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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즐김..

조선 건국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혁명>>(김탁환 지음,  민음사, 2014) 중 제2권에서 나온 내용 중에서 발췌함(69~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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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능선을 탔다. 한 달 전 산불이 난 탓에 검은 재가 그득했다. 불바람을 피하지 못한 토끼며 노루며 멧돼지들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일흔 살을 넘김, 삼옹(森翁)으로 통하는 늙은이만 능선을 바삐 오갔다. 그가 과연 능선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점심때 황소를 잃고 곡을 하는 농부의 집에서 나오다가 삼옹을 발견하고 손목을 쥐었다. 

"매일 능선에 가서 뭘 하오?" 

삼옹이 천으로 덮인 지게를 고쳐 메곤 답했다. 

"궁금하면 따르십시오." 

비탈로 접어들자마자 검은 재들이 풀풀 날리며 신발과 바지를 더럽혔다. 삼옹은 무거운 지게를 지고도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재가 전혀 흩날리지 않았다. 능선에 오르니 어제까지 삼옹이 심어 놓은 어린 나무들이 보였다. 홀로 이곳까지 와서 나무를 심은 것이다. 삼옹이 지게를 내리고 천을 걷었다. 오늘 심을 어린 나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바위 밑에 숨겨 둔 삽과 괭이를 가져와선 어린 나무 한 묶음과 함께 내밀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삼옹을 따라 허리를 숙인 채 나무만 심었다. 삼옹은 때때로 사러졌다가 나타났다. 물지게를 지고 계곡까지 내려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방금 심은 나무에 물을 그득 부어 주려고 열 번도 넘게 비탈을 오르내렸다. 준비해 간 나무를 모두 심은 뒤에 내가 물었다. 

"그대 땅이오?" 

"아닙니다. 여긴 농사도 짓지 못하니, 누가 가지려고 탐을 낼 곳이 아니지요." 

"한데 왜 나무를 가져와서 심는 게요?" 

"움직이는 나무들이 좋아서입니다. 불이 난 후론 능선이 너무 고요합니다." 

"나무들이 움직인다고 했소? 나무들이 어떻게 움직인다는 게요? 움직이지 못하기에 불이 나도 달아나지 못하고 모조리 불타 버린 게 아니오?" 

삼옹은 하산길에 나를 데리고 잠시 참나무 숲으로 갔다. 불길이 미치지 않은 숲은 그림자가 짙고 시원했다. 삼옹이 턱을 들며 말했다. 

"잘 보십시오. 나무들이 얼마나 신나게 움직이는지." 

산바람이 불어내렸다. 가지가 흔들리면서 잎이 덩달아 춤을 추었다. 어린 나무들은 줄기까지 휘청대기도 했다. 내가 따져 물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지 않소? 나무는 다만 흔들릴 뿐이고." 

"바람도 움직이긴 하지요. 하지만 나무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바람을 만나 춤출 기회가 없었을 겁니다. 사람이나 들짐승들은 대부분 좌우로 움직이지만 나무는 위아래로 움직입니다. 이 어린 나무가 어떻게 저와 같이 크고 긴 나무로 자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자세히 살피지 않아서 몰랐을 뿐이지, 나무는 매일매일 움직입니다. 우선 하늘을 향하여 쑥쑥 올라가지요. 줄기를 곧게 뻗고, 또한 그 줄기에서 가지를 내보냅니다." 

"아래로 움직인다는 건 무슨 말이오?" 

"저 땅속에서 나무가 하는 일을 떠오려 보십시오. 나무의 뿌리는 깊은 곳을 향햐여 파고들어 갑니다. 뿌리가 깊이 내려갈수록 높이 솟구치는 법이지요. 이래도 나무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솔직히 잘못을 인정했다. 

"내 생각이 짧았소. 한데 나무의 줄기와 가지가 허공으로 올라가는 것이야 눈대중으로 살피며 즐길 수 있으나, 그 뿌리가 땅으로 파고드는 것은 흙을 덜어 내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렵지 않소? 아래로 향한 움직임은 어떻게 즐긴다는 게요?" 

"눈으로 꼭 봐야만 즐기는 건 아닙니다. 줄기의 굵기와 길이, 또 가지의 벌어진 꼴과 잎의 모양을 세세히 살피며, 뿌리가 얼마나 넓은 땅을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지요. 위가 아름다우려면 아래가 튼튼해야 합니다. 아래가 건강하지 않고는 햇빛이 아무리 좋아도 나무는 썩어 부러지고 맙니다." 

삼옹이 서둘러 숲을 내려왔다. 나는 그의 빈 지게를 쳐다보며, 뿌리를 백성에 빗대어 보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는다고 즐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을 되뇌며 농부의 집으로 삼옹과 함께 들어갔다. 곡소리가 어느새 노랫가락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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