러한 총체성은 단지 상품관계의 물화 현상이며, 이러한 물화현상의 극복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 3) 이러한 상품관계를 극복하고 '내적으로 생동적이고, 구체적 인간들 속에서 체현된 새로운 자각'만이 유일한 해방의 길이다. 비판이론에서 이것은 비판적 사고의 제국으로의 '도약'(Sprung)이며, 적군파에서 이것은 바로 무장투쟁이다. 언어의 비판과 비판적 사고는 적군파에서 '무기의 비판'으로 전화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따라서 다양한 저항의 형태를 사상하게 되었다. 4) 이들이 물려받은 급진적 주체주의는 문제를 첨예화, 예각화했으며, 사회의 다양한 관계를 갈등과 대립으로 단순화했으며, 극단적인 전위주의로 향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적군파의 탄생과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자.
3.
3-1.
적군파의 탄생은 70년의 안드레아스 바아더(Andreas Baader) 구출작전으로 시작되지만, 실질적인 맹아는 이미 68년 프랑크푸르트의 방화사건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베트남 소이탄 투하에 대한 '복수행동'(Racheaktion)으로 바아더, 프롤(Thorwald Proll), 에슬린(Gudrun Esslin) 등은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 2곳을 방화한다. 다음날 체포된 이들은 3년형을 선고받지만, 이듬해에 보석으로 석방되어, 형집행과 관련된 사회봉사업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69년 11월 이들의 사면 요청이 기각되고 형집행이 실질효력을 발휘하게 되자 이들은 모두 사라졌다. 70년 4월 바아더가 베를린에서 체포되면서 적군파는 실질적인 첫 행동으로 바아더 구출작전을 계획한다. 적군파 1세대의 이데올르그였던 마인호프(Ulrike Meinhof)(주9)는 수배중이던 에슬린과 적군파의 창립멤버이자 바아더의 변호사였던 말러(Horst Maler)와 함께 바아더 구출작전을 계획한다. 70년 5월 14일, 마인호프는 테겔교도소에서 바아더와 함께 공동저술을 위해 베를린의 한 연구소를 들려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바아더를 일단 감옥에서 불러낸 후 이 연구소에서 동행했던 교도관과 연구소 직원에게 총격을 가한 후 창문을 통해 탈출한다. 이후 이들은 PLO의 조직 중 하나였던 파타(Fatah)의 도움으로 요르단으로 도주한 후 그곳에서 군사교육을 받는다. 바아더 구출투쟁은 적군파의 공식적 탄생을 알리는 첫 작전이었다.
석 달동안 군사교육을 받은 적군파 1세대들은 70년 9월, 독일로 돌아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다. 70년 9월 29일 적군파는 3군데의 은행을 동시에 습격하여 20만 마르크를 탈취한다. 11월에는 마인호프의 주도로 '여권청 작전'을 벌이며 기센의 관청을 습격해 관청용지와 도장을 손에 넣으려 했다. 71년 1월에는 다시 은행 2곳을 습격해 10만 마르크 이상을 손에 넣었다. 은행습격은 72년 2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은행습격(주10)을 통해 적군파는 약 80만 마르크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른바 '재정활동'은 72년 본격적인 활동의 재정적, 실천적, 조직적 훈련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적군파의 본격적인 활동은 72년 5월 프랑크푸르트의 미국 헌병대에 대한 폭탄테러로 시작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13명이 부상당하고 1명이 사망했다. 바로 다음 날 적군파는 아우스부르크의 경찰청에 대해 자동차 폭탄테러를 가했다. 이어진 일주일 동안 적군파는 연방법원의 판사에 대해 암살시도를 하고, 보수언론인 슈프링어 출판사에 폭탄테러를 가한다. 또 24일에는 미군 유럽본부에 자동차폭탄을 설치해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하였다.
적군파의 이런 공세에 대해 독일정부는 71년 2월 '테러대책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2백8십만 명의 신상을 한번에 비교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조사방법과, 테러와 납치의 방지와 처벌을 위한 법안을 상정한다. 적군파의 투쟁은 자신들이 바라는대로 적군파와 당시 독일정부와의 첨예한 '대립선'을 만들어냈지만, 이들의 투쟁은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가능케 하는 여러 가지 현대적인 법령과 장치(주11)들을 만들어 냈다.
은행습격으로 자금과 경험을 축적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하기 시작한 적군파의 주위에는 당시 급진세력과 동조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투쟁의 준비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의 확대와 무장투쟁의 준비는 필연적으로 많은 성원들의 체포를 낳기 시작했다. 72년 6월 1일 '바아더-마인호프 갱단'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바아더의 체포를 시작으로 6월 7일 마인호프마저 체포됨으로써 적군파 1세대들의 대부분이 검거되었다.
이 당시 이들의 인식은 '도시게릴라 구상'(Das Konzept Stadtguerilla)에 잘 나타나 있다. '도시게릴라 구상'은 71년 4월에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이미 70년에 체포된 말러의 구상에 대한 응답과 같은 것이었다. 적군파의 창립멤버인 말러는 감옥에서 적군파가 지하의 광범위한 하부구조를 건설하고, 군사훈련과 정보체계를 갖추어야 하며, 도시내에 각계각층의 동조자 그룹들 속에 핵심을 건설하며, 이들과의 연결을 강화하고, 이들 속에 군사적 준비정도를 확산해야 한다는 구상을 내놓았다.(주12) 그러나 바아더-마인호프 그룹은 이러한 구상에 반대하면서 자신들의 게릴라 투쟁에 대한 구상을 '도시게릴라 구상'(이하 구상)을 통해 공개했다.
6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문서는 매 장마다 마오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이 문서에서 적군파는 기존 좌파와 자신을 엄격히 구별하며, 학생운동의 혁명적 정통성을 자신이 계승함은 물론 이들의 한계 또한 극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게릴라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적군파는 이 문서에서 드뷔레(Devrey)가 정립한 초점이론(foquismo)에 따라 혁명적 상황의 성숙여하에 관계없이 주체들의 무장투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이들은 말러와는 달리 70년 이후 1년간의 경험에서 동조자 그룹들내에서 적군파의 하부구조를 건설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독자적인 지하구조와 무장투쟁의 방법으로서 지하투쟁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무장투쟁은 의회투쟁의 한계와 기존 좌파투쟁의 한계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으로 어떠한 이론적 준비보다는 실천과 투쟁이 모든 것을 결정(Primat der Praxis)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이 문서에서 이들의 당시 일부 학생운동세력의 합법당 건설노선에 반대하면서 적군파의 무장투쟁을 강조하고, 무장투쟁은 혁명전야가 아니라 지금 즉각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13)
이후 발표된 글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적군파 전략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그것이 공세의 의미보다는 대항(Gegen)의 의미가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 구상에서는 국가의 무장에 대한 자신들의 무장과 국가의 탄압에 대한 첨예한 대립전선 건설의 필사적 노력이 강조되어 있으며, 80년대의 반제전선(antiimperialistische Front)구상, 90년대의 사회적 대항권력(gesellschaftliche Gegenmacht)의 구상에서도 이러한 단순화된 대립과 타방에 대한 대항의 의미가 이들 전략의 전반을 관철하고 있다. 따라서 전반적인 투쟁은 은행털이, 동지들의 구출투쟁 등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실질적인 공세와 주도권은 이들의 투쟁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3-2.
78년의 '독일의 가을'(deutscher Herbst)은 적군파와 독일좌파 뿐만 아니라 전후 독일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독일의 가을'은 77년 9월 5일 적군파가 독일 경제인연합 의장인 슐라이어(Hans-Martin Schuleyer)를 납치하면서 본격화되었다.
