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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아고라 이슈 청원] 촛불을 든 보통사람들이 직접 녹색당을 만듭시다

Daum

서명진행중 아고라에 바랍니다
보통사람들이 녹색당을 직접 만듭시다

 

여러분께서 참여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디서와서 어디로가고 있으며
지금 어디까지 와있습니까"
-- 2008년, 이렇게 좋은 날
보통사람들이 녹색당을 직접 만듭시다!

우리는 모두 안전하고 생명을 귀하게 여길줄 아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고싶습니다.

촛불문화제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의 좋은 생각들과
우리나라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나 정부와는
왜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요?

촛불문화제에 많은 국민들이 참여를 하면서
그 성과는 또 왜 민주당 손학규님과 대통령과의 회담이 되고
손학규님이 이명박대통령에게 '팅기는' 힘이 되는 걸까요?
그리고 촛불문화제가 몇몇 정당이나 국회의원들이 사람들에게 광고되는 자리로 이용되고 그런게 정치라고 언론에서 가르쳐주는대로 믿고
우리같은 사람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나요?

이명박정부의 폭력은, 우리들 내면의 비폭력 불복종의 자존감을
나약한 소시민의 두려움으로 느끼게 만들고,
국민주권의 민주주의 정신을 폭력시위라고 매도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기가막히는 노릇은 국민들과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듯,
앞에서 사과하고 뒤에서 폭력이라 매도하면서 국민의 뒤통수를 치는
전략전술을 방불케하는 태도입니다.

지금 국민들이 이명박정부에게 바라는 것은
말이나 전쟁때나 쓰는 심리전같은 선무방송이 아니라
“신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폭력에 맞고 다치고 쓰러지면서도
촛불을 들고 있는 시민들에게
“폭력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비폭력 시민불복종 만이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한국의 용기있는 정치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성정치인들은 오히려 촛불들의 동향에 따라
오락가락 하며 촛불들의 힘으로 자신들의 등원의 정당성과 명분을 통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촛불을 든 국민들이 어떻게 하나 정부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요즈음 농수산물 직거래가 유행인데,

그냥 이런 노력들이 곧장 촛불문화제를 실제로 만드는
보통사람들의 한마디가 정치가 되고 정부가 되는,
실제로 우리같은 사람들의 생활이 정말 조금씩 바뀌면 안되는 건가요?

'유통마진'을 빼고 군사독재시절부터 많은 국민들이 노력해서 얻은
민주주의를 그냥 보통사람들이 가져가면 안되나 하는 생각에서
이런 카페를 열고 보통사람들이 직접 만드는 녹색당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무슨무슨 정당을 만들 힘도 우리는 없습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퇴근해서 돌아오면 밥쑤셔 먹고
친구라도 만나면 독한 술 몇잔에 즐거운 마음도 되었다가
시체처럼 쓰러져 잠들기에도 빠듯한 우리에게
거창한 무엇을 할 시간이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 국가는, 정부는, 정치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가르치려만 들고
자꾸 우리들의 인생을 좌지우지 하려는 걸까요?

촛불문화제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하지만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을 보면
역설적으로 현실은 그렇지 않은건가 봅니다.

독일에서는 녹색당이라는 정당이 있어
환경파괴나 지구나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하고
정치를 한다고 합니다.

남의 나라에서 무언가를 베끼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국민 스스로가 만드는, 보통사람들이 시위나 해서
무슨무슨 선거때 기성정치인 표나 늘려 주는게 아니라
정말 아무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살기좋은 곳으로 만드는 주인공이 되는
그런 정치를 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위해
가난하고 배운것은 많지 않지만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한 사람이 되고 싶은 소박한 마음으로
무슨무슨 직책이나 명함이 없다고 무슨무슨 교수나 박사가 아니라고 무시당하지 않고 그 사람이 갖고있는 뜻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로 존중되는 그런
조그만 대화의 마당을 열어보고자

정치가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가 주인이 되어 주인공이 되어
이웃들과 함께 만드는 우리 동네, 우리 마을,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을
지금부터 말없이 시작해 보려고
거창한 간판을 걸고 한번 달려봅시다.

인터넷 녹색당
http://cafe.naver.com/greencommune
도우미 우리별

 

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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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단의 광장미사와 단식농성에 감사드립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광장미사와 단식농성에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25일 이후로 더욱 거세어지는 이명박정부의 폭력적 시위진압에

거리에 나와 행진을 하며 물대포를 맞으며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며

며칠을 고민하고 토론하였지만 그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명박정부의 폭력은, 우리들 내면의 비폭력 불복종의 자존감을

나약한 소시민의 두려움으로 느끼게 만들고,

국민주권의 민주주의 정신을 폭력시위라고 매도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기가막히는 노릇은 국민들과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듯,

앞에서 사과하고 뒤에서 폭력이라 매도하면서 국민의 뒤통수를 치는

전략전술을 방불케하는 태도입니다.

지금 국민들이 이명박정부에게 바라는 것은

말이나 전쟁때나 쓰는 심리전같은 선무방송이 아니라

“신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폭력에 맞고 다치고 쓰러지면서도

촛불을 들고 있는 시민들에게

“폭력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비폭력 시민불복종 만이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한국의 용기있는 정치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성정치인들은 오히려 촛불들의 동향에 따라

오락가락 하며 촛불들의 힘으로 자신들의 등원의 정당성과 명분을 통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촛불을 든 국민들이 어떻게 하나 정부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촛불은 안으로는 내면의 욕심을 불태우고,

밖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수단입니다.

저마다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여 지친 세상을 위로하고

서로에게 빛이 됩시다.”


위 정의구현사제단의 말씀에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며칠간의 목마른 기도 속에 위로같은 응답을 얻었습니다.

광장에서 비폭력 시민불복종의 거대한 촛불들이

서로서로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광장미사와 단식농성을 지지하며

여러분의 아름다운 촛불에 함께 하겠습니다.

서로서로에게 작지만 따뜻한 눈길로 위로와 용기를 나눕시다.


우리가 촛불을 들며 이웃들과 그 작은 불꽃을 나누었던 것처럼,

국민주권과 생명정치의 수많은 오솔길을 따라 갑니다.


2008년 7월 1일

인터넷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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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7.1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성명서 전문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마태복음 7장 15절)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민을 상대로 마구 저지르는

오늘의 폭력상과 거짓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분노합니다. 주권재민을 힘껏 외치는

시민들의 고뇌를 마음에 품고 오로지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사제들이 오늘까지

이렇다 할 의견표명과 행동 없이 침묵 중에 지냈으나 이제 그런 절제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국민이 그토록 간절하게 호소하건만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자진 굴복하여 문제의

쇠고기와 위험한 부속물 수입을 전면 허용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들끓는

국민여론을 제압하기 위해 몽둥이와 방패로 시민들을 패고 내려찍으며 무참히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로써 촛불에 담겼던 간곡한 뜻은 짓밟혔고 우리는 대통령과

정부의 존립근거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 그리고 한나라당의

교만과 무지를 탄식하면서 그들의 병든 양심을 교회의 이름으로 엄중하게

꾸짖고자 합니다. 아울러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사제의 양심에

따라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먼저 보수언론의 폐해를 지적합니다. 참여정부 시절 광우병의 위험성을 무섭게

따지고 들다가 현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의 절대 안전을 강변하는

조선·중앙·동아일보의 표변과 후안무치는 가히 경악할 일입니다. 정론직필의

본분의 버리고 이해득실에 따라 말을 뒤집는 언론의 실상이 널리 알려진 것은

만시지탄이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국가정책의 많은 부분에 대하여 국민을 속이고 있는 현실은 더욱 큰

불행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순진하다고 착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그의 궤적을 잘 알면서도 혹시 경제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지난 대선의 결과를 빚어낸 것뿐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기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금번 쇠고기 협상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도 울분을 터뜨릴 일이지만,

높이 받들고 깊이 새겨야 할 천심을 폭력으로 억누르는 정부의 교만한 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미국에 충성하려 드는 맹목적 사대주의도 딱한 일이거니와 오늘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재앙은 무엇보다도 돈을 위해 정신의 가치를

값싸게 여기는 정부의 경박한 물신숭배에서 비롯했음을 지적합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값싸고 질 좋은 외국산 쇠고기가 아니라 모두가

공생공락하는 드높은 자존감입니다.

