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론:역사학 비판

한국사

한국역사(한국역사연구회, 1992)는 한국 역사 입문(한국역사연구회, 1995-1996)의 축약본. 한국사강의(한국역사연구회, 1989)를 대체한 것. 한국역사는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에 주목, 한국사강의는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운동에 주목. 한국역사연구회가 개정판 준비하고 있지는 않음.

다시 찾는 우리 역사(한영우, 1997)의 축약본인 간추린 한국사(한영우, 2011) 같은 한국 통사 참고할 필요. 시민을 위한 한국역사(한영우 등, 1997)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통사.

한국사학사

한국사학사의 대표작은 역사학의 역사(한영우, 2002). 한국사학사 대요(박인호, 1996)도 참고.

한국역사연구회는 한국사학사에 대한 입장을 제시한 적 없음. 20세기 한국사학사에 대한 입장은 한국사 연구와 과학성(이세영, 1997) 참고.

한국사에서 사관수사(史館修史) 전통은 고려왕조에 의해 확립. 고려왕조가 편찬한 정사는 신라주의와 고구려주의의 논쟁을 해결하지 못함.

사관수사(史館修史) : 관찬사서 지향. 고려는 삼국시대 이래의 개인편찬사서체제(個人編纂史書體制)를 지양하고, 국초부터 당제(唐制)를 본받아 사서분찬제(史書分纂制)를 시행하였다. 사서분찬제란 사관(史官)이 사관(史館)에 모여 사서를 나누어 편찬하는 체제이다.

기전체 정사의 효시는 삼국사였는데 실전됨. 삼국사는 고구려주의를 복권시켰다는 특징. 광종이 칭제한 사실과 관련.

삼국사를 대체한 새로운 기전체 정사는 신라주의를 부활시킨 삼국사기. 삼국사는 묘청의 입장을 정당화한 반면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입장을 정당화한 것. 김부식은 사마광의 영향을 받음. 묘청은 풍수도참설을 신봉한 승려.

원과의 대결 지향한 무신정권은 고구려주의를 주장. 불교를 존숭하는 입장에서 팔만대장경을 간행. 원간섭기에 고조선, 발해, 말갈까지 포함한 삼국유사를 사찬. 신화와 전설을 집대성.

고조선-고려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편년체 통사는 동국통감. 동국통감은 삼국사절요, 고려사절요를 계승. 삼국사절요는 신라주의와 고구려주의를 절충. 고려사절요는 신권주의적 기전체 정사 고려사와 왕권주의적 용비어천가를 절충.

중종 때 박상은 동국통감을 1/10로 축약한 동국사략을 사찬. 신라주의를 채택. 정도전이 아닌 정몽주를 중심으로 사림의 계보를 정리. 이익, 성혼, 송익필, 윤근수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의 역사관은 동국사략으로 소급.

왜란 직후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만주의 고조선과 한반도의 삼한이 병존했다는 주장을 제기(북자북남자남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반면 백제, 가야, 신라는 각각 마한, 변한, 진한을 계승했다는 설을 주장. 그 자신은 고구려주의를 주장.

호란 직후 서인이 조선중화주의를 창도하면서 신라주의가 강조됨. 유계가 고려와 요금원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사제강을 사찬. 제강은 강목과 동일한 의미로 자치통감강목(조사연)에서 유래. 주희, 조사연은 춘추의 경과 전처럼 강과 목을 구별하면서 정통론의 관점을 강조.

김성일, 유성룡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남인, 정구의 학통을 계승한 기호남인도 서인과 거의 동일한 입장.(김성일, 유성룡, 정구는 이황의 수제자) 영남남인 홍여하는 신라 중심으로 고려 전사를 정리한 동국통감제강을 사찬. 기호남인 이익은 고조선-한-삼국-통일신라-고려라는 계보를 제시했는데, 그의 제자 안정복이 사찬한 동사강목이 강목체 통사였음.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북자북남자남설을 계승하지만, 고조선보다 한(마한)이 발전한 사회라고 주장. 고구려가 쇠퇴한 것은 상무(尙武)정신이 해이해진 탓이라고 주장. 모순적.

기호남인 중 고구려주의를 주장한 대표적 경우는 유득공. 발해고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남북국시대라는 관점을 제시.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이라고 주장.

기호남인 한치윤이 해동역사(海東繹史)를 사찬. 동국문헌비고, 중국 일본의 사서를 토대로 한 고려왕조까지의 기전체 통사. 繹史는 역사에 대한 고증이라는 의미. 성혼의 학통을 계승한 소론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사찬. 기사본말체를 기사체로 보충한 조선왕조의 야사.