75년 2월 27일, '6월 2일 운동'(Bewegung 2. Juni)(주14)이 기민련의 로렌츠(Peter Lorenz)를 납치하고 정치범의 석방 요구를 관철하자, 적군파는 이에 고무 받아 4월 25일 2달의 단식으로 사망한 동료 홀거 마인스(Holger Meins)의 이름을 붙인 '홀거 마인스작전'으로 스톡홀름의 독일대사관을 점령하고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한다. 슈미트정부는 그러나 적군파의 요구를 거부하였으며, 경찰을 투입하여, 진압과정에서 인질 2명과 게릴라 1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한 게릴라 1명은 후송도중 사망했다. '홀거 마인스작전'은 적군파의 투쟁이 군사적 투쟁으로 국한되는데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홀거 마인스작전'의 실패 이후 적군파는 검찰총장 부밬(Siegfried Buback)을 살해하고, 드레스덴 은행 총재인 폰토(J rgen Ponto)를 납치하는 도중 실수로 사살했다. 적군파의 이러한 군사적 공세는 75년∼77년 4월 사이에 진행된 적군파 1세대의 재판과 관련이 있다. 적군파는 이들의 석방을 위해 군사적 공세와 납치 시도에 투쟁의 중점을 맞춘다.
폰토의 생포에 실패한 적군파는 다른 대안으로 슐라이어를 납치했다. 슐라이어의 납치를 통해 적군파는 동료들을 석방시키는 한편 슐라이어의 나치전력을 공개하여 현 국가의 나치체제의 계승성을 부각시키려 했다. 적군파와 감옥의 1세대와의 연결은 77년 2월에 석방된 2세대의 지도부인 몬하웁트(Brigitte Mohnhaupt)에 의해 수행되었다. 몬하웁트는 감옥에 있는 1세대들의 메시지를 가지고 나왔으며, 그들은 바깥에 있는 동료들이 자신들의 석방을 위해 투쟁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적군파는 '지그프리드 하우스너작전'의 이름으로 슐라이어를 납치하고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슈미트정부는 즉각 위기대책반을 구성하는 한편 이들과의 협상을 질질 끎으로서 슐라이어와 적군파의 소재파악에 주력했다. 대책반은 모든 언론매체에 적군파와 관련된 검열령을 내렸고, 언론들은 이 검열에 대부분 자발적으로 임했다. 반핵발전소 운동으로 고양되던 신좌파의 흐름들은 적군파의 이러한 무모한 행동에 대해 거리를 두고 이들을 비판했다. 모든 언론과 여론은 적군파를 궁지로 몰아 넣었으며, 정부는 민주주의의 모든 측면을 압박하면서 적군파의 도전에 대답했다. 감옥의 1세대들은 완전히 격리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방을 옮기고 검색 당해야 했다. 좌파와 시민운동세력들은 정부와 적군파의 대립을 중재하려 했지만 양측 모두 협상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적군파의 입지는 독일 여행객들이 탄 루프트한자 비행기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 의해 납치되면서 더욱 좁아졌다. 적군파 성원들이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동의아래 이루어진 비행기 납치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자기 동료들의 석방은 물론 적군파 1세대들의 석방도 동시에 요구했다. 여론은 물론 좌파도 적군파가 이제 사회의 상부와 대중들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맹목적인 조직이 되었다는 비판이 비등해졌다.
77년 10월 18일 독일의 특수부대 GSG9(주15)은 모가디슈에 착륙해 적군파 성원들의 석방을 기다리고 있던 납치비행기에 들어가 납치범들을 사살했다. 같은 날 이 소식을 감옥에서 접했던 적군파 1세대 3명은 동반자살을 했다.(주16) 다음 날인 19일 적군파는 슐라이어를 사살했다고 공표했다.
정부와 적군파의 대립은 당시 독일사회 전반을 극도의 긴장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정부는 가장 첨예한 대립과 민주적 권리의 심각한 제한으로 나아갔으며, 적군파는 단호한 무장행동으로 응수했다. 한 달여에 걸친 극도의 긴장상태로 사회내에는 긴장과 분열이 심화되고 '게릴라와 국가' 사이에서 좌파는 무기력의 좌절감과 새로운 모색 속에서 갈등했어야 했다.
77년은 과잉폭력의 난무 속에서 사회전반에 동의의 창출과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과제로 남겨 놓았으며, 68년 이후 새로운 모색을 시도했던 좌파는 본격적인 녹색당 건설에 착수한다.
77년 '독일의 가을'을 겪으면서 적군파는 77년의 패배를 분석하지 않은 채 80년대 새로운 전략으로서 반제전선을 내놓는다. 독일국가가 나치의 과거를 철저히 분석하고, 청산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비난처럼 이들은 77년에 대한 토론을 금기시 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주17)
3-3.
적군파는 82년 [게릴라, 저항 그리고 반제전선](Guerilla, Widerstand und antiimperialistische Front, 이하 전선)라는 문건을 통해 새로운 노선을 제기한다.
여기서 그들은 77년 투쟁의 패배는 국가의 승리가 아니라, 국가가 얼마나 폭압적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자평하며, 77년 투쟁이 직접 무장투쟁을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면, 지금의 문제는 발전 가능한 중심부 전략의 전망적 소실점 속에서 게릴라, 전투적, 정치적 투쟁들이 통합적 요소로서 함께 수행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이후 제국주의는 그야말로 레닌이 이야기하던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에 와 있으며, 전후 전체 역량관계는 소련의 강화로 동-서, 남-북, 국가-사회의 대립과 불안정한 평형상태가 형성되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미제국주의에 종속된 국가고리, 즉 제국주의가 최후로 의존할 수 있는 국가들을 강력하게 묶어세우는 것이 현재 미국의 의도이며,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반제전선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세계적인 반제전선을 가능케 하는 시도는 중심부 자체내에 전선건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77년 투쟁은 범위의 차원에서 투쟁을 전체 서유럽으로 확산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했으며, 심도의 차원에서 전 사회에 걸친 억압과 수탈을 강화함으로써 국내적 전선형성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행동하는 전선'(handelnde Front), '투쟁하는 전선'(k mpfende Front)에는 행동뿐만 아니라, 연대와 구조건설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전선의 건설에서 게릴라와 무장투쟁, 비합법투쟁은 역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전선에서는 또한 77년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는데, 미제국주의와 그의 종속국, 미국 자본과 기타 자본, 미국 정계와 독일 정계라는 전체 체제를 수직적 위계를 가진 총체성 속에서 파악하면서, 당시 투쟁의 오류를 자신들의 노선적 오류라기 보다는 판단의 오류로 격하했다.(주18)
전선의 공개이후 적군파의 활동은 문건에 표현된 만큼 활발하지 못했다. 그들의 활동은 은행습격, 미군기지에 대한 테러 활동으로 제한되었다. 적군파는 실제 77년 이후 거의 정체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많은 이탈자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비판하던 현존 사회주의 국가와의 교류가 80년대 본격화되면서, 군사훈련과 물자들을 지원 받는 것은 물론 성원들의 일부가 동독으로 빠져나가 체류했다. 이들은 통일 후 대부분 기존 동독 정보부와 서독 정보부의 합작으로 검거되었다.
