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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은 뒤늦게 80년대를 회상한다. 그는 신군부를 소환하고, 파묻고만 싶었던 (그리고 비경험자인 나는 감히 말할 수 없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끄집어낸다. 연출자가 불러내는 사건은 절묘하게, 혹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개인서사로서의 살인과 거대서사로서의 살인을 비교하고 대조한다.
약간 재미없는 법학적인 시선을 투영해보자. 법학에서 그나마 약간의 철학적 담론이 가능한 형사소송절차에 관한 이야기이다. 애초 수사를 통해 밝혀낸 사실이라는 것은, 도저히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한 연속의 총합인 사건을 잘라내고 재구성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봉준호가 무언가를 기억한다고 함은, 수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재구성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망각한다는 것이다. 서정주가 말하지 않은 2할, 침묵을 지켜야만 하는, 자갈로 입이 막힌 망각된 객체는 무엇인가?
살인이 영혼에게 주는 압도적인 경종 때문인가? 강간이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이 다소 천박한 탓일까? 분명 강간살인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봉준호는 살인만을 추억한다. 제목에서부터 강간은 배제되고, 첫 번째 용의자가 산에 올라가 범행 내용을 ‘자백’할 때도, 강간에 대한 기술은 거의 빠져있다. 우리는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애매한 그림자 같은 파편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을 뿐, 사건은 어느새 연쇄살인사건으로 뇌리에 못 박힌다.
입체적이지만 결코 이분법을 뛰어넘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시골형사(박두만, 송강호)와 서울형사(서태윤, 김상경)의 수사방법은 극적으로 대비된다. 적법절차를 거의 모두 무시하고(그렇다고 서울형사가 적법절차를 완벽하게 준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감에 의존해서 수사를 하는 시골형사는 이성과 논리, 과학에 의해 수사를 하려는 서울형사의 반대편이다. 연출자는 알게 모르게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무고’한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용의자를 누가 구출해 내는가? 서울형사.
이성과 논리, 감각과 감성의 이분법은 서양 철학사의 주된 쟁점임과 동시에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니는 것으로 판단된다. 남성이 본래적으로 이성적이고, 여성이 본래적으로 감성적이라기보다는, 남성이 이성을 독점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담론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감성을 주워 담을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렇다면, 연출자의 의식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시골형사가 여성성의 대변자라는 설정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바로 이 시골형사가 지목한 용의자들이야 말로 이 사건의 진범이다!
영화가 결코 답해주지 않는 물음이 있다. 왜 연쇄강간살인사건이 벌어졌는가? 단지 80년대이기 때문에? 대중은 애초 이 물음을 제기하지 않고, 봉준호도 물음에 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봉준호가 진실을 아예 은폐하지만은 않은 까닭에 영화 속에서도 진실을 유추할 수 있는 흔적들이 발견된다.
우선 첫 번째 용의자가 있다. 그는 젓가락질조차 혼자서 못하는 장애인인데도 사건 당일 피해자를 쫓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수사에 시달린다. 뒤에 밝혀지지만 그는 유력한 목격자였다. 목격자? 아니다. 용의자는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어떠한 구조의 노력도 하지 못한 채 사건을 지켜보기만 한 방관자이다. 수사기관에다가, 마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는 비겁한 방관자이다. 그가 이 연쇄강간살인사건의 첫 번째 범인이다.
두 번째 용의자가 있다. 그는 범행 현장에서 자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범인으로 무리하게 몰린다. 단지 변태일 뿐인데 온갖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변태일 뿐이었을까? 그는 괴물의 형태처럼 나타난 가부장제의 무의식 그 자체이다. 아내의 병간호에 적극적이며, 성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그 가면 아래에는 여성을 묶고 소유하고 강간하려는 욕망을 숨기고 있는, 바로 가부장제다. 모든 성범죄를 가능케 하는 형제애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조의식을 형상화한 모습이다. 두 번째 용의자야말로 범죄를 조직하고 조종하는 수괴, 상부구조이다.
