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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건국 60년 학술회의 소개

2008년 대한민국은 건국 60주년을 맞습니다. 이미 많은 시민사회 영역에서 건국 60주년의 의미를 해석하고 토론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건국 60년을 맞아 기획강좌 [대한민국을 다시 묻는다]와를 진행하였고, 8월 중순 학술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건국 60주년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련 학술회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건국 60주년, 통일 코리아를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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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마당 | 세계 속의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21세기
사회: 최상용 (고려대학교 정치학 교수)
1. 한국현대사의 성찰과 한민족의 미래/김학준(동아일보 회장)
2. 동아시아 공동의 미래를 찾아: 한중일 3국의 민족주의를 넘어/최원식(인하대 교수)
토론/박명규(서울대 통일연구소 소장), 윤명철(동국대 교양학과 교수), 윤해동(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제2마당 | 통일 코리아가 나아갈 길
사회: 박종화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
3. 한반도 통일프로세스와 통일비전-통일, 왜 지금 말하는가/조민(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토론/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연구실장), 김형기 (전 통일부 차관,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4. 한반도 통일을 넘어 - 한반도 통일의 문명사적 의의/법륜(평화재단 이사장)

 

[라운드 테이블] 건국 60년과 통일코리아의 비전  





대한민국 건국 60년, 과거.현재.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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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조발표
사회: 박찬승(한양대 교수)
1.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인과적 이해/한영우(이화여대 석좌교수)
2. 국제정치의 전개와 대한민국의 건국/김학준(동아일보 회장)

발표 및 토론
3. 건국, 1948년 체제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박찬표(목포대 교수)
토론/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4. 경제성장, 그 빛과 그림자/조석곤(상지대 교수)
토론/김성보(연세대 교수)

5. 냉전에서 탈냉전, 전쟁에서 평화로/정창현(국민대 겸임교수)
토론/김광운(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6. 종합토론




건국6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민주공화국의 탄생'

 

일시: 2008년 7월 23~24일
장소: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
주최: 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후원: 조선일보


[ 7월 23일 ]



[ 제 1 Section ] 대한민국 탄생의 국제적 배경

사회 : 이인호(KAIST 석좌교수)

발 표1 Kathryn Weathersby (Woodrow Wilson Center)
: “The Cold War and Its Impact on the Founding of the ROK.” 



토론: 차상철 (충남대)

 

발 표 2 이 지수(명지대) :“2차 대전과 소련의 한반도 정책”



토론 : 양현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발 표 3 William Stueck(University of Georgia) :
"The United States and the Division of Korea, 1945-48
: An Assessment of American Responsibility"



토론 : 김영호 (성신여대)

 

 


 

발 표 1 양동안 (한국학 중앙연구원): “대한민국과 임시정부의 관계”



토론 : 한시준(단국대)

 

발 표 2 김충남(East-West Center) :“국가 건설의 도전과 응전: 건국과 이승만"



토론 : 이주영(건국대) 발 표 3 도진순(창원대): “남북협상과 건국”
토론 : Andrei Lankov(Kookmin University)

 


[ 제 3 Section ] 건국에 관한 다양한 구상과 입장 II

사회 : 유종호(연세대)

발 표 1 이영훈(서울대) : "개인일기에 비친 건국과 전쟁"




토론자 이훈상(동아대)

발 표 2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 :“해방이후 좌파들의 혁명론”


토론 : 홍석률 (성신여대)

발 표 3 연규홍(한신대) : "건국과 기독교"



토론 : 장규식 (중앙대)

발 표 4 박흥순(선문대) : "건국과 유엔의 역할"


토론 : 홍규덕 (숙명여대)

 

[ 7월 24일 ]

 


[ 제 4 Section ] 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기초작업

사회 : 이춘근(자유기업원)

발 표 1 Gregg A. Brazinsky (George Washington Univ)
"The Role of the United States and American Aid in South Korea's
State Building"



토론 : 마상윤 (가톨릭대)

 

발 표 2 나종남(육군사관학교) : "국가안보의 보루를 세우며: 건국과 한국군"



토론 : 김세중(연세대)

발 표 3 Boram Yi (이보람, University of Baltimore)
"The Interaction of U.S. Troops and the Korean People, 1945-48".


토론 : 전상인 (서울대)

 


[ 제 5 Section ]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

사회 : 강규형(명지대)

발 표 1 김성호(연세대) : "우리들 대한국민의 정체성과 정당성에 관한 소고"



토론 : 정종섭 (서울대)

발 표 2 鐸木昌之 (스즈키 마사유키 尙美學園大學 敎授):
"대한민국 건국에 관한 일본인들의 견해"


토론 : 김호섭(중앙대)

 


[ 제 6 Section ]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 II : 세계사적 관점

사회 : 이인호(카이스트 석좌교수)

발 표 1 박지향(서울대) · 김일영(성균관대): “대한민국 건국의 세계사적 의의”



발 표 2 Chen Jian (Cornell Univ.):
"Radical versus Conservative Nationalism: Contending Nation-Building
Discourses in East Asia during the Early Cold War"



 [제 2 Section ] 건국에 관한 다양한 구상과 입장 I

사회 : 박효종(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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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쇠고기 장관 고시는 위법, 위헌이다(7/3 토론회)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위생조건에 관한 농식품부 장관 고시가 26일 이루어졌다. 한편 야당과 민변 등은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장관 고시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으며, 현재 전원재판부에 회부되어 있는 상태다. 정부의 고시 강행은 과연 법적인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참여사회연구소와 참여연대 공익법 센터는 7월 3일 장관 고시의 위헌성과 위법성에 대해 검토하는 긴급 토론회를 열었다. 많은 국민이 쇠고기 문제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부 정책에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거리로 뛰쳐나오게 된 상황에 정부는 불법과 법치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정부의 위법이 자초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 장관 고시는 위법이고 위헌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최승환 경희대 법대 교수는 국제법적 시각에서 쇠고기 고시의 위헌성을 분석했다. 최 교수는 한미 쇠고기 합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생명권/신터에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헌법 제10조, 제12조 1항, 제37조 1항), 건강권/보건권(36조 3항)등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조약이라고 말했다. 또한 위생검역 주권을 포가한 한미 쇠고기 합의는 헌법 제60조 1항 상의 ‘중대한 조약’에 해당함으로 국회의 비준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이를 무시한 정부의 고시 강행은 헌법상의 절차적 요건이 결여되었으므로 효력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참석자들도 쇠고기 고시가 위헌이라는 의견에 대부분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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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시의 법적 근거로 볼 때, 국민의 건강권을 침해할 소지가 다분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장관 고시가 위법이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행정규제기본법 제4조에 따르면 고시는 “경미한 사항으로서 업무의 성질상 위임이 불가피한 사항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한 경우에”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김광수 서강대 법대 교수는 국민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미 쇠고기 합의가 경미한 사항인지, 업무의 성질상 위임이 불가피한 사항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하고, 이미 국민들이 고시의 위법성에 대해서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동석 아주대 법대 교수는 정부의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고시는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가축방역 및 공중위생상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 … 고시할 수 있다”라는 가축전염병예방법 제 34조 2항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오 교수는 가축전염병예방법은 법의 목적 자체가 가축의 전염성질병을 예방하는데 있다고 지적했다. 사람과 소 사이에 전염이 우려되는 인수공통전염병(人獸共通傳染病) 사안인 광우병 쇠고기 수입 문제를 마치 식중독 문제정도로 취급하여 검역주권을 포기하는 장관 고시를 강행하는 것이 오히려 정부가 말하는 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는 것이다.

 

조약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절실히 필요

 

 최재천 전 의원은 “국내 법률의 비율은 37%인데 비해 조약은 63%로 월등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체결에 관한 사항이 외교통상부에만 맡겨져 있다. 의회를 거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말했다. 조약이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만큼 민의의 대표기관인 의회를 통한 통제가 필요한데 외교통상부가 이를 계속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가 7월 1일 한미FTA를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국회로 보내자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17대 국회에서 충분히 심의했기 때문에 이번 국회에서는 전원위원회로 보내자고 발언한 부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헌법상 회기불계속이 원칙이고, 국회법 상 외통위로 보내기로 되어있는데 정부 여당에서 이처럼 위헌적인 주장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한미동맹이 그렇게 유치한 동맹이었나?”
 
 청중에서 “정부에서는 우리가 재협상을 요구하면 미국에게 보복조치를 당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고 하는데 그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최승환 교수는 WTO체제에서 미국 정부가 무역보복조치를 즉시,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도 지리한 절차를 거쳐 WTO산하 분쟁해결기구로부터 사전승인을 받고, 또 이를 우리 정부가 시정하지 않아야만 가능하다고 답했다. 최승환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미국 정부가 WTO 제소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WTO 위생검역협정(SPS)상의 검역주권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최재천 전 의원은 “여기서 잘못하면 저기서 보복 받고, 이것 하나를 퍼주면 저것을 받을 것이라는 식의 논리는 위험하다”며 예를 들어 설명했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에서 우리가 미국에 양보한 대가로 한미FTA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고, 이라크 파병의 대가로 북핵문제의 주도권을 우리 정부가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역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한미동맹이 아무런 원칙도 없이 정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복을 염려해야 하는 그렇게 유치한 동맹이냐고 정부에 되물었다.

 촛불문화제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불법을 운운하고 있지만, 오히려 한미 쇠고기 합의와 고시 강행의 과정에서 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위헌과 위법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명박 정부로 인해 법치주의는 오히려 위기는 맞고 있는 것은 아닌가?

토론회 자료집 보기 >>

토론회 음성 파일 듣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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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독재'를 넘어 '광장의 대한민국'을 위하여

'CEO 독재'를 넘어 '광장의 대한민국'을 위하여
'촛불 연대'의 놀라운 성과, 그러나 그 다음은?


이병천 / 참여사회연구소장,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다시 6월의 광장에서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이른바 '실용'과 '선진화'의 깃발을 내세우고, 국민을 섬기며 모두가 잘사는 국민 성공시대를 열겠다면서 출범한 지 어느새 100일이 넘었다. 그 사이에 대한민국의 산과 들은 옅은 연두 빛에서 싱그러운 짙은 녹색 빛으로 새 단장을 했다. 이 녹색 빛을 받아 대한민국의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광장의 수많은 촛불도 더욱 밝게 빛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이명박 호의 앞길은 음울한 짙은 잿빛이다. 이명박 호는 출범하자마자 너무 빨리 길을 잃었다. 누가 떠밀어서가 아니라 제 발로 길을 잃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짙은 안개 속 타이타닉 호처럼 초대형 빙산에 부딪혀 침몰할 위험을 앞두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뿌연 안개 속에 길을 잃고 헤매는 이명박 호를 보다 못해 학업과 생업에 바쁜 중에도 민주공화국의 시민 주체들이 '촛불 등대'를 밝혀 길을 일러 주며 함께 희망 길을 찾아보자고 나섰다. 그런데 MB호는 촛불 등대를 걷어차고, 군화발로 짓밟고, 심지어 방패로 도망치는 아이의 뒤통수를 내리찍는 것이 아닌가. 배은망덕,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무리 토건전문 CEO 출신이라 해도 그렇지, 이것이 실용이고 선진화며 국민을 섬기는 방식이란 말인가. 이런 것이 국민 성공시대란 말인가. MB호, 눈이 멀어도 단단히 멀었음이 틀림없다.
 
  눈이 너무 멀어 잘 보지 못하는가 싶어 등대지기들은 너도 나도 촛불을 더욱 높이 치켜들고 연대의 광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광장의 촛불 집회는 이제 거의 '촛불 항쟁' 수준으로 변화되고 있는 중이다. MB호 앞 길 뿌연 잿빛은 지금 당장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고 해야 한다. 이대로 간다면 아직 갈 길이 먼 그 미래 또한 잿빛을 면치 못할까 두렵다. 5월 29일 국정 최고 책임자라는 자가 출국 중인 상태에서 참으로 비열한 방식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장관 고시를 강행했던 이 정권은 21년 전 전두환 정권이 강행했던 4.13 호헌 조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 ⓒ프레시안

  만약 이 권위주의 시장보수 MB호의 신종 'CEO 독재'가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제 갈 길을 찾지 못한다면, 불행히도 민주공화국 등대지기에 의해 강제 견인되어 궤도를 바꾸어야 하는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MB호가 촛불을 걷어차고 마침내 '돌진 앞으로'를 강행해 파국을 자초할 것인가, 촛불 등대지기들이 MB호를 떠밀어 잿빛 항로를 수정하게 만들 것인가. 87년 6월 이후 21년을 맞는 오늘의 6월은 새로운 역사의 기로가 될 것인가?
 
  다시 2008년 6월의 광장에서, 21년 전 87년 6월 그 날의 열망을 기억하고 그 날의 희망을 새롭게 배운 시민 등대지기들이 촛불을 들고, 세대의 벽을, 시대의 벽을 허물고 손을 맞잡고 함께 섰다. 신종 무책임 'CEO 독재'로부터 버림받은 국민의 건강과 안전,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민주공화국의 시민적 주권자로서, 다 죽어 가고 있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똑똑히 새겨 놓은 대한민국 헌법 제 1조에 새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MB 정권의 때 이른 실패는 왜?
 
  국민들이 이명박 정부를 선택했었다.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48.7%의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 지지율이 불과 100일 만에 10%대로 급락하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여론조사만이 아니라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미국의 AP통신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통치불능' 단계까지 급락했다고 보도했다. 왜 이렇게 되었나. 보수 세력은 MB 정권의 성립을 단지 5년의 집권 기간을 넘어 거창하게 새로운 60년을 시작하는 '선진화'의 포부를 밝혔고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까지 내어 놓기도 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진보 개혁 세력 또한 보수 세력의 장기 집권과 '욕망의 정치'에 대한 공포감을 숨기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들이 MB 정부를 세운 데는 이유가 없지 않았다. 두개의 힘이 MB 정부를 떠받쳤다. 하나는 MB 정부의 핵심 골간으로서 가진 자, 강한 자의 힘이다. 이들은 냉전반공 구체제에 뿌리를 두고 세계화 시대 새롭게 기득권을 재구축하면서 강한 자를 더욱 강하게 가진 자를 더욱 더 갖는 방향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요리하려고 하는 보수적 사회기반이다. 다른 하나는 MB의 경제 살리기 약속에 일말의 기대를 건 서민, 중산층들이다. 이들은 탈세와 투기에 최고 모범을 보인 이명박 후보를 부득이 조건부로 선택했던 불안정한 지지기반이다. 이들에게 이명박 후보가 대기업 CEO와 서울시장으로서 보여준 리더십은 지지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이질적인 이상과 같은 두개의 힘은 참여정부를 붕괴시킨 상반된 저항력이기도 했다. 이는 곧 참여정부, 나아가 97년 이후 '중도 자유주의' 정부 10년의 이중성 의 문제로 직결된다. 가진 자, 강한 자들은 97년 이후 남북화해, 미진한 사회복지, 심지어 절차적 민주주주의의 진전조차 좌파적이라고 본다. 그래서 통째로 '잃어버린 10년'을 주장하는 것이다.
 