전선 이후 이들의 활동 가운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두 사건이었다. 하나는 85년 프랑스의 직접행동과 '서유럽 혁명가들의 단결' 성명을 발표한 것이었는데, 이 조직은 87년 지도부의 대부분이 검거됨으로써 투쟁이 불가능해졌다. 다른 하나는 프랑크푸르트의 미공군기지의 테러에 필요한 신분증 확보를 위해 미군병사 피멘탈(Pimental)을 뒤통수에 총을 대고 사살한 것이다. 이 사건은 적군파의 도덕성에 다시 한번 치명타를 가했는데 적군파는 이후 성명을 통해 그를 사살한 것이 오류였음을 인정했다.
전선은 "폭넓은 동맹이나, 개방과는 진정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전선구상은 아주 목적의식적으로 좌파의 전투적, 급진적 부분에 제한되었다."(주19) 77년의 패배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서유럽의 다른 테러조직과 국내의 급진세력과 반제전선을 구성한다는 전선의 취지는 80년 내내 실현될 수 없었다. 전선은 77년 이후 변화된 객관정세를 이른바 미제의 위기와 위기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반제전선사이의 문제로 격하하고, 주관정세에서 자신의 고립을 극복하고자 급진적 좌파와의 접근을 시도했지만 해산성명에서도 드러나듯이 77년 이후 독일의 좌파는 적군파와 더 이상 연대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신을 정립했다. 결국 전선은 77년 패배에 대한 판단중지를 통해 더 이상 자기변신을 모색할 수 없는 무능력을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3-4.
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90년 통일은 적군파에 있어서 77년 패배 이후 가장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이미 82년 전선 발표 이후 2세대 지도부가 대부분 체포된 상황에서 적군파는 자신을 유지하는데에도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해야했다.
투옥된 적군파 성원들은 현 적군파의 노선과 자신들의 진로를 놓고 분열했으며, 감옥과 바깥의 연계는 노선의 갈등으로 완전히 단절되었다. 더욱이 89년 이후 동독에 은폐했던 전 적군파 이탈자와 성원들의 체포가 이어지면서 기존의 증언들이 번복되고 새로운 재판이 재개되는 등 적군파의 해체는 90년대 들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 속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던 적군파는 92년 4월 "우리는 경제와 정부의 대표자들에 대한 공격을 중지한다"(이하 공격중지)라는 휴전에 가까운 성명을 발표한다. 이 성명은 적군파의 수세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89년 이후 서독에서 저항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투쟁이 진행될 수 없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민의 출발점은 1) 냉전이 종식되고 공동의 국제투쟁이 변혁을 열어 젖히지 못했으며.... 2) 89년 이전에 정책을 수행했던 것만큼 우리가 더 강해지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더욱 약해졌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에게 공동투쟁을 가능케 하는 흡입력을 상실했다..... 우리가 모든 결정을 하고 다른 이들은 이것에 쫓아오는 방식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우리의 정책을 매우 강력히 제국주의자들의 전략에 대항하는 공격으로 격하시켰으며, 우리에게 결여되었던 것은 직접적인 긍정적 목표의 추구였으며, 여기서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사회적 대안이었다.... 우리가 관련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대부분 어떻게 공동의 공격을 조직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경험하고 발전시킨 가치는 결정에서 어떠한 공간도 차지할 수 없었다.... 토론과 이와 관련된 것들은 우리가 아래로부터의 대항권력(Gegenmacht)이라고 부른 역량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문제들에 대한 동지들의 경험과 토론에서 게릴라가 더 이상 건설의 이러한 과정에서 중심에 놓여질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국가와 경제의 우두머리에 대한 목적의식적인 사살활동은 더 이상 현재의 과정을 앞으로 전진시킬 수 없다."(주20) 공격중지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여전히 대항과 단순한 전선적 대립에 갇혀 있지만 무장투쟁은 더 이상 투쟁의 핵심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사회의 대항권력 건설이라는 이들의 문제의식은 89년 투옥된 적군파성원들의 89년 단식 이후 점차 제기되기 시작했으며(주21) 석방된 성원들의 적군파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사회운동세력과의 대화와 토론을 일정정도 반영한 것이었다.
공격중지 이후 적군파의 활동은 바이터스타스(Weiterstadt)의 신축감옥 폭파를 제외한다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공격중지는 모든 테러활동을 중지한다는 휴전선언은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공격중지는 그러나 '전투성 없이는 일상적 생존투쟁을 상상할 수 없는' 적군파에 있어서 활동중지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82년의 전선에서 제기된 국가-사회의 대립 속에 모든 것을 해소한 공격중지의 대항권력의 개념은 다시 다른 전망과 지평을 사상한 채 총체성의 블랙홀로 빨려들어 갔으며, 적군파가 그렇게 강조했던 주체성은 92년 이후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공격중지는 89년 이후 독일내의 변화 속에서 77년의 패배를 소화하지 못한 게릴라, 무장투쟁, 비합법을 고수했던 적군파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그들은 서독사회 내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동독 사람들, 그리고 통일독일의 사회 속에서 어떤 대안도 모색할 수 없었다. 더욱이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은 자신들의 차별성 강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실질적인 사상적, 정치적, 조직적 활동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었기에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공격중지의 대항권력은 사회적 역동성의 반영이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대안모색과는 실질적인 관련이 없었기에 결국 해체의 전주곡이 되고 말았다.
4.
적군파는 역사가 되어버렸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과거는 독일인들에게는 상당히 소화하기 힘든 역사로 남아있다. 2백 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적군파의 투쟁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적군파의 투쟁으로 독일의 법적, 형사적 제도와 장치들은 비대해졌으며, 운동세력들은 과거 동료들의 극단적이고 첨예한 사회대립화 구도로 '동-서'라는 대립과 더불어 '게릴라-국가'라는 또 다른 흑-백 사이의 선택을 강요당했다.
해산선언에서 적군파는 30년 적군파의 역사와 노선을 역사와 대중의 평가로 남겨두지 않았다. 해산선언에서 그들이 발휘한 자기 역사에 대한 '주체성'은 다시 다른 사회운동과 대중들에게 자기 역사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영원한 역사의 창고로 이것을 던져버렸다.
비판철학의 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와, 마오주의적 실천으로 '비판의 무기'를 '무기의 비판'으로 대체하며 사회를 변혁하려 했던 이들은 결국 좌절의 역사만을 남겨놓았다.