 

국제적 망신을 일으킨 졸속협상이나마 정부의 주장대로 이에 복종하는 것이

한미FTA 체결 조건에 유리하고, 그래서 자유무역이 혹시 경제지수를 끌어올릴

것이라는 억측이 설령 옳다고 가정해도 그 결과는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양극화 현상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게 교회의 판단입니다. 결국 정부는

불행한 미래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공권력을 악용하여 국민의 통곡과 신음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복음 1장 5절)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까지 촛불을 지켰던 민심을 지지하고 격려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청정한 수도자들과 전국의 모든 교우들과 함께 무장경찰들의 폭력에 숭고한

촛불의 뜻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 드리고자 합니다. 정부는 원천봉쇄와 강경진압

그리고 오늘 아침에 벌어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압수수색과 체포 따위로 진실을

어둠에 가두려고 하겠지만 이런 모진 마음 때문에 국민이 받은 상처와 모욕은

더욱 깊어만 갈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대통령에게 호소합니다.

 

1. 국민은 너그럽습니다. 대통령은 우선 쇠고기 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 앞에

겸손하게 사죄를 청하는 뜻으로 장관 고시를 폐하고 쇠고기 전면 재협상을 선언하길 바랍니다.

 

2. 먼저 들으셔야합니다. 소통을 강조하는 대통령은 먼저 국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진실을 깊이 헤아린 다음 국민과의 대화에 나서길 바랍니다.

 

3. 국민은 현명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민 건강의 안전성과 이를 보증할 검역주권

입니다. 일부 언론이 쇠고기 문제를 친미와 반미, 진보와 보수의 이념갈등으로

몰아감으로써 핵심을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4. 과잉 폭력진압을 지시한 어청수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시위 중 연행된 사람들과

대책회의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십시오. 그리하여 존엄을 바라는 국민의 상처를

씻어주길 바랍니다.

 

5. 국민 여러분에게도 호소합니다. 촛불은 평화의 상징이며 기도의 무기이며 비폭력의

꽃입니다. 우리가 비폭력의 정신에 철저해야만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앙인에게 호소합니다. 촛불은 안으로는 내면의 욕심을 불태우고,

밖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수단입니다. 저마다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여 지친 세상을

위로하고 서로에게 빛이 됩시다.

 

2008년 6월 30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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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를 넘어서, 제레미 리프킨

쇠고기를 넘어서 

제레미 리프킨

《녹색평론》제5호 1992년 7-8월호  

 

 

현재 지구상에는 12억 8천만 마리의 소들이 있다. 소들은 지구 땅덩이의 거의 24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수억의 인간을 먹여살릴 수 있을 만큼의 곡물을 소비하고 있다. 소들의 무게를 모두 합하면 지구 전체 인구가 차지하는 무게를 능가한다. 축산업은 지구환경과 인간의 건강과 우리 문명의 경제적 안정성에 유례없는 위협이 되고 있다. 축산업은 세계의 굶주림과 오염과 삼림벌채와 사막화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며, 야생 생물의 멸종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짐승들은 엄청난 양의 메탄가스를 방출하는데, 이것은 지구온난화의 관건적 요인이다. 글자 그대로 축산업은 지구의 장래를 위협하고 있다.

 

  식량이냐 사료냐

 

  미국에서 지금 “쇠고기는 왕이다.” 평균적인 미국인은 한해에 65파운드의 쇠고기를 먹는다. 미국에서 십만 마리 정도의 소들이 스물네 시간마다 도살되고 있다. 전세계 쇠고기 생산량의 23퍼센트를 미국인들이 소비하고 있다.

 

  미국사람들이 쇠고기 소비에서 선두에 있지만 호주사람들도 과히 뒤떨어져 있지 않다. 서유럽 사람들의 쇠고기 소비는 미국사람들의 반쯤 되고, 일본사람들은 약 10퍼센트쯤 소비한다. 이러한 수치는 앞으로 10년간 극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세계의 이 특권적인 쇠고기클럽에 가입하는 일본사람들의 수가 자꾸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쇠고기값은 미국보다 네배나 비싸지만 1990년에 일본의 쇠고기 수요는 1965년 수준의 3.5배로 올랐다. 1990년에 뉴욕시보다도 도쿄에서 더욱 많은 맥도날드 햄버거가 팔렸다.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보는 이와 같은 쇠고기중독은 전지구적인 식량위기를 초래하였다. 오늘날 제1세계의 소비자들이 차돌박이 쇠고기를 먹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귀중한 곡물이 수억 마리 소들의 먹이로 이용되고 있다. 북쪽 나라들에서 사람들이 곡물로 길러진 쇠고기를 게걸스레 먹고 있는 동안 개발도상국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다. 곡물이 사람이 아니라 가축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대한, 그러나 거의 인식되어 있지 않은 문제 중의 하나이다.

 

  소와 기타 가축들은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3분의 1을 먹어치우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퍼센트 이상이 가축의 먹이로 제공된다. 이것은 농업의 역사에서 새로운 현상이다. 처음으로 소들이 방대한 양의 곡물을 먹게 된 것이다. 소들이 꼴이 아닌 곡물을 먹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번 세기 동안 일어난 일이지만 거의 아무런 논쟁 없이 이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일은 토지이용과 식량배분 문제에 어떤 다른 한 가지 요인보다도 더욱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코넬대학의 데이비드 피멘틀의 추정에 따르면, 미국에서 가축의 먹이를 완전히 풀로 바꾸면 1억 3천만 톤의 곡물이 절약되어 4억이 넘는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가축 대신에 인간을 먹이는 데 곡물을 이용한다면 십억 이상의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대부분 아이들인 4천만 내지 6천만명의 인간이 해마다 굶주림과 그에 관련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통계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1984년 에티오피아에서는 날마다 수천명의 사람이 기근으로 죽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에티오피아가 영국과 기타 유럽 국가들에 가축사료를 수출하기 위해서 농토의 일부를 아마씨와 목화씨와 평지씨 깻묵을 생산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별로 없다. 현재 제3세계 토지 수백만 에이커가 유럽의 가축사료를 생산하는 데 전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식량이냐 사료냐 하는 문제는 다가오는 수십년 동안 남북관계에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 십년 동안 세계인구가 거의 20퍼센트나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에서 세계 곡물생산의 삼분의 일이 소나 다른 가축들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은 세계적인 식량위기를 이미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죽음의 비계

 

  제3세계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곡물부족으로 굶주리고 있는 동안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수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심장마비와 뇌졸중과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질병들의 원인은 부분적으로 쇠고기의 과잉소비에 있는 것이다. 해마다 동물성 지방의 소비에 관련된 질병으로 죽는 사람들의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미국 공중위생국장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1987년에 사망한 2백 10만명의 미국인들 가운데 1백 50만명의 경우는 식사요인에 관련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포화지방의 과잉소비가 포함되어 있다.