  서민, 중산층은 이와 반대다. 이들은 97년 이후 탈냉전적 정상국가로의 길을 진보라고 본다. 그런 위에서 민주와 공공의 부족, 즉 97년 위기와 구조조정이 낳은 사회경제적 양극화 심화와 공공성 빈곤, 민생고통 때문에 절망하고 지지를 철회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항간의 대중적 보수주의 또는 보수장기 집권의 우려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MB정부의 정당성은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것이었고 생각된다.
 
  서민, 중산층이 MB 정권의 구체적 정책 내용까지 동의해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MB정권이 보여 준 강부자, 고소영 내각의 천박한 행태, 그리고 규제 완화/민영화/감세 → 투자 → 성장 → 일자리 창출을 겨냥하는 시장 보수정권의 이른바 '신발전체제'는 민생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97년 체제하 대중의 삶의 조건에서 볼 때 처음부터 순탄하게 관철되기는 어렵게 되어 있었다.
 
  노동력, 토지, 금융의 과잉 상품화가 진전되고 사회복지 또한 빈곤할 때 어떤 상황이 초래되겠는가. MB 정권이 '폴라니적 모순'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고삐 풀린 잔인한 시장사회의 모순을 감당할 '통치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이 모순을 발화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며, 준비된 것같이 보였던 CEO 리더십은 나라의 '공공의 일(res publica, public affairs)'을 일개 사기업의 비즈니스나 다름없이 사고하고 처리하는 오만, 독선, 사기극, 비열함으로 폭로되었다.
 
  촛불 연대를 위해, 광장의 대한민국을 위해
 
  87년 민주화 이후 21년이 되는 MB정권 시기 촛불의 연대는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여 불이 붙었다.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서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오늘 광장의 촛불의 연대에서 가장 폭넓게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당연히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로부터 건강과 안전, 생명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명박 정부가 고시를 철회하고 미국과 즉각 재협상을 하라는 것이다. 이런 요구가 이명박 정권 심판으로, 대통령 탄핵과'이명박 OUT'의 구호로까지 확대 발전되고 있는 양상이다. 그렇기에 절차적 민주주의 후퇴를 거부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외침, 그리고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에 대한 반대 등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이 촛불의 연대는 기본적으로 MB 정권이 자초한(피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때 이른 실패에 반응하여 일어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라는'저항 연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기회가 너무 빨리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겨난다. 이 저항의 연대는 얼마나 공고하며, 얼마나 더 지속될까. 또 어떻게 질적으로 성장, 전환될 수 있을까. 기적같이 생겨났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과연 이 연대는 무엇을 이뤄낼 것이며, 이명박 정부의 성립으로 한 매듭을 지은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어떤 전환적 사건으로서 자리매김 될까.
 
  지금 이 마당에 그 누가 이에 대한 답을 갖고 있겠는가. 적어도 지금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이쪽과 저쪽 모두에게 기적같이 다가온 이 촛불 연대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 성격과 전망에 대해 미리 예단하지 말자. 미래는 열려 있다. 다만 촛불 연대의 더 높은 성숙과 우리 모두를 위한 광장의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을 위해 떠오르는 생각을 간단히 적어 볼 뿐이다.
 
  지금 하고 있는 짓을 보노라면, 이명박 정부는 쇠고기 문제를 결국 재협상이 아니라 한미 쇠고기 수출입업체간 자율규제 수준에서 마무리지을 작정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먹지 말라는 식이다. 양동작전이 눈에 보인다. 한 손으로는 미봉적인 인적 쇄신책 그리고 민생 대책으로 민심을 달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촛불 집회에 대해서는 더 강경 진압책으로 나올 공산이 높다.
 
  이에 대응하여 촛불 연대는 어찌해야 하나. 지금까지 촛불 연대가 적어도 두 가지를 얻은 것만큼은 분명하다. 첫째, MB 정권의 신뢰와 권위가 회복하기 아주 어려울 정도로('통치 불능'단계까지는 몰라도) 손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이 정권이 구상하는 각종 시장보수 정책에도 제동이 걸렸다. 둘째, 진보 개혁 진영이 새로운 활력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단절되어 있던, 2008년 6월의 세대와 87년 6월의 세대가 벽을 허물고 시민적 주체성과 연대성의 광장에서 손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
 
  내가 생각하건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차이 속의 광범한 연대의 물결을 흐트리지 않고 이어가는 것이다. 대오를 유지해야 한다. 조급은 금물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안전 보장의 연대'라는 촛불 연대의 중심축을 흐트려서는 안 된다. 내부 차이를 강조하지 말고, 이슈를 과도하게 높이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비폭력 평화의 시민불복종 정신을 철저히 지켜가야 한다. 희생이 없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를 공공성의 연대를 향해 단련시키고 그 축적된 힘으로 권위주의 시장 보수정권과 마주 서야 한다. 우리안의 공공성의 연대는 아직 취약하다. 우리 자신의 경험의 축적 자체가 빈약함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연대는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오늘 광장의 촛불은 어느 시점에서는 꺼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예상하고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미안하지만, 오늘의 국면에서 우리는 패배할 수도 있다. 마치 흥겨운 축제와 같은 집회와 저항은 불행히 쓰라린 패배와 희생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국면적 패배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과거에도 그랬다. 지금 우리가 내다보고 준비해야 할 것은 그 일시적 패배를 딛고 87년 6월 이후 21년에 다가온 시장보수 'CEO 독재'정권의 시기를 역사의 막간으로 치워낼 수 있는 정치적 실력, 세계화 시대 우리 모두를 위한 광장의 대한민국, 공공의 시민국가를 위한 지혜와 전략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과 동시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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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사유화 관련 일지 및 국내외 현황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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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사유화 관련 일지

2001년 9월 정부의 수도법 제19조 3항 개정 → 상수도 사업을 대통령령에 의해 한국수자원공사에 민간위탁할 수 있는 법적 근거 마련 

2005년 수도법 제17조 3항 개정 → 민간의 참여 확대하는 본조 신설

2006년 2월 14일 『물 산업 육성방안』 발표 → 상하수도 민영화 계획 가속화

2006년 6월 수도법 시행령 제22조 4항 개정 → 상수도 사업에 민간 참여 대폭 허용

2007년 7월 16일 『물 산업 육성 5개년 추진계획』 발표

2008년 5월 29일 『지방상수도 전문기관 통합 관리계획』발표

2008년 6월 (가칭)'물 산업 지원법' 입법 예정


     
          <표1> 시도별 상수도 위탁.민영화 추진 현황(전국 164개소 중)

 

구 분

위탁중단

양해각서

자체기업화

위탁실시협약

기본협약

비 고

4

1

1

11

37


서울특별시

    

1 (공사화)



보류

인천광역시


1




베올리아와 연구용역 완료

강원도

삼척시




평창군, 태백시, 고성군, 홍천군, 정선군, 철원군, 춘천시

노조반발로 기본협약 파기

경기도




동두천시

의왕시, 양주시, 포천시


경남도

마산칠서



사천시, 거제시

진해시, 밀양시, 함안군, 고성군


경북도

안동시



예천군, 고령군

포항시, 영천군, 청도군, 문경시, 영주시


전남도




나주시

여수시, 장흥군, 고흥군, 함평군, 담양군, 보성군, 무안군


전북도

전주시



정읍시

완주군, 남원시, 임실군

남원 주민반대로 보류

충남도




논산시, 서산시, 천안시(공업), 금산군

보령시, 홍성군, 부여군, 당진군, 공주시, 청양군

부여, 당진 주민반대로 보류

충북도





진천군, 단양군

진천 주민반대로 보류

(자료: 전공노특위, 정부 물산업육성 정책과 상수도 민간위탁.기업화의 문제점)

수자원공사에 경영을 위탁한 논산시의 경우 수자원공사와 위탁비용을 둘러싼 지리한 논란을 벌이고 있으며, 수자원공사의 요구대로 비용을 지불할 경우, 물 값이 5배도 오를 수 있는 상황임.


<표2> 지자체에 의한 물 민영화 (위탁 또는 기업화) 반대와 거부 사례 (1994-2003)


나라

지역

연도

결과

결정과정

폴란드

로즈

1994

민영화 거부

주민투표

스웨덴

말뫼

1995

민영화 거부

지방정부 결정

온두라스

온두라스

1995

민영화 거부

정부 결정

헝가리

데브레켄

1995

민영화 거부

지방정부 결정

미국

워싱턴 DC

1996

민영화 거부

지방정부 결정

아르헨티나

투쿠만

1998

민영화 폐기

주민투표

독일

뮌헨

1998

민영화 거부

지방정부 결정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1999

민영화 거부

법원 결정

캐나다

몬트리올

1999

민영화 거부

지방정부 결정

파나마

전 지역

1999

민영화 거부

국민투표

볼리비아

코차밤바

2000

민영화 폐기

정부결정

독일

포츠담

2000

민영화 폐기

지방정부 결정

모리셔스

전 지역

2000

민영화 거부

국민투표

미국

버밍햄

2000

민영화 폐기

지방정부 결정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2002

민영화 폐기

-

프랑스

그르노블

2001

민영화 폐기

지방정부 결정

파라과이

전 지역

2002

민영화 거부

의회 결정

폴란드

포즈난

2002

민영화 거부

지방정부 결정

브라질

전 지역

2002

민영화 폐기

국민투표

남아공

은콘코베

2002

민영화 폐기

법원 결정

태국

전 지역

2002

민영화 폐기

정부 결정

미국

아틀랜타

2003

민영화 폐기

지방정부 결정

(자료: 전공노특위, 정부 물산업육성 정책과 상수도 민간위탁.기업화의 문제점)

                         <표3> 물 사유화 관련 정부, 시민사회, 노동운동 진영 토론회 자료

일시

작성자

제목

2006.2.14

산업자원부, 환경부, 건설교통부

『정부의 물산업 육성방안』

 

 

2006.4.11

장재연(수돗물시민회의)

수도산업 발전안, 무엇이 문제인가?
상수도 민영화를 위한 정부의 물산업 육성방안의 문제점과 대안

 

 

2007.7.16

환경부

『물산업육성 5개년 세부추진기획』

 

 

2007.7.24

박하순(공동행동)

물 사유화에 맞선 전략과 대안 토론회
물 사유화 정책 비판과 노동자 민중적 대안

 

 

2007.8.30

(1)송유나(공동행동)
(2)염형철(환경운동연합)

물산업 육성정책과 물 공공성에 관한 대국민 토론회
(1)상수도 사업의 올바른 대안 모색
(2)물산업 육성 주장하는 환경부, 차라리 산업부로 가라

 

 

2007.12.5~6

정영섭(공동행동*)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세계 노동장 민중 국제 심포지움
한국 물 민영화의 문제점과 대안

 

 

2008.1.

전공노 민영화저지특위

물산업 육성정책과 상수도 위탁, 기업화의 문제점

 

 

2008.4.25

이태기(전공노특위)

이명박정부 공공부문 사유화에 대한 대응방안 토론회
만인을 위한 물, 만인의 투쟁으로 물 공공성을 쟁취하자

 

 

2008.5.29

행정안전부

『지방상수도 전문기관 통합 관리계획』

 

 

2008.5.21~23

이태기(전공노특위)

시장화, 사유화를 넘어, 사회공공성 대안 찾기 사회공공성 포럼
물사유화 국립대법인화의 문제점과 대응방향

 

 

주) * 공동행동은 물 사유화 저지.사회 공공성 강화 공동행동
    ** 전공노특위는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민영화 저지 특별위원회


6월 8일 MBC 시사매거진 2580 에서는 민간위탁을 실시한 13개 지자체와
해외 사례 등을 통해 물 사유화가 가져올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음

MBC 시사매거진 2580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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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무조건 아름다운가요? 식민지 근대화론은 허상입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5월 14일부터 6월 18일까지 총 6회에 걸쳐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좌는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 역사교과서 출간으로 촉발된 우리 근현대사의 쟁점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좌표를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이 글은 3강에 대한 강의노트로 자원활동가 박소현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4강은 6월 4일 '한강의 기적'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라는 주제로 강원대 이병천 교수가 강의에 나설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참여사회연구소 기획강좌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제3강 식민지 경제는 대한민국을 근대화시켰는가?

허수열|충남대 경제학과

사용자 삽입 이미지
 1년 전에도 강의를 했습니다. 그 때 한 시민께서 ‘다 아는 얘기를 하십니까?’라고 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이른바 '실증 자료'를 가지고 반격을 해오면 곤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좀더 객관적이고 좀더 실증적인 자료로 일제시대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대안교과서를 3번 정도 정독해서 보았습니다. 과거에 비해 오히려 식민지근대화론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 교과서 개정 과정을 거치면서 식민지근대화론이 점점 더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긴 합니다. 그래서 지금 시간에는 대안교과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본질을 더 파헤치는 게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1.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요 주장을 살펴봅시다.

(1) 일제의 조선지배는 부당한 것이었다.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은 일제가 조선인의 의지에 반하여 주권을 침탈한 데 있는 것이다 … 그러나 부당성에 대한 비판과 식민지 시기 경제 발전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혼동해서는 안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모든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책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마저 없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겠죠. 그러나 서론과 결론 부분에 한단락 정도 잠깐 언급할 뿐, 식민지가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 자신들 책의 거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2) 조선 왕조는 체력의 고갈로 스스로 몰락하였다.
 "1905년 조선왕조의 멸망은 모든 체력이 소진된 나머지 스스로 해체된 것이라고 할 정도"라고 하는데, 이는 조선후기 사회가 정체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본의 시사월간지 <정론>에 2005년에 기고한 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한반도가 러시아에 의해 점거되지 않고 일본에 병합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히려 근대화가 촉진되어, 잃은 것에 못지 않게 얻은 것이 많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는 오히려 매우 다행스런 일이며,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축복해야하며 일본인에게 감사해야할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은 한승조 교수보다는 세련되어 있으나 결국은 한승조의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3) 식민지기에 본격적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조선인들의 삶의 질도 향상되었다.
 이게 사실 식민지 근대화론의 핵심이고 그들이 정말 하고 싶은 얘기입니다. 과연 근대화가 되었고 과연 삶의 질이 향상되었는가? 만약, 일제시대 조선인의 삶의 질이 향상되지 않아 피폐해졌다고 가정한다면 다음 주장이 성립할 수 없고 앞의 두 가지 주장도 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주장의 시야는 식민지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식민지를 끼고 그 전후 시기를 보려는 시각인 거지요. 