해산선언은 자신의 좌절과 역사의 좌절을 동일시하면서 냉전 종식 이후 글로벌 현상에 대한 맹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적군파의 좌절은 역사의 좌절이 아니며, 사회주의의 종말은 희망과 대안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글로벌 현상은 그 자체로서 사실일 뿐이며, 지지나 반대를 요구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글로벌화 하는 세계의 발전 속에서 경제현상이 두드러지고 이에 대해 일정한 지역의 한계 속에서 완성태를 추구한 정치의 한계가 드러나며, 국가간(inter-national) 관계 역시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는데 제한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구적(global), 지역적(regional), 지방적(local) 문제들은 글로벌한 현상 속에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라는 관점은 이제 글로컬(Glocal)한 문제의식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적군파는 지난 시기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계급투쟁에서 찾았으며, 후기자본주의 사회 혁명의 핵심적 문제는 이들의 마지막 은신처인 국가의 문제이며, 합법성의 위기(Legitimationskrise)를 겪고 있는 국가는 무장투쟁만으로 전복될 수 있고, 이러한 무장투쟁은 도시게릴라가 수행하며, 도시게릴라는 무장투쟁으로 전체 반국가-반자본 투쟁을 선도하며 도시주변그룹들의 투쟁을 고무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좌절로 맑스-레닌주의의 3가지 버전, 동구권의 10월 혁명 프로젝트, 반둥 프로젝트, 서구사회의 공산당-도시게릴라 프로젝트의 총체적 파산을 보았다. 전선, 동맹, 인민민주주의독재, 국유화를 중심에 둔 다른 소유형태의 결합 등의 변종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전위정당, 계급투쟁, 피티독재, 국가사회주의를 기본으로 했던 점에서 이들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첨예한 계급적 대립 속에서, 지역과 경제권을 중심으로 각종의 제도를 구축했던 근대 민족국가에서 출발했던 마르크스주의와 후진적 러시아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억압을 내재화했던 레닌주의를 결합시켰던 맑스-레닌주의의 프로젝트는 결국 사회의 다양화와 민족국가의 약화와 정치-경제-사회 관계의 변화와 글로벌화의 심화라는 변화 앞에 낡은 것으로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의 프로젝트 전반을 쇄신하지 못한 채 맑스-레닌주의 프로젝트의 핵심을 고수했던 적군파의 좌절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註
1) Eric Hobsbawm, Das Zeitalter der Extreme, Weltgeschichte des 20 Jahrhunderts, Carl Hanser Verlag M nchen Wien 1995, 원제: Age of Extremes,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
2) [BRD-RAF] "Die Rote Armee aufbauen": Erkl rung von Andreas Baader. GNN, Verlagsgesellschaft Politische Berichte m.b.H, Ausgew hlte Dokumente der Zeitgeschichte 1. Aflg. K ln, 1987
별도의 주석이 없는 경우, 적군파의 성명들은 [BRD-RAF]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자료들은 온라인 버전으로 구해 볼 수 있다. 주소: http://www.trend.partisan.net 혹은 http://www.nadir.org
3) 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는 1946년 사민당의 학생조직으로 출발했지만, 1960년 반핵에 대한 사민당과의 견해 차이로 거리를 두고 결국 사민당으로부터 제명조치를 받는다. SDS는 당시 동독에서 망명해온 루돌프 두취케(Rudolf Dutschke)라는 탁월한 지도자에 의해 지도되었다. 68년 4월 11일 SDS회관 앞에서 두취케가 총격으로 쓰러지면서 SDS는 69년 분열과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SDS 내에는 다양한 흐름들이 존재했는데, 당시 이들의 사상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이론이었다. SDS는 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독일의 이후 재야운동(au 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APO)과 대안운동(alternative Bewegung)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두취케는 70년대 들어 녹색당의 건설에 참여하다 79년 총격의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4) 유럽 학생운동의 진원지였던 프랑스의 경우 40년대 말에 비해 60년대 대학생수가 4배 이상 증가했다. 독일의 경우도 3배 이상 학생이 증가했으며, 이태리와 스페인의 경우는 40년대와 비교해 볼 때 5배 이상의 증가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학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교육시설과 인력은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낙후하고 충분치 못했다.
5) 이러한 인식은 물론 당시에 전개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즉, 기존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조직들의 억압적 조직형태로 동화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국이라고 하는 사회주의의 철권통치는 비판이론 1세대들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성에 대한 회의를 심화시켰다.
6) TAZ Nr. 2876 Seite 13-14 vom 05.08.1989
7) 비판이론 2세대의 대표주자인 하버마스는 그러나 당시 학생운동을 '좌파 파시즘'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68년 6월에 행한 연설에서 그는 학생운동을 '의사혁명'(Scheinrevolution)이라고 비난하면서 테제를 발표했다. 그의 테제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지금까지 혁명의 징조라고 간주되는 모든 요소들이 결핍되어 있으며, 사회경제적 계급의 대립은 사회적 보상의 기초 위에서 대중특권을 보장하는 지배체제에 의해 조종되며, 따라서 체제를 위협하는 계급충돌은 잠복하게 된다. "감정적 차원에서 생산된 정체화는 어떠한 가치도 가질 수 없으며", '새로운 데모기술'은 성장하는 자들의 경솔하지만, 그러나 관용적인 부모에 대한 압박과 불만의 의식(儀式)화된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은 연령에 따라 적용되어야 한다. 결국 학생들은 심볼과 실제를 혼돈하고 있으며, 대중적 계몽에 주어진 전략의 자리를 의사혁명의 전술이 차지한다. 학생들은 현실적이어야 하며, 행동공간의 경계를 인식해야 하며 특권적인 영향력의 기회를 가진 노조 등과 공동사업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인식은 이른바 합법성문제(Legitimationsproblem)로 발전되고, 노조와 같이 파업의 합법성을 학생운동이 창출하여야 하며, 반대로 국가나 후기자본주의는 자신의 지배를 합법화하지 못하면 커다란 위기에 빠지게 된다. 후기자본주의에 들어와 이러한 합법성의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는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체제(System)로부터 생활세계(Lebenswelt)를 방어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의사소통행위(Kommunikatives Handeln)가 실종되게 된다는 것이다.
8) [Rebellische Subjektivit t und Internationalismus], Verlag Arbeiterbewegung und Gesellschaftswissenschaft: Marburg. 1989
9) 마인호프는 학생시절부터 유명한 학생운동가였다. 독일학생운동을 주도했던 SDS의 반핵죽음위원회(Anti-Atomtod Ausschu )의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좌파 월간지로는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콩크레트(Konkret)에서 59년 이후 기자생활을 하다 62-64년에는 이 잡지의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독일공산당(DKP)의 당원이기도 했다. 마인호프의 이러한 경력은 적군파가 레닌주의적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10) 적군파는 이러한 은행습격에 대해 이것은 "재정문제를 다른 식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논리적으로 올바르고, 이것은 몰수작전이기에 정치적으로 정당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이기에 전술적으로 합당하고, 게릴라의 재정에 이바지하기에 전략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1) 72년 3월 사민/자민당 연정은 '국내안보를 위한 중점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연방형사청의 인원을 933명(69년)을 2천62명으로 2배 이상 늘리고, 예산을 6배 이상(2백20억에서 1천2백2십억 마르크로)으로 늘렸다. 그리고 각 지방의 기동경찰을 1만 8천명에서 2만2천명으로 늘리고, 이들의 무장을 현대화하고, 좌우테러를 감시하는 헌법감시청의 인원을 50%이상 증가시켰다. 이러한 국내질서대책은 74년 개인의 자유를 특정한 상황에서 제한할 수 있는 법령 개정으로 이어졌다.
12) [BRD-RAF]
13) [BRD-RAF]: das Konzept der Stadtguerilla
14) '6월 2일 운동'은 오네조르그가 죽은 날을 자신의 단체명으로 삼은 무장투쟁조직이다. 적군파가 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을 가졌다면, 6월 2일 운동은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단체는 적군파가 인텔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데 비해 노동자와 인텔리가 같이 결합된 조직이었다. 80년 초 적군파에 합류함으로써 '6월 2일 운동'은 해소된다.