메이지유신 이후 동경제국대학에서 식민사관 출현.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경성제국대학과 조선사편수회에서 발전하여 조선사로 완성.

식민사관에는 일선동조론, 만선동조론, 유교망국론, 당쟁망국론이 포함. 식민사관의 핵심은 봉건제결여론, 조선정체론. 이는 독일역사학파 후예인 후쿠다(福田三德)가 제기한 주장. 봉건제가 결여되어 조선이 정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식민사관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신라주의와 고구려주의의 논쟁 지속. 신채호는 강유위, 양계초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면서도 독일의 낭만주의적 민족주의를 채택. 정신적 유기체로서 국수라는 민족(Volk) 개념을 고수. 신채호는 신라주의를 비판하고 고구려주의를 복권시키기 위해 한국사를 만주의 부여족(主族)과 한반도의 한족(客族)의 투쟁으로 서술. 1910년대에 대종교를 수용하면서 배달겨레(단군족)에 예맥족(부여족), 한족, 말갈족도 포함. 왜(倭)만 배제한 것은 일선동조론 주장 때문. 식민사관에는 만선동조론도 있었으므로 그의 비판은 정곡을 찌르지 못한 것. 1920년대에 아나키즘으로 전향한 다음에도 사회진화론과 국수주의를 고수.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 

최남선은 단군을 단국의 군주가 아니라 무당으로 해석. 인도-유럽문화권, 중국문화권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불함문화권이 발칸-중앙아시아-만주-한반도-일본열도까지 존재했다고 주장. 이는 식민사관과 친화성이 있는 일만선동조론.

안확은 조선문명사에서 부족-국가-통일국가라는 정치적 발전을 기준으로 한국사의 시대를 상고-중고-근고-근세로 구분. 안확은 조선이 일종의 입헌군주정인 제한군주정이었다고 평가. 붕당정치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서 신권주의를 주장한 서인은 자유주의정파, 왕권주의를 주장한 남인은 보수주의정파였다고 주장. 탕평정치의 귀결로서 외척세도정치가 망국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셈.

안확의 후예인 이병도, 김상기, 이상백이 주도한 진단학회와 신채호의 후예인 문일평, 안재홍, 정인보가 주도한 조선학이 1950년대 남한사학계 주류의 연원. 그들은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 정약용이 집대성한 실학을 강조함으로써 문화주의적 민족주의를 창도.

신채호, 안확의 식민사관 비판은 역부족. 가장 유력한 비판은 후쿠다의 제자 백남운(연희전문학교 교수)이 조산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에서 제시. 백남운의 평전은 한국 근현대사상사 연구:1930-40년대 백남운의 학문과 정치경제사상(방기중)을 참고. 백남운의 부친은 송시열 후손 송병선의 제자.

백남운에 따르면, 삼국은 노예제, 통일신라-조선은 봉건제. 고려가 가장 전형적인 봉건제. 고조선은 원시공동체에서 노예제로의 이행기였는데 확정적 판단은 유보. 유럽적 봉건제와 차별화된 아시아적 봉건제의 특징으로 토지국유제와 그 결과로서 지대와 조세의 통일성을 강조.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분단정국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백남운의 시기구분을 둘러싸고 사회사 논쟁 전개. 이청원은 삼국부터 고려까지는 노예제, 조선은 봉건제였다고 주장. 일본공산당 주류 강좌파와 친화성 가졌던 그는 아시아적 원시공동체론을 수용하여 아시아적 봉건제론 기각.

강좌파는 1868년 이래의 메이지유신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봉건적 또는 반봉건적 관계가 존속하고 있다고 봤다. 따라서 절대주의 천황제를 타도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 당면한 과제라며 2단계 혁명노선을 제출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코민테른의 정치방침과 이를 추수하는 일본공산당의 입장 즉 정통파를 대변하는 것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209232058325

전석담(경성고등상업학교 교수)은 노예제의 존재를 부정. 노예제의 부재로 인한 원시공동체의 장기적 존속으로 인해 삼국부터 시작된 봉건제로의 이행이 완만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 백남운의 아시아적 봉건제론을 지지.

1960년대 이후 등장한 신세대는 서울대 한우근, 김철준 교수. 그들의 후계자가 한영우 교수. 김철준 교수가 '한국적 민족주의론'으로 유신을 정당화한 대가로 박정희가 한국사학계를 물심양면 지원.

진단학회 핵심성원 이상백 교수는 미국의 원조로 서울대 사회학과 창설. 그의 학통은 최문환 교수를 거쳐 김진균, 신용하 교수로 계승.