(4) 해방 후 한국 사회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하 민중들의 삶이 향상되었을까요? 악화되었을까요? 아니면 변화없음일까요?. 이 세 가지로 나눠봤을 때  저는 '변화없음'에 한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물론 영정조시기에 상당히 많은 발전적 변화를 이루고 근대적 사상도 많이 나타났지만 19세기의 조선 경제는 슬럼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 시기에 정체되었다고 해서 발전 능력이 있다, 없다를 판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19세기의 경제 악화는 분명하지만,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생활수준의 악화가 계속되었다고 한다면 19세기의 인구증가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죠. 또 일제때 인구증가가 있었다 해서 일제시대 삶의 질이 향상되었을까. 이건 또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2. 식민지 근대화론의 실증적 문제

(1) 국내총생산(GDP) 통계의 허실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책인 [한국경제성장사]는 1910년에서 1940년의 기간의 통계자료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를 다 다루는 것 같은데, 사실 일제시대 일부만 다루고 있는 겁니다. 빠진 부분은 41년에서 45년의 4~5년에 불과한 것 같지만, 사실 그 시기는 일본제국주의가 몰락하는 시기입니다. 몰락의 시기를 빼고 발전하는 시기만 딱 떼어놓고 보니 발전한 것 같다고 평가하는 것은 환상이지요. 게다가 1차적 사료로 사용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의 통계는 초기(1910년대)일수록 과소평가되어 있습니다. 20세기 초 한 나라의 통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토지면적과 인구입니다. 이 둘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데, 그 위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이 제대로 따져졌을 리가 없지요.
 1910년대와 41~45년 사이 두 구간의 통계가 다 부실한 것인데,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제 패망기 41~45년 사이의 통계는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1910년대의 통계는 사용한 것입니다.
  다시, 과연 1910년대에 생산이 급증했을까를 살펴봅시다. 1910년대는 압도적으로 농업중심 경제인데 우량품종의 보급을 제외하면 특별한 농업증산정책이 부재하는 상황이었고 비료, 농업용수 등의 투입량도 특별한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910년대의 농업생산(국내총생산)의 증대에는 통계적 허상이 크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식민지 초기에는 저평가하고 식민지 후기에는 고평가하는 구조에서 일제 초기 조선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고 나타나는데, 1910년대 초반의 생산은 사실 이상으로 과소평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추계된 GDP, 1인당 GDP, 1인당 소비 등의 성장률에 대한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추계는 과장된 것임이 명백합니다.


3. 근대적 경제성장 (modern Economic Growth)

(1) 근대적 경제성장의 개념
  근대화라는 것은 순수하게 경제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정치·사회·문화적인 변화에 경제가 포함돼야 하고, 또 경제 성장이 없으면 그 사회가 근대화되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근대적 성장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근대화’를 정의하지 않는 이상, 그들도 통용되는 ‘근대화’의 정의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3회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고 쿠즈네츠 곡선 등으로 유명한 사이먼 쿠즈네츠의 정의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쿠즈네츠의 근대적 경제성장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입니다. (1)인구의 지속적 성장  (2)일인당 생산의 지속적 성장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단, 적어도 30~40년간의 성장이 있어야 하며 이 기간에는 전쟁이나 정치적 변혁기간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인구 성장을 봅시다. 전세계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20세기 상황에서 조선의 인구도 증가했지만 특별한 변화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첫 번째 조건은 충족합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조건을 봅시다. 1인당 GDP 혹은 GNP로 살펴야 하는데, 인구증가 속도보다도 GDP 성장 속도가 더 빨라야만이 두번째 조건을 충족합니다. 이런 성장이 전근대에선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런 성장이 근대적 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사십년 이상 장기 지속되기 힘들기에 근대적 성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인구변화
  인구는 일제시대때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 이전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근거로써 영남대 차명수 교수의 연구를 들 수 있습니다. 차명수 교수는 족보의 생몰연도를 토대로 인구를 추계했습니다. 그 연구에서의 인구증가의 터닝포인트는 1898년입니다. 즉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지 않았더라도 조선에서는 인구가 증가했을 것이다라는 결론이 가능합니다.

(4) 1인당 GDP(1인당 GDP성장률= GDP성장률 - 인구증가율) 
  물질적 삶의 변화를 측정하는 지표로는 1인당 GDP 성장률 외에도 1인당 민간소비 증가율, 1인당 곡물 소비량, 1인당 칼로리 소비량 등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또한 분배구조가 극단적으로 나쁘다면 평균적으로 1인당 GDP가 증가하더라도 일반 대중들의 삶의 질이 향상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의 1인당 GDP 그래프(미조구치와 메디슨)를 본다면 1910년부터 시작해서 30년대까지는 1인당 GDP가 증가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의 증가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메디슨 자료에서 보면 1945년의 GDP가 1910년보다 더 낮은 수준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지만 42년부터 45년까지는 어느 누구도 GDP를 추계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신뢰성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일제 최종기의 1인당 GDP라는 것은 일제 초기의 GDP를 넘어서기 어려운 것이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음, 1913년부터 2000년까지의 한국의 1인당 GDP 그래프를 보시지요. 적어도 사이먼 쿠즈네츠의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본다면, 한국에서의 근대적 경제성장은 60년대 후반입니다. 물론 경제적인 변화만으로 그 시절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제3공화국 시절은 인권과 민주화에 있어서 여러가지 부정적 문제가 분명 존재합니다 또 소유구조 불평등과 소득 분배의 문제가 있지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의 근대적 경제성장은 일제시대에서는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민족별 소유구조 

  보통 수탈론에서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조선인의 토지를 수탈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말에어폐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시대의 공유지를 조선총독부가 가져간 것은 수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일본이들이 조선인으로부터 토지를 매매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빼앗았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일제시대 수탈이라는 것이 미미한 것이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합니다. 얼마 안되는 토지를 소유한 조선인들이 도저히 살지 못해, 죽지못해, 마지못해 헐값에 재력 있는 일본인에게 땅을 파는 것. 왜 조선인들이 자신의 땅을 팔 수 밖에 없었는가. 그 식민지적 구조를 봐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보지않고 무조건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토지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유감입니다.
 
  지주제가 확대되어가는 과정도 보겠습니다. 1920년 이후부터 자소작농(일부 자기 땅 보유. 일부 소작) 수가 급감하는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합니다. 이는 농민들이 경제적인 궁핍에 몰리는 것인데, 이 상황인데 농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죠.  1인당 미곡소비량을 보더라도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삶이 나아졌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미곡, 맥류, 잡곡류, 두류 소비량을 봤을 때 전체적인 소비량은 약간 증가했지만, 인구증가를 반영할때 1인당 소비량은 감소하는 추세를 뚜렷하게 보입니다.


6. 인적자본형성의 식민지적 특징

  ‘일제시대의 근대교육이 한국의 발전에 자양분이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통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표면적인 접근일 뿐입니다.  또한 조선인중 44년에 대학졸업생은 7374명인데, 비중은 전체 조선인구의 0.03%밖에 되지 않습니다. 전문학교는 0.1%, 중등학교 0.9%여서 다 합치면 중학교 이상 졸업자가 전체인구의 1%밖에 안되는 겁니다. 따라서 근대교육을 받은 것이 그렇게 큰 비중을 가지지 못하는 겁니다. 물론 일제시대 교육받은 사람이 해방 후 각 분야에서 활약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일제시대의 교육이 사회를 이끌었다고 할 정도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다는 겁니다. 전체 조선인 중 1%밖에 안되는데 과대 평가를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거지요.


7. 식민지적 유산의 기여 정도

  마지막으로 일제가 건설한 철도 등의 기간시설이 이후 경제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이야기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간단히 철도 건설을 예로 들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당시 철도부설권은 이권(利權)이었습니다. 일본이 철도를 건설하지 않았다면 조선에 철도가 없었다는 것은 넌센스죠. 실제 조선인중에 철도 건설을 추진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일본이 특혜를 가져간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일본이 안했으면 미국이 했을 것이고, 일본 미국 아니라도 국제자본이 서로 차관을 줘가면서 조선에 철도를 건설했을 것입니다. 즉 일제때 남은 철도와 공장 등의 물적 자산이 일부 도움을 준 부분도 있습니다만 그 비중이 실제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일부러 과대 평가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지요.

성장은 아름다운가요? 비록 식민지시대의 경제성장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일제 식민지시대 경제성장은 없었으며, 식민지경제가 대한민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허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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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참여사회연구소는 5월 14일부터 6월 18일까지 총 6회에 걸쳐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좌는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 역사교과서 출간으로 촉발된 우리 근현대사의 쟁점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좌표를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이 글은 2강에 대한 강의노트로 자원활동가 박소현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3강은 5월 28일 '식민지 경제는 대한민국을 근대화시켰는가?'라는 주제로 충남대 허수열 교수가 강의에 나설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참여사회연구소 기획강좌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제2강 해방 전후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정용욱|서울대 국사학과

1. 무엇이 문제인가?

1) 교과서포럼(이하 포럼)의 해방전후사 인식과 이승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전근대편의 해당 부분 서술의 주어는 주로 무엇으로 시작할까요?  대부분 ‘무슨 무슨 왕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검인정 근현대사 역사교과서는 어떻게 시작할까요? 주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포럼은 이 “민족으로부터 벗어나, 한국인”을 주어로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주로 ‘지배층’을 말합니다. 교과서포럼이 ‘우리 민족’ 대신에 ‘한국인’을 역사적 행위의 주체로 보겠다고 한 이유로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라고 서두에 써놓았습니다. 그러나 결론 부분에서는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확고한 신념을 가진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였다”라고 씁니다. 서론과 결론이 어긋나는 겁니다.

 주요 역사적 쟁점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와 포럼의 인식이 너무 다릅니다. 여러 가지 오류를 많이 저지르고 있지만 대표적으로 식민지시기를 ‘능력 축적’을 위한 시기로 파악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또한 포럼 측은 기존교과서의 좌편향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들의 교과서를 실증주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실증으로 포장한 제멋대로의 서술입니다. 그 예로 포럼은 제주 4.3 항쟁을 두고 “대한민국의 성립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무장반란”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4.3의 본질은 대한민국 정부 성립 이전의 단선 반대운동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시간’에 대한 개념마저도 없다는 비판이 성립하는 겁니다.

 그들은 실증주의를 주장하나 대안교과서의 사관은 근대사관(近代史觀)이 아니라고 봅니다. 전(前)근대사관과 근대사관을 구분할 수 있는 지점은 ‘정통성’과 관련한 부분입니다. 전근대 역사서는 모두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합니다. 포럼 교과서는 이런 맥락에서 전(前)근대적 사관으로서,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포럼 교과서의 또다른 문제점은 그들이 ‘민족’을 경시하거나 부인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구체적 서술에서 일제식민지기 민족 억압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고 평가하지 않거나 민족운동의 역사성을 평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긍부정성에 대한 평가와 민족의 실체성에 대한 평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일부 민족주의의 부정적 사례를 들어서 민족의 실체를 부정하면 민족허무주의에 빠져버리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또한 그들의 엘리트주의도 문제입니다. 당시 선진적 지식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은 높게 평가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을 ‘봉기’, 즉 일회성 업라이징(uprising)이라고 비하합니다.

  이영훈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이승만에 대해서는 사실 의식적으로 부각하려고 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사실 1994~95년에 조선일보가 했던 주장 바로 그대로입니다. 아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지요. “대한민국의 기틀을 잡는 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김구에 대해서는 저평가로 일관하지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2) 포럼 교과서의 서술 전략과 선전 전략

 포럼이 만든 교과서는 교과서라는 이름에 값하지도 않을 뿐더러 학문적 성과도 없이 선전, 선동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좌편향을 시정했다고 선전하고 있는데, 역사학계에서는 과거 친일·독재 세력의 자기 변호용 책자로 보고 있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지금까지 나온 교과서 중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지요. 또한 이승만과 친일세력을 정당화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햇기에, 역사학계의 보수적인 분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주장이 많아요. 심지어 상명대의 주진오 교수는 ‘한국판 후소샤(扶桑社) 교과서’라고 말합니다. 이외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 같은 입장입니다.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 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와 포럼을 비교해보지요. 이들은 모두 국가주의를 고취하고 기존의 역사관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취하는 입장도 서로 같습니다.
 
 이들은 논의 조건을 재정의해버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논의 조건에서 문제를 협소하게 좁혀버립니다. 사실 해방 전후사에 얼마나 풍부한 역사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모든 것을 분단정부 수립이냐, 건국이냐로 몰아갑니다. 이 시기의 역사적 사건을 의도적으로 좁혀서 단순화하고 프레임화해서 건국문제, 이승만 평가 문제로 논점을 몰아가는 겁니다.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게 위안부문제입니다. 그건 구조적 폭력과 구조적 시스템이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새역모는 '징집의 강제성 여부' 문제로 프레임화해버립니다. 자기가 돈 벌러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직접 위안소를 설치했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능하게 하는 제반의 조건이 있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닙니까. 위안소에 가는 병사들에게 일본 육군에서 콘돔을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다 있습니다. 이는 국가 시스템이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걸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축소의 과정은 동시에 중요한 수사적 기능을 가집니다. 이른 바 ‘말살의 역사학’입니다. 이게 포럼과 새역모의 아주 유사한 점이지요.

3) 역사교과서, 그리고 포럼 교과서

 역사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전달되어 평생의 이념·가치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계의 논의를 거쳐 검증되고, 공감대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 논의와 합의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역사교과서에는 또 딜레마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정체성 함양과 국민 통합, 다른 한편으로 창의적인 역사적 상상력·비판적 인식 태도의 함양이라는 이중적 목표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객관적인 지식을 전달해야 합니다. 비판적 인식은 객관적 지식을 통해 함양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나라는 역사적 사유 방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암기를 시키는 구조예요. 세계사 교과서를 보면 진나라, 명나라 등의 시기가 각각 한 문단만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건 외우라는 거죠. 여기서 무슨 비판적 인식이 길러질 수 있겠습니까.
 또 원시시대의 천년보다 현대의 하루가 더 의미있는 발전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근현대사를 가르쳐야죠. 모든 나라의 교과서는 혁명정통성을 설명하기 위한 교과서입니다. 프랑스는 그들이 이룩한 자유·평등·박애가 너무 중요해서, 프랑스 역사의 대부분은 중고등학교에서 60~70% 근현대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많게는 1/8, 적게는 1/10에 그치고 있어요.
 이런 근현대사 교과서 중 포럼의 교과서는 너무나도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적 역사인식과 역사적 상식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찰·반성·비판이 부재하는 3無 교과서가 되어버린거죠. 또 사후적 평가와 결과론적 인식이 지배합니다. 또 단선적이고 독선적인 인식이 난무하죠. 우리는 식민지와 전쟁, 분단 등 근대세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겪은 나라입니다. 이게 어느 한 세대만이 이뤄낸 일은 아닙니다. 시련이 많았으면 고통도 많았고 또 성취도 많았습니다. 그런 과정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을 기르기보다 퇴행적 역사인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탈냉전의 시대에 냉전적 시각을 강요하고 민주화 시대에 독재를 찬양하고 통일을 향한 시대에 통일 무용론을 설파하고 있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

2. 이승만 선전의 계보와 민초들의 망각에 대한 싸움 
 
아까 말씀드렸듯이 포럼의 교과서는 해방 전후를 이승만으로만 몰아가는 프레임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집권기였던 50년대에는 그 측근 혹은 정부에 의해 활동과 업적을 찬양하는 홍보물이나 전기가 많이 나옵니다. 60년대에서 80년대에서는 관련자나 저널리스트 등이 본격적 연구를 하기 위한 전 단계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역사 바로보기와 비판론, 옹호론이 공존하던 시대입니다. 9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상·노선·활동·업적에 대한 재평가와 본격적인 인물연구가 언론계와 학계에 의해 시작됩니다. 기억의 투쟁이 시작되는 거지요. 2000년대에는 ‘이승만 띄우기’와 ‘역사 지우기’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승만으로 그 시대의 역사를 모두 대체해버리면 그 외의 다른 역사는 지워지는 거라고 봐야지요.