15) GSG9은 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이스라엘 선수들 사살과 적군파에 대한 대응책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16) 76년, 감옥에서 자살한 마인호프와, 77년 슈탐하임(Stammheim) 감옥에서 자살한 바아더, 라스페(Jan-Carl Raspe), 에슬린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마인호프는 수건으로 목을 메달았으며, 바아더와 라스페, 에슬린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어떻게 비행기 납치범들의 사살을 알 수 있었으며, 고립된 감옥에서 어떻게 서로 동시자살을 시도하기 위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으며, 하루에도 6회 이상의 검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들을 적군파의 동조자들은 제기한다. 그러나 적군파 성원들의 상당 수는 이들이 감옥에서 라디오를 조립해 들었으며, 서로간의 의사소통도 했고, 총기를 반입하여 감추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Taz, 96년 6월 16일, Taz Magazin 5567, 27. 06. 98)
17) 마약중독자였다가 마인호프와 바아더에 의해 의식화돼 적군파에 참여 한 이후 슐라이어 납치에 참여했던 2세대 지도부인 봌(Peter-J rgen Boock)은 적군파 내부에서 77년 슐라이어 납치와 슈탐하임의 동료들의 자살에 대해 적군파 내에서 토론된 적이 없었으며, 완전히 타부시 되었다고 한다. (Taz 6월 16일) 이에 비해 또 다른 2세대 지도부인 몬하웁트는 '성명 77'에서 스톡홀름 이후 적군파는 무장투쟁으로 국가와 대립을 시도했으며, 이 투쟁에서 적군파는 '게릴라와 국가'사이에 갈등했던 좌파와 이들의 개량주의를 분명히 했으며, 제국주의 중심부 국가에 대한 반제전선 구상을 구체화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BRD-RAF)
18) BRD-RAF: Guerilla, Widerstand und antiimperialistische Front
19) Lutz Taufer(전 적군파성원), Gesellschaft oder Isolation Teil I, ak 363, 09.Febrbuar 1994
20) TAZ Nr. 3682 Seite 3 vom 14.04.1992, "Wir werden Angriffe auf f rende Repr entanten aus Wirtschaft und Staat einstellen"
21) Lutz Taufe, Gesellschaft oder Isolation Teil II, ak 364
* 김정수(독일 베를린 홈볼트대학 학국학과를 수료)
* 이 글은 시대정신 [1998 11-12월호] 창간호에 수록되었던 것입니다.
위 글과는 사뭇다른 논조의 글
일본적군을 찾아보다 돌고돌아 독일적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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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F (Rote Armee Fraktion)
Baader-Meinhof 그룹
1968년 4월 독일 프랑크프르트,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도중 Andreas Baader와 여학생 Gurdun Ensslin가 "자본주의와 미 제국주의를 반대"하며 백화점 건물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이를 젊은이들의 과격 시위 도중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사건 정도로 여겼다.
1970년 5월 한 명의 여류 저널리스트가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구금되어 있던 Baader를 취재하겠다고 요청, 베를린 사회문제 연구소에서 인터뷰 허가를 받는다. 인터뷰 당일, 그러나,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사법 재판관 1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법정 관리인들을 위협하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검은색 BMW 승용차로 Baader를 탈옥시킨다. 그녀의 이름은 Ulrike Meinhof, 좌파 잡지 "Konkret"의 기고가이자 이미 쌍둥이 자매를 둔 엄마이기도 했다. 이 둘의 이름을 딴 Baader-Meinhof 그룹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이 사건은 이후 서독 사회운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좌파 테러조직 Rote Armee Fraktion (RAF)의 출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탈주에 성공한 이들은 곧 동독 국가 안전부(슈타지)의 비호를 받으며 동베를린을 거쳐 요르단에 잠입, 팔레스타인 해방군으로부터 본격적인 무장 투쟁 훈련을 받는다. 이들 창립 멤버에는 두뇌 역할을 하던 변호사 Horst Mahler도 속해 있었다. 그는 동독에서 건너온 사회주의자로 이미 운동권 출신 수감자들의 전문 변호인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독일 네오 나찌주의 정당인 NPD를 창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동독으로 돌아와 무기까지 제공받은 이들은 서독으로 비밀리에 귀환, 72년부터 본격적으로 "폭력적 혁명 투쟁"에 나선다.
전후 독일의 상황
이들이 무장 투쟁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는 파시즘을 겪은 후의 독일사회와 미국의 베트남 참전, 68년 학생혁명의 좌절의 경험이 있다. 민족사회주의(나찌)가 패전한 이후에도 독일에서는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자본주의 진영은 전후의 독일에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재 구축하고 서방 사회의 군사적 경제적 블록에 독일을 편입시키는 것을 1차적 과제로 삼았다. 그들에게 전후의 서독은 "공산주의 블록과 볼세비즘에 대한 방어벽"이었던 것이다. 힘을 키워가던 사회주의 세력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해, 전후 몇 년 사이에 이전의 나찌주의자들이 다시 관직과 명예를 회복하였다. 두 차례의 전범 재판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전후 젊은 세대들의 눈에 독일의 과거와 나찌 시대의 범죄와의 사회적 대결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과거에 대해 어떤 질문도 던져지지 않은 채 독일은 급속하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사회가 되어야만 했다.
전후 독일 세대들은 곧 독일 관료들의 정신상태, 나찌 공범자와 위선자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부모세대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다. 왜 그들은 유대인에 대한 질문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가? 어떻게 파시즘이 나타날 수 있었는가? 누가 이 살인 기계의 일부였는가? 어째서 그들은 처벌받지 않았는가? 나찌의 범죄와 유대인 수용소에 대해 당신들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왜 당신들은 그에 반대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위 세대는 어떠한 만족할 만한 대답도 주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나찌 시대에 사형판결을 내렸던 바로 그 판-검사들이 법정에, 나찌 시절의 사장들이 기업에, 바로 그 관료들이 관청에, 그 선생들이 학교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로써 젊은 세대들에겐 파시즘에 물들었던 사회가 거의 아무런 과거와의 단절없이 그대로 민주주의사회로 이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들은 대안을 찾아 나섰고,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살려했으며 그를 통해 사회와의 대결을 받아들였다. 많은 젊은이들은 60년대에 이 곰팡내 나는 부르조아 사회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그를 비판하였다. 새로운 주거 공동체(Wohngemeinschaft)와 학생 조직이 생겨나고 기성세대와는 다른 삶의 감정이 느껴질 수 있었다. 투쟁의 동력은 대학들에서 출발한 반 권위주의 운동으로부터 생겨났으며, 그것은 베트남 전쟁과의 대결을 통해 본격화되었다.
당시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이름을 걸고 베트남 민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고 있었다. 네이팜탄으로 무장한 미군의 무자비한 융단 폭격은 독일 전역의 좌파들 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학생운동 내부에선 의식적인 반제국주의 운동과 제3세계 해방운동에 대한 연대의 움직임이 자라나왔다. 1968년 2월 "사회주의 독일 학생연맹(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포스터)는 베트남 전쟁에 관련된 국제 회의를 개최하였고 여기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제3세계 해방 투쟁에 대한 지지와 전세계적인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의 혁신을 위해 유럽 각도시 들에서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제2의 전선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서유럽은 제국주의의 조용한 배후 국가로 남아있어선 안된다. 이 투쟁의 수단과 형태들은 각 나라들 대중의 조건과 의식에 따라 전개되어야 한다. 여기엔, 이미 라틴 아메리카의 도시 게릴라 경험을 통해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던, 혁명적 폭력의 사용이 포함되는 것이었다.