 

  지금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미국에서 두번째로 흔한 종류의 암인 대장암이 고기소비와 관계있다고 한다. 10만이 넘는 대장암 사례들이 해마다 진단되고 있고, 1990년 한해만 해도 5만명 이상이 그 병으로 죽었다. 서른에서 쉰아홉살 사이에 있는 미국여성 88,751명에 대한 6년간에 걸친 어떤 연구에서 연구자들이 발견한 것은 날마다 고기를 먹는 여성들이 고기를 드물게 먹거나 혹은 전혀 안 먹는 여성들보다 대장암에 걸릴 가능성이 두배 반이라는 것이었다. 이 연구를 주관한 보스턴의 브리검여성병원의 월터 윌레트는 이렇게 말했다. “객관적으로 자료를 보면, 우리가 먹는 붉은 고기의 적당량은 영(零)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서구세계의 쇠고기문화 속에서 대장암이 발생하는 비율은 아시아나 개발도상세계의 비쇠고기문화의 약 열배이다.

 

  과학자들은 또 고기소비와 유방암을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미국여성 아홉명 가운데 한 사람은 언젠가는 유방암에 걸리게 된다. 1960년 이래 마흔네살 넘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방암 발생률은 해마다 2퍼센트씩 증가했다. 국립암연구소의 연구원들은 1백개의 동물실험으로부터 얻은 자료를 분석하여 ‘지방과 열량’이 유방암 발생위험을 높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연구에서 유방암으로 발전한 대부분의 여성은 평균적으로 “지방질에 출처를 둔 상대적으로 높은 열량을 일관되게” 소비하였다. 쇠고기나 다른 동물성 식품이 지방질 식사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지만, 미국과 같은 풍요한 나라에서 그것은 지방질 식사의 주요 요소이다.

 

  동물성 지방, 콜레스테롤과 인간의 질병 사이의 관련에 대하여 일찍이 수집된 아마도 가장 강력한 증거는 1990년 미국―중국 합동연구팀이 중국인의 식사습관과 건강에 관한 방대한 연구의 결과를 발표했을 때 나온 것일 것이다. 〈뉴욕타임스〉가 역학(疫學)의 ‘그랑프리’라고 말한 그 연구는 25개 성(省)에 걸친 69개의 군(郡)에서 8천명의 중국인의 식사습관을 추적한 것이었다.

 

  중국사람들은 미국사람들보다 20퍼센트나 더 많은 열량을 소비하는데, 미국사람들이 25퍼센트 더 뚱뚱하다. 그 까닭은 미국인의 식사에서 열량의 37퍼센트가 지방질에서 나오고 있는 반면에 중국농촌의 식사에서는 지방질은 총열량의 15퍼센트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서구식 식사에서 단백질의 70퍼센트가 동물성이고 나머지 30퍼센트가 식물성인 데 반해서 중국에서는 불과 11퍼센트만이 동물성이고 89퍼센트는 식물성이다.

 

  중국에 대한 이 연구는 최근의 많은 다른 연구들처럼 고기소비와 심장질환 및 암발생과의 높은 관련성을 보여주었다. 어떤 사례들에서는 동물성 지방이 아직 평균 식사의 15퍼센트를 채 차지하지 않고 있는 지역에서보다 쇠고기 문화권에서 심장병 발생률은 50배나 더 높게 나타나 있다.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은 글자 그대로 먹어서 죽는다. 쇠고기문화가 약속한 ‘행복한 삶’은 미국인들이 무절제한 습관으로 풍요의 질병에 시달리게 됨에 따라 하나의 잔인한 조크가 되고 말았다.

 

  열대우림의 파괴자들

 

  세계의 축산업이 인간건강에 끼치는 악영향은 막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가는 쇠고기문제의 오직 일부분일 뿐이다. 산업화된 축산단지도 심대한 환경위협을 제기하는데, 이것은 지구생태계의 존속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60년 이래 중앙아메리카 숲의 25퍼센트 이상이 목초지 조성을 위해 벌채되었다. 1970년대 말에는 중앙아메리카 전체 농토의 3분의 2를 소나 다른 가축들이 점유하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북미의 식탁으로 갈 운명에 있는 가축들이었다. 미국의 소비자들은 중앙아메리카로부터 수입되는 햄버거를 사먹음으로써 햄버거 하나마다 평균 5센트 정도를 절약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대신 환경에 대해 치르는 대가는 엄청난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수입되는 햄버거 하나를 위해 6평방야드의 숲이 발가벗겨져야 하는 것이다.

 

  중앙아메리카에서 방대한 축산단지를 하나 만들면 소수의 부유한 지주들과 그들의 정치적 동맹자들은 더 부유하게 되지만, 이 때문에 많은 농민이 빈궁하게 되고, 광범위한 사회불안과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중앙아메리카에서 농촌 가족의 반 이상이 ― 3천5백만의 사람들이 ― 현재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립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 반면에 토지귀족과 다국적기업들은 계속하여 토지점유를 확대하면서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을 목초지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파괴적인 방식 ― 삼림벌채, 토지집중, 농민분해 ― 은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걸쳐 되풀이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1987년 이후 3천7백만 에이커의 숲이 방목지의 추가를 위해 파괴되었다. 멕시코 환경운동가 가브리엘 과드리가 다음과 같이 경고했을 때 그는 자기의 많은 동포들의 느낌을 요약하였다. “우리는 소수의 힘있는 축산업자들의 이익을 위해 멕시코의 장래를 외국에 팔아먹고 있습니다.”

 

  축산과 사막화

 

  축산의 파괴적인 영향은 열대우림을 훨씬 넘어 지구의 광대한 땅덩이를 포함하는 데까지 미치고 있다. 가축은 이제 지구 전역에 걸친 사막화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오늘날 대략 13억 마리의 소들이 지구상에 남아있는 초원의 많은 식물들을 짓밟으며 벌거벗기고 있다. 소 한 마리는 한달에 9백 파운드의 식물을 먹어치운다. 흙을 붙들어매고, 물을 흡수하며, 영양분을 재순환시키는 데 필요한 식물들이 사라지면서 땅은 나날이 약해져 바람과 물에 쉽게 침식당한다. 그리고 가축은 땅을 또다른 방법으로 파괴하기도 한다. 짐승들의 강력한 발굽들이 평방인치당 24파운드의 압력으로 흙을 압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흙이 굳어지면 흙의 입자들 사이에 공기가 통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물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감소한다. 흙은 봄에 눈이 녹을 때 물을 받아들일 능력이 점점 없어지고, 급작스러운 홍수에 쉽사리 침식되고 만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전체 목초지의 60퍼센트 이상이 과도한 방목으로 파괴되었다.

 

  유엔의 추정에 따르면, 지구 땅덩이의 29퍼센트가 지금 ‘가볍거나 심각한 사막화’에 시달리고 있다. 약 8억 5천만의 사람들이 사막화의 위협을 받고 있는 땅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2억 3천만명 이상이 사는 땅은 사막화가 너무나 심각해진 탓에 생존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영양실조와 아사(餓死)의 전망이 높아져가고 있다.

