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이 서문을 달았다. 슬라보예 지젝의 서문과, 마오쩌둥의 본문에 대해 각각 적어야할 것 같다.

 

슬라보예 지젝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되짚어보니 글 하나를 온전히 다 읽은 것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당췌 번역이 그런건지, 쓰는 말이 그런건지, 못알아들을 말이 많다.(이를테면 '마오쩌둥의 변증법은 이해, 즉 고정된 관념적 대립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말하자면 관념적 결정의 변증법적인 자기동일화를 형식화하지 못한 것이다.'-이게 무슨 말일까?)

 

 

  •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은 언제인가? 후기의 엥겔스가 역사적 유물론을 실증주의적 진화론으로 변질시켰을 때인가? 제2인터내셔널의 수정주의와 정통주의였는가? 레닌이었는가? 아니면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수십 년 전에 주장했듯) 젊은 시절의 인간주의를 저버린 만년의 마르크스 자신이었는가? [...]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은 이론의 여지 없이 애초부터 각인된 것이다(좀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원래의 모델을 오염시키고 타락을 일으킨 침입자를 찾는 행위는 반유대주의의 논리를 재생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는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를 가차없이 비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을 비판하고 그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두 번의 중요한 전치가 일어났는데 한 번은 마르크스에서 레닌, 그리고 한 번은 레닌에서 마오쩌둥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운동은 아시아적인 '근본적 낯섦'에 기반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이 보기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승리는 '자본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반세계화 운동은 오히려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을 '제국주의 비판으로 변형하려는 유혹'에 굴복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반자본주의'라는 기표는 전북의 힘을 잃었고, 오히려 민주주의(정치)를 문제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마오쩌둥이 상부구조를 주요모순으로 제기한 것을 유비시키는 듯하다.
 
이어서 지젝은 마오쩌둥이 변증법을 기각하며 '악무한' 개념에 사로잡힌다고 비판한다. 마오쩌둥이 보기에 모든 물질은 무한히 분열될 수 있고, 인간은 무한히 광대한 우주(시공간)안에 존재하는 보잘것 없는 존재일 뿐이다. 지젝은 마오쩌둥이 이런 사상이 중국의 인민들이 기근으로 굶어죽는데 일조했다고 본다. 그래서 홀로코스트는 '비이성적'이었지만, 마오쩌둥-스탈린의 공산주의는 '이성적'인 '죽음의 공업적 생산'이라고 묘사한다.
 
'악무한' 개념의 귀결은 '부정의 부정'을 거부하는데 이르는데, 이제 '종합'은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라 한 측면이 다른 측면에게 승리하는 것이다. 헤겔식의 '부정의 부정'은 낡은 질서가 스스로의 형식 내에서 부정되고, 다음으로 형식 자체의 부정된다. 반면 마오쩌둥은 '부정의 부정'이 진정한 부정인 것을 파악하지 못했고, 끝없는 부정/둘로의 분열/하위 구분의 '악무한'에 빠졌다.
 
그래서 지젝은 문화혁명이 무한한 '부정'에 불과했고, 스탈린의 숙청과 사실상 동일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문화혁명의 최종적인 결과는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역동성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자본주의는 시장의 자유로운 지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장애물로 인해 자유로운 지배가 제한될 때 발전하는데,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이런 역동성과 마오쩌둥 식의 영원한 자기혁명화, 영원한 투쟁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조적 상동성이 있다. 그렇다면, 끊임없는 자기혁명화를 원칙으로 하는 질서를 어떻게 혁명할 것인가? 지젝은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라는 마오쩌둥의 말을 가져오며 글을 마무리한다.
 
 
지젝은 형식논리로 역사를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형식마저 부정하는 '진정한' 혁명!, 선언하기는 쉽지만 구체적 현실에서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농민과 노동자의 갈등, 전민소유와 인민공사소유 사이에서의 진동을 극복하기 위해서 숱한 시행착오와 시간이 걸릴 것은 너무 당연하다. 다시 말해서 역사에는 구체적인 분석과 실천이 필요한데, 지젝은 논리에 갇혀 역사를 방기하는 것이지 않나 싶다.
 
또한 자본주의의 근본적 원리가 끊임없는 자기부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과 실천이 자본주의적 논리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을 하는데에는 유용할 수 있겠지만, 실제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지젝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선을 긋고 싶어하는 것은 알겠는데, 정말 긋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고작 '담대하라'라는 훈계라면, 이건 너무 허망하다. 우리는 겁이 많아서 세상을 바꾸지 못했던 것인가?

 

 

모순론/실천론 본문에 관해서는, 기억나는 걸 옮겨놓으면

 

6억을 다 죽일 수 있겠느냐는 배짱. 생태계가 진화의 과정에 있다는 마오쩌둥의 시각은 타당하다.(지젝은 서문에 이 부분을 동물도 의식을 갖게 될 것이라고 오독해서 옮겼다.) 다만 그곳에 사는 민족이 그 환경에 가장 적합한 민족이라는 인식은 재고해야할 것이다.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계획, 이전 실천에 대한 평가를 얘기한다. 일반적인 원칙보다는 매순간 정세에 따른 전술을 제출하자고 요구한다. 지식분자와 간부들이 현장으로 내려갈 것을 주문한다. 좌익맹동주의와 우익기회주의 양편향을 동시에 경계한다. 

 

낮은 단계의 인식은 감성적인 반면 높은 단계의 인식은 논리적/이성적이다. 높은 단계의 인식을 갖추면 진짜 세상을 볼 수 있다.

 

역시 눈에 띄는 것은 모순을 여러 층위로 나눈다는 것이다.

사물의 양측면을 모두 모순으로 설명하는 것이 좀 견강부회로 느껴진다. 아무튼 마오에게 적대적인 모순과 비적대적인 모순의 층위도 정세에 따라 변한다.

그러보고니 난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스탈린, 엥겔스의 글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다. 

 

 

 

마오쩌둥 : 실천론.모순론
마오쩌둥 : 실천론.모순론
마오쩌둥
프레시안북,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