60년대 후반에 발생했던 두 사건은 이러한 분위기를 본격적인 저항으로 발전시키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1967년 6월 2일 폭력적인 독재정권으로, 당시 독일과의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던 페르시아의 국가원수가 베를린을 방문하던 날, 이에 대한 반대시위 도중 학생 Benno Ohneorg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채 1년도 안지나, 1968년 4월 10일 언론 재벌 Axel Springer사의 선동을 통해 자극받은 한 우익 화가가 독일 학생연맹 의장인 Rudi Dutschke를 저격하여 중태에 빠뜨리는 사건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일어난 광범위한 장외 가두 투쟁 (APO)이 1968년 말을 기해 그 한계에 직면하게 되면서, 독일의 저항세력들은 다양한 조직들로 분열되어 나갔다. KBW 같은 공산주의 그룹, 현실 사회주의 국가 지향적인 DKP 같은 조직이 생겨났고, 또 어떤 이들은 제도권에로의 진출을 시도하거나 반 교조적인 환경 운동에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무기를 들고 불법적으로 투쟁하려는 그룹들이 독일의 적군파, 즉 RAF 를 조직하였고, 이에는 다수 도시 게릴라 그룹의 연합체인 "7월 2일 운동", 그 이후에 생겨난 "혁명 세포"(RZ)와 "붉은 분노(ROTE ZORA)" 그룹 등이 해당된다.
도시 게릴라의 개념
Meinhof가 Baader를 탈주 시킨지 1년 후인 1971년 4월, RAF 기관지 "도시게릴라의 개념"(사진)이 등장한다. Meinhof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그 팜플렛에서 RAF는 무장 투쟁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현시점 독일과 서독에서 무장한 저항그룹들을 조직하는 것이 올바르며, 가능하고 또 정의로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린 또한 맑스-레닌주의의 최고 형태로서 무장 투쟁이 지금 시작될 수 있으며 또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없이는 대도시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은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는 불법적인 무장 저항조직들의 합법적인 프롤레타리아 조직을 대체할 수 있으며 이것이 유일한 계급 투쟁의 방법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장투쟁이 기업과 국가에서의 정치적 투쟁들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이것이 다른 투쟁들의 성과와 진보를 위해 필요한 하나의 전제라고 주장할 뿐이다."
RAF는 그들의 선사를 학생운동의 역사에서 찾는다. "자유,평등,박애도, 인권도, UNO-헌장도 우리 민주주의의 내용을 이루지 않는다. 여기서는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서의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착취가 문제이다.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규율과 지배, 그 무자비함이 그들로 하여금 항의하고 저항하며, 반 제국주의투쟁을 이끌도록 한 것이다. 학생운동에게 자의식을 주었던 것은 이곳에서 전개되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우리가 베트공과 같은 계급의 적을 상대한다는, 우리의 운동이 곧 국제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의 부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학생 운동은 그 조직형태가 그 목적에 적합한 실천을 발전시키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드러나 와해되었다. 학생운동은 자신의 목표와 내용을 반제국주의 투쟁이라 부를 수는 있었지만, 그들 자신은 혁명적 주체가 아니였으며, 때문에 그들은 운동의 조직적 중개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험으로부터 도시 게릴라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도시 게릴라는 전체적으로 보아선 힘이 약한 혁명 세력들에 의해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체제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탈 도덕화한다. 도시 게릴라는 국가의 지배 도구들을 개별적 지점에서 파괴하고, 곳곳에서 교란시키며, 체제의 편재와 체재의 불가침성이라고 하는 신화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1세대 RAF의 활동
당시 독일 정부는 경찰 및 법조인, 공무원등 국가 조직을 총 동원하여 이들 RAF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업에 돌입한다. 또한 언론과 방송, 티브이 등의 매체를 총 동원하여 국민들 사이에서 당시의 사회 혁명적 운동들에 대해 광범위한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켜 이들을 대중으로부터 이반시키려 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에 대한 정보차단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2년, 5명 중 1명의 독일 시민들은 RAF가 수색되고 체포되지 않게 하는 것에 대해 묵인하겠다고, 7명중 1명은 RAF 구성원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겠다고 대답했으며, 6%는 스스로를 RAF의 잠재적 동조자라고까지 말했다.
1972년 미국은 "베트남을 석기 시대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 민간시설에 대해서까지 전격적으로 폭격하고 나아가 북 베트남 항구를 지뢰밭으로 만들 공격 계획을 세웠다. 이 공격은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유럽 미군-사령부에 설치된 대형 컴퓨터를 통해 지원되는 것이었다. 1년 내내 이에 대한 많은 항의시위들이 있었지만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공격을 막기엔 역 부족이었다. 이에 RAF는 1972년 3월 11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제5미군 사령부를 폭탄을 장착한 차량으로 공격하였다. 이를 통해 5명의 미군이 사망하였다. RAF는 이 공격을, '우리 자신과 미국의 전쟁 책동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저 바라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수단을 통해 효과적으로 행위할 수 있게 한 해방적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베트남을 절멸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을 위해 서독과 서 베를린은 결코 더 이상 안전한 배후국가가 될 수 없다. 미국은 베트남 민중들에 대한 그들의 범죄행위가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는 새로운 적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과 이제 세계 어디에도 그들이 혁명적 게릴라 부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고 말했다.
5월 12일에는 아우구스부르그와 뮌헨의 경찰서에 RAF의 폭탄공격이 있었으나 부상자는 없었다. 5월 16일 독일 연방범원 판사 Buddenberg에 대한 폭약공격으로 그의 부인이 다치는 사건이 이어졌다. 5월 19일 마침내 함부르크에 있는 언론재벌 스프링어 빌딩에 두 개의 폭탄이 폭발하였다. 사전에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프링어는 직원들을 대피시키지 않아 17명의 직원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1972년 6월과 7월에 거쳐 드디어 수배 중이던 RAF 핵심인물들, Baader, Holger Meins, Jan-Carl Raspe, Gudrun Ensslin, Brigitte Mohnhaupt, Ulrike Meinhof가 체포되게 된다.
형무소 내에서의 투쟁
체포된 RAF 구성원들은 형무소에서 완전히 사회로부터 고립당한다. Ulrike Meinhof(사진)는 "죽음의 지대"라 불리는 쾰른의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녀의 감방은 모든 외부 세계로부터 청각적, 시각적으로 차단되었으며 사방의 벽과 시설들, 감방의 문까지도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림이나 달력 등도 벽에 걸지 못하게 했으며, 창문은 처음에 완전히 막혀있었고 후에 약간 열리긴 했으나 그 틈으로는 아무 것도 내다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네온으로 된 조명은 밤에도 켜져 있었고, 겨울에도 난방이 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고안된 이러한 "백색고문"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그녀는 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머리가 폭파될 것 같은 느낌, 척수가 뇌 속으로 쥐어짜 들어오는 듯한 느낌, 뇌가 마치 마른 과일처럼 점점 찌그러드는 느낌. 몇 시간 동안이나 알아차리지 못하나 끊없이 원격 조정당하고 있는 느낌. 내 몸통으로부터 영혼이 오줌을 통해 빠져나가 버리는 느낌,일어나서 눈을 떠보면 감방이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 오후에 햇빛이 비치면 갑자기 멈추어 서는 듯한 그런 느낌...벙어리가 되어 버려, 단어들의 뜻을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어 버리고, 항상 아픈 머리가 문장과 문법과 구조를 더 이상 콘트롤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 글을 쓸 때 두 번째 줄 말미에서 더 이상 첫 번째 줄 시작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내부에서 무언가 불타 버리는 듯한 느낌.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더 이상 어떤 생존의 기회도 갖지 못하리라는 분명한 의식. 완전히 끝장나 버렸다는 느낌. 면회 역시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1시간 후엔 그 면회가 오늘이었는지 지난 주였는지를 겨우 기계적으로 구성해낼 수 있을 뿐...살갗을 벗겨내 버린 듯한 느낌..."