 

  미국에서 소들은 서부의 많은 부분을 파괴하고 있다. 2백만 내지 3백만 마리의 소들이 현재 서부 11개 주의 공유지 수억 에이커에서 풀을 뜯고 있다. 이곳의 식육용 소들은 미국 전체 쇠고기 생산에서 미미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심각한 환경파괴라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유엔이 마련한 1991년의 한 보고에 따르면, 서부 목장의 4억 3천만 에이커 이상이 주로 과도한 방목의 결과로 25 내지 50퍼센트의 생산량 감소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필립 프래드킨은 《오더본》 잡지에 실린 글에서 이러한 위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는데, 이 위기는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가장 은밀히 숨겨져왔던 환경비밀에 속하는 것이다. “서부의 식물유형과 땅의 형태를 변경시키는 데 수많은 소들의 발굽과 입이 끼친 영향은 그 지역에서 이루어진 수리공사, 노천탄광, 발전소, 고속도로 건설, 구획분할 개발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큰 것이었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쇠고기의 기여

 

  곡물을 사료로 하는 축산단지는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세 개의 주요 가스 ― 메탄, 이산화탄소, 일산화질소 ― 를 방출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고, 다가오는 몇십년 동안 지구온난화에 더욱 큰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1987년에 대기 중에 추가된 이산화탄소량은 85억 톤이었는데, 이 가운데 3분의 2는 화석연료로 말미암은 것이다. 나머지 3분의 1은 삼림 및 초지를 불태우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식물은 광합성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흡수·저장한다. 식물이 죽거나 불태워질 때 저장되어 있던 탄소 ― 흔히 수백년이나 넘게 쌓여있던 ― 가 공기 중으로 다시 방출된다. 아마존 삼림 혼자만 그 나무들 속에 750억 톤의 탄소를 저장하고 있다. 목축장을 위해 나무들이 벗겨지고 불태워질 때 나무들은 엄청나게 방대한 규모의 이산화탄소를 공기 중에 뿜어낸다.

 

  그러나 목장을 만들기 위해 숲을 불태우는 것은 이야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상업 축산은 다른 방식으로도 지구온난화에 이바지한다. 고도로 기계화된 농업부문도 역시 상당한 양의 화석연료를 사용한다. 대부분 축우(蓄牛)로 구성되어 있는 가축의 사료를 위하여 미국의 총곡물생산의 70퍼센트가 이용되고 있는데, 사료를 생산하고 실어나르는 데 쓰여지는 연료는 이산화탄소 방출량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 미국에서 사료로 기른 1파운드의 쇠고기를 생산하는 데 1갤론의 가솔린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평균 네명으로 되어있는 한 가족의 연간 쇠고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260갤론 이상의 화석연료가 요구되는 것이다.

 

  게다가 소들이 먹는 사료용 곡물을 생산하는 데 석유화학 비료를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이 또한 온실효과의 원인이 되는 가스의 하나인 질소산화물을 뿜어낸다. 비료와 기타 다른 원천에서 나오는 질소산화물은 현재 지구온난화에 6퍼센트 정도의 책임이 있다.

 

  마지막으로, 소들 자신들이 강력한 온실효과 가스인 메탄을 뿜어낸다. 메탄은 이탄(泥炭)습지, 벼논, 매립장에서도 방출되지만 그 숫자가 늘어가는 소들이 지난 수십년간의 메탄가스 방출량 증가에 큰 책임이 있다. 전지구적인 온난화 경향을 초래하고 있는 가스들 가운데 18퍼센트를 메탄이 차지하고 있다.

 

  동물학대

 

  세계 축산업의 최종적인 희생자는 동물들 자신들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린 숫송아지들은 좀더 ‘순종적’으로 되고, 그 고기의 질을 개선하기 위하여 거세된다. 동물들이 서로 상처를 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쇠뿔의 뿌리를 태워버리는 화학약품이 사용된다. 이런 일이 마취도 하지 않고 이루어진다.

 

  송아지들은 어미소들과 함께 여섯달에서 열한달 동안 방목장에서 지내는 것이 허용되고, 그 이후에는 거대한 기계화된 사육장으로 옮겨져서 거기서 살이 찌고 도살되기를 기다린다. 미국의 주요 13개 쇠고기 생산 주(州)에 현재 4만2천개 정도의 사육장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2백개의 사육장에서 미국 전체 소의 거의 반을 먹이고 있다. 사육장은 일반적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는데 한 면을 따라 콘크리트로 된 먹이통이 딸려있다. 비교적 규모가 큰 많은 사육장에서 수천 마리의 소들이 굉장히 비좁은 공간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최소한의 시간 안에 최적의 몸무게를 얻기 위해서 사육 관리자들은 성장촉진 호르몬과 사료첨가물을 포함한 여러가지 약제들을 소들에게 투여한다. 단백동화 스테로이드제가 조그만 시한탄환의 형태로 동물들의 귀에 박힌다. 그러면 그 호르몬은 서서히 혈류 속으로 스며들어가서 두 시간에서 다섯 시간 간격으로 호르몬 수준을 증가시킨다. 소들은 에스트라디올, 테스토스테론, 프로게스테론 따위의 호르몬을 주입받는다. 호르몬들은 세포를 자극하여 여분의 단백질을 생산케 하고, 근육과 지방조직이 더 빨리 붙게 한다. 사육장에서 기르는 미국의 소 전체의 95퍼센트가 현재 성장촉진 호르몬을 투여받고 있다.

 

  전에는 사람들이 엄청난 양의 항생제를 투여하였는데, 그것은 동물들을 비좁고 오염된 우리나 사육장 속에 억지로 가둬놓고 살게 할 때 만연되는 질병을 막기 위한 것이다. 축산업자들은 소의 먹이 속에 항생제를 광범위하게 섞는 것을 중지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약들이 여전히 젖소들에게는 투여되고 있고, 젖소 고기는 미국에서 소비되는 쇠고기 전체의 거의 1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소비하는 고기에서 항생제 잔류물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은 인체가 항생제 효과에 저항력을 갖도록 만들며 그렇게 함으로써 좀더 유독한 계통의 박테리아에 쉽게 감염되게 만든다.

 

  거세되고, 온순해지고, 약물을 주입받으면서, 소들은 먹이통에서 옥수수와 사탕수수와 기타 곡물을 소비하면서 긴 시간을 보내는데, 그 곡물들은 온통 제초제로 절여진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제초제의 80퍼센트는 옥수수와 콩에 살포된다. 동물들이 이런 곡식들을 소비하고 난 다음에 그 제초제들은 동물의 몸에 축적되고, 그것은 또 쇠고기라는 형태로 소비자에게 옮겨진다. 미국 학술원의 국립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쇠고기는 지금 제초제 오염에 제1위이고, 전반적인 살충제 오염으로서는 제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살충제 오염으로 인한 가장 큰 발암 위협을 제기하고 있는 식품으로서 토마토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어떤 사육장에서는 현재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마분지와 신문지와 톱밥을 먹이에 첨가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다른 축산농장에서는 닭집과 돼지우리에서 거름을 긁어모아서 그것을 바로 소먹이에 첨가하기도 한다. 미국 농무성에 의하면 시멘트 가루가 장래에는 특히 매력적인 보충사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보통 사료보다도 30퍼센트나 빨리 체중이 불어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식품의약국(FDA) 관리들의 말을 들어보면, 어떤 사육장 운영자들은 비용을 줄이고 동물들을 더 빨리 살찌우기 위한 목적으로 산업폐수와 기름을 먹이에 섞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소의 몸무게를 최대한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사육되는 소들의 삶의 모든 국면이 하나하나씩 감시되고 통제되고 있다. 파리떼를 쫓느라고 소들이 몸을 움직임으로써 매일 반 파운드까지 몸무게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고도의 독성을 가진 살충제가 사육장 부근에 살포되는데, 오빌 쉘은 그의 책 《현대의 고기》에서 이 모양을 묘사하여 “우리와 때로는 그 안의 동물들이 독구름 속에 뒤덮여버린다”라고 쓰고 있다.

