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우유로 만든 붉은 노을 [제 741 호/2008-04-04]

봄 기분이 완연한 주말, 짠돌 씨는 가족과 함께 N서울타워에 갔다. 아이들의 성화에 거금을 털어 전망대까지 올라갔다. ‘무슨 엘리베이터 한번 타는 값이 그리 비싸냐’고 투덜댔지만 막상 전망대에 오르니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 전경이 꽤 멋졌다. 이왕 올라왔으니 저녁까지 버텨서 본전을 뽑으리라 결심했다.

“막신아, 막희야, 이거 봐. 이쪽 방향으로 6600km를 가면 모스크바인가 봐. 신기하지?”
“모스크바가 뭐야?”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수도야. 넌 그것도 모르냐.”
“뭘, 모를 수도 있지. 6600km이면 가만있자…. 서울부터 부산까지 15배 거리네. 엄청 멀다, 그치?”
창문에 쓰인 각 도시의 이름을 보며 신나게 놀다보니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높은 곳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노을이 지는 시간은 좀 늦다. 서쪽 하늘이 서서히 빨갛게 타 오르기 시작했다.

“와아~”
“아빠, 하늘이 빨개. (진지하게) 내 평생 이런 멋진 장면은 처음이야.”
다섯 살 밖에 안 된 녀석이 평생 타령은. 어쨌든 돈 들인 보람이 있군. 그러고 보니 여유롭게 저녁노을을 본 적이 참 오랜 만이다. 하지만… 여유롭게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을 턱이 없지.

“아빠, 근데 왜 파랗던 하늘이 빨개졌어?”
“맞아, 같은 하늘인데 왜 때에 따라 색이 달라져?”
“껄껄~. 그건 말이지. 햇빛이 변덕이 심해서 그래.”
“에이, 거짓말. 아빠 잘 모르니까 대충 무마하려는 거지?”
“정말이야. 사실 햇빛은 여러 색의 빛을 숨기고 있거든. 그러니까 변덕쟁이지.”
“정말?”
“좋아 간단한 실험 하나 해 볼까? 막희야 네가 먹던 우유 잠깐 줘봐. 여보 당신은 매장에서 투명한 컵 좀 얻어 와요.”

실험방법
1. 준비물 : 투명한 물 컵, 우유, 손전등
2. 물 컵에 물을 붓고 우유를 약간 탄다. 물 200ml에 우유 10ml 정도면 된다.
3. 물 컵을 흰 벽이 있는 어두운 곳으로 가져간다.
4. 손전등을 비춘다.
5. 우유 탄 물을 통과한 빛이 처음 빛보다 붉게 변했다.

“컵을 통과한 빛이 붉게 바뀌네.”
“정말! 비추는 전등도 흰빛이고, 우유도 하얀데…. 아빠, 왜 이렇게 바뀌는 거야?”
“아까 아빠가 햇빛이 변덕쟁이라고 했지? 조금 어렵긴 한데 햇빛은 여러 파장의 빛이 섞여 있어. 그래서 그걸 분리하면 무지개 색이 나오지.”
“빨주노초파남보?”
“맞아, 우리 막희 똑똑하구나. 빨간색 빛은 파장이 길고, 보라색 쪽으로 갈수록 파장이 짧아지지. 파장이 길고 짧은 건 가만있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파동에서 느슨한 건 파장이 긴 거고, 촘촘한 건 파장이 짧은 거잖아.”
“저번에 아빠 휴대전화는 파장이 짧은 PCS 방식이라 터널에 들어가면 안 터지는데, 옆자리의 아저씨 휴대전화는 셀룰러폰 방식이라 터널에서도 잘 터진다고 아빠가 투덜거렸어.”
“헉! 너희들이 그걸 어떻게 다 아니?”
“우리 대충 아니까 계속 설명해 봐.”

“(이 녀석들이….) 막신이 말대로 빨간색 빛은 파장이 길어서 파란색보다 멀리까지 갈 수 있어. 파란색 빛은 멀리 못 가고. 햇빛은 지구의 대기권을 통과해서 우리에게 도달하겠지? 그럼 정오 때랑 해질 때 중에서 햇빛이 대기권을 길게 통과해야 하는 때는 언제겠니?”
“지구가 둥그렇고, 대기권이 얇게 덮고 있으니까…. 해가 질 때 햇빛이 대기권을 오래 통과해야 하겠네.”
“맞아. 해질 때 햇빛은 대기권을 오래 통과해야 해. 그러면서 햇빛 중에 파란색 빛은 도중에 다 없어지고, 멀리까지 갈 수 있는 빨간색 빛만 우리 눈에 들어오는 거야.
“그렇구나. 그럼 도중에 없어진 파란색 빛은 어떻게 되는 거야?”
“파란색 빛은 먼지 같은 공기 중의 입자와 만나서 산란돼. 파장이 짧은 빛일수록 잘 산란되지. 평소 하늘이 푸른 이유는 바로 산란된 파란색 빛 때문이야.”

“아빠, 그럼 왜 유리컵에 우유를 넣었어?”
“아까 빛이 공기 중의 입자와 만나 산란된다고 했지? 우유는 아주 작은 알갱이로 구성돼 있거든. 그 알갱이가 공기 중의 입자와 같은 역할을 한 거지. 그래서 우유 섞은 물을 통과하면 무슨 색만 남는다?
“붉은색!”

그러는 사이 노을이 완전히 지고 서울시의 야경이 멋지게 펼쳐졌다. 아뿔싸, 시간이 이렇게 흐르다니! 본전을 생각하면 더 있고 싶지만 이곳에서 더 버티다간 저녁밥까지 사줘야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막희의 입에서 ‘배고파’ 소리가 나오기 전에 이곳을 떠야 한다. 벌써 아내 김 씨가 막희 포섭에 들어갔다!

“아빠, 초조해 하지 마. 집에 가서 밥 먹을 거야.”
“엄마가 고생스럽지만 어쩔 수 없지. 멋진 구경시켜줬으니 오늘은 엄마가 이해해.”
녀석들…. 대신 내려오는 길에 쥐포를 몇 개 사서 나눠 먹었다. 봄이라 그런지, 기분이 좋아 그런지 바람이 상쾌하다. 오늘처럼 하늘은 파랗고, 노을은 붉어야 제 맛이다. 아이들에게 하늘도, 노을도 회색이라고 가르칠 순 없지 않은가. (글 : 김정훈 과학칼럼니스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