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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말에 누군가 진심으로 귀기울여 들어줄 때 우리는 감동하게 되고 때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누군가가 내 말을 들어주는 것에 감사합니다. 나 같은 사람의 사정을 알아주는 것에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순간은 마치 지하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가 매일 " 제 소리 들립니까? 거기 누구 없어요? 제 소리 들려요? 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던 중 "예"는 단순한 대답이지만 듣는 사람에겐 그 순간이 모든 절망감으로부터 안도하여 다시 살아난 기분일 것이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파놓은 지하감옥 속에 살면서 감옥 밖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하동굴과 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희미한 음성에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
칼 로저스는 인본주의 상담의 대가이다.
나는 여기서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희미한 소리를 듣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날카로운 직관과 살아있는 감정만이 해 낼수 있다. 죽어 있는 감정을 살려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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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직관과 살아있는 감정이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불교적으로 보면 돈오점수(돈오점수-한자가 생각이 안남)로 마음의 관조 깨달음에 대한 마음공부 일 겁니다.
이것을 해석하는 어떤 학자의 견해는 어느 선수행의 대가에 대하여 그가 돈오점수를 깨친것을 또한 학자 자신의 이론적 깨달음으로 자신의 이성을 정립하더군요
돈오점수란 오(悟)와 수(修)에서 수행자는 어쩌면 자신의 마음의 직관(돈)이 고통의 시간 득도의 시간을 통하여 어느날 지혜로움의 마음의 본질을 보게되는 것 같습니다.그것은 사물과 관계를 있는 그대로 인간의 기의(문자적 표현의 이성)를 배제한 그야말로 흐강(흐르는 강)을 본다는 겁니다.그러나 흐강은 물과 천이 어루러진 구성이 강입니다.강에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 흐강이지요 그럼으로 강이 물이 없다면 존재할수 없고 천이 없다면 강이 아니겠지요 즉 직관과 감정도 이성과 분리된 그것만의 독특함은 아닐 겁니다.
돈오점수에서 선(禪지식,깨달음)을 획득하는 것에서 수행자는 오를 더욱 강조했다고 할수 있습니다.물론 오와 수는 불과분의 관계이지만 오를 강조하는 수행자는 깨달음의 경지 높은 수준의 득도 대하여 수행자로서 오를 중요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론의 깨달음은 오(悟)는 수(修)를 통하여 끝없는 수행속에서 깨달음의 지혜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돈오점수의 개념 구성에서 단 한번의 득도의 힘(돈오)이 직관과 살아있는 감정의 지혜의 도구가 아니라 끝없는 수행에서 오가 쌓이며(점수)그것이 돈오의 지혜작용의 이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돈오점수로 즉 깨달음으로 나타 난다면 여기서 오와 수에 대하여 어느것이 우선 이다고 말할수는 없지요
그럼으로 이론과 수행은 이성과 감성이 상대적 분리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 아닙니까?
직관과 감정은 남의 말을 들을수 있는 힘이며 보다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돈오점수라는 이성과 감성이 어우러지는 공부는 그야말로 인간을 존중하는 힘이 되겠지요
어쩌면 기존의 기의적이고 기표적인 이성의 오류에서 탈피하는 노력이 있어야 그 고통의 시간으로 해체와 비움이라는 새로운 미학적 직관이 마음에서 우러 나겠지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질로 회심하는 새로운 이성은 아닙니까?
인간은 배제 할수록 소외 될수록 고독 합니다.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적 관계에서 존재감을 느낄때 행복합니다.그럼으로 그 고독은 누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것이지요(마음의 주체로 보면)
그러나 그것을 탈피하기 위하여 대화의 소통이 단순히 커뮤니티적인 인터넷의 대화는 아니죠 그런 의미에서 진보블러그란 대화의 힘이 무한 하면서도 진보한 커뮤니니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 진보란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고 여기서 소통한적이 있습니다.그럼으로 진보란 역사적으로 앞으로 나아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봅니다.인간과 자연이 가장 행복해 질수있는 인간의 깨달음이 이성과 감성의 수준이 될 것이며 그것이 사회화 되는 것이 진보 이겠지요
-커뮤니티는 계속 이어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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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게 생각하시는 군요..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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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 커뮤니티는상담체와 대화체이다
듣는다,이해한다
인간을 위해서....
내가 상담이라는 생명없는 빈깡통을 차버렸을때
"왜이래요"
디지털의 커뮤니케어션이 아니라면
내가 커피를 마시고 종이컵을 던졌을때
"왜이래요...."
여러 반응의 현실의 커뮤니티가 액션화 되어서 나타 나겠지요
이것이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상담과 대화를 넘어서는 인간의 관계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보다 수동적인 커뮤니티로 인간의 관계가 만들어 진다는 겁니다.
"배워야 할 자유"는 상담의 기능이나 대화의 기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관계를 위한 풍부한 자료와 노력이 없이는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마빡을 치며 "돈오돈수(삶은 樂일까 修일까)!"
영 다른 내용으로 똑 같은 문장으로...말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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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궁금한것이 있는데요.. 저한테 뭐 원하는 것이 있나요?혹시나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