<이승만 전기 연구의 시기별 특징과 경향>

 

1950년대

1960-80년대

1990년대이후

편찬주체

측근, 정부

저널리스트, 관련자

언론계, 학계

관점과 대체적 내용, 저술동기와목적

활동․업적 찬양 일색의 홍보물

노선․활동․업적에 대한 비판과 옹호. 본격적 연구의 개시

사상․노선․활동․업적에 대한 재평가. 본격적인 인물 연구

외화형태

전기 및 홍보물

전기, 사론, 실록

기사, 사론, 전시, 전기, 논문, 저서

필자

양우정, 서정주, 김광섭, 한철영, 박성하, 올리버 등, 공보처

리챠드 알렌, 이원순, 허정, 실록편찬회, 송건호, 김도현, 손세일

서중석, (이한우, 조갑제), 유영익, 이정식, 고정휴, 정병준

주요활용자료

관찰기, 회고, 전기류, 왕복문서

 

미국 측 외교, 정보 문서 + 이화장 문서


  중요한 것은 90년대에 이미 포럼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다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를 기억하십니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신문의 역할인데, 한면을 통틀어 ‘이승만과 나라세우기’라는 기획기사로 메꾼다는 것은 다른 나라 언론에서는 생각도 못하는 일이예요. 공정성이 생명인 신문의 역할은 찬반 입장 설명하고 평가내리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조선일보의 태도는 이승만 살리기에 주력하고 반대진영 얘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승만을 ‘역사적 거인’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독자들과 비판자들에게 ‘역사를 보는 틀’을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 극도의 엘리트주의와 영웅주의, 대중경시 사상과 맞물린 채 나타나는 역사 인식입니다. 이승만 절대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대 언론에 의해 이런 일이 자행되는 한편, 한편에서는 민초들이 '잊혀지지 않기 위한' 망각에 대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위안부 문제, 제주 4.3항쟁, 노근리 민간인 학살 등이 이 때 본인들과 유족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탈냉전 이후에, 냉전시대에선 생각도 못했던 일들을 민초들이 시작한 것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사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2000년대 와서 과거사 위원회로 제도화해낸 것입니다. 그거 정부가 한 거 아닙니다. 90년대 민초들이 해낸 일에 정부가 숟가락 하나 달랑 얹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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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실(史實), 성찰, 상상력: 해방3년사? 점령3년사? 분단3년사?

 미소가 점령했었기 때문에 분단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과론이 포럼 교과서의 한 축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구조적이고 극복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분할점령에서 분단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이야기하고, 당시 상황을 역사주의적으로 평가한다면  결과론적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겁니다.  해방직후 좌우대립의 역사성에 대해서도 얘기해보지요. 좌우대립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또한 식민지하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은 어떻게 좌우합작을 하느냐였어요. 물론 노선은 있었죠. 김구는 공산주의자를 테러했고 공산주의자는 자유시 참변을 일으켰어요. 그런데도 서로 연합하려 했습니다. 그게 해방 직후 조선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주요 대립구도는 민족 대 반민족이었습니다. 45년의 정국이라는 것은, 독립과 정부수립을 위해 뭉쳐야 하는 단계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구도가 어느 순간 절대적인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좌=빨갱이=국보법으로 처단해야 하는 자들’로 절대화됩니다. 그 계기는 찬반탁 문제였죠. 1945년 연말, 신탁통치 소동이 벌어집니다. 결정적인 것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모스크바 3상회의 보도였습니다. 신탁이 확정되었고 제안자는 소련이다라는 내용이 보도되었습니다. 보도된 것이 1945년 12월 27일인데, 기사 출처는 해외의 육군을 위해 발행하는 육군주보 12월 27일자였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석간이라 하더라도 당시 기술 수준으로, 같은 날 외신 기사를 받아 쓰는 것은 불가능하죠. 같은 날 나올 수가 없어요. 이건 누군가 정보를 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의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흘렸고 여기서, ‘전민족 대동단결’에서 ‘좌우 대립은 골육상쟁의 지경’으로 변화됩니다. 결국 좌=친소=친공=국가보안법 대상자이고, 우=민족주의자=친미=반공이란 개념이 새롭게 착근됩니다. 미군정을 지지하면 우고, 반대하면 좌라는 것이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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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아줌마의 편지, 테러로 인한 위협을 호소하는 탄원서]

 
사실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너진 민초들의 삶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라는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엄청난 테러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 그것이 바로 민생이고, 다른 말로는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그걸 극복하는 방법이 그 당시에는 민족의 길과 민초의 길이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외세의 점령이라는 구조적 조건 속에서 자기 삶의 복원과 새로운 정부 수립을 일치시켜 가는 게 삶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해방 전후사에서는 바로 민초들의 삶의 복원과 새로운 정부 수립의 길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저지당했습니다. 민초와 민족의 길이 일치되는 것이 저지당했다면 어떤 구조적이고 객관적인 요인에 의해 저지당했고 어떤 주관적인 문제에 의해 실패했는지 따져보는 것이, 건국의 의미를 따지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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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의 역사의식, 무엇이 문제인가?

참여사회연구소는 5월 14일부터 6월 18일까지 총 6회에 걸쳐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좌는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 역사교과서 출간으로 촉발된 우리 근현대사의 쟁점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좌표를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이 글은 1강에 대한 강의노트로 자원활동가 박소현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2강은 5월 21일 '해방전후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주제로 서울대 정용욱 교수가 강의에 나설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참여사회연구소 기획강좌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제1강 뉴라이트의 역사의식, 무엇이 문제인가?

한홍구|성공회대ㆍ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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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는 국내외 역사를 둘러싼 전쟁을 보고 있습니다. 일본·중국과의 역사 기록을 둘러싼 갈등도 있지만 우리의 근현대사를 두고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죠. 일본 후소사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 교과서와 비견할만한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 등장 때문입니다. 오늘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뉴라이트의 등장배경, 그들의 속성과 역사인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자유주의의 빈곤 - 뉴라이트 등장의 토양

1) 해방 이전
  우리 사회는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의 맹아를 틔우기도 전에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으면서, 일본의 식민자본주의가 들어온 거죠. 바로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은 반근대적이면서 반제국주의적인 정서를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화에 저항하고, 근대에 휩쓸리지 않았던 기층 민중들에게 반일이라는 것은 반근대성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또한 우리를 침략했던 제국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라는 점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은 반자본주의적 정서와도 맞물립니다. 즉, 반제국주의는 동시에 사회주의적일 수 밖에 없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학문을 수학해 근대화의 세례를 많이 받았다면 그만큼 자유주의적 성향과 개인주의적 성격이 생기는가에 대한 물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근대학문이라는 것이 일본제국주의 하에서 수학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는 제국주의 중에서 가장 후진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겠죠. 천황을 섬기는 봉건적 성격과 군국적 성격, 그리고 ‘천황의 신민’이란 집단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자각한 개인들이 모여 민족이란 단위를 만든 것이 아니라, 민족이란 집단이 먼저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질 토양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죠. 게다가 그나마 자유주의적 성향의 지식인들도 전쟁수행에 강제 동원되거나 협력해야 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자발성이냐, 강제 동원이냐라는 정도의 차이 혹은 딜레마가 있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존경받을만한 우파마저 거의 소멸됩니다.

2) 해방- 전쟁 - 학살
  해방 이후, 미군정이 성립되면서 친일파가 득세해 제대로 된 과거 청산에 실패하게 됩니다. 아니, 친일 청산을 주장했던 민족적 세력이 오히려 친일파에게서 청산당하는 아이러니(반민특위, 백범 김구의 암살 등)까지 일어나죠. ‘조선의 몸, 황국신민의 마음, 미국 옷’이란 말은 그 시대를 상징합니다. 그 후 친일 정권이 수립되었고, 분단이 되었고, 전쟁이 발발했고, 학살이 있었습니다. 관용이라는 것이 없는, 거의 멸균실 수준의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보도연맹사건 등 사실상 좌익과 무관한 민간인마저도 학살당하였는데,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친일파들이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말이 필요없는 시대, 담론이 없는 시대가 1950년대였습니다.

3) 군사독재
  휴전 7년만에 민중의 힘으로 정권을 바꾼 4.19혁명이 있었습니다만 5.16 군사 반란으로 그마저도 꺾입니다. 4.19에서 주장되었던 것은 (북은 청산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남한의 잘못에 대한 지적과 통일이었습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통일의 열기에서 친일파와 군대들은 위기감을 느꼈고, 그래서 결국 군사반란과 군사 독재가 시작된 것입니다. 군사독재 시기 우리의 국시는 반공이었습니다. 반공이라는 것. 이건 제대로된 이념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살아남은 친일 세력들이 ‘반공’이란 개념을 사용한건이죠.
 저는 식민치하에서 생계형 친일을 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그 친일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하지만, 용서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말 용서하지 못 할 친일파는, 독립운동 하던 사람을 밀고·체포·학살한 주체. 즉, 고등경찰들입니다. 그러나 고등경찰이 반공을 무기로 살아남았습니다. 친일에 대해선 가급적 입을 다물고 반공·경제성장을 두 축으로 나라를 운영하였던 겁니다. 체육관 선거가 정당화된 나라에서 자유가 설 자리가 어디 있었습니까. 게다가 70년대, 한국적 민주주의가 주장되면서 외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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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현대사에서 보수와 진보의 단순 이분법 가능한가?

1) 한국의 진보
  진보진영의 정신적 지주들은 과연 진보적이었을까요? 김구, 장준하, 함석헌, 계훈제, 문익환, 김수영, 이영희 등의 사상이나 이념의 성격은 사실상 보수주의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단지 양심적이었던 것이 진보적이었던 시절에, 양심적이었을 뿐입니다.

2) 한국의 보수
  우리나라의 속성은 사실 보수적이라고 봅니다. 왕조의 지속성을 봐도, 유교문화의 전통을 봐도 그렇습니다. 200~300년만에 지배층이 완전히 교체되던 중국과 비교해 보아도, 신라부터 대한민국까지 지배층이 완전히 물갈이 되는 경우가 없었지요. 그런데 현대에 오면서 한국의 진짜 보수는 다 사라지고 가짜 보수, 친일파가 득세했습니다. 분단이란 특수상황에서 주먹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담론을 형성하지도 않았고 형성할 필요도 없었던 거지요. 담론생산 능력이 결여된 극우세력은 전향한 진보로부터 많은 것을 빌려옵니다. 4.19세대, 6.3세대들이 정권에 복속합니다. 류근일, 조갑제, 송복, 김진홍, 이석연, 김문수, 이재오, 심재철 등 지금은 수구지만 사실, 진보의 총아였던 자들 아닙니까? 이들은 개별적으로 수구에 충원되어갔던 것이죠. 그런데 이제 우리는 2002년에 ‘뉴라이트’라는, 과거 주사파였던 자들의 집단적인 전향을 목격하게 됩니다.

3. 2004년 뉴라이트 등장

1) 2002년 대선과 노무현 정권 출범의 의의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의 승리는 수구 세력도 납득할 수 있었을 겁니다. 외환위기에, 군사독재 등 장기집권 30년에 대한 국민적 염증에, 김영삼-김현철 부자의 실정이 있었죠, 그리고 DJP연합으로 지역구도도 탈출했지요. 여기에 후보 개인에 대한 평가도 한 몫했으며 500만표를 가져갔던 이인제 효과도 있었습니다. 하나만으로도 대선 결과가 바뀔만한 중대요인이 여러 개 중첩되었던 것이죠. 수구 세력도 패배를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2년 노무현의 승리는, 수구세력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구세력이 탄핵을 통해 반격을 합니다만 탄핵도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수구의 위기로 이어졌던거죠. 그 때 사실 진보개혁진영이 제 역할을 못함으로써 수구 세력을 분리수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바로 수구의 헤게모니를 깰 수 있는 호기를 놓치게 됩니다. 민변출신 대통령·국정원장·원내대표·법무부장관과, 여당 단독과반수, 그리고 덤으로 민노당 10석을 가지고도 국가보안법을 폐지못했지요. 이른바 4대개혁입법을 가지고 정치적 야합을 하는 와중에 민심은 진보 진영에서 떠나게 됩니다.

2) 뉴라이트 등장 요인
 2004년 하반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국가보안법,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대법원과 헌재의 판결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8.15 경축사와 과거청산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에 노무현 정권의 과거청산(친일/민간인 학살/군사독재) 작업에 대한 뉴라이트의 위기의식이 발동하게 된 것입니다. 2004년 가을. 뉴라이트는 수구좌파와 수구우파를 비난하면서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적 정당성과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정통성이 집권세력에 의해 의문시되면서 국가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며 결집하기 시작하엿습니다.
 여기에 수구언론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거 수구세력의 충원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뉴라이트 세력은 집단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에 수구측은 자신들의 주장이 과거 운동권 전술을 통해 관철되기를 기대하였고, 실제로 그들의 투쟁력도 증강되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대선을 두고 ‘좌파 정권’ 재창출을 저지할 필요성을 느껴 보수층이 총집결합니다.

4. 뉴라이트의 문제점과 미래

1) 약점과 문제점
  뉴라이트들에게는 사상적 깊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주로 독재정권으로부타, 그리고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도 억압받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반공교육을 가장 철저히 받은 세대가 가장 극렬한 운동권이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 것이 바로 주사파 집단입니다. 그런데 지금 뉴라이트는 사실 그 주사파 집단 출신들입니다. 20대에는 좌익 소아병을 앓더니 40대가 되어서는 극우 소아병을 앓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죠. 이들이 수구의 관심과 지원을 받고있지만, 뉴라이트의 출현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보수집단이 출현하기는 더욱 어려워진 겁니다.

5. 뉴라이트의 한국 근현대사 인식

  한국의 근현대사 연구는 연구 그 자체가 투쟁이고 운동이었습니다. 80년 광주를 겪으며 8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쓰는 것도, 자료를 구하는 것도 투쟁이었던 시대였지요. 젊은 연구자들 중심으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씌어졌습니다. 그런데 뉴라이트 집단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펴냅니다. 그 책의 1권은 ‘탈민족’집단이 함께 저술했는데 책이 나온 후에 포스트모던 역사가들은 『근대를 다시 읽는다』를 펴내  탈근대적 입장에서 뉴라이트와 민중사관을 함께 비판했습니다. 민중사관은 자신들의 주장이 정치적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일하는 민중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스스로 밝힙니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지배세력 중에서도 친일 세력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면서 자신들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 뉴라이트의 한국근현대사 인식을 짚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구세력에 빚진 게 없기 때문에 과거청산에 적극적일 수 있었습니다. 2004년 이후 과거 청산이 본격화됩니다. 그런데 수구세력들은 이 과거청산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자학사관’입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세력이 사실 친일파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자학사관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학사관’이란 말은 일본의 ‘새역모’가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어디 빌려올 게 없어서 일본 침략사를 정당화하는 ‘새역모’의 용어를 빌려옵니까. 이 비판이 제기되자 최근에는 ‘자해사관’이란 용어를 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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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건국한 세력과 그 정체성은 어떨까요? 우리 헌법에는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계승을 위해서는 두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물과 정책이 그것입니다. 먼저 인물을 봅시다. 임시정부의 주축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당시 현역 육군 소위였던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그런데 안두희는 전쟁통에 복귀해 육군 중령까지 진급하고 예편후엔 군납업으로 큰 재산을 모으기까지하지요. 이를 계승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정책은 계승했습니까? 임시정부의 강령과 정책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강령의 주요 내용은 주요산업 국유화, 토지는 국민에게 무상 분배, 파업의 자유 보장, 무상교육, 무상취업, 남녀평등입니다. 너무 좌파적입니까? 식민시 시절 당시 조선에서 웬만한 중요산업은 일본인의 것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세력은 비자본적, 반자본적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게 1940년대의 분위기였던 겁니다. 이 당시 자유당의 강령조차도 지금 시각으로 보면 좌파적입니다.
 
