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려고 맘먹고 일은 건 아니고, 시험공부 하기 싫어서 딴 짓하다 텍스트 파일로 있는 걸 핸드폰에 받아서 읽었다. 하필이면 자기전에 농땡이 피울 궁리를 하다 붙잡고 읽은 거여서 새벽 4시가 넘어 잤더니 다음날까지 엉망진창이었다. -_-
특별한 갈등구도도 없고, 문체가 구수한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주제나 사건의 전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한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증을 만들어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람의 이야기여서 그런 것 같다.
'토지'에서처럼 '김약국의 딸들'도 소설의 시간적 배경의 폭이 매우 넓다. 하지만 숫자로 바꿔놓고 보면 100년이 채 안되는 시간이고 수백 수천년 쯤은 쉽사리 넘나드는 현대 소설에 비해 시간의 폭이 넓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폭이 넓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속 시간대 안에 갸늠할 수 있는 3대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에 500년, 1000년이었다면 내가 동감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손에 잡히는 규모의 시간대를 한 이야기 안에 엮어놓는 데에서 그 시간대가 위압감 있게 다가온다. 역사 앞에 섰을 때 겸손해지는 것도 그 역사가 갸늠이 가능할 때이다. 그 역사 안에 살았을 사람들의 삶이 두리뭉실하나마 만져질 수 있을 것 같을 때.
이땅에는 예전에도,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고. 그네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담아내면 그 사람수만큼 소설들이 나올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걸 평소에는 실감하지 못하고 살다가,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으면 이전에 살았을 불가사의한 숫자의 생명들이 머리속에 펼쳐진다. 이럴 때 느끼는 어떤 감정은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기도 하고, 삶을 담담하게 대할 수 있게도 해준다.
박경리의 '토지'는 정작 토지에 발딛고 사는 사람들이 중심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정말 '토지'에 대해 쓰려했다면 시점이 달랐어야 했다고. 고등학교 다닐 때 들었던 이야기 같은데, 그 땐 '토지'를 그저 재밌게 읽기만 했던 터라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고, 대학교 와서는 '토지'를 다시 펼쳐볼 염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말은 기억만 해두던 터였다. 그런데 '김약국의 딸들'을 읽다 보니 좀 느껴지는 게 있다. '평범'이라고 상정되어진 모델에 맞게 살아간다 해도 그것이 결코 평범한 삶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도 덜중요할 건 없지만, 박경리의 촛점은 그렇게 무난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다. 무난해 보이는 이들의 삶이 결코 무난하지 않음을 얘기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중립적인 사람들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거다. 평균적인 아픔들. '모든 사람이 저 마다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요'라는 말 앞에서 아픔의 불균등함은 외발로 서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