1973년 1월 17일부터 40여명의 정치범들은 처음으로 공동 단식투쟁을 벌이며 RAF 수감자들에 대한 고립, 특히 Ulrike Meinhof를 "죽음의 감방"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단식투쟁 결과, 그녀는 2월 9일 남자 감방의 독방으로 옮겨온다. 그러나, 그 외의 수감 조건들은 하나도 변화하지 않았다. 1974년 9월 19일 수감자들은 이번엔 5개월동안이나 지속되는 단식 투쟁을 벌여 RAF 수감자들에 대한 특별대우와 비인간적 대우에 항의한다. 형무소측은 이들의 단식투쟁에 대해 고통스럽고도 생명에 위협적이기까지 한 강제 급식으로 대응하였다. 12밀리미터 두께의 고무 튜브를 강제로 입에 집어넣고 음식물을 쏟아붓는 것이다. 8주 후인 1974년 11월 9일 RAF 수감자인 Holger Meins가 강제 급식 도중 사망한다. Holger Meins의 죽음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국가의 RAF와의 전쟁이 형무소 내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폭력적 국가 권력에 대한 대중적 투쟁은 더욱 거세어진다. 그의 무덤 앞에서 당시 서독 학생운동 조직 SDS(사회주의 독일 학생연명) 대변인 Rudi Dutschke는 "Holger!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이러한 반 국가 투쟁에 불을 붙인다.
석방을 위한 투쟁
Holger Meins가 죽은 다음날 베를린의 고등법원장 Drenckmann이 "6. 2 운동" 그룹에 의해 사살당한다. 이에 국가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경찰과 비밀 경찰들을 동원해 전국에 있는 변호사무실, 좌파 서점, 인쇄소와 주거 공동체들을 수색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집들이 부서지고 많은 사람들이 임시 연행되었다. 그럼에도, 수배 중이던 23명 중 아무도 체포할 수 없었다. 1975년 2월 6.2 운동 소속의 테러리스트 3명이 베를린 CDU의 부의장이었던 Peter Lorenz를 납치하였다. 다음날 이들은 수감 중이던 6명의 RAF 테러리스트들의 석방을 로렌즈 석방조건으로 제시하고,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로렌즈를 살해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서독 정부는 이들의 요구조건을 수용하고 석방을 거부한 홀스 말러를 제외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을 석방하였다. 납치범들은 자진해서 인질이 된 전 베를린 시장이였던 알버트 그리고 석방된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서독이 제공한 루프트한자 항공기 편으로 남 예멘에 도착, 정치적 망명을 요구하였고, 알버트는 그 다음날 귀국하였다. 로렌즈는 알버트 도착 6시간 후에 무사히 석방되었다. 1975년 4월 24일 RAF "Holger Meins" 분견대가 스톡홀롬에 있는 독일대사관을 점거하고 12명의 대사관직원을 인질로 잡고는 26명의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였다. 경찰이 대사관 건물에 진입, 4명을 사로잡고 1명을 사살, 1명은 도주하였다.
1975년 5월 수감된 RAF 멤버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변호를 방해하고 배제하려는 조직적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변호인들은 수감자들과 직업적으로 접촉했다는 이유로 범죄인 취급을 받았고, 사무실을 수색당하고, 재판서류를 압류당했다. 이 재판을 위해 법률들이 개정되어 심지어 Andreas Baader는 재판이 시작하기까지도 변호인을 갖지 못했다. 1976년의 "반-테러법률"에 의해 변호인단과 정치 수감자들 사이의 편지나 정보교환에 대해 검열이 행해졌다.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이러한 제한은 유엔의 인권위원회와 다른 공식적 위원회에 의해 비판되기도 했다.
1975년 12월 21일 비인에서 열리고 있던 오펙 회의가 6명의 RAF 조직원들에 의해 습격 당한다. 이들은 회의에서 반-이스라엘 선언이 채택될 것을 요구하였고 11명의 장관들을 알제리로 납치해 간다. 그 와중 1명의 오스트리아 경찰과 2명의 아랍인이 사망한다.
Ulrike Meinhof의 죽음
1976년 5월 8일 Ulrike Meinhof가 그녀의 감방에서 목매달아 죽은 채 발견된다. 이에 대해 국제 조사위원회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Ulrike Meinhof가 목매달아 죽었다는 독일 당국의 주장은 증명되지 않았으며 우리 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오히려 그녀가 스스로 목매달 수 없었다는 데에 도달하였다. 본 조사 결과, 목매달았을 때 그녀는 이미 죽어있었으며, 이 죽음에는 제3자가 관여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상황증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형무소 직원들 외에 비밀요원들이 분리되어 있는 비밀 통로를 통해 7층 감방에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독일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자살이라고 발표되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타살 의혹과 그 죽음이 불러일으켜진 동요에 의해 프랑크프르트를 비롯한 독일 여러 도시에서 화염병을 동반한 과격 시위가 일어났다. 현 독일 외무부장관 요스카 피셔가 '전투요원'으로 참가했었던 프랑크프르트에서의 시위 도중 누군가가 던진 화염병에 의해 경찰관 1명이 심한 화상을 입었던 것도 이때였다. 같은 해 6월 27일 텔 아비브에서 파리를 비행하는 에어 프랑스 소속 항공기가 조지 하바시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조직 PFLP와 독일의 RAF 소속 8명의 테러리스트에 의해 아테네 이륙 직후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항공기와 함께 납치된다. 납치범들은 리비아의 벤가지를 거쳐 6월 28일 아침 우간다의 엔테베에 항공기를 강제 착륙시키고, 유럽 각국에 투옥되어 있는 아랍과 RAF 테러리스트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승객을 유대인과 비유대인으로 분류하여 협상과정에서 146명의 인질을 석방하고 유대인 106명은 계속 인질로 잡았다.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스라엘 정부는 특공대 대장인 조나단 네타나후 중령의 이름을 따 "조나단(Jonathan) 작전"으로 명명된 구출작전을 단행했다. 7월 3일 이스라엘을 이륙한 특공대는 3대의 헤큘러스 수송기를 이용해 3,000마일 떨어진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어둠을 이용해 잠입, 7명의 테러리스트와 20명의 우간다 군인을 사살하고 구출작전을 성공적으로 단행하였다. 30분간의 구출작전 과정에서 그러나, 특공대장 조나단과 3명의 인질이 사망하였다.
독일의 가을
1977년은 2세대 RAF 테러리스트들이 본격적으로 독일의 법조계, 경제계, 정치계의 주요인물들에 대한 테러를 벌였던 '독일의 가을' 해였다. 그 첫번째 희생자는 당시 독일 연방검사였던 Siegfried Buback였다. 1977년 4월 7일 Karlsruhe 시내에서 그와 그의 운전사, 그리고 그를 호위하던 한 명의 경찰관이 오토바이를 타고 습격해온 "Ulrike Meinhof 분견대"에 의해 사살 당한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Buback은 직접적으로 Holger Meins, Siegfried Hausner, 그리고 Ulrike Meinhof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는 연방 검사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통해 그들의 살해를 야기시키고 이끌었던 것이다. 게릴라에 반대하는 제국주의적 독일의 반전쟁 속에서 사법부는 그 전쟁을 이끄는 도구에 다름 아니다. Buback은 우리와의 대결을 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이끌어왔다. 우리는 우리의 전사들이 서독의 형무소에서 살해되도록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연방검사는 수감자들이 투쟁을 멈추지 않는 문제를 조정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연방검사가 수감자들의 4번째 단식 투쟁을 인권을 유린하는데 이용하고 Andreas, Gurdin. Jan을 살해하도록 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석 달 후 7월 30일, 드레스덴 은행의 대표이사였던 J rgen Ponto가 직원을 사칭하고 집에 들어온 RAF 요원에 의해 피살된다. RAF는 애초에 그를 납치, 수감자들의 석방을 놓고 협상할 계획이었다.