 건국을 둘러싼 두가지 시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건국 자체가 정당하다는 뉴라이트의 주장과 건국은 불행했으나 그 이후 걸어온 민주화의 길이 정당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친일파가 세운 나라입니다. 교과서에는 한정된 지면에, 어떤 부분의 이야기를 더 쓸 것이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을 써야 합니까? 친일파를 써야 합니까?
 뉴라이트 학자들은 세계사적 시각을 중시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2차대전 이후 제국주의에 협력한 세력이 집권한 나라가 더 많은지, 아니면 독립운동했던 세력이 집권했던 나라가 더 많은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국주의 협력 세력이 집권한 나라는 대한민국과 남베트남, 두 곳밖에 없으며 지금은 대한민국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70~80년대 올드라이트들은 친일을 미화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뉴라이트는 친일과 독재까지 미화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느냐. 그것은 사실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 때문입니다.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 필진에는 한국사 전공자가 없습니다. 물론 교과서 집필이나 역사서술을 전공자만이 기술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학자가 빠지다보니, 사료의 오독과 역사 왜곡, 그리고 직업윤리(역사학자들은 있는걸 없다고 못하고, 없는 걸 있다고 못 합니다) 부재의 상황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들은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이고, 박정희가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승만에게, 박정희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시절에 어떤 일이 있었고, 경제발전과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역량은 무엇인가, 과거사 진실규명에 의한 성과는 무엇인가, 민주화의 성과는 무엇인가 교과서에 기술해야 할 것입니다.
  뉴라이트는 경제적 발전을 절대화하는데, 민주화와 경제발전은 대립항이 아닙니다. 87년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경제발전도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민주화의 성과로 노조가 생기고, 임금이 오르고, 노동자가 인간대접을 받게 됩니다. 군대의 의문사나, 산업재해가 줄어들엇습니다. 바로 민주화의 성과로 사람의 죽음이 줄어들었습니다. 뉴라이트의 주장과는 다른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의 진짜 문제는 2010년의 교과서 편찬 기준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입니다. 뉴라이트의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는 방식보다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현대사를 기술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사 진실규명과 관련된 성과, 민주화의 성과를 제대로 알려 큰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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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크리지 연구소의 종언과 미국 진보세력

라크리지 연구소의 종언과 미국 진보세력

 

글/사진 홍일표(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 시거센터 방문연구원)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 Know Your Values and Frame the Debate)의 저자로 한국에 많이 알려진 조지 레이코프 UC 버클리 언어학과 교수와의 인터뷰는 매우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미국 서부 싱크탱크 방문 조사를 위해 워싱턴 DC를 출발하려던 날 새벽 5시에야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편지와 그의 개인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4월30일 오후 레이코프 교수가 지난 8년간 운영해온 라크리지 연구소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갑자기 접하면서, 인터뷰의 의미와 방향 자체가 크게 변하게 되었다. 질문이 ‘왜 망했는지, 무엇을 남겼는지’로 모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 30분 정도만 약속했던 레이코프 교수는, 필자의 주차 사정까지 고려해 인터뷰 장소를 자기 집으로 옮겨주었고, 1시간30분 동안 자신의 생각과 감회·전망을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무의식’의 영역, 그리고 그것과 분리될 수 없는 ‘뇌’ 연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최고 수준의 언어학자, 인지과학자, 그리고 정치철학자라 할 수 있는 레이코프는, 자기 주장과 설명을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실제로 라크리지 연구소의 종언(終焉)을 두고, 미국 내 진보 매체, 운동 조직, 블로그에서는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갑론을박이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1970년대 미국의 보수 세력이 ‘철저한 패배’라는 현실 위에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나갔듯, 라크리지 연구소의 폐쇄는 그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인지, 레이코프 교수의 얼굴은 밝았고 목소리는 힘이 있었다. 그의 글과 그가 놓인 현실이 우리에게 더욱 다가오는 것은,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이 현재 처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청계천과 여의도를 가득 메운 촛불에서 ‘희망’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자족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홍일표 :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린다. 그런데 미국 서부 싱크탱크들을 조사하기 위해 교수님과 접촉을 시도하던 와중에, 지난 4월30일자로 라크리지 연구소(Rockridge Institute)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라크리지 연구소의 종언은, 저는 물론 다른 많은 미국의 진보 지식인과 사회운동가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한국에서도 이미 교수님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읽은 독자가 많기에, 연구소 폐쇄 이유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아해할 것 같다. 어떻게 해서 연구소가 문을 닫게 되었는가?

레이코프 : 말씀하신 대로 그저께인 4월30일 오후에, 연구소의 모든 집기를 사무실에서 뺐다. 이제 연구소와 관련된 모든 사안은 인터넷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 연구소 폐쇄의 가장 큰 이유는 재정 문제다. 이처럼 연구소 운영자금이 급격히 부족하게 된 외부 요인으로는, 미국 경기침체와 더불어,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민주당 후보들에 대한 높은 관심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우리 연구소 예산 3년치 자금이 단 사흘 만에 오바마 후보 후원금으로 몰렸다. 그만큼 우리에 대한 지원이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가’에 대한 인식 부족이 더 큰 요인이라 생각한다.

홍일표 : 교수님이 말씀하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란 무엇인가?

레이코프 : 그것은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이 과연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일찍이 보수 세력(conservatives)을 ‘엄격한 아버지 모델’로, 진보 세력(progressives)을 ‘따뜻한 어머니 모델’로 은유해 설명한 바 있다. 이들은 세계를 인식하고 다루는 데에서 전혀 다르다. 이러한 차이는 싱크탱크의 태도와 전략에서도 발견된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의 보수 세력은 ‘보수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과 실천을 싱크탱크를 기반으로 계속해오고 있다. 이들은 ‘다년 연구 프로젝트’ ‘출판과 언론’에 대한 막강한 투자를 통해 공적 담론을 장악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진보 세력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또 하지도 못했다. 이들은 보수 세력과 달리, 여러 개의 작은 싱크탱크로 쪼개져서 지나치게 세분화한 정책과 이슈를 다루는 데 급급했다.

홍일표 : 라크리지 연구소는 그러한 진보적 싱크탱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가?

레이코프 : 그렇다. 진보 세력 역시 제대로 된 싱크탱크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2000년에 연구소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사회과학 전공 교수 일곱 분과 인지과학을 전공하는 내가 함께 연구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뜻을 같이했던 우리조차 충분한 공감을 이루지 못해, 지난 2005년 사회과학자가 모두 떠나고, 나와 다른 스태프 6명을 중심으로 몇 년간 연구소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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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코프 교수의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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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레이코프 버클리대학 교수

홍일표 : 교수님과 다른 사회과학자 사이에서 좁혀지지 않았던 차이란 무엇이었나?

 

레이코프 : 그것은 이슈와 정책을 우선시하면서, 오히려 좀더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한 인식 차이였다. 이는 개별 정책 연구에 주로 자금을 지원하는 진보 재단과, 가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연구하도록 지원하는 보수 재단의 차이와도 유사하다. 그들이나 진보 세력 가운데 상당수는 정책 대안만 있다면, ‘언론 전략’이나 ‘대외홍보’를 강화하는 수준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바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우리는 갈라서게 되었다. 이후 연구소를 새롭게 재편했고, <누구의 자유인가?>(Whose Freedom?), <생각 지점>(Thinking Points), <정치적 마인드>(Political Mind) 등 일련의 좋은 연구 결과물을 생산해낼 수 있었다.

홍일표 :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크리지 연구소는 문을 닫게 되었다. 과연 라크리지 연구소는 어떤 구체적 성과를 남겼다고 자평하는가?

레이코프 : 우선 우리가 출판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미국 민주당의 선거 전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2006년 11월 중간선거 결과를 통해 일부 확인되었다. 두 번째로는, 현재 민주당 오바마 후보 캠페인은, 그동안 내가 강조해왔던 가치와 프레임의 중요성을 깊이 공감해 실현해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주당뿐만 아니라 진보적 사회운동 조직 사이에서도 역시 가치와 프레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제한적으로나마 확산되는 것 같다.

홍일표 : 교수님 설명대로라면, 민주당이나 진보 세력은 아이디어나 가치 프레임 등에 대한 인식이 약한 반면, 보수 세력과 공화당은 일찌감치 중요성을 깨닫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실천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인데…. 그런 차이가 도대체 왜 발생했는가?

레이코프 : 무엇보다 보수 세력은 사업을 출발로 삼는 이들이기에 자기가 가진 것(아이디어나 가치)을 어떻게 남에게 팔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민감했다고 본다. 그뿐만 아니라, 보수 세력의 자각은 그들에게 ‘아무런 권력도 없던 상황’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은 오히려 개별 정책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하이에크나 프리드만과 같이 최고 수준의 지식인으로 하여금 더욱 근본적 수준의 아이디어를 말할 수 있도록 할 여지가 있었다. 이들의 성장에 결정적 구실을 했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민주당과 진보 세력 측은 달랐다. 예를 들어, 조지 소로스가 민주당의 가장 큰 재정 후원자 가운데 한 명인 사실은 잘 알 것이다. 그가 엄청난 자금을 지원하는 ‘민주주의 동맹’이라는 조직이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아이디어보다는 세분화한 정책이나 돈의 힘을 중시한다. 내가 그 조직 창립 당시, 조지 소로스 집에서 가치와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설명한 바 있는데, 그날 이후 나는 단 한번도 ‘민주주의 동맹’ 행사에 초대된 적이 없었다.

홍일표 : 미국의 진보 세력이 아이디어나 가치의 중요성보다는 지나치게 세분화한 ‘정책 중심’ 사고에 매몰되었다고 비판을 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레이코프 : 무엇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계몽주의 정치철학에 기반한다. 논리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문자를 중시하고,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강조하는 계몽주의 관점은 이미 틀렸음이 인지과학에서 모두 밝혀졌는데도 이들은 여전히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한다. ‘합리적 행위자 모델’(rational actor model), 이익집단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방식, ‘비용-편익’ 분석의 틀로 정치를 바라보는 것이다. 현재 민주당은 기본적으로 이런 관점에 서 있다. 그들이 무보험자 4700만명 문제를 들고 나올 때도 항상 그런 방식으로 얘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화당이나 보수 세력은 어떠한가? “그래서, 뭐? 그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라고 말한다. 이들은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그들의 언어로 표현해낼 능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그저 세뇌 수준이 아니라 ‘뇌 개조’를 동반한다는 사실 또한 오랜 연구 결과 밝혀졌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과 충분한 연구에 근거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를 ‘선동’이나 일삼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과 연결된 것이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미국 정치의 구조이다. 여론조사 결과 어떤 이슈에 대한 선호도가 확인되면 그것의 정책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몰려간다. 그리고 언론 역시, 대학에서 이들과 비슷한 논리구조로 훈련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를 익숙하게 전달한다. 이들에게는 내가 말하는 ‘인지적 틀짜기’(framing)라는 것이 겨우 정치적 조작 수준에서 이해된다. 예를 들어 이라크 전쟁이라고 말을 하면 그것은 결국 ‘승리/패배’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공화당과 보수 세력은 철군을 주장하는 민주당이나 진보 세력에 대해 ‘패배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점령을 얘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승리/패배’가 끼어들 틈이 없다. 나는 그런 점에서 민주당은 여전히 공화당이 만들어낸 아이디어 가치 그리고 프레임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홍일표 : 하지만 앞서 말씀했던 것처럼 민주당 오바마 후보 진영은 변화나 통합과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며 엄청난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지 않은가? 2008년 미국 대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레이코프 : 나는 우리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나 <생각 지점> 등이 민주당 정치인에게 주요하게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실제로 2004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선거가 진행 중이다. 그렇지만 나는 대중이나 정치인이 아이디어나 가치의 중요성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위해 좀더 크고 단단한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라크리지 연구소처럼 스태프 일곱 명으로 운영되는 연구소로는 부족하다. 이는 진보적 사회운동 조직에서조차 마찬가지이다. 그들 또한 여전히 낮은 수준의 정책에 치우쳐 있고, 이는 결국 공화당이 만들어낸 아이디어―예를 들어, ‘낮은 세금’ ‘학교 선택’ ‘강한 국방’ ‘총기 자유’ 등등―가 강화되는 것을 돕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민주당 계열의 대표적 싱크탱크로 떠오른 미국 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는, 빠른 외형적 성장을 보이지만 가치와 아이디어를 생산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된다.

홍일표 : 오늘 교수님 말씀을 들어보면, 힐러리 클린턴보다는 버락 오바마 쪽에 더 많은 점수를 주는 것 같다. 혹시 앞으로 오바마 캠프에 참여할 계획은 없는가?

레이코프 : 계몽주의와 합리적 행위자 모델에 입각한 미국 정치인들은, 그런 관점을 국제관계에도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 그러므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북한 같은 나라를 힘겨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바마 상원의원은 이런 인식의 문제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오바마 의원을 도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선거광고를 만들고 선거전략을 짜는 이들에게는 나 같은 ‘외부 사람’이 그리 탐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나를 초대한다면 나는 기꺼이 응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정치적 중립 의무를 확실히 해야 하는 미국 국세청 코드 501(c)(3) 조직(라크리지 연구소)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올 6월에 출판되는 <정치적 마인드>의 책 홍보 활동 또한 중요한 매개가 될 것이다.

홍일표 : 교수님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특히 보수 세력이 대통령에서 지방의회까지 모두 장악한 한국의 현실은, 2004년 미국 대선 직후와도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의 새로운 구성을 고민하는 많은 이에게, 교수님께서 책과 글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더욱 절실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 시민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가?

