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글을 쓰게 되는데,

그만큼 재밌고 좋아서다.

할 일 없는 놈들이 밀짚모자 쓰고 수염 기르고는 세상 고민 전부 짊어진 것처럼 불교 한다고 지랄하더라. 그리고는 어디서 주워들은 쓰레기 같은 말들 가지고 장난만 치고... 그런 놈들이 '불교 하면', '중 되면' 나무 그늘에 붙어서 노래만 부르는 매미처럼 산다고 생각하고... 느리게 산다? 지랄들하고 자빠졌네. 그렇게 게으르게 살아가 도를 깨치겠나? 그런 소리 하는 놈들은 정신 차리게 뺨따귀나 몇 대 때리면 속이 다 시원하겠다. - p91-92

이런 구수한 입담이 계속 이어진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버려라, 버려라",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멈춰라", "일체유심조" 등등 이성을 포함 해 모든 걸 놓는 게(정확하게는 포기하는 게) 수련의 방편인 것처럼 소비되는 '구도' 상품들에 대한 비판이다. 이성을 직관의 반대말 쯤으로 여기는 풍토가 있는데, 엉뚱하게 짚은 거다.(MBTI에서는 직관-감각이 쌍이다.)

류시화를 비롯해 구도를 상품화시키는 일련의 무리들에 대해 불편함이 있었는데, 나의 불편함은 "깨달음의 길이라는 게 원래 그런건데, 나는 분별지를 버리지 못해 따라가지 못하는 건가"라는 자책과 의문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상교 씨는 불교가 철저한 논증에 기반한 '이성'과 누구가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경험'에 기반한 종교라고 설명한다. 제8식인 아라야식이라는 게 추상적으로 개풀 뜯어먹는 소리가 아니라, 수행을 통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식'의 하나라는 거다.

나에게도 학승을 선승보다 낮게 자리매기고, 돈오의 순간이 깨달음의 전부라고 멋대로 그려놓은 상이 있어왔다. 문제는 내가 그려놓은 그 상에, 나는 도무지 부합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건데, 언젠가부터 내가 부당한 대립쌍을 만든 것이라는 걸 깨닫기는 했지만, 마음 속 깊숙이 자리잡은 선입견을 지우는 게 여전히 쉽지 않다.

불교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내가 접하는 건 한국-중국 선불교 언저리일 뿐이었다. 불교의 역사, 갈라짐과 논쟁에 궁금한 게 많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풀리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입문서이고, 내 궁금증을 풀려면 어떤 책을 더 찾아서 읽어봐야할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는 의미다.

내가 막연히 인도철학-사상에 느끼던 불편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도 고민해보게 됐다. 따지고 보면 내가 처음 읽었던 불경, 금강경에서 느꼈던 감동은 내 멋대로 노장 식의 해석을 덧씌우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 땐 노장과 선불교를 구분해낼 수 없었고, 지금은 중국 불교가 노장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렇다해도 중국 불교와 인도불교, 티벳불교가 어떻게 다른지 접해볼 기회가 없었고 막연하다. 되짚어보면, 인도불교에서는 소승이 대세고, 중국-한국에서 대승불교의 꽃이 피었다는 식(대승이 소승보다 우월한 것)의 편견도 있었고, 티벳불교를 영성의 가르침 정도로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있었다. 이러니 무지는 죄악이다.

1차결집 부터 시작된 불경의 성립, 상좌부와 대중부의 갈라짐,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여러 학설, 중관불교, 유식불교 등 불교 학파의 차이 등등, 내 의식을 열어주는 이야기들이었다. 어떤 책을 읽든 매번 느끼는 바지만, 우리의 의식은 유한하여 아는 만큼만 생각할 수 있고, 여기에 경험이라는 재료가 없으면 생각은 몽상이 되기 십상이다.

나머지는 다 읽고나서 쓰련다.

도쿄대학 불교학과 - 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 공부
도쿄대학 불교학과 - 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 공부
정상교
동아시아,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