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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2/08
    장인어른
    지리산

장인어른

아버님~~~ 이렇게 불러본지가 98년 초봄 즈음 거동을 못하고 누워계살때 불러보고, 그해에 아버님을 저승으로 보낸 그해이후 처음입니다. 벌써 아버님이 이승과 작별을 하신지가 휫수로는 7년째가 되는 것이지요, 안성에 만석집 둘째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 부러워할것이 없으셨다는데 일본유학에서서 큰형님의 사회주의자로 변신이 아버님의 일생을 모질고 고통스럽게 다시 살게 하시었답니다. 89년 겨울 국가보안법으로 수배중인 나를 보고는 "내가 형놈때문에 이렇게 네 에미와 아이들을 고생시켰는데 다시 그꼴을 본다"는 한마디로 우리시대의 아픔을 독백하시기도 했엇지요. 어제는 모처럼 처가댁식구들이 다 모였습니다. 79년 이후 끊이질 않는 외도로 장모님과 큰처남댁 속을 무지하게 썩인 큰처남도 작년 말 외도를 훌훌 털고는 집으로 귀의???를 하고 멀리 순천에 가 있는 둘째아들과 막내아들내식구 손주녀석들 그리고 변변하지 못해 살아생전 막걸리 한잔 받아주지 못한 우리 하나밖에 없는 딸년내외가 모여 있는 것입니다. 해방이후 우리 남한사회의 근대사 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은 처가집에 이제서야 비록 추상명사이지만 남들이 그렇게 목메이게 추구하고 갈망하는 행복이 찾아오는 듯 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큰아버님의 월북에 연좌제에 묶여 반세기를 넘게 무의도식하신 장인을 대신한 장모님의 경제활동은 변변한 가게 하나 없이 양은다라하나로 새벽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생선띠어다 머리에 이고 이집저집찾아다니는 장사였던 것 입니다. 3남 1년의 성장도 그속에 잇었던 것이겟지요. 참 모질고 모진 삶이 초록이외가집에 있었고 그 곳에 초록이아빠인 내도 민주화운동을 한답시고 한몫을 단단히 하면서 걱정을 끼쳐드렸지요. 초록이녀석 초등학교를 갓 입학시키고는 수배에 징역살이에 수발히기 위해서서 남의집 허드렛하는 딸년과 외손주녀석을 2년이나 건사하면서 얼마나 걱정을 하셨을지 모릅니다. 내가 진짜 지은 죄는 여기에 있었던 깃입니다.. 약주가 과하시어서 가끔 걱정을 하는 내게 네놈이 막걸리한잔 받아주어 보았느냐는 호통으로 무안하게도 하신 장인인 정말로 선비였고 휴머니스트이기도 했었습니다, 곧은 걸음걸이처럼 곧은 글씨체하며 당장 내일 끼니가 없어도 주변에 끼니를 거르는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분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장모님의 고생은 배가 되었엇습니다. 다행히 그 가난을 함께 이음질 하면서도 사랑을 베푸는 천사같은 처남댁이 들어와 큰처남의 20여년 외도를 아랑곳 하지 않고 가정을 지켜내는 정말로 천사의 심성이 지금 처가집을 가꾸어 놓았던것 입니다. 오늘은 7년전 5월 용미리 납골당에 모신 아버님을 뵈러 군대를 간 외손주 초록이녀석만 빼고 온가족들이 새배드리러 가기로 했습니다. 이제 큰 걱정없이 살아갈 처가댁 식구들의 형복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초록이 아빠와 더불어 말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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