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론 대 종말론: 알튀세르와 데리다의 대화'

(- 에띠엔 발리바르) 후기

 

목적론종말론을 굳이 구분하려 생각해본적 없었고, 둘 다 형이상학의 한 형태일 뿐 역사의 시작과 끝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기각해야할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다 이 글에서 데리다가 목적론과 종말론을 구분하고, 목적론에 대한 대안으로 종말론을 제시한다는 내용을 읽으며 종말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종말론을 후쿠야마류의 역사의 종언으로 생각해왔는데, 철학적 의미에서 종말론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겠구나 싶다. 우선 알튀세르에게 있어 목적론역사에서의 단일한 기원을 상정하고, 그것이 헤겔적인 전개를 거쳐 단계/목적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발리바르가 서술한 바에 따르면, 이미 주어진 목적의 실현으로서 역사적이고 지적인 과정,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목적을 갖는 과정에 대한 교리) 자본주의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필연적 도래와 같은 목적을 향해 역사가 진화해간다는 의식에 목적론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맞게 이해한 거라면, 데리다가 목적론과 구분짓는 종말론은 앞으로 올 (해체불가능한)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불가능성을 명령ㆍ소환하는 PT의 메시아성(마르크스의 유령적 요소)과 관련된다. 이 메시아에 의한 심판은 임박한 혁명과 혁명적 운동의 분열이 역설적으로 공존하는 순간이고 결과가 발본적으로 불확실하다.

 

나의 현실적인 고민으로 질문을 옮겨보면, 소위 Turning point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의 결정적 국면이 존재할 것인가, 역사의 어느 한 국면을 특권화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만약 특권화 시키지 않는다면, 이를테면 1917의 러시아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등이다. 대중으로서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순간, 그 임박한 파국의 순간, 심판의 순간을 상상치 않는 운동은 가능할 것인가? 사실 이런 류의 종말론이라면 나를 비롯한 주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것이고,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여기에 있었다. 분명히 마르크스 또한 부단히 진동했을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이지도 않은 대안, 발본적으로 유물론적인 대안을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한다고 주장한다. 목적론과 종말론을 구분짓는 데리다의 비판과 달리, 역사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역사의 목적 뿐만 아니라 종언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임을 확인하고, 목적론/종말론이 아닌 변증법으로 역사를 조망하는 것이 진정 '유물론'적이라는 것이 데리다-알튀세르 사이에 유예되었던 대화의 결론으로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내용이다. 유물론적 태도에서 변증법은 변혁을 장기적인 이행으로 사고하고, 따라서 역사를 끊임없는 과정으로 사고(미래는 오래 지속된다)하며 그 안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서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던 것(철학에서 유물변증법, 경제에서 논리와 역사의 결합 등)을 끌어내려는 내재적 비판이 진정 마르크스적인 것이고,  역사의 목적/종언이라는 관념론과 단절하는 게 유물론이었음을 밝혀내는 건 마르크스를 복원시키는 작업이다. 이것은 어느 순간에서나 혁명이 가능하다는 선험적인 주장혹 의지주의와 결별하는 것이고, 승리의 순간이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지성으로 비관하며, 설사 심판의 순간으로 여겨지는 국면에서도 고독할 이행의 여정을 생각하며 차가운 지성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건 오랫동안 혁명에 대해 품어왔던 낭만적 감성과 저 극단에 있는 것이고, 그렇잖아도 보잘것없는 존재인 나를 더욱 위축시키지만, 가장 원칙적이고 발본적인 부정으로서 혁명이라는 관점을 기각했을 때 취해야할 당연한 귀결이고, 현실적으로도 타당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삶의 고통 없기를 바라지 말것이고, 되려 이 순간의 해탈이야 말로 아편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니, 부처의 가르침도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리라. 니체의 영원회귀 또한 다른 식으로 읽자면, 현실의 구질구질함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을 마다하지 말라는 것이지 않을까.(물론, 니체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결코 이걸 얻으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