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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과 수치심[발췌]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09/11/17 21:28
  • 수정일
    2009/11/17 21:28
  • 글쓴이
    강 아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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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 교수였던 톰킨스는 1955년 안식년에 외아들을 대상으로 매우 인상적인 실험을 시작한다.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유아의 정서 변화가 인간의 신체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관찰하게 된다.

 

그는 유아의 정서를 긍정적 상황의 정서(흥분, 기쁨)과 중립적 상황의 정서(놀람), 부정적 상황의 정서(슬픔, 두려움, 분노, 수치심), 그리고 본능적 욕구와 반대되는 상황의 부가적 정서(메슥거림, 역겨움)로 나누어 보았다. 그리고 해당 정서가 유아에게 어떤 신체 변화, 특히 안면의 변하를 가져오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예를 들어 유아에게서 기쁨의 정서는 세 가지 표정, 밝은 얼굴, 안면 근육의 이완, 열린 입술과 직결된다. 그리고 유아의 분노는 눈이 좁아지고 턱에 주름이 잡히고 얼굴이 붉어지는 변화를, 수치심은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고개를 숙이거나 돌리며 얼굴이 붉어지는 변화를 가져온다. 부가적 정서인 역겨움에 대해서는 윗입술이 올라가고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식의 차원에서 정세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수립한 톰킨스의 연구는 후대 학자들에 의해 정신분석학적인 틀을 많이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어지게 된다.

톰킨스가 새롭게 제시한 인간의 정서적 경험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그의 연구소에서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현재 미국 필라델피아 주에 있는 실번 톰킨스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도널드 네이선슨은 정신분석학자이다.  그는 톰킨스가 제시한 실증적 척도를 바탕으로 인간의 보다 많은 부가적 정서를 연구하고 있다. 실증적 관찰이 가능한 인간 의식의 중요성뿐만 아나라 무의식적인 반응에도 민감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네이선슨은 톰킨스가 제시한 수치심이라는 부정적 정서의 이면을 발견한다. 2개월 반에서 3개월 된 유아를 대상으로 관찰하던 네이선슨은 유아에게서 '부정적 정서'로서만이 아닌 '부가적 정서'로서의 수치심의 특징을 확인한다. 엄마가 눈을 맞추며 웃다가 중단하고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가 전혀 다른 무서운 표정을 짓자, 유아는 울거나 고개를 떨어뜨리면서 시선을 피하는 수치심의 특징을 보였다.

톰킨스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정서로만 분류했던 수치심은 유아가 자신의 기대 욕구와 반대되는 상황을 경험할 때 발생하는 부가적 정서의 특징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치심을 경험하는 이들의 정서적 경험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의식적 차원에서의 부정적인 정서만이 아니라, 보다 상호 관계적이고 무의식적인 측면, 즉 상대에게 기대하는 본능적이고 내면적인 욕구와 관련해 이해해야 한다는 점으로 네이선슨은 잘 보여주고 있다.

네이선슨의 연구에서 나타난 바와 깉이 수치심은 아주 어릴때부터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정서다. 이것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정이나 사랑등을 기대했다가 거부당하는 뜻밖의 겅험을 하고 나서 느끼는 부가적 정서라는 점은 인간의 의식 배후에 대한 보다 진지한 관심을 촉발한다. 한 개인의 수치심은 그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만 기인하는 인과론적인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그가 타인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졌는지가 무었보다 중요하다. 바로 그 기대와 다르게 진행되거나 거부되는 경험이  자신의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이다. 자신에 대한 혼란, 회의 , 무가치성에 시달리도록 낭떠러지로 떠미는 수치심이라는 정서는 실로 위험한 정서로 탈바꿈되기 쉽다. 심지어 수치심은 종종 자살이나 살인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흔히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해 제시되는 죄책감(guilt)와 수치심(shame)의 비교 연구에서 그 이유를 보자.

에릭슨은 죄책감과 수치심의 극명한 차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죄책감은 유아 혹은 아동의 청각적 경험이고,  수치심은 시각적 경험이라고 설명한다. 즉 죄책감은 잘못을 행한 아이가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는 경험이다. 반면 수치심은 잘못을 행한 아이가 그 벌로 발가벗겨져서 손을 들고 서 있을때 자신의 발가벗은 몸을 보는 경험이다.   무엇이 다를까?    부모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따끔하게 남 앞에서 창피를 주는 등의 충격 요법을 쓰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하는 아이의 무의식에는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청각적인 죄책감의 경우 아이는 단순히 자신이 잘못한 '행위' 에 대해 그림을 그린다. "내가 왜 하지 말라는 일을 했을까"  "이 일은 해서는 안될 일인가 보다. 매번 잔소리를 하시니 말이야" 등이다. 

그러나 시각적인 수치심 경험을 하는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즉 자신 전반의 '정체성'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나는 엄마에게 무엇인가? 나는 얼마나 형편없는 아이인가? 그래,나는 정말 쓸모 없는 놈이다." 등 부정적인 자의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유아기에 이러한 수치심 경험을 수없이 한 아이들을 상상해보라.   그들은 부정적인 자의식을 가지게 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기 자신을 해치거나, 부정적인 정체성을 갖게 하는 대상을 없애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기도 한다.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러건은 매사추세츠 주의 형무소에서 오랜 기간 동안 살인을 비롯해 아주 치명적인 폭력을 범한 재소자들의 범행 동기를 밝히기 위해 심층 인터뷰와 연구를 실시한다. 25년간에 걸쳐서 연구한 결과 그는 대부분의 재소자들이 아주 흡사한 정서적 경험을 한 후에 순간적으로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무의식적인 동기는 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원한이나 증오가 아니라, 그들의 수치심이었다. 거의 모든 재소들이 기억하는 , 범죄의 마지막 순간에 들었던 무의식적 메시지는  "이렇게 무시를 당하고 어떻게 살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없애버려!" 였다. 대부분 '체면 손상(loss of face)'을 수없이 경험한 경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순간이나, 너마저 나를 창피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폭력과 수치심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놀아운 사실은 폭력의 발단이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대상'에 대한 문제이기보다는, 수치심을 느끼는 개인 '내면'의 문제라는 점이다. 주로 극단적인 폭력을 동반하게 되는 병리적인 수치심은 왜곡된 자아상을 가지게 한 성장 환경과 관련되어 있다. 수치심이라는 정서는 한 인간의 정서적 경험이 중요한 타인들에 의해 제대로 돌아지지 않을 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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