 

  이상적인 체중인 1,100파운드까지 살이 찐 다음에 소들은 거대한 트레일러트럭에 무리지어 실려가게 되는데, 트럭에서 소들은 조금도 움직일 공간도 없이 서로 부대끼며 참아야 한다. 도살장까지 가는 여행은 흔히 거칠고 야만적이어서 동물들이 트럭 안에서 쓰러지고, 그러고서는 짓밟혀서 다리와 목과 등과 골반이 깨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흔히 소들은 몇 시간 혹은 며칠에 걸쳐 아무런 휴식도 먹을 것도 없이, 대개는 물도 먹지 못하고 고속도로를 따라 수송된다. 여행의 끝에서 여전히 서있는 동물들은 도살장의 대기우리에 맡겨진다. 도중에 쓰러진 소들은 트럭에서 끌어내려지기를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 쓰러진 동물들은 흔히 엄청난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결코 안락사나 마취제가 주어지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그들의 시체는 쓸모가 없어지고 따라서 이윤에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일어서거나 걷지 못하고 대개 트레일러의 바닥에 큰대자로 드러누인 채로 이 불운한 동물들은 목이나 부러진 다리에 쇠사슬이 걸려 끌려서 트럭으로부터 램프로 옮겨져서, 도살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 도중에 죽는 동물들은 ‘시체더미’에 집어던져져서 쌓이게 된다.

 

  캔사스주 홀콤에 있는 아이오아 쇠고기처리공장 같은 좀더 현대적인 도살장들은 14에이커 남짓한 면적을 갖고 있다. 소들은 일렬로 도살장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공기총을 맞고 소들은 기절한다. 동물이 주저앉을 때 도살장 노동자가 재빨리 뒷다리의 발굽에 쇠사슬 하나를 건다. 그리고 동물은 기계적으로 마루에서 들어올려지게 되고, 몸이 뒤집혀진 채 걸려있게 된다. 피에 흠뻑 젖은 사람들이 길다란 칼을 가지고 황소의 목을 베는데, 칼날을 후두 속으로 깊이 1, 2초 동안 들이밀었다가 재빨리 칼을 거두면서 그 과정에 경동맥과 경정맥을 절단하는 것이다. 피가 용솟음치듯 터져나와 노동자들이나 장비가 피칠갑이 된다.

 

  죽은 동물은 기계화된 라인을 따라 움직여가면서 가죽이 벗겨지고, 목이 잘리며, 창자가 제거된다. 내장들이 제거되고 난 뒤에 전기톱으로 등뼈의 가운데가 절단되고, 꼬리가 잘려나간다. 동강난 시체는 따뜻한 물로 흠뻑 적신 다음 천에 싸서 냉장고로 보내는데, 24시간 후에 그것이 스테이크, 목정, 갈비, 양지머리와 같은 알아볼 수 있는 조각이 되게 톱질이 가해진다. 이 조각들은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30 내지 40개의 절단기를 통하여 최종적인 제품이 된다. 그리하여 깨끗하게 진공포장된 이 쇠고기 조각들은 슈퍼마켓으로 수송되고, 거기서 환하게 밝은 불이 켜진, 방부처리가 된 판매대에 전시되는 것이다.

 

  쇠고기를 넘어서

 

  우리의 나날의 식사에서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개인적인 결정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매우 파급효과가 큰 결정이다. 지금 수백만의 미국인과 유럽인들이 쇠고기를 졸업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쇠고기 소비를 줄이려는 개인적 선택을 하고 있는 중인데, 이것은 우리의 행성과 인간의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국에서 쇠고기 소비량은 지난 16년 동안 현저하게 떨어졌다. 1975년 일인당 연간 소비가 83파운드였는데 1990년에는 65파운드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다섯 대륙에 걸쳐 조직되어 있는 환경, 동물보호, 건강, 굶주림 및 개발을 위한 연락망인 ‘쇠고기 안 먹기 연합’은 모든 사람이 적어도 50퍼센트씩 쇠고기 소비를 줄이고 그 대신 곡식과 과일과 야채를 먹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돼지고기나 닭이나 기타 곡물을 사료로 하여 키운 짐승고기를 풍성하게 소비하는 식사는 쇠고기의 경우와 같은 여러가지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쇠고기를 대신하는 음식으로 고기 종류가 아닌 것들이 강조되는 것이다. 여전히 자기들의 식사에 얼마간의 쇠고기를 포함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엄격한 유기농법 기준 밑에서 인도적으로 길러진 소들한테서 얻는 고기를 사 먹도록 권장되고 있다.

 

  다가오는 여러 해 사이에 수백만의 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수백만의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먹이연쇄의 좀더 낮은 쪽에 속하는 것을 먹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할 것이다.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그 결과는 상업적 축산업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고, 우리 자신과 제3세계와 이 행성을 포함하는 전지구적인 건강이 증진될 것이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개인 식사의 변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긍정적 혜택은 엄청난 것이다. 곡물을 사료로 한 쇠고기를 제거하고, 먹이연쇄의 낮은 쪽을 먹을 때, 심장병과 뇌졸중과 암의 발생빈도는 극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수백만의 인간이 더 나은 건강을 즐기고, 더 오랜 삶을 누릴 것이다. 의료비용으로 쓰이는 수십억 달러가 절약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더 많은 농토와 식량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잠재적으로 주어질 것이다. 인간을 위하여 더 많은 곡식을 키울 수 있도록 토지를 해방시킨다면, 제3세계의 과밀도시들로부터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대규모의 인구이동이 시작될 것이다. 그동안 뿌리 뽑혀졌던 수백만의 농민들이 조상대대로 살아온 고향땅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러면 다시 한번 소규모의 생존농업을 일으켜서 땅으로부터 직접 자기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농민들에 대한 적절한 토지 재분배를 보장하기 위하여 다국적기업들과 개발도상국의 지배 엘리트들에게 정치적 압력이 집중적으로 가해져야 한다. 토지와 식량에 접근할 수 있게 될 때 가난한 사람들의 아이들은 현재와 같은 많은 질병의 희생자가 되지 않고 유아기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식사에서 쇠고기를 꾸준히 줄여나가면 모든 대륙에 지금 긴급히 필요한 자연회복이 수반되고 생태학적 르네상스가 이루어질 것이다.

 

  미국의 서부가 서서히 재생할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의 강물이 다시 흐를 것이며, 그 물은 대평원을 가로질러 손상된 풍경을 다시 살려놓을 것이다. 토착 야생화와 사철 푸른 풀들이 돋아나서 활짝 피면서 서부의 지평선을 가로질러 초록색 융단을 펼쳐놓을 것이다. 미루나무들이 다시 한번 평원에 그늘을 드리우고, 수천 마리의 본바닥 새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할 것이다. 강물과 샘들이 소생하고, 깨끗한 물에 송어와 다른 물고기를 도로 데리고 올 것이다. 몸짓이 큰 평원의 포유류들 ― 고라니, 말코손바닥사슴, 영양(羚羊), 큰뿔양 ― 이 다시 서부의 회복된 초원을 그들의 늘어난 숫자로 채울 것이다. 코요테, 늑대, 살쾡이, 쿠거, 스라소니들이 서부로 가만히 되돌아갈 것이다.