서울형사는 이성과 논리로 두 용의자의 혐의를 풀어준다. 그는 첫 번째 용의자를 장애인으로, 두 번째 용의자를 변태로 재호명함으로써 방관자와 그 방관을 가능케 하는 무의식에게 더러운 면죄부를 안겨준다. 대신, 이성과 논리는 새로운 용의자를 소개한다. 관객은 새로운 용의자가 진짜 범인이라고 믿고 싶다. 세 번째 용의자는 이상할 정도로 강한 여성성을 지닌다. 그의 외모부터 말투, 고운 손, 작업장에서 ‘여고생이 연애편지 쓰듯’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의 모습. 전형적인 남성성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오히려 영화적 설정 때문에 범인이 남성일 수밖에 없기에, 남성의 몸을 빌린 여성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상황이라고 봐야겠다. 서울형사, ‘고귀한’ 이성과 논리가 제시한 대안은 가부장을 완벽하게 구제하는 것이며 어차피 피해자로 전락해버린 여성, 주체적인 말하기를 할 수 없는 여성에게 가해자로서의 책임까지 지워버리는 것이다. 고운 손과 감성적인 얼굴로 대변되는 세 번째 용의자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징후를 지니고 있고, 영화 또한 이를 암시하고 있지만, 그는 여성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80년대가 재구성되기 위해서는 서사가 닫히면 안 된다. 그래서 세 번째 용의자는 다시 이성과 과학의 이름하에 무죄를 선고받는다. 여기서 여성으로서의 세 번째 용의자가 구출되는 작용은 이성적, 역사적 반성의 효과에 불과해 보인다. 정말 이성과 과학이 그를 구했는가? 미국에서 보냈다는 종이는 오히려 서울형사로 하여금 그에 대한 살의를 일으키게 한다. 사실상 세 번째 용의자를 구해준 것은, 비에 젖은 무기력한 종이쪼가리가 아니라 그의 뒤에 버티고 서있던 터널이다. 그는 터널(자궁) 안으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이성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해진다. 나는 봉준호가 어디까지를 의식했으며 어디부터를 지각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연출자로서의 그가 담아낸 역사적 진실 안에 가면을 쓴 여성의 잔재를 찾는 작업이다.
잔재는, 봉준호가 등장시키는 수많은 이름 없는 ‘수사 도우미’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수사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어디선가 힌트를 주는 사람이 나타난다. 첫 번째 용의자의 경우, 시골형사의 부인과 부인에게 링거를 맞은 할머니가 단서를, 두 번째 용의자의 경우 역시 부인과 여자인 점쟁이가 단서를, 세 번째 용의자의 경우 여자 학생과 여자 교사와 여자 피해자, 그리고 여자순경이 나타나 약간씩의 단서를 제공하고 바로 퇴장한다. 오로지 수사의 진행을 위해 등장한 인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내레이션의 가능성을, 연출에 의해 소멸되기 전까지 비춰준다. 바로 가부장제 밑에서, 가부장제의 보조적인 역할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 역할을 맡으면서라도 존재하고 있음이, 그 존재 없이 남성은 주체성을 확립할 수 없음이, 보조로서의 여성을 타자화시키지 않는 한 남성의 주체가 없음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애초 열쇠는 시골형사가 쥐고 있다. 그는 아내와의 섹스를 고작 위안거리로 삼는 팔루스의 형상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면서도 반이성이라는 반주체성의 향유자이기도 하다. 엔딩신에서 여자 아이와 시골형사와의 대면은 그런 면에서 분열된 자아 간의 대화이기도 하다. 팔루스와 반이성의 대화 끝에, 관객을 응시하는 것은 팔루스다. 팔루스는 젠더를 봉인해버린 채, 강간을 망각으로 보내버리고 관객에게 오로지 살인의 추억만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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