같은 해 9월 5일 쾰른, 5명의 RAF 테러리스트들이 서독 실업계의 거물로 서독 경영자협회 회장과 서독 산업 연맹 회장을 겸하고 있는 Hanns Martin Schleyer(사진)를 납치하였다. 납치 과정에서 그의 경호원 3명과 운전사가 사살당했다. 이들은 감금당해 있는 Shleyer의 사진을 언론에 보내며 연루 중이던 Baader를 비롯한 11명의 RAF 구성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수감자들이 그들이 원하는 나라로 석방된다면 Schleyer를 석방하겠다고 말했다. 슐라이어는 당시 독일 사회에서 가장 힘있는 인물 중의 하나로, 언론들이 침묵하거나 면죄시켜 준 나찌 경력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미 16살 때 파시즘 운동에 참여했었으며, 나찌 학생회의 리더로써 대학 평준화와 유대인 및 반 파시즘 학생들의 제거에도 참여했었다. RAF의 납치전이 이루어지는 동안 형무소에선 수감자들에 대한 접촉이 강하게 통제되었고, 형무소 외부에선 동시에 전격적 수색이 이루어졌다. 중요한 교차로에선 20살에서 35살 사이의 운전수가 운전하는 모든 통행 차량들에 대한 검문이 이루어졌으며, 쾰른에선 모든 전기 계량기들이 점검되었다. 슐라이어의 가족과 동료들은 협상을 원했으나 독일 정부는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할 수 없다는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이에 가세해 그해 10월 13일 4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부대가 82명의 승객과 5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Mallorca에서 프랑크프르트로 향하던 루프트 한자 항공기(사진)를 납치, RAF 연루자와 터키에 수감되어 있던 "팔레스타인 해방전선" 소속의 두 명의 석방과 1500만 달러의 석방금을 요구하기에 나선다. 그들은 이 요구가 10월 16일 8시까지 이행되지 않을 경우 승객과 승무원을 모두 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납치된 비행기는 마요르카에서 로마, 사이프러스, 바레인, 두바이, 아덴을 거쳐 납치 발생 5일만에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공항에 최종적으로 착륙하였다. 독일 정부당국은 협상을 거부하고 소말리아 정부의 허락을 받은 후 영국제 특수장비와 SAS 대원의 도움을 받아 대 테러리즘 특공대 GSG-9를 투입하여 10월 18일 밤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하고 인질들을 구출한다.
1세대 RAF의 죽음
10월 18일 아침 Andreas Baader(사진)와 Gurdrun Ensslin 이 죽은 채로, Jan-Carl Raspe 와 Irmgard Moller는 심하게 부상한 상태로 감방에서 발견된다. Raspe는 몇 시간 후 사망하였다. 이후 이루어진 조사에서 석연찮은 점들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자살이라고 하는 공식발표가 이루어졌다. Andreas Baader가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하지만, 전문가 판정에 의하면 권총은 머리에서 30-40Cm 떨어진 곳에서 발사되었으며 권총 길이 자체가 이미 17Cm였다. Gurdrun Ensslin의 시체에는 상처와 피 멍들이 발견되었다. 독일 당국은 이것이 스스로 목을 맸을 때 오는 발작 과정에서 단단한 대상에 몸을 부딪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Meinhof의 경우에서처럼 스스로 목을 맸는지, 아니면 이미 죽어있는 상태로 목 매달아졌는지를 판정할 수 있는 히스타민 테스트는 거부되었다. 관계자들이 시체를 곧바로 묶어 버렸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Irmgard Moller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살이란 우리들에게 명백히 말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투쟁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내 상처도(심장 바로 옆의 자상) 내 스스로 낸 것이 아니다." 당시 Irmgard Moller는 의식 불명상태에서 병원으로 후송 도중 깨어났다. 당시 수감자들은 거의 6주 이상 고립상태(접촉차단)에 처해있었다. 그들은 라디오를 지닐 수 없었으며, 따라서 모가디슈에서 그들 스스로가 경험할 수 있었을 사건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1977년 10월 19일 한 프랑스 신문 편집부에 Hanns-Martin Schleyer의 시체가 어디있는지 알려주는 편지 1통이 배달된다. 거기엔 "모가디슈와 스탐머(형무소)에서의 학살에 대한 우리의 고통과 분노에 비하면 그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문장이 쓰여져 있었다. Shleyer의 시체는 납치된지 43일 만에 차량 트렁크에 실린 채 발견된다.
RAF의 해체
이들 1세대 RAF 멤버들이 죽고, 독일의 정치가 안정 기미를 보이자 한동안 독일 내에선 좌파 테러가 잠잠해지는 듯 했다. 그러나, RAF 조직 자체가 완전히 와해된 것이 아니었다. 80년대 들어 RAF가 벌인 테러들은 다음과 같다. 1981년 헤센 주 경제 장관 Heinz-Herbert Karry 피살, 85년 8월 20세의 미군 파이멘탈 살해, 적군파는 그의 신분증을 가지고 라인-마인 공항에 폭탄을 장치하여 2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86년 7월 지멘스사 경영자 백쿠르츠 살해. 86년 10월 외무부 브라운틸 국장 살해. 89년 도이체 방크 은행장 Alfred Herrhausen 피살, 1991년 신탁청 총채 Detlev Karsten 피살. 93년에 RAF는 헤센 지역에 증축 중이던 형무소 건물을 폭파하였다. 같은 해 Wolfgang Grams와 Birgit Hogefeld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Grams는 국경 수비대원 1명을 살해하고 자살한다.
1996년 말 프랑크프르트의 법정에 선 Hogefeld는 RAF의 와해를 선언한다. "투쟁은 좌초되었다." 그러나, RAF의 공식적 해체는 1998년 4월 20일 RAF가 로이터 통신에 발송한 "해체 선언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통독 이후 동독에 은신해 있던 조직원들의 신원이 드러나고, 그들의 투쟁 방식에 대한 좌파 내부에서조차 비판적 시각이 증폭되어가면서 이루어진 자기 해체였다. 그들의 해체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RAF는 해방투쟁 속에서 1970년 5월14일 탄생하였다. 오늘 우리는 이 계획을 종결한다. 이제 RAF의 조직으로 진행되었던 도시 게릴라는 역사 속의 한 장이 되었다. RAF는 나치로부터 해방되고도 나치의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항해 투쟁을 시작하였다. 무장투쟁은 권위적 사회형태와 (자본주의적) 소외와 경쟁에 대한 반항이었고 다른 사회적 문화적 현실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해방의 바람 속에서 사이비 합법 체제를 거부하고 극복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의 시간이 무르익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좌파가 그 한계에 도달하고 붕괴하기 시작되었을 때 RAF를 새로운 기획에 연관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비현실적이었다. RAF의 오류는 불법적 무장투쟁 외에 어떠한 정치 사회적 조직도 구축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런 기획의 부족은 RAF가 미래의 해방과정에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세계는 우리가 혁명을 시작했을 때 보다 더 악화되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적절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저지른 오류들보다 더 심각한 일이다. RAF는 해방의 해답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이었다. 그럼에도 해방된 인간의 세계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래의 해방계획은 여러 주체와 관점과 내용의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상이한 개인이나 사회 그룹들이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68년이래 독일 좌익의 구상은 새로운 해방의 기획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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