레이코프 : 나 역시 한국과 스페인 등에서 내 책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라크리지 연구소는 문을 닫았지만, 여전히 인터넷을 통해 많은 이와 아이디어 및 가치에 대해 토론하고 우리가 축적한 연구 성과를 공유할 것이다. 앞서 계속 말했듯이, 보수 세력이 사용하는 단어와 개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그저 세분화한 정책만으로 그들을 이겨내리라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독자적인 가치와 아이디어, 그리고 새로운 프레임의 형성은, 좀더 탄탄하고 안정된 제도적 기반을 필요로 할 것이다. 라크리지 연구소가 문을 닫은 것, 미국 진보센터의 한계, 헤리티지 재단의 성공, 민주당의 가능성, 공화당의 저력 등에 대한 종합적이고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리라 본다. 나와 우리 연구소에 관심을 갖고 찾아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


* 시사IN 35호(2008년 5월 17일)에 실린 필자의 원고를 시사IN의 양해아래 올립니다. 약간의 수정이 더해졌으며, 중간의 사진은 필자가 직접 찍은 것입니다. 이 원고의 필자인 홍일표 박사는 참여사회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으로도 참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미국 싱크탱크에 대한 연구를 정리한 <세계를 이끄는 생각 - '사람과 아이디어를 키워라' 미국 싱크탱크의 전략> 책을 펴 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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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과 자유주의 · 진보세력의 부활? : 재창조를 위한 긴 여정

세계의 창 미국 민주당과 자유주의 · 진보세력의 부활? : 재창조를 위한 긴 여정
홍일표 _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1. 2008년 대선, 미국 민주당은 다시 백악관을 차지할 것인가

2008년 봄,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 대선 후보를 정하는 기나긴 장정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공화당은 “이단아(maverick)”라 불렸던 존 맥케인 상원의원이 일찌감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반면, 2008년 3월 말까지 민주당은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피 말리는 접전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론조사 결과나 분위기는 2008년 대선 승자가 민주당에서 나올 것으로 모아지고 있다.
미군 전사자 숫자가 4000명에 달하고, 매달 100억 달러 넘는 엄청난 전비를 쏟아 붓고 있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해법이 가장 큰 이슈가 될 것으로 예측되었던 미국 대통령 선거는, 어느새 미국의 ‘경기침체’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로 최대 이슈가 전환되고 있다. 연일 치솟는 원유가격과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라 불리는 미국 주택시장-신용회사-은행의 위기적 상황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주식시장 폭락과 경기침체로 이어질 우려마저 낳고 있다. 미국 국민들의 ‘위기’와 ‘불안’ 그리고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고, 이는 대선 국면에서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결집되고 있다. 또  풍부한 국정경험과 인적 자원을 이유로 자신이야말로 ‘해법(solution)’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힐러리 클린턴과, 지금이야말로 과거와 단절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변화(change)’의 시점임을 호소하는 버락 오바마라고 하는 걸출한 두 후보의 존재는 민주당의 인기를 더욱 높이는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2008년 대선 과정에서 확인되는 미국 국민들의 민주당에 대한 지지, 그동안 계속 떨어지던 투표율의 상승, 특히 젊은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 열기, 엄청난 선거자금 모금액 등은 뛰어난 두 후보자의 존재로 인해 가능했던 것인가? 아니면, 극도의 “반反부시” 정서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가? 과연 그것이 다인가?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 이후, 1994년 중간 선거 이후, ‘승리’보다는 ‘패배’가 더 많았던 민주당과 자유주의․진보 세력이 2008년 현재 시점에 ‘부활’ 또는 ‘귀환’을 논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특히 이 글에서는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의 창립을 포함한 미국 진보적 싱크탱크들의 동향과 그것의 함의를 중심으로 그 이유를 짚어 볼 것이다.


2. 공화당과 보수 세력의 ‘오랜 혁명’
 
2004년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이후, 미국 서점가에는 ‘공화당의 영구 지배’에 대한 우려와 기대를 담은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칼 로브를 필두로 하는 뛰어난 선거 전략가의 존재, 남부 복음주의 교회(evangelican church)들의 강력한 동원력, 폭스 뉴스와 같은 케이블 텔레비전, 러쉬 림버우(Rush Limbaugh)와 같은 보수적 라디오 호스트들의 여론 조작과 장악, 헤리티지재단을 필두로 한 보수적 싱크탱크들과 미국납세자연맹과 같은 보수적 사회운동조직들의 긴밀한 협력, 공화당 주도의 담론적 틀짜기, 케이 스트리트(K Street)의 갱들이라 불리는 거대로비집단들의 지지 등 ‘공화당 영구지배’ 가능성은 여러 각도에서 분석되었다(David Brock, 2004 ; Matthew Continetti, 2006 ; Donald Critchlow, 2007 ; Thomas Edsall, 2006 ; Paul Pierson and Theda Skocpol(eds.), 2007 ; Mark A. Smith, 2007). ‘강력’하고 ‘탄탄’하게 구성된 공화당-보수 세력의 환원구조는 결코 쉽게 패배를 허락하지 않을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그려졌다. 이러한 공화당 및 보수 세력에 의한 미국 지배의 연원은 현재까지 많은 보수 세력의 ‘우상’처럼 칭송되는 로널드 레이건의 1980년 승리부터라기보다 오히려 1964년 베리 골드워터(barry Golodwater)의 철저한 패배로부터 살피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지지자들의 열광적 응원 속에서 선명한 보수의 기치를 내걸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던 베리 골드워터였지만, 그는 민주당 린든 존슨 후보에게 참담하게 패배하였다(Rick Perlstein, 2001). 그가 내걸었던 보수적 가치에 열광했던 미국의 보수 세력들은 자신들이 패배한 원인으로 언론과 대학, 출판 문화계 등을 장악한 ‘자유주의 기득세력(liberal establishment)’의 존재를 지목하였다. 이들의 교체 없이 보수 세력의 집권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미국의 보수 세력은 헤리티지재단(1973년)과 케이토연구소(1977년) 등 자신들의 지적 거점이 될 싱크탱크들을 새로이 설립하였고, 후버연구소나 미국기업연구소 등 기존 싱크탱크들의 보수적 성향도 더욱 강하게 가다듬었다. 이러한 노력은 보수적 가치의 확산을 지지하는 보수적 재단들의 적극적 지원을 통해 더욱 빠르고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홍일표, 2007). 그리고 이들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의 집권을 계기로 자신들의 이념을 현실의 정책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얻게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보수 세력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겨 온 많은 가치들을 현실의 정책으로 전환시키려 하였으며, 헤리티지재단과 미국기업연구소 등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아이디어’와 ‘사람’의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James Allen Smith, 1991, David Ricci, 1993). 하지만 막강한 대통령 권력만큼 강력한 권한을 가진 것이 미국 의회이며, 레이건과 부시 전 대통령 12년 기간 동안 의회 다수당은 여전히 민주당이었기 때문에 공화당의 정책적 주도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Nelson W. Polsby, 2007).
그런 의미에서 공화당이 상하 양원 모두에서 다수당이 된 1994년 중간 선거 결과는 1980년 레이건 집권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선거 당시 원내 총무였던 뉴트 깅그리치 의원은 “미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을 전면에 내세우며 공화당의 압승을 이끌었다. 이들은 ‘가치’와 ‘정책’을 결합시켰고, 민주당을 “미국적 가치에 반(反)”하는 존재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경제의 호황과 개인 인기에 힘입어 1996년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분할정부는 계속되게 된다. 이후 클린턴 대통령의 잇따른 성추문과 그에 대한 ‘거짓말’을 이유로 특별검사 수사와 하원에서의 탄핵결의안 통과 등 공화당의 ‘파상공세’가 계속되었으나, 오히려 1998년 중간선거 결과 민주당은 공화당으로부터 하원 의석을 일부 빼앗아 왔고,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은 의장직은 물론 의원직까지 사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부시(George W. Bush)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공화당과 보수 세력의 정치적 지배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2000년 대통령 선거는 칼 로브라는 걸출한 선거 전략가의 진두지휘 하에 남부 복음주의 교회와 보수적 풀뿌리 운동조직, 전국적 이익단체, 보수적 싱크탱크들이 긴밀한 협력 하에서 전개되었고, 이러한 선거운동의 구조는 이후 2002년 중간선거, 2004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위력을 발휘하였다(Ryan Sager, 2006 ; 吉原欽一 編, 2005). 특히 9/11 테러 사건 이후 부시 대통령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높은 지지 열기에 힘입어 공화당은 2002년 중간선거 이후 백악관과 상하양원, 지방자치단체장, 그리고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전 국가권력을 그들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Tom Hamburger and Peter Wallsten, 2006 ; Thomas Edsall, 2006). 특히 공화당은 자신에게 충성도가 높은 이들의 투표율을 최대한 높이는데 주력하는 “탈중간(Off Center)” 전략을 취하였고(Jacob Kacker and Paul Pierson, 2005), 이로써 미국은 정확하게 ‘붉은 색’(공화당)과 ‘푸른 색’(민주당)의 나라로 나뉘게 되었다는 분석들이 이어졌다(Nivolar, Pietro S. and David W.Brady(eds), 2006 ; Earl Black and Merle Black, 2007).

그러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처럼 보였던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의 위세는 2004년 대통령 선거 승리 이후 2년 만에 확연히 꺾이기 시작하였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하원 다수당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장, 그리고 상원에서도 실질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일순간에 상황을 반전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동안 민주당과 자유주의 세력을 “반가족적”, “반미국적”, “유약하고 무능”한 존재로 몰아 붙여 왔던 공화당이지만, 2008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이들은 ‘이라크 전쟁’과 ‘경제 침체’, 그리고 ‘부시’라는 이슈를 넘어서지 못한 채 힘겨운 싸움을 벌여 나가고 있다. 
더욱이 공화당은 오바마 지지층을 중심으로 무섭게 결집하는 ‘젊은 세대 유권자’에 대한 매력을 거의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인구학적 변화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이민자’와 ‘젊은 세대’를 빼앗긴 공화당의 ‘추운 겨울’이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공화당의 핵심 전략가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히 언급되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를 앞세워 국민적 지지를 모아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결집을 가능케 하는 ‘돈’의 규모와 ‘조직’의 활력에 있어 공화당을 압도하고 있다.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의 집권과 더불어 시작된 공화당과 보수 세력의 ‘오랜 혁명’은 아직 ‘종언’을 고하진 않았으나 민주당과 자유주의․진보 세력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음은 분명하다.


3. 민주당과 자유주의.진보세력의 ‘기나긴 부활’

1994년 뉴트 깅그리치가 이끄는 하원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기 전까지 미국 민주당은 1930년부터 약 64년 간 하원을, 1954년부터 40년간 미국 상원을 장악해 왔다. 미국 헌법이 규정하는 철저한 ‘견제와 균형’의 원칙은 막강한 대통령의 권한만큼 강력한 위상을 의회에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지난 수십 년간 훨씬 더 많은 기간 공화당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그 기간 동안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분할 정부’의 구도가 계속되어 왔고, 1994년 민주당이 상하 양원을 잃은 후에도 2000년까지 백악관을 차지함으로써 여전히 ‘분할 정부’의 한 축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은 민주당이 전통적 지지층과 정당으로써의 활력을 잃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체질개선’을 서두르지 않게 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이는 민주당만이 아니라 의회를 통해 입법적 변화를 추구하였던 자유주의적․진보적 성향의 이익단체나 사회운동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정당 지도부의 일사불란한 지휘를 받아 움직이기보다는, 특정 상임위원회 소속의 개별 의원, 또는 성향을 같이 하는 의원모임(caucus)과의 관계에 ‘적응’해 왔다. 실제로 미국 사회운동, 특히 진보적 사회운동 대부분은 자신들이 다루는 이슈가 현실의 정책으로 실현되는데 주력하였을 뿐, 그것을 넘어서는 ‘연대’와 ‘협력’에는 미숙하거나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항상 “내 이슈는 어떻게 되지?(What about my issues?)”라는 고민만 했다는 것이다(Jerom Armstrong and Markos Moulitsas Zúniga, 2006 : 37~39). 또한 싱크탱크들 역시 헤리티지재단이나 미국기업연구소와 같은 보수적 싱크탱크들의 경우 강력한 ‘종합형’이 많은 것과 달리, 진보적 싱크탱크들 대부분은 ‘단일이슈형’이거나 규모나 영향력이 작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유주의적․진보적 성향의 재단들 또한, 보수적 재단들의 후원전략과는 달리 개별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 단기 지원, 분산 지원의 후원 전략을 취함으로써 진보적 성격의 사회운동과 싱크탱크들이 ‘단일이슈’에 집중하는데 일조하였다(홍일표, 2007).
이와 같이 ‘단일이슈형’ 사회운동과 싱크탱크의 확산은 의회 다수당을 차지한 민주당, 상임위원회 중심의 의회 운영, 정당보다는 개별 의원이나 의원모임 중심의 입법 활동 등의 정치적 조건과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효과적이고 튼튼해 보였던 이 구조는, 막상 민주당이 의회 다수당의 지위를 잃는 순간, 민주당은 물론 자유주의적․진보적 사회운동과 싱크탱크의 입법적 영향력도 급격히 약화되는 다분히 ‘취약한’ 구조였음이 드러났다.


1) 민주적 리더십 평의회 : ‘민주당 내 주류화’와 ‘민주당의 주류화’

 

1980년 레이건 행정부가 시작된 후 미국 사회의 ‘보수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는  강한 국방, 감세, 사회보장 축소와 같은 군사․경제적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낙태’나 ‘동성 결혼’ 문제 등 사회적 이슈들에서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공화당과 보수 세력들은 “자유주의자(liberals)”를 “가족을 무시하고, 애국심이 없으며, 생명을 우습게 하는 자기 멋대로의 존재”로 규정하면서 민주당과 자유주의 세력, 진보 세력을 공격하였다(Mark W. Smith, 2006). 이런 공세에 맞서 자유주의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전략을 취하고자 한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결국 공화당과 보수 세력의 기를 꺾는데 성공한 것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Stupid, it's economy)”라고 소리치며 등장한 빌 클린턴과 <민주적 리더쉽 평의회(Democratic Leadership Council)>(이하 <평의회>)세력이었다.
마치 헤리티지재단 창립과 미국 보수세력 결집이 1964년 베리 골드워트의 패배를 계기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평의회>와 그것의 지적 거점인 진보정책연구소(Progressive Policy Institute, http://www.ppionline.org/)의 창립 또한 1972년 대통령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 1984년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월트 먼데일의 자유주의적․진보적 노선에 대한 평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화당과 보수 세력이 자신들의 ‘보수적’ 가치를 더욱 강고히 지키고자 하였던 것과 정반대로, 이들은 전통적인 민주당의 노동자․서민 중시의 대중주의적(populist) 접근을 비판하며 기업 경쟁력, 자유무역, 개인 책임의 확대 등 공화당이 즐겨 사용하던 가치와 단어들을 오히려 강조하며 등장하였다. 
공화당 집권 12년의 종지부를 찍는데 성공한 빌 클린턴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선출되기 이전 2년간(1990년-1991년) <평의회> 의장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George H.W. Bush)가 걸프전 승리라는 대외정책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경제 상황 악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점을 정확히 파고듦으로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러한 빌 클린턴의 당선을 돕고, <평의회>는 물론 클린턴 행정부 시기 민주당의 핵심적 정책들에 영향을 미쳤던 싱크탱크가 진보정책연구소였다. 진보정책연구소는 <평의회> 창립 당시 두 명의 스탭 가운데 한명이었던 윌 마샬(Will Marshall)에 의해 1989년 창립되었으며, 특히 이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경제 정책 보고서(The New Economy Policy Report)’는 <평의회>는 물론 클린턴 행정부의 ‘세계화’와 ‘자유무역’ 중시의 경제정책 기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1996년 <평의회>계열의 정치가들은 신민주당원 네트워크(New Democrat Network : NDN)이라 불리는 정치위원회(Political Action Committee, PAC)를 만들었고,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당선된 하원의원들을 중심으로 1997년 신민주당연합(The New Democrat Coalition : NDC)이 결성되었고 2000년에는 상원에 상원신민주당연합(The Senate New Democrat Coalition : SNDC)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로써 민주당의 연패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하나의 ‘지적 운동’으로써의 <평의회>는 민주당 내 대표적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久保文明, 2005 : 4~5).
그러나 <평의회>가 주도한 1990년대 민주당은 ‘경제 호황’이라는 성과 이외에 진보적 ‘가치’의 재구성이나 운동적 ‘활력’의 재창조에 있어선 그다지 성공적이거나 적극적이지 않았다. 특히 <평의회>는 2000년대 이후 불기 시작한 민주당 바깥으로부터의 변화를 수용하는데 소극적이거나 때로는 부정적이기조차 하였다(Jerom Armstrong and Markos Moulitsas Zúniga, 2006 : 141~143).

