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0년전에 읽었던 책, 문득 떠올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근래에 나카자와 신이치의 어떤 책을 읽으면서, 아스트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카자와 신이치에 대한 호감은 대단히 맹목적이었던 것 같다.

 

다윈의 대답2를 읽으면서, 신화가 인류의 장기적인 기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화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책을 훑었다.

 

먼저 요약하면

 

나카자와 신이치는 후기구석기를 지나면서 인간의 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 현재 인류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됐을 거라고 추측한다. 이 변화를 거치며 언어가 탄생하는데, 태초의 언어는 시나 음악과 같이 비유(은유, 환유)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최초의 의식은 시를 감상하듯이 세계를 이해했고, 세계는 '상징의 숲'이다. 

 

신화는 바로 이 '시'와 같은 차원에 있다. 저자는 세계를 비유와 상징으로 인식했던 것이 신화라고 바라본다. 신화시대에는 문화와 자연이 구분되어 있고, 문화 덕분에 인간은 욕망을 억누르고 절제된 행동을 한다. 이 때에는 문화와 자연 사이에 대칭성이 유지되고 있지만 자연의 힘을 흡수하면서 문화는 문명으로 변한다. 이제 문명에 미달하는 것을 야만으로 몰아부치지만, 실상 대칭성의 사회에서는 현재의 문명이야말로 야만이다.

 

털가죽을 뒤집어 쓰면 동물로도 사람으로도 변할 수 있는 세계에서는 사냥으로 식량을 얻더라도 선물 받은 것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 세계에 예리한 검, 총이 들어오면서 자연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이 비대칭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약자의 테러가 행해진다.

 

대칭성의 사회에서는 문화 안에 자연이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장벽을 두는데, 제의/식인은 이런 절차를 표현한다. 사회의 수장은 자연의 권력을 가진 샤먼, 전사와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 내부로 자연의 권력이 들어오게 되면서 수장을 대체하는 '왕'이 등장하고 국가가 만들어진다.

 

식인은 문화가 부여해주는 인간의 의미를 먹어치우는 것인데, 자아를 부정하는 불교의 공(空)은 그런 의미에서 엄청난 식인이다. 불교에는 국가와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있고,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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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대답2와 연관지어서 생각났던 게,

전업사냥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피식자의 개체수를 유지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점과 파트타임 농부가 등장한 뒤에는 수렵 이외의 다른 생존방법이 생겼기 때문에 더 잔혹한 포식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든 생각은, 결국 대칭성의 사고라는 것도 토대에 기반하지 않느냐는 거다. 곰을 과하게 사냥해서 절멸시킨다면, 인간도 죽는다. 소위 대칭성이 깨진 사건도 파트타임 농부의 출현에 대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새로이 자연의 권력을 획득했다기 보다, 그것을 제한할 필요가 없어진 인간의 살육. 

 

이렇게 보면, 나카자와 신이치가 대칭성의 사고를 회복하자고 주문을 외는 것은 대단히 허망하다. 대칭성의 사고가 깨진 것은 생존양식이 변한 데 따른 결과인 것이지, 원인이 아니다. 야만적인 사회를 바꾸기 위해 대칭성의 사고를 회복시켜야 겠다면, 사고의 전환이 아니라 토대의 전환을 도모해야하지 않을까.

 

결국 결과를 원인으로 두고 분석하는 꼴이다 싶은데, 이런 게 관념론의 한 형태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