북한사학계를 주도한 사람은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출신 김석형과 박시형. 1960년대 북한사학계는 고조선은 노예제, 삼국시대 이후는 봉건제였다는 결론 도출. 백남운, 진석담의 아시아적 봉건제론은 견지. 1970년대에는 주체사상이 득세하면서 고조선-고구려-발해 계보 강조하는 주체사관 출현. 역사의 추동력을 계급투쟁, 민족해방투쟁에서 발견하면서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 개념은 상대화.

1975년, 사회경제사를 거부하던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연세대 사학과로 이적한 김용섭 교수가 백남운 학통을 계승하여 조선후기 사회경제사를 연구. 한국사 인식과 역사이론(김용섭교수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간행위원회, 1997) 참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경제학부는 전석담의 학통 계승하지 못함. 박현채 선생 교수로 부임하지 못했고, 안병직 교수는 전향. 이대교, 진백달 같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가 부재.

고려대 사학과 강만길 교수가 분단사관, 민족통일사관을 제기. 한국사회성격 논쟁에서 민족해방(NL)론의 일각으로 계승. 민족해방론의 주류는 주체사관에 충실.

깅용섭 교수 입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한국역사연구회는 PD론적 입장과 친화성을 갖는 한국통사를 집필. 통일신라 이후에 봉건제 출현했다고 주장. 한국사에서는 노예제 발견할 수 없음을 인정. 주체사관, 분단사관 아닌 사회경제사관 타당하다는 것이 내(윤소영) 생각.

 

이처럼 정여립 사건과 관련되어 등인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에 대한 선조의 분노가 어떠했는지는 동인의 엉수인 이발이 뚜렷한 연루 혐의도 없이 조사를 받다가 죽은 데서도 알수 있다. 뚜렷한 물증은 없었지만 사건은 날로 확데되었고 억울한 희생자는 크게 늘어 갔다. 이 사건은 정철과 이발, 그리고 류성룡 등이 모두 죽고 난후에도 남인과 서인 사이의 끝없는 논쟁거리가 되있다. 이발이 죽을 당시 정철이 위관이었는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서인들이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라 동인인  류성룡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남인측은 정여립 반란 사건 내내 위관은 정철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럼 정여립 사건 당시 위관은 누구였던가? 류성룡이 위관이있던 적이 있있을까? 류성룡이 위관이었나는 증거는 없다. 다만 정여립 사건의 수사기록인 기축옥안已丑獄案이 임진왜린 때 불타버린 것을 이용해 서인들이 자기들이 살육한 정치보복을 동인 류성룡에게 뒤집어 씌운 정치공세였다. 이 사건은 조선의 당쟁이 피행으로 가는 첫 관문이었다. 사건의 진상은 모호한채 뚜렷한 물증도 없이 수많은 동인들이 죽어 갔다.

이덕일, 조선 선비 당쟁사


정철과 유성룡의 대화를 기록한 김장생의 ‘송강행록’이 조작이라고 이 소장은 주장했습니다. 선조 23년에 위관(委官)은 정철이었는데, 마치 유성룡인 것처럼 김장생이 기록하여 이발의 노모와 아들을 유성룡이 죽인 것처럼 덮어씌웠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이 일이 선조 23년이 아닌 선조 24년의 일이었다고 바로잡아 그의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광해군 9년(1617) 생원 양몽거(楊夢擧)의 상소’와 ‘아계 이상국(이산해) 연보’를 근거로 선조 23년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조반정 이후의 서인들 기록에서부터 ‘선조 24년’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몽거의 상소는 광해군 9년이 아니라, 60년 뒤인 숙종 3년(1677)의 일이었습니다. 그 뒤 이 양몽거의 상소에 대해, 신묘년(선조 24년)을 경인년(선조 23년)으로 잘못 보았다는 다른 이들의 비판이 이어집니다. ‘아계 이상국 연보’도 광해군 때가 아니라 인조반정 이후에 편찬된 것입니다. 이것이 ‘장황한 판본 조사’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들이 죽은 시기는 분명 선조 23년 5월이 아니라 유성룡과 이양원이 위관을 맡았던 선조 24년 5월입니다.

이덕일 소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논조를 바꿉니다. 아니지요. 기본 성격은 바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에서 도출되는 것입니다. 이 소장과 같은 방식으로 사료를 인용하면서 주장하는 ‘기본 성격’을 저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덕일 소장에게 편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편견의 기반은, 식민사관에서 시작되어 근대주의적 역사관, 즉 ‘자본주의맹아론-실학’ 구도에서 강화된 당쟁론입니다. 제가 ‘콩쥐-팥쥐’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한국지성사의 안타까운 일면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장은 비장하리만큼 자신과 ‘주류학계’를 구별하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주류학계’의 충실한 일원입니다.

- 오항녕, http://m.hani.co.kr/arti/culture/book/36975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