반면 1994년 공화당이 내걸었던 ‘미국과의 계약’은 ‘가치’와 ‘정책’을 적절히 연결시키고 그것을 ‘정치’로 전환시킨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이들은 개별 상임위원회와 의원 중심의 하원 공화당 운영 메커니즘을 훨씬 더 일괄된 중앙집중형으로 변화시켰다(吉原欽一 編, 2005 : 33). 또한 ‘아메리카와의 계약’이 선거용으로 사용되면서 진정한 ‘가족’의 가치를 충분히 반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보수적 기회의 사회’ 그룹은 ‘미국 가족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n Families)를 1995년 별도로 제시하며 정치적․사회적 결집을 새로이 시도하였다.
이처럼 ‘가치’의 재구성과 ‘활력’의 재창조를 중시한 공화당과 보수 세력의 노력은, 이후 2000년 부시 대통령의 승리, 2002년 상하 양원의 공화당 승리, 그리고 2004년 부시 대통령의 재집권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선거승리의 튼튼한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미국 민주당은, 공화당이 보여 준 ‘가치’와 ‘활력’을 거의 보여 주지 못하였고, 2000년대 이후 계속된 패배는 민주당을 ‘무력’한 정치정당으로 여겨지게 하였다. 민주당과 진보 세력의 변화는 결국, 민주당 주류로 자리 잡은 <평의회>와 민주당의 경계를 넘어선 곳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서 시작되었다(Matthew R.Kerbel (eds), 2006 ; Jerom Armstrong and Markos Moulitsas Zúniga, 2006, James Carville & Paul Begala, 2006).

 

2) 민주적 리더십 평의회(DLC)의 한계와 민주당의 경계를 넘어 :
   “풀뿌리”(grassroot)와 “인터넷뿌리”(netroot)의 결합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중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다 접한 웨스 보이드(Wes Boyd)와 조안 블레이즈(Joan Blades) 부부는, 공화당에 의해 주도되는 클린턴 대통령 탄핵 반대와, 이에 적극적 대응을 못해내고 있던 민주당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약 10년이 지난 2008년 현재, 그들이 만든 <무브온>(MoneOn, http://www.moveon.org)은 미국 대중정치운동을 대표하는 강력한 조직으로 성장해 있다. <무브온>이 현재 회원 숫자가 300만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각종 선거 기간 중에 모금하는 선거자금, 광고자금 액수가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했지만, 1999년 탄핵반대운동을 시작할 당시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한 인터넷 상의 ‘청원 운동’ 조직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무브온>의 활약상은 지금의 그것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조직과 운동을 정리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였으며,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전쟁’이 아닌 ‘평화’를 통한 테러의 근절을 주창하며 대중적 관심과 지지를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2003년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이들은 더욱 분명하게 ‘반전 메시지’를 발신하였고 이들에게 호응하는 이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갔다. 인터넷은 <무브온>이 전국적이면서 동시에 지역적 운동조직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지역번호(zip code)만 기입하면 자기 주변의 <무브온> 회원모임이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공동행동 또한 쉽게 조직되었다. 인터넷을 이용한 소액기부 액수가 수천만 달러에 달하게 되면서 이들은 목소리는 점점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방송광고를 통한 메시지 전달에 많은 관심을 두었고,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내용의 텔레비전 광고는 실제로 커다란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Byron York, 2005 : 17~47).
<무브온>은 200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가장 뚜렷한 반전 입장과 인터넷을 매개로 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강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등장한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하워드 딘 후보가 후보경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민주당 대선 후보 존 케리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며, 부시의 재집권을 막고 이라크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2004년 선거에서 존 케리 후보가 패배하고 부시 제2기가 시작되자, <무브온>은 2004년 대선 결과가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며 이후 오히려 보다 강력한 인터넷 기반의 ‘풀뿌리 운동’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은 <무브온>외에도 다양하게 확산되었다. 특히 2004년 대선 과정에서 하워드 딘의 돌풍은 인터넷을 통한 정치참여의 충격과 가능성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 하워드 딘은 인터넷을 통한 선거자금 모금만으로 다른 후보들을 압도하였고, 그동안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던 ‘젊은 세대’들을 유세장과 투표장으로 끌어 들이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젊은 세대들은 인터넷을 매개로 정보와 열정을 공유하였으며, 엄청난 액수의 선거자금이 인터넷을 통해 모금되었다(Joe Trippi, 2004). 비록 하워드 딘이 중간에서 경선을 포기하였지만, 부시의 재집권을 막는 것을 최우선의 정치적 과제로 설정하였던 수많은 네티즌들과 블로거들은 민주당 존 케리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가능케 했던 조직적 돌파구가 소위 ‘527’ 조직의 활약이었다.
2002년 11월 중간선거 다음날부터 시행된 ‘초당파선거활동개혁법’(Bipartisan Campaign Refrom Actof 2002 ; BCRA)에 따라 정당전국위원회가 연성자금(soft money)을 쓰는 것이 금지되자 미국 국세청 코드 527에 해당하는 조직형식을 택한 단체들이 다양하게 만들어 졌고, 이들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정치변화의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특히 액트(America Coming Together, ACT)는 가장 대표적 527단체로써, 조지 소로스 등 일부 거액 기부자들의 자금지원 등에 힘입어 다른 어떤 조직들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강한 활동력을 보여 주었다. 527단체들과 정당은 법률적으로 상호조율이 불가하도록 되어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조율’과 ‘조정’의 과정을 거치며 선거에 임했고 이는 이들 활동의 위력을 더욱 증폭시켰다(Craig Holman, 2006).
뿐만 아니라 전미서비스산업종사자노동조합(SEIU) 등이 주도한 노동운동의 선거 전략 또한 과거처럼 그저 선거자금만 민주당에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전략 지역’을 설정하고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보다 적극적인 투표등록과 투표참여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대변해 줄 수 있는 의원을 당선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투표 등록과 참여를 독려하는 과정을 통해 운동의 조직화와 활력 회복이라는 별도의 효과를 얻기도 하였던 것이다(篠田徹, 2005).
이러한 새로운 흐름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블로그의 힘이다.
미국에는 수많은 ‘정치 블로그’들이 존재하고, 이 가운데는 하루 방문자 수가 수십만인 데일리코스(Daily Kos,http://www.dailykos.com/)나, 보다 오랜 역사와 하워드 딘 캠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정치 블로거 제롬 암스트롱이 운영하는 마이 디디(My DD, http://mydd.com/) 등이 가장 대표적인 정치블로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엄청난 양과 속도의 정보를 공유하였으며, 기성 언론이 다루지 않는 진실의 추적과 공유, 현재의 정치 쟁점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뜨거운 토론 등 기존의 정치교육과 정당조직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큰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급성장하였고 이들이 형성한 블로거 세계(Blogsophere)는 현실 세계와 “따로 또 같이” 번창하고 있다(Chris Bowers, 2006).

이처럼 최근 민주당이 보여 주고 있는 활력의 근저에는 “풀뿌리(grassroot)”와 결합된 “인터넷뿌리(netroot)”가 있다(Jerom Armstrong and Markos Moulitsas Zúniga, 2006). 특히 이들은 지금까지 민주당과 진보 세력이 “단일 이슈” 중심으로 뿔뿔이 흩어져 움직여 왔던 “그 전통”을 변화시키고 있다. 무브온, 미국을 위한 민주주의(Democracy for America), 블로거들, 전국힙합 정치컨퍼런스(the National HipHop Political Conference), 미국진보센터와 같은 싱크탱크 등 새롭게 등장한 주체들은 모두 “종합형”(multi-issue) 운동에 기반해 있다(Jerom Armstrong and Markos Moulitsas Zúniga, 2006 : 69). 특히 인터넷에 기반한 “넷루트(netroot)”들은 “풀뿌리 운동의 새로운 활동가들처럼, 더욱더 당파성이 강하고, ‘종합형’ 운동을 중시하며, 보다 넓은 운동의 기반을 만드는데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이 흐름을 주도하는 핵심 인물들 스스로의 분석이다(Jerom Armstrong and Markos Moulitsas Zúniga, 2006 : 146).
이것은 민주당을 넘어서는 힘이자 움직임이다.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 모두 민주당원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민주당 주류들 가운데 일부는 이들에 대한 적대감이나 우려를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한다. 비록 하워드 딘이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만장일치로 선출되고, 대선 후보자들의 선거모금액의 대부분이 인터넷을 통한 소액모금으로 이뤄지며, 웹사이트와 블로그, 텍스트 메시지와 유투브가 젊은 유권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는 등 “새로운 변화”의 위력은 대단하지만, 민주당과 자유주의 세력, 또는 진보세력의 관계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짝사랑”도, 그렇다고 “서로 너무나 사랑”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이다. 지난 30여 년간 보수 세력이 잘 ‘조율’되고 ‘조정’된 운동을 통해 그 위력을 증폭시켰듯이, “무브온이나 미국을 위한 민주주의와 같이, 넷루트와 풀뿌리들의 잘 조정(coordinated)된 노력을 통해 중앙은 물론 지역 수준의 민주당을 민주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확산되고 있다(Jerom Armstrong and Markos Moulitsas Zúniga, 2006 : 169).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2004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2008년 현재 시점까지 민주당 바깥과 아래로부터의 활력과 변화가 확연히 드러난 이 시기 동안, <평의회>나 진보정책연구소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의회>에 속하는 적지 않은 민주당 의원들이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만, <평의회>의 이름은 2006년 중간 선거에서 2008년 대선 기간까지 거의 들리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진보정책연구소 역시 그것의 존재 자체가 망각될 정도로 미약한 활동만 보여 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진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보수적’, ‘신자유주의적’, ‘신보수주의적’ 성격의 싱크탱크로 분류되는 등, 2000년대 이후 더욱 양극화(polarized)된 미국 정치의 지형 속에서 분명한 자기 위치를 찾는데 실패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이다. 이들은 진보정책연구소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과거 헤리티지재단이 내걸었던 것 방향과 마찬가지의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진보적’ 가치와 이념을 분명히 하고, 이를 실현할 구체적 정책을 만들어 내며, 여기에 “풀뿌리”와 “인터넷뿌리”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변화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창조할 수 있는 싱크탱크를 표방하며 등장한 것이 바로 미국진보센터인 것이다(Byron York, 2005 ; Matt Bai, 2007).

 


4. ‘가치’와 ‘정책’, ‘변화’와 ‘활력’을 연결하는 지적 거점

1) 반(反/半) 주류의 도전과 실험 : 미국의 진보적 싱크탱크들

 

미국의 대표적 언어학자이자 민주당 전략가로 손꼽히는 죠지 레이코프(George Larkoff) 버클리대학교 교수는 미국 민주당과 진보세력은 공화당, 보수세력과의 틀짜기 싸움에서 패배했음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보수 세력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함으로 인해,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당, 나아가 진보세력의 독특한 틀짜기와 이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적절한 언술의 발명을 강조한다(Geogre Lakoff, 2006). 하지만 그가 강조하는 것은 단지 섹시한 ‘8자 구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가치와 이념, 이를 정교히 가공한 정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싱크탱크의 의미는 더욱 중요해진다. 실제로 미국 보수 세력은 1970년대 이후 공화당의 경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정책과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다양한 싱크탱크들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이를 지원함으로써 1980년대 이후 의제와 정책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적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Donald T. Critchlow, 2007 : 104~122, Jerom Armstrong and Markos Moulitsas Zúniga, 2006 : 114~132.). 반면 1990년대 민주당 계열의 대표적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진보정책연구소는 사회운동과의 소통구조를 강화하기보다 클린턴 행정부와 민주당 <평의회>와의 소통에 주력하였고,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다른 진보적 싱크탱크들 역시 자신들이 처한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는데 그다지 성공적이진 못하였다. 특히 현재 부시 행정부의 경우, 외부로부터 제기되는 다양한 제언들에 대해 거의 귀를 열지 않았고, 오직 헤리티지재단이나 미국기업연구소와 같은 몇몇 소수의 보수적 싱크탱크들만이 정책형성에  구체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진보적 싱크탱크들의 영향력은 더욱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Eric Alterman, 2007 : 43~47).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정책연구소(Institute for Policy Studies)와 경제정책연구소(Economic Policy Studies), 예산 및 정책 우선순위 센터(Center for Budget and Policy Priorities), 경제 및 정책 연구센터(Center for Economic and Policy Research) 등의 진보적 싱크탱크들은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전통적 전략을 취하였다. 이들은 평화운동, 환경운동, 노동운동, 예산감시운동 등 미국 사회의 주요 사회운동세력들에 대해 구체적 정책과 정보를 제공하고 함께 움직임으로써 동원 역량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책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Mark A. Smith, 2007 : 86~93, 홍일표 : 2008b).
이들과 달리 보다 새로운 접근을 통해 변화를 주도하고자 하는 싱크탱크들도 눈에 띤다.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새로운 미국재단(The New America Foundation)이다. 이들은 1999년에 창립한 신생 싱크탱크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기명칼럼 채택건수를 자랑할 정도로 뛰어난 언론 활용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구글(Google)의 현직 최고경영자인 에릭 슈미트(Eric Schumidt)를 재단 이사회의 이사장으로 선임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인터넷과 정보혁명의 의미와 가능성을 가장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싱크탱크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은 기존 싱크탱크들이 “비당파(non partisan)”를 선언하고 있는 것과 달리, 스스로의 위치를 “탈당파(post partisan)”으로 규정함으로써 훨씬 더 자유로운 가치와 정책의 제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진보적 싱크탱크는 역시 “미국진보센터”라 할 것이다. 2003년에 창립한 미국진보센터는 막강한 자금력, 쟁쟁한 인물들, 뛰어난 인터넷 활용, 풀뿌리 조직들과의 다양한 연계, 확실한 민주당 지지 등을 내세우며 자칭타칭 “진보판/민주당판 헤리티지재단”으로 불리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수석보좌관을 지냈던 존 포데스타의 주도로 설립된 미국진보센터는 비록 5년의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향후 민주당 집권시 가장 영향력 있는 민주당 계열의 싱크탱크 가운데 하나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Byron York, 2005 ; Jerom Armstrong and Markos Moulitsas Zúniga, 2006 ; Matt Bai, 2007).

 

2) ‘진보판 헤리티지재단’을 건설하라
   :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 http://www.americanprogress.org)는 지난 2003년 클린턴 행정부 당시 백악관 수석보좌관을 지냈던 존 포데스타(John Podesta)의 주도로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것을 주도한 인물이 존 포데스타라는 사실(吉原欽一, 2005 : 69~92),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포함한 민주당의 중심적 인물들이 큰 관심과 호응을 보냈다는 점, 조지 소로스, 허버트와 매리언 샌들러 등 민주당 성향의 억만장자들의 거액 기부가 “씨앗 자금”으로 사용되었다는 점 등 세간의 관심을 끌만한 요소들이 풍부했기 때문이다(Byron York, 2005 : 189~219). 하지만 이들이 더욱 주목받았던 것은 그들 스스로 “진보판 헤리티지재단”이 될 것임을 분명히 천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진보센터를 창립한 존 포데스타는 자신들의 구상을 이렇게 설명한다(Matt Bai, 2003).