 

  중남미에서 축산업의 해체는 불도저를 할 일 없게 만들 것이고, 태고의 숲을 절단하고 있는 전기톱들의 귀에 익은 단조로운 소리를 침묵시킬 것이다. 아마존 숲을 태우는 수천개의 불은 꺼질 것이다. 한때 목장주들과 다국적기업들의 손아귀에서 틀림없이 멸종할 것으로 보였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種)의 식물과 곤충과 동물들은 구제될 것이다. 그리고 토착민들은 오랜 세월 지켜온 그들 나름의 생활방식을 계속하도록 허용될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사막화의 속도는 늦추어지고, 자연이 다시 살아나도록 허락할 것이다. 한때 사하라사막 이남에 풍부했던 야생생물들이 서서히 되돌아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풍요한 토착식물들이 되살아나서 반불모지의 대륙을 다시금 세계의 가장 풍성한 정원으로 되돌려놓을 것이다. 코끼리, 제브라, 코뿔소, 사자들이 다시금 툭 트인 사바나 대초원 위를 배회할 것이다.

 

  소들이 줄어들면 세계에 지금 남아있는 깨끗한 물의 공급원에 대한 압력이 완화될 것이며, 공기 중에 방출되는 온실효과 가스가 줄어들 것이다.

 

  쇠고기 문화를 넘어서는 것은 하나의 혁명적인 행동이다. 현대축산업을 해체하고 인류의 식탁에서 쇠고기 소비를 꾸준히 줄여나가는 일은 인간 정신의 전개에 새로운 장(章)을 예고한다. 쇠고기를 넘어서는 것으로써 인류는 새로운 의식을 향한 중대한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 .미국의 저명한 환경운동가이자 저술가. 《엔트로피》 등 많은 저서가 있다. 그의 책 《쇠고기를 넘어서 ― 축산문화의 번영과 쇠퇴》(1992)는 현대적 축산업의 문제를 다각적인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분석·정리함으로써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리프킨은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든, 지구생태계의 보전을 위해서든, 제3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든, 또는 동물학대를 막기 위해서든, 산업사회에 있어서 고기 중심의 식사습관은 하루빨리 극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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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에 대한 이명박정부의 폭력적인 탄압에 대한 성명

촛불에 대한 이명박정부의 폭력적인 탄압에 대한

인터넷 녹색당의 성명


더 이상 촛불을 켤 필요가 없다면, 그만 불을 꺼야겠습니다만,

이렇게 더욱 더 어둠이 짙어진다면

1980년대에서나 보던 정부의 모습이 되풀이 된다면

촛불을 스스로 내릴 수는 없습니다.

 

가녀린 하나의 촛불이 큰 강을 이루는 것은

자신의 초가 다했더라도 옆 사람에게 불을 건네고 다시 옆사람에게..

지역의 한계를 넘어, 정치색의 차이를 넘어

국민주권 생명평화로 향하는 마음을 품고 든 작은 촛불들이 있습니다.


민중이 지피고 있는 국민주권과 생명평화를 염원하는 거대한 물결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분노는,

살아있는 채로 매장된 수백만 닭, 오리와 우리의 탐욕으로 병들어 주저앉은 소들은,

그럴때가 아님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직한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정치가들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힘겨루기나 말싸움장난이 아니고

2010년에 당선시킬 지방의원의 숫자도 아니요

정파의 재구성을 통한 거대야당의 출현도 아닌,


자연과 민중 속에서 숨쉬고 약동하는, 살아있는 생명들의 정치적 표현체라면

단, 세 명이 모여서 시작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감히 그것을,

‘당’ 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지구와 문명, 사회와 우리, 그리고 나의 작은 일상과 내면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레 연결되는 변화의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것도 유머가득한 재기발랄함으로.

새로운 가치로 한 시대를 열고 있는 전국의 수많은 촛불여러분,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대는

다시 샘솟는 꿈과 새로운 열정으로 충만한 여러분들에 의해 열립니다.


겉으로의 촛불은 언제든 잦아들 수 있지만

한번 마음속에 지펴놓은 촛불은 우리의 삶을 비출 것입니다.


이 마음의 빛을 꺼트리지 않고 널리 전달하는 소명, 우리가 할 일이었음 좋겠습니다.


힘내세요. 

지금은 연약한 백 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 녹색당,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2008년 6월 27일    인터넷 녹색당  http://cafe.naver.com/greencomm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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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녹색당 만화성명서] 이명박정부의 폭력적 고시강행을 규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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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희망의 밥상 (1) 생명, 음식 그리고 흙

음식은 사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하며

식사는 깊은 영적(靈的) 체험과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다.

----  피터 파브, 조지 아머라고스,

<열정의 소비 : 먹는 것의 인류학>

 

...

영국 속담에 "관습이 인간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먹을거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인간에게서 기본적인 생리와

해부학적 구조, 유전자를 통해 물려받은 행동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먹는 것

뿐이지는 아닐까요.

 

...

따라서 진화의 과정을 겪는 동안 동물의 신체 구조와 행동은 자신에게 적합한

먹을거리를 취하려는 요구에 따라 결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도 먹을거리가 중요한 역할(먹을거리를 손에 넣고, 먹을 거리를

손에 넣고,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소비하는 행동까지 포함해서)을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

생태적 환경의 다양성과 인간 문화의 다양성을 고려한다면, 사는 지역에 따라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먹을거리를 먹고 사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사람의 입맛은 기본적으로 문화와 가족 생활, 그리고 시대에 의해 형성됩니다. 

 

...

제 땅을 파괴하는 나라는 국가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

그러나 전통적인 농법으로 땅을 쓰는 일이 사라지고 산업적인 농산업이 나타나면서

모든 게 변했습니다. 문제는 산업적인 농경이 농지 자체에 해를 끼치는 대표적인

예라는 것입니다. 옛날의 농부들은 농작물과 가축을 순환시키고 몇 년 만에 한 번씩

논밭을 쉬게 해 휴경지를 두었습니다. 이런 배려로 토지는 수백년 동안 농사를 지어도

비옥함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산업이 등장하면서 상식적인 토지

관리방법은 창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거대 기업들은 당장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고 미래 세대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점점 더 많은

토지가 화학 비료, 화학 살충제, 제초제, 살균제에 의해 조금씩 죽어 가고 있다.

 

제인구달의 <희망의 밥상> 중에서 p.33~82

( Harvest for Hope : A Guide to Mindful Eating, 제인 구달, 게리 매커보이, 게일 허드슨,

사이언스북스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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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세상바꾸기에 대한 생각들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세상바꾸기에 대한 생각들

: 새로운 생활 / 새로운 마을공동체 / 새로운 세상

                                                           우리별 초록별(2008.5.7)


1-1. 나는 누구입니까?


- 우리가 처음 ‘민주주의’, ‘노동자’, ‘민중’, ‘환경’, ‘노동해방’, ‘인간해방’, ‘자연’, ‘생명’ 같은 말들에 감동받던 순간들을 떠올려 봅니다. 왜 우리는 이런 험난하거나 순탄치 않은 길에 나서게 되었을까요?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 자신의 삶을 움직인 것은 (분노나 보복, 복수가 아니라) 못나고 연약하고 여린 것들에 대한 살림이나 사랑은 아니었을까요?


- 우리는 자기만을 생각해서는 삶의 목적을 결정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남이야 어찌되든 내 삶의 목표만을 위해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습니다. 나 자신의 행복과 우리의 ‘풍요로운 복지사회’를 위해 지구 어딘가에서 저임금노동과 환경파괴가 이루어진다면 이런 것이 정말 발전이고 진보일까요?


-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 능력의 한계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뼈저리게 느낍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 어찌보면 이 글의 제목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나는 혼자가 아니고 오로지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자각으로 모아지리라 믿고 있습니다.



1-2.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요?


-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활동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감동을 받고 있습니까?


- 우리 각자가 바라는 참된 삶이란 무엇입니까?


- 좋은 사회나 올바른 민주주의란 사회공동체의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잘 이해하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역할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인간혁명의 과정 그 자체가 아닐까요?


