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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들의 ‘멀리 뛰기’ 올림픽 [제 740 호/2008-04-02]

몇 년 전 중국 만주의 말라붙은 호수 바닥에서 발견된 2000년 전의 연꽃 씨앗이 발아해 과학계에 화재를 일으킨 사례가 있다. 어떻게 2000년 된 씨앗에서 싹이 날 수 있었을까? 보통의 씨앗이라면 세월이 흐르면 썩거나 말라비틀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호수 바닥 퇴적층이 연꽃 씨앗에겐 산소나 수분, 빛을 차단하는 일종의 ‘냉동창고’ 역할을 했다. 덕분에 지상에 나온 연꽃은 상상속의 냉동인간처럼 부활했다.

이처럼 식물의 씨앗은 환경이 불리하면 겨울잠을 자다가 때가 좋아지면 발아해 생장을 계속하는 전략을 쓴다. 하지만 겨울잠을 자는 것은 최후의 방법일 뿐 자손을 퍼트려 종족을 번성시키려면 활발하게 활동하는 편이 낫다. 식물은 어떤 전략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트리고 있을까.

봄에 피는 민들레는 낙하산의 원리를 이용한다. 민들레의 꽃이 지면 흰 갓털이 씨앗에 붙어 낙하산 같은 모양으로 하늘을 둥둥 떠다닌다. 만약 씨앗에 갓털이 없다면 그 씨앗은 민들레꽃이 피어있는 바로 그 자리에 떨어져 민들레는 늘 그 자리만 맴돌 것이다. 하지만 꽃받침이 변형된 관모가 씨앗의 갓털이 돼 낙하산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 있어 민들레의 생육 범위가 훨씬 더 넓어질 수 있다.

소나무나 단풍나무, 물푸레나무 같은 식물은 씨앗에 날개를 달았다. 이들 식물에서 떨어진 씨앗은 날개가 공기의 저항을 받으며 프로펠러처럼 돌며 바람에 의해 날아가기 때문에 멀리 옮겨질 수 있다. 민들레 씨앗보다는 무겁지만 씨앗에 달린 날개의 모양이나 길이에 따라 날아갈 수 있는 거리가 더 먼 경우도 있다. 또 단풍나무류나 물푸레나무류는 보통 나뭇잎으로 수종을 식별하는데, 겨울철에 낙엽으로 수종 식별이 어려울 때는 씨앗에 달린 두 날개의 각도를 수종을 식별하는 ‘열쇠’로 활용하기도 한다.

여름에는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라는 노랫말처럼 봉선화 꽃은 폭발을 한다. 물론 아무 때나 손을 댄다고 터지는 것은 아니고 봉선화 열매가 성숙하면 스프링처럼 씨앗이 저절로 튕겨져 나온다. 그래서 봉선화를 영어로 ‘touch me not’(만지지 마세요)라고 부른다. 봉선화뿐 아니라 괭이밥이나 이질풀의 씨앗도 이런 방법으로 멀리 날아간다. 특히 지중해에 자라는 박과의 ‘분출오이’는 폭탄처럼 씨앗이 터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을에 산이나 들에 나갔다 오면 양발이나 신발, 옷 등에 이름 모를 식물의 씨앗이 붙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번 붙은 씨앗은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씨앗이 붙은 것을 귀찮아 할 테지만 그 식물로선 어떻게 해서든 자기 씨앗을 멀리 퍼트리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다. 이런 특성을 가진 식물 대부분은 사람이나 동물, 짐 등에 달라붙을 수 있도록 씨앗에 갈고리나 가시가 달렸거나 끈끈하다. 도깨비바늘, 도꼬마리, 진득찰 같은 귀화식물들이 여기에 속한다.

물에 띄워서 종자를 퍼뜨리는 식물이 있다. 야자나무나 문주란, 해녀콩, 모감주나무 등은 씨앗이 가벼워 물에 잘 뜨고 껍질이 두꺼워 쉽게 안 썩는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인 충남 안면도의 모감주나무 군락이나 제주도 토끼섬의 문주란 군락은 바닷물에 의해 씨앗이 퍼진 대표적인 지역이다.

고려시대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것처럼 씨앗이 스스로 움직이기보다 동물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한다. 바로 식물의 열매를 짐승이나 새가 먹도록 하는 것이다. 딱딱한 씨앗은 동물의 체내에서 소화되지 않고 배설되므로 동물이 이동한 거리만큼 씨앗을 퍼뜨릴 수 있다. 그러나 은행나무 열매는 씨앗을 둘러싼 과육의 냄새가 고약하고 독이 있어 동물들에게 기피의 대상이다. 단 사람만이 독이 있는 과육을 제거하고 은행나무 씨앗을 먹기 때문에 은행나무는 사람에 의해서만 이동된다. 은행나무가 대게 깊은 산 속에서 자라지 않고 사람이 사는 집 근처에 자라는 이유다.

식물은 자기 종족의 번식을 위해 오랜 노력 끝에 다양한 전략을 터득했다. 하지만 지금 지구에서의 식물은 인간의 도움없이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이다. 식물과의 공존에 동의한다면 길가에 피어난 풀 한 포기에도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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