“매일매일 우파들의 주장을 논박하는 브리핑이 발표되고, 공격적인 미디어 부서가 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이 케이블 텔레비전에 출연하도록 도울 것이다. 신랄한 내용들로 가득한 웹사이트가 만들어질 것이고, 국내외 이슈들에 대해 강력한 입장들을 발표하는 정책 부서가 움직일 것이다. 내가 요즘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은 “우리는 언제쯤 우리의 ‘8자 구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차 범퍼에 ‘작은 정부(Less government)’, ‘낮은 세금(Lower taxes)’, ‘적은 복지(Less Welfare)’ 등의 구호를 붙이고 다닌다. 우리는 우리의 ‘8자 구호’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에겐 그것이 참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싱크탱크의 설립 목적은 자유주의(liberalism)라는 아이디어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며, 한 세대 동안 미국의 정치적 대화를 지배해 온 보수적 싱크탱크의 ‘거울 이미지’를 재생산하기 위함이다. 배리 골드워터 이래 보수주의자들은 강력한 영향력과 다양한 아이디어를 갖춘 싱크탱크들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아이디어를 끌어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그것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백악관과 의회, 그리고 사법부마저 보수주의 정당이 통제할 수 있게끔 하였다.” 

미국진보센터는 창립 5년만에 이미 그 규모(스탭 숫자 125명, 1년 예산 2,000만 달러 이상)와 영향력(언론 보도 빈도 전체 10위권) 등에서 이미 대부분의 다른 ‘진보적’ 싱크탱크들을 앞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주류 싱크탱크들조차 위협하는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미국진보센터의 창립은 앞서 존 포데스타의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 진보 진영에도 헤리티지재단과 같은 ‘강력한 종합형 싱크탱크’가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깊은 성찰로부터 시작된 것이다(Matt Bai, 2007 : 205~206). 앞서 여러 차례 강조하였듯, 미국의 진보적 사회운동과 싱크탱크들은 대부분 ‘단일이슈형’으로 쪼개져 성장해 온 반면, 보수 세력들의 경우 “가치”와 “정책”, “국내”와 “국제”를 모두 아우르는 강력한 “종합형” 싱크탱크들을 키워 왔다. 또한 이들은 이념을 같이 하는 보수적 성향의 ‘단일이슈형’ 싱크탱크나 사회운동, 그리고 각 지역 싱크탱크들과 긴밀한 협조체계를 구축하며 그 위력을 더욱 증대시켜 왔다. 그러나 민주당과 진보적 사회운동, 싱크탱크들의 상황은 달랐다. 미국진보센터 켄 구드(Ken Gude) 연구원 역시 센터의 창립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민주당은 1994년 선거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약 40 여 년간을 의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1994년 의회를 잃고 난 이후에도 1990년대에는 백악관의 주인이 민주당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2000년엔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이 2006년 11월 중간선거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권력을 갖고 있던 민주당으로서는 권력 외부의 자원이나 조직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의 결과는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튼튼한 하부구조가 없다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미국진보센터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을 한 것입니다. 진보진영에 이념적 좌표를 제시할, 그래서 우파의 헤리티지나 미국기업연구소와 같은 기능을 수행할 진보적 조직을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헤리티지재단이나 케이토연구소와 같은 보수적 싱크탱크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튼튼한 조직이 필요하며, 재정후원 또한 단기 프로젝트 중심이 아니라 5년-10년 정도의 장기적인 투자가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것이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초기 자금 후원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Matt Bai, 2007). 이로 인해 미국진보센터는 매우 안정적인 재정기반을 갖고 출발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더 많은 돈을 모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처럼 안정적 재정기반과 탄탄한 인력기반 역시 미국진보센터의 큰 자산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미국진보센터에는 레이건 행정부 당시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던 로렌스 코브(Lawrence Korb),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가경제평의회 책임자였던 진 스펄링(Gene Sperling), 정치학자이자 《부상하는 민주당 다수》(The Emerging Democratic Majority)의 저자이기도 한 루이 텍세이라(Ruy Teixeira) 등 33명의 연구위원(fellow)과 전 민주당 원내대표 탐 대슐(Tom Daschle)이 특별 연구위원(distinguished senior fellow)으로 속해 있다. 이외에도 시니어 스탭으로 대표인 존 포데스타를 포함하여 각 프로젝트의 책임자들과 연구소 전체 업무를 책임지는 수석부대표급들 19명이 있고, 정책연구분야, 커뮤니케이션분야, 대외협력분야, 재원개발 부서 등을 통틀어 100명이 훨씬 넘는 연구원과 스탭들이 함께 일하고 있는 거대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미국진보센터의 커뮤니케이션 부서에 16명이 배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부서에 별도로 15명이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진보센터가 대중들과의 소통을 얼마나 얼마나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진보센터가 비록 신생 싱크탱크 가운데 하나이지만 다른 싱크탱크들에 비해 더욱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발달한 정치적 안테나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 것은 이러한 엄청난 투자에 힘입은 바 크다(John Podesta and John Halpin, 2006). 이들은 마치 헤리티지재단이 “레이건 공항에서 의회 의사당”까지 가는 자동차 안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정책브리핑 자료를 만들어내는 혁신을 이뤄냈듯, 주장의 ‘본질’ 그 자체만큼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 즉 소통 전략(communication strategy)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싱크탱크인 것이다.
미국진보센터가 헤리티지재단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는 사실은, ‘소통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만 아니라 인턴쉽 프로그램을 중시하는데서도 확인된다. 센터의 인턴쉽 프로그램의 경우, 2006년 여름에만 모두 55명의 인턴들이 참여했는데 이 숫자는 다른 싱크탱크들의 전체 스텝 숫자보다도 많을 정도다. 이 인턴쉽 프로그램의 목표는 단순히 부족한 노동력을 보완하기 위함이 아니라 “차세대 젊은 진보적 지도자들을 기르는 것”이며, 이는 “캠퍼스 프로그래스”(http://www.campusprogress.org/)라는 대학생 대상 프로그램을 센터가 별도로 운영하는 것과도 맞물려 있다. 어떻게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그들과 “진보의 가치”를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적극적 노력은, 미국진보센터가 진보정책연구소가 아닌 헤리티지재단의 ‘거울 이미지’임을 분명히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미국진보센터는 1990년대 민주당의 정책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진보정책연구소와 달리, “진보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의 재구성을 추진하고 있다. 사회운동, 특히 풀뿌리 사회운동과의 연계를 강화하려 하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한 소통의 확대에 능동적이다. 젊은 대학생들을 “미래 세대의 지도자”로 키워 나가기 위한 별도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최고의 경륜을 자랑하는 전직 관료와 의원, 전문가들을 싱크탱크 연구원으로 포진시키고 있다. 억만장자의 거액 쾌척이 ‘씨앗 자금’이 되었지만, “넷루트”라 불리는 수많은 정치 블로거들과의 교류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있다. 지금까지 진보적 싱크탱크와 사회운동이 ‘단일이슈’에 매몰되었던 한계를 넘어 ‘종합형’ 싱크탱크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당과 민주당 바깥의 새로운 힘을 ‘연결’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헤리티지재단이나 미국기업연구소는 공화당이라는 경계에 스스로를 국한시키지 않는다. 그들이 발휘하는 ‘아이디어의 힘’은 공화당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화당과 그 ‘바깥’을 연결시켜 주는 그 ‘사이’에 근거하고 있음을 미국진보센터는 꿰뚫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 은 남부복음주의자들이나 전국총기협회가 튼튼히 일궜던 ‘풀뿌리’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넷루트(netroot)’들과도 어울려야 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지난 몇 년 간 민주당은 물론 미국의 진보적 사회운동에 ‘활력’을 불어 넣은 주역들이었다. 미국진보센터는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진보판/민주당판 헤리티지재단’ 이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5. “조심하라, 워싱턴이여. 자유주의자들(the Liberals)이 오고 있다”

2008년 3월 16일, 워싱턴 포스트 2면에 실린 기사(‘Take Back America’ Conference Is a Change for Democrats to Highlight Progressive Politics)는 위 제목으로 시작하였다.
3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워싱턴 디씨에서 열린 <미국을 되돌리기>(Take Back America, http://www.ourfuture.org/tba-live)컨퍼런스는 <미국의 미래를 위한 캠페인>(Campaign for America's Future)이 매년 개최해 오고 있는 미국 진보 세력들의 총결집 행사이다. 3일 간 100여개의 세미나와 각종 이벤트들이 진행되며, 2,000여명이 넘는 자유주의적․진보적 단체와 인물들이 모두 모여 토론과 집회를 이어 나간다. 이 행사의 웹사이트를 방문해 보면 이 글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던 미국 자유주의․진보 세력의 현재 모습과 상황인식, 그리고 전망의 대강을 확인할 수 있다. 첫날 발표된 보고서들의 제목 ―<진보의 부상-2008 : 면모일신의 획기적 선거>(Progressive Rising-2008 : Sea-Change Election), <보수주의의 쇠퇴>(The Decline of Conservatism), <보수주의가 죽어가고 있다>(Conservatism is Dying)― 에서 알 수 있듯, 2008년 3월 현재 미국 자유주의․진보 세력들은 희망과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다.
이들의 이런 ‘희망’과 ‘자신감’이 부시 대통령의 실정이라는 이유로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힐러리 클린턴이나 버락 오바마와 같은 걸출한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의 존재로 인해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이 글을 통해 살펴보았다. 길게는 레이건 집권 후 28년, 짧게는 부시 집권 8년 동안 이들은 수없이 패배하였고 그보다 더 많이 도전하여 왔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거쳐 이들은 “조정”(coordination)이 갖는 중요성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각자 알아서 간다”(Go it alone)는 식의 운동은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당의 지도’ 하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 아니다. 미국 보수 세력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실행해 왔듯, 운동과 정당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완전히 포섭되거나 종속되는 방식으로 위력이 발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 ―운동과 정당, 운동과 운동, “풀뿌리”와 “넷루트”, 온라인과 오프라인, ‘가치’와 ‘정책’, 정당과 사회운동과 싱크탱크― 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조율’되고 ‘조정’될 수 있는가라는 사실을, 미국 민주당과 자유주의․진보 세력은 오랜 시간의 “아픈 학습”의 과정을 거쳐 배워 온 것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상황은 새로운 단계로의 질적 전환을 요구받는 한국의 민주주의, 시민사회, 사회운동, 그리고 민간 싱크탱크 등 다양한 영역에 있어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참여연대나 경실련과 같은 “종합형” 시민단체의 존재를 ‘후진적’인 것으로, 또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미국과 같이 ‘단일이슈형’ 운동과 조직”으로 ‘발전’해 가야한다고 훈계했던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운동영역이나 조직의 경계를 넘어 함께 ‘연대’하고 ‘조정’하는 것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운동의 전통이, 최소한 미국의 상황에 비추어 보더라도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잊은 것은 아닌가? ‘이념’이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을 ‘정책’을 논하는 것에 비해 ‘구태의연’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1970년대 이후 ‘보수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워 왔던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들이나 2000년대 이후 새롭게 ‘진보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진보적 싱크탱크들은 어떻게 보이는가? 아마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더 쏟아져 나올 것이며,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한국에서도 “보수주의의 쇠퇴”와 그것의 “죽음”을 논하는 행사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 때 “진보의 부활”을 자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얼마나 갖추고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난 시기 우리 운동과 정치에 대한 보다 냉철한 평가, 발 딛고 선 현재에 대한 객관적 분석, 만들어 갈 미래에 대한 깊이 있는 전망이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홍일표 (Hong, Il-Pyo), iphong1732@gmail.com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시거센터 방문연구원
참여연대 연구팀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참여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연구위원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는 《기로에 선 시민입법 : 한국 시민입법운동의 구조, 역사, 동학》, <부패방지법 제정운동 사례를 통해 살펴 본 한국 시민입법운동의 동학>,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들의 성정과정과 전략 : 이념, 사람, 조직을 강화하라>, <‘시민사회론의 한국적 변용’에 대한 연구사적 고찰>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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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수 시대, 진보의 길을 묻는다 <시민과 세계> 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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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신보수 시대, 그리고 정치의 휘발성 : ‘진보의 허브’ 를 구축해야 한다 _ 이병천 · 홍윤기 / 공동편집인

주제기획 신보수 시대를 말한다: 성립 조건과 성격
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구조 변화와 불평등 체제 _ 신광영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한국사회는 보수화되었나? : 의식과 이념의 변화 _ 한 준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뉴라이트의 등장과 보수의 능동화 _ 윤민재 /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객원연구원
이명박 정부의 두 얼굴과 다가올 위기들 _ 우석훈 /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명박 정부 시대, 금융빅뱅과 한국경제의 운명 _ 이종태 /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특집 신보수 시대, 진보의 길을 묻는다
시민운동의 위기와 새로운 혁신의 과제 _ 이태호 /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정당개혁론의 재성찰 ‘시민참여 책임정당’의 길 _ 정상호 /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

좌담: 18대 총선평가와 진보의 새길 찾기 _ 좌 담 자  구갑우 (사회,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안병진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장석준 (진보신당 정책팀장)/정상호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세계의 창
일본 보수의 장기집권은 왜 가능했나? 55년체제의 역사와 한국에 주는 함의 _ 김용복 / 경남대 정치언론학부 교수
미국 민주당과 자유주의 · 진보세력의 부활? : 재창조를 위한 긴 여정 _ 홍일표 /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문화인종적 다원주의 패러다임을 향하여 _ 이충훈 / 미국 뉴스쿨 박사과정
서브프라임 사태와 거품의 붕괴 _ 조혜경 /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아시아포럼 한국에게 아시아란 무엇인가 _ 좌 담 자  박승우 (사회,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김기석 (강원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이남주 (성공회대 중문과 교수)/이재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연구교수)/조희연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시민운동현장
국민참여재판, 사법 민주주의의 새 장을 열다 _ 박근용 / 참여연대 사법감시팀장

시민정치론
새로운 시민정치 : 존 롤스 ‘무지의 베일’을 단서로 _ 김상준 / 경희대 NGO대학원 교수

참여사회포럼 숭례문, 한국사회에 말을 걸다
숭례문의 문화재적 가치와 문화재 복원의 방향 _ 양윤식 / 한얼문화유산연구원장
숭례문, 한국사회에 말을 걸다 _ 토 론 자 송도영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조민재 (동아시아문화기획 대표)/홍기빈 (참여사회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서평
대처리즘의 교훈 : 그람시적인, 너무나 그람시적인 _ 지주형 /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연구교수
제3의 길과 신노동당, 오독과 베끼기를 넘어 _ 김보영 / 영국 요크대 사회정책 박사과정
멸종위기의 서양늑대와 양치기, 뒤늦게 나타난 자본주의의 종말 _ 박승옥 / 시민발전 대표
‘창조적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 _ 이희영 /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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