2. 지금 나 자신과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습니까?


- 그토록 자기헌신적이었던 사람들이 결국은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 그동안의 모든 어려움을 감내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날 운동의 현실은 아닌가요?

젊은이들의 사랑이 지배세력에 대한 날선 분노로 일어서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고 나이가 들수록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 운동의 모습은 아닐까요?

어떤 조직의 대표로 활동하는 분들은 연봉 6천만원입네 8천만원이네 하는 현실에서 어떤 활동가들은 월 몇십만원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해가며 결혼은 차마 엄두도 내지못하고 단체 사무실에서 기숙하는 생활들을 왜 하고 있을까요?


- ‘경제투쟁’ 혹은 ‘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한다’라는 취지아래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몰려다니는 군중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 우리 운동의 한 단면은 아닐까요?


- 민주화운동부터 따지더라도 우리 운동의 역사가 20년 이상 됩니다만, 그동안 의제를 스스로 만들기보다는 눈앞에 닥친 과제를 방어적으로 해결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어떤 계획도 없이 결국은 남는 것이 없는 그런 운동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성과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는 무엇이며 지금부터 국민들과 함께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하는 공감과 참여를 북돋는 문제에 대해서 비전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로지 저지하고 투쟁하고 반대하는 투쟁으로만 일관했다는, 그런 한계에 대한 평가가 각 운동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3. 우리 사회의 예측가능한 미래를 생각해 봅니다




4-1. 우리는 왜 보통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녹색당을 만드려고 합니까?


- 선거, 국가, 우리들의 삶


  ․ 지금의 선거제도가 우리에게 대안이 되어질 수 있나요?


  ․ 국가 : “우리도 대한민국에서 함께 살고 싶습니다”

   선거제도나 국가 자체가 갖는 가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 정책과 운영을 무시할 수 는 없습니다.


  ․ 압력이나 힘겨루기가 아니라, 이 사회에 꼭 필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당 그리고

   반대나 저항에 우리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기 보다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지금부터

   묵묵히 만들어 가는 작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정당을 만들고 싶습니다


- 국가 혹은 정부가 내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들의 운명을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좌지우지 하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 정치라는 것이 점점 이익집단의 이해라는 그릇된 상식으로 바뀌면서,

우리 자신과 가족, 이웃 그리고 사회공동체의 공동선(共同善)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4-2. 보통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녹색당은 무엇을 하는 공동체인가요?


- 그동안의 힘들었던 삶을 위로하고 치유받을 수 있는 공동체


- 이웃 그리고 세상과 사랑을 나누는 지혜를 나누는 공동체


- 보통사람들이 당원으로 가입하여 지역과 사회의 꼭 필요한 이웃으로 변해가는 작지만 능력있는 정당


- 젊은이들이 선뜻 자신의 오늘을 투자하여 자신의 삶의 사회적 의미와 운동을 이해하고 새로운 친구들과 이웃을 만날 수 있는 대안적 일터


- 대안적 사회에 대해서는 녹색평론이 주관한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 두 번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님의 <세계화에서 지역화로>라는 글의 생각을 참고로 할 수 있습니다.


 


 

[보충자료]

보통사람들이 직접 만드는 대안신당의

초록세상을 만드는 생각의 뿌리

                                                                                                                                         


[생각의 뿌리 1]

다양한 사람들과 생명들 그리고 환경과의 공존(共存)-공생(共生)-공영(共榮)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이념/노선/운동은 이미 우리 모두의 현실가능한 대안이 아닙니다


- (보통 ‘신자유주의’라고 말하는) 기득권을 이미 갖고 있는 세계적 독점(금융)자본의 시장독재를 통한, 사회적 약자들과 자연에 대한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대안일 수 없습니다.


- 자신이 속한 집단/계급/민족/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집단이나 계급, 다른 민족이나 국가 혹은 개인 그리고 다른 생명들이나 자연 등의 환경이 피해를 보거나 희생되거나 파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대안일 수 없습니다.


=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남은 판도라의 희망이란,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완전한 대안을 가진 사람이나 사상은 없으며,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즉, 공존 자체를 부정하는 이념/노선/운동이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의 복수를 이미 내포하고 있으므로 우리들의 실현가능한 대안이 아니며, 이 부족한 우리 모두가 함께 공존-공생-공영을 대화와 다양한 시도를 통해 진지하게 모색하려는 것 자체가 유일한 대안임을 인정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오로지 온전하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어떤 분들은 ‘공동체 독재’라고 느끼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저의 생각 속에는, 다른 사람 다른 생명들 그리고 주위 환경과 공존하려하지 않고 대중의 두려움과 분노를 움직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들기만 하는 민족주의/자본주의/공산주의/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초록생각 들이 혹시라도 있다면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보통사람들의 힘을 모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운동으로서의, 과정으로서의 혁명인 참된 사회변화"가

근대적 중앙집중적인 형태 즉, (효율성의 논리에 근거한) 조직된 다수의 힘에 의한 압력 정도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좀더 쉽게 설명하면,


현재 전세계적으로 보이는 '자본, 시장, 국가 혹은 집단이나 조직으로부터의 탈주/일탈'을 무리하게 단일한 조직으로 형성시키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그 에너지의 가능성을 오히려 '고정화' 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회주의(정당, 정당정치, 선거 등)의 틀 안에 무리하게 포괄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만들 정당은 가치/메시지에 의한 구심력으로 다양한 원심력과 균형을 이루는 것[양식화]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존에 동의한다면 다양한 국가/시장 심지어 공동체로부터의 탈주조차 보다 넓은 대화와 축제의 광장에서 그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의 뿌리 2]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는 자기자신과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위로에 소박하게 기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엑스트라나 주변인 취급을 받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다


- ‘대의 민주주의’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통치하기 위해서만 쓸모 있던 낡은 방법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운명을 다른 이들이 쥐락펴락 하도록 입 벌리고 바라보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한다며 완장차고 껍죽거리는 관료나 지식인이 아니라, 때가 되면 투표장에 나와 언론에서 가르쳐주는 후보에게 표나 찍으라는 문자메시지나 선거관리위원회의 홍보포스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지금 있는 그대로 존중하여 우리가 살며 거칠게나마 깨달은 개똥같은 지혜라 할지라도 귀담아 듣고, 이 팍팍한 인생길을 오손도손 함께 갈 수 있는 친구 한 명이 절실한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몇몇 사람들이 어떤 실험적인 체계(시스템)를 만들면 그 틀 속에 갇혀 관찰되고 감시되고 통제되고 조정 받는 대상이 아닙니다.


- 국가던 정당이던 누군가의 자극이나 투쟁, 폭로나 선동으로부터 스펀지처럼 그 생각을 강요받고 싶지 않습니다.


헤게모니(주도권)가 장악되면 그 헤게모니를 장악한 사람들이나 헤게모니에 대해 원심력을 갖는 사람들은 정말로 그 헤게모니의 가치들로 생활의 변화가 있나요?


= 인간의 아름다움은 분명, 팽팽한 젊음을 자랑하다가도 나이들면서 쭈그러져 썩어없어질 물질적 육체에 있지 않고, 타인과 다른 생명들 그리고 우리가 살고있는 이 자연과 다른 사람들과 생명에 대한 배려와 노동과 자기 헌신과 희생의 숭고한 영혼에 있습니다.



[생각의 뿌리 3]

혁명이 개인과 공동체의 생활의 변화를 의미한다면 그러한 꿈들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보통사람들 스스로가 지금 경험하기 시작하고 현실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 상상을 해 볼까요.

