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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200주년 - 다시 보는 다윈

탄생 200주년 - 다시 보는 다윈 [제 895 호/2009-03-30]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를 뽑으라면 누굴 들 수 있을까? 물론 이외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이 많기 때문에 누구를 최고의 과학자로 뽑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과학계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논쟁에 휘말리는 과학자를 뽑으라면 단연코 다윈이 뽑힐 것이다. 올해로 다윈 탄생 200주년을 맞아 다윈의 업적과 함께 진화론도 부각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윈의 진화론은 왜 그렇게 논쟁에 휘말리게 된 것일까?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은 1809년 2월 12월 영국의 슈루즈버리에서 여섯 형제자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다윈의 어머니 수산나는 웨지우드 도자기의 창업자인 조시아 웨지우드의 딸로 매우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독실한 유니테리언 교도였고, 이러한 집안 분위기는 다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슈루즈버리에서 존경받는 의사로 형편이 넉넉한 편이었다. 어린 시절 다윈은 딱정벌레를 잡거나 조개껍데기, 광물 등을 수집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착실하게 수업을 듣는 편은 아니었다. 또한 수학실력은 별로였으며 과제를 싫어하여 시 짓기 숙제를 베껴 낼 정도로 평범한 학생이었다.

다윈은 16살이 되던 해에 가장 유명한 의대가 있었던 에든버러 대학에서 형과 함께 공부를 하기 위해갔다. 다윈의 아버지는 형의 말벗도 할 겸 다윈이 의학 공부를 하기 바라며 같이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다윈은 의학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마취를 하지 않고 외과 수술을 하였는데, 다윈은 어린 아이의 수술 장면을 보고 다시는 수업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윈은 살아있는 낚시 미끼도 끼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았기 때문에 의학이 적성이 맞을 리 없었던 것이다.

다윈이 의학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안 아버지는 다윈을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에 보냈다. 하지만 여기서도 다윈은 성서 공부보다는 딱정벌레 잡기와 분류에 열중했으며, 식물학자인 헨슬로와 친하게 지냈다. 헨슬로와 친하게 지낸 덕분에 다윈은 비글호에 탑승할 기회를 얻었고, 자신이 원하던 탐험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린 흔히 다윈이 진화론을 떠올린 곳으로 갈라파고스를 이야기하지만 사실 다윈은 갈라파고스의 지층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는 헨슬로에게서 받은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론>을 너무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다윈은 갈라파고스를 떠난 후 2년 동안이나 그 섬에서 관찰한 핀치새의 다양한 부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으며, 귀국 후 다윈은 생물학자가 아니라 지질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지질학자로 명성을 얻은 다윈은 가족들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비글호 항해기>를 출판했고, 저자로서도 유명해진다. 이후 다윈은 자신이 수집해온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진화론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다윈은 1859년까지 자신의 생각을 출판하지 않았는데, 이는 남들과 극도로 부딪히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이 어떤 파문을 몰고 올지 잘 알고 있었고, 라마르크와 같이 진화론을 잘못 주장했다가 동료로부터 조롱거리로 전락한 과학자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윈이 진화론 발표를 주저하던 중 다윈은 월리스라는 자연학자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다윈이 월리스보다 먼저 진화론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다윈은 자신이 월리스의 생각을 훔쳤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월리스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발표 후 다윈은 요약본인 <자연선택>을 출간하고, 흔히 <종의 기원>으로 알려진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혹은 생존 경쟁에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에 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라는 긴 제목의 책을 출간하게 된다.

<종의 기원>은 출간되자마자 교회와 과학계에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논쟁을 싫어한 다윈은 책의 어느 곳에도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종의 기원>을 읽은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한 성직자의 부인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랍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윈의 책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특별한 존재라는 지위를 박탈한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충격은 마치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의 평범한 행성으로 그 지위가 강등된 것에 비견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누구도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하지만 진화론은 아직도 논쟁이 진행 중이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관측을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데 반해 진화론은 그것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윈은 다양한 화석자료를 통해 진화의 증거를 제시했다. 물론 이러한 화석 자료들이 다소 불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화석의 생성원리상 완전한 화석이 발견되기는 어렵다.

생물학에서 진화론이 차지하는 위치는 물리학에서 에너지 보존법칙의 위치와 비슷하다. 그러나 어느 이론도 아직은 명확하게 정론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윈 탄생 200주년을 맞아 건설적인 논쟁을 통해 생물학 분야에 있어서 발전해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글 : 최원석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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