24살 유치원보육여선생님, 정읍 마을두레 농민, 대안학교에 다니는 13세 청소년, 초등학교 1학년 학생, 대구 무슨무슨 구의 경로당 오락부장 할머니가

정당의 리더쉽(지도력)네트워크의 멤버쉽(회원)이 되고

대학이나 각종 연구공동체의 연구자들이 각 부문별 노동자 생산자 소비자들과 함께

정책네트워크의 멤버쉽으로 활동하며

당의 모든 마디와 옹이에 필요한 소통 마다

온라인 공동체 네트워크로 모든 당원들이 필요할 때는

실시간 온라인대화나 다양한 의견 제안이 대화의 안건으로 토론될 수 있는 온라인게시판 등에 컴퓨터와 모바일 등을 이용하여 대화에 참여하거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며 발언기회를 갖는다면 우리는 이미 실질적인 참된 변화의 큰 물줄기를 이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실험들은 지금 당장 다양한 영역에서 도입되어 성장하고 성숙되어야 하고

우선 보통사람들이 만드는 자신의 정당의 당원들을 중심으로 함께 훈련하고 스스로 단련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실질적인 과정이며,

일순간에 하나의 사건으로 도래한다고 잘못 이해되었던,

"운동으로서의 혁명, 참된 사회변화"입니다.


저는 위에 나열한 분들이 모든 영역에서 지금 당장 참여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도입 초기에는 거짓말이거나 쇼인 줄 알고 긴가민가하며 참여하던

몇몇 평당원들의 성공사례를 보게 되면서 그 참여의 폭은 보다 넓어지리라고 봅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욱 경계해야할 태도는,

평당원이나 노동자 민중 보통사람들에게로의 권력이동을 먼 미래의 혁명의 날에나 가능하고

지금은 자본가들이랑 싸워야 하니까 정치가들을 강력한 권한을 갖는 지도부관료로 인정하라는 식의 반(反)정립적이며 자기모순적인 혁명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혁이나 혁명 혹은 참된 사회변화가 아름다운 것은

지금 우리 자신의 생활을 진정으로 유쾌한 기쁨으로 바꾼다는 점입니다.


한 지역의 공동체의 실험과 모색들이, 현실 자본주의 사회 속에 어떤 파라다이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몬드라곤 공동체 등의 경험에서 한계를 분명히 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공동체에서의 모색이 의미를 갖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아름다움을,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 자기 자신의 생활의 변화를 통해 배우고 문제점을 깨닫고 성숙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즉, 과정이 목적을 위배하지 않도록 그 과정 자체가 목적이 갖는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그 본래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뿌리 4]

상식을 갖고 있는 보통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상식적 대안/정책/노선만이 보통사람들을 정치와 정당 그리고 사회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저는 제 글에 앞서 제출된 김현우님의 글을 읽으며 보통사람들의 대중정당을 만드는데 그 모든 것이 준비되는 것이 중요할까 반문해 보았습니다. 오히려 상식적인 정치과제들이 대중정당의 강령이나 정책이 되어야 실질적으로 보통사람들이 이 대화에 참여할 여백이 생긴다고 봅니다.


물론 섬세한 이론적 배경이나 사회구조에 대한 해석과 설계도는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정당 내의 보다 전문적인 정책 이론 연구자들에 의해 당의 다양한 언로들을 통해 논의되고 검토되어 지면서 동시에 보다 치밀하게 준비되는 상식적인 대중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표와 실현방법들에 대한 단순하고 상식적인 정치가 당원들과 국민들에게 대안정당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당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리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태여 진보라는 말을 빌어 이러한 생각을 표현하자면

“진보는 복잡한 사회를 보다 단순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네 가지 생각의 뿌리는, 누구와 함께 <보통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녹색당>을 만들며 어떤 초록세상을 일구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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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녹색당 만화성명서] 그렇게 말로 해결될수있는거라면 촛불을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로 해결될수있는거라면 촛불을 들지도 않았습니다"
--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기자회견에 부쳐(2008.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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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들의 촛불혁명은 계속됩니다] 촛불문화제 작전타임 (1)

이 빗속을 지키며 촛불을 든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 인터넷의 공간을 여기저기 건너뛰며 다니며 밤 잠 설치며 다른 분들의 글을 읽어가며

생각의 힘을 키워가고 소식을 퍼다 나르거나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계신

네티즌 여러분께 박수를 보냅니다.

운동권이니 배후세력이니 하는 온갖 무시와 악선동에도 묵묵히 하나의 촛불이 되어

촛불문화제 곳곳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 활동가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한국에서 이제 보통사람들이 직접 만드는 녹색당 같은 정당 하나쯤은 필요한 때가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국민들과 나누고 있는 단체의 상근자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무실에서 7월에 있는 회원총회 준비를 하다가 퇴근 때가 되면 부리나케 집 근처

시장으로 달려가, 2개월이 갓 지난 아기와 출산후 다리를 다쳐 집에만 있는 아내와 함께

먹을 저녁식사를 위한 찬거리를 이것저것 사갖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요즈음 저의 일상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빗속에도 지키고 있는 촛불광장은, 1주일에 한번? 제가 몸담고 있는 단체에서

가기로 한 날에나 저는 참여하고 있습니다. 촛불소녀들이나 청소년분들을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뉴스라도 귀기울여 듣고 인터넷 게시판에 댓글이라도 열심히 달려고

하는 것은, 모두 작은 마음이라도 보태고자 하는 한마음이리라 믿습니다.

이 글도 우리 모두가 우정을 나누며 지혜를 모아가는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될까하여

적어보았습니다.


< 촛불집회 방향 논쟁에 앞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있는 것은 >


대책회의의 국민대토론회 실천방안제안게시판이 뜨겁습니다. 촛불문화제에 대해서

대책회의가 확실한 지도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에서 지도부가 되려하지 마라는 의견,

정권퇴진으로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견에서부터 하나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 국민투표에서부터 국민소환제까지, 노동계의 총파업이

합류되어 고맙다는 의견에서 촛불문화제가 변질될까하는 우려까지.


우리 가운데 이 촛불문화제가 어떻게 해결될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거리로 나왔던 어린 아가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쯤, 2008년부터

시작된 이 촛불혁명에 참여하여 나는 무엇을 하였고 나 자신의 생활은 이때부터 무엇이

변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는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무슨무슨 정당의 국회의원 같은 정치가들이 모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람보나 터미네이터

같은 강력한 무력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레닌이나

체게바라 같은 혁명가들이 모인 것도 아닙니다. 청소년들로부터 시작하여 보통사람들이

들고 있는 이 촛불들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어보이던 이명박정부와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꾸만 자꾸만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진실을 말하는 보통사람들 자신의 대화

이 촛불문화제의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잘 깨우쳐 왔던 것처럼, 그늘지고 낮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작은 목소리에 조금더 귀기울여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상대방도 눈물배인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요?

함께 하나하나의 촛불이 되는 과정 가운데 우리들 서로서로에 대한 믿음이 커나가는

가운데 지혜도 커져나가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 무수한 촛불의 씨앗을 우리 자신과 온 국민의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심으려고

합니다. 각자 자기자신이 짊어진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오늘 당신의 씨앗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씨앗은 어디에 뿌려야, 어떻게 해야 그 씨앗이

땅에 심어져 열배 백배로 될까요? 함께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대통령과 정부의 독선적인 지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2008년

시작된 촛불혁명이 이미 성취한 첫 번째 승리입니다. 모두 함께 기운냅시다^^;;


인터넷 녹색당

http://cafe.naver.com/greencommune

도우미 우리별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타 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마태복음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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