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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 투쟁에 관한 단상...

서울의 모 대학 총장이 일명 <빵장>으로 불리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그 총장이 <더 맛있는 빵을 먹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면서,

내년도 등록금을 2~3배 정도 올려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란다.

물론 그 이후에 해명을 했단다. <단과대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려면 등록금을 그 정도로 올려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뭐,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시대가 천박하니까 교육자라는 사람도 입이 경박해지고 천박해지는가부다.

맑스가 한 말이 절실하게 생각난다.

<교육자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육자를 누가 교육을 시킬 것인가?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학생들이다.

학생들의 <힘>이 없으니까 즉흥적으로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힘이 있었다면 저런 식으로 교육자가 천박함을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교육자가 천박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책임이 크다 할 수 있겠다.

 

90년대 이후로 줄기차게 대학 사회의 중요한 이슈 중이 하나가 된 것이 바로 <등록금 인상> 문제이다.

학교는 끊임없이 인상하려고 하고, 학생들은 인하하려는 저항을 계속 해 왔다.

그러나 등록금은 학교가 마음 먹은대로 계속 인상되어 왔고,

학생들의 저항은 별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것은 곧 학생 운동권의 불신을 넘어서서 학생회 자체에 대한 불신,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공부이자 활동인 <자치>에 대한 무관심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자치는 학생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러고서는 오로지 취업, 취직만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

대학은 이제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불모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

대학이라는 횃불이 점점 더 사그러지고 있다.

 

그러다고 하더라도 아주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여전히 투쟁의 불씨는 남아 있다.

그 불씨가 바로 등록금 인하 투쟁이다.

지금까지의 등록금 투쟁은 대학 재단과 총장에게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등록금을 인하해 달라는 식이었다고 본다.

이때 대학의 답변 역시 먹고 살기 힘드니까, 다시 말해 자꾸 물가가 오르니까 등록금을 올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 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똑같은 전제를 깔고 있는데, 누가 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여 싸움의 승패를 가를 수가 있을까?

그러니 이 투쟁은 아무런 진전도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는, 김 빠진 사이다와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칼자루를 대학 재단이 쥐고 있으니 싸움을 오래 끌면 끌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학생들 쪽이다.

그러니 이 싸움의 승리는 결국 재단이 하게 된다.

등록금 인하 투쟁을 한다고 대학 본관(행정관), 총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한다고 해도 학생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싸움의 승자를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싸움은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늘 항상 투쟁의 방식은 이런 식이었음을 학생들은 보아 왔다.

학생회는 학교에 선전포고를 한 다음에 말싸움 몇 번 하고 서명을 받고는 더 이상 무엇을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전술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학생회, 학생운동 진영의 상상력의 빈곤... 이것은 교육자의 천박함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단순히 등록금만 인하하자고 하는 투쟁은 이제 안 하느니만 못한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안 하자니 마땅히 할 사업이 없고, 하자니 이미 결판난 싸움이고, 또 학생들한테 곱지 않은 눈길을 받을 테고.

 

<등록금 투쟁은  졸업 이수 학점을 대폭 낮추는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

 

먼저 등록금 투쟁은 학생들의 관심과 주체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

이 말은 아주 진부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부하다고 생각되는 이 말 속에 진리가 있다.

진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의 관심과 주체적인 참여가 가능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학생들이 현재 수준에서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학생들은 과중한 노동, 즉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재미 없는 공부와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공부에 지쳐 있다.

그래서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너무도 필요로 한다.

그들의 입에서는 <어휴~~! 힘들어!> 하는 소리가 무의식중에 흘러 나온다.

속된 말로 똥 누고 밑 닦을 틈도 없는 것이 학생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학생들은 정말로 약간이라도 인간적인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재미 있는 대학생활을 원한다.

학기 중엔 잠도 맘 편히 실컷 자볼 수도 없다.

시험과 레포트에 치여 일주일에 삼사 일은 거의 밤을 새다시피한다.

(잠 좀 자자라는 말은 촛불시위를 당긴 여고3학년의 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대학생들 전체의 입 속에서 신음소리인 듯이 나오는 말일 것이다.)

어느 딱한 책상물림들이 한국 대학생들은 공부를 안 한다고 했던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고3보다도 더 빡빡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한국의 대학생들이다.  

 

친구들과 마음 편히 영화 한편, 연극 한편 등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

그러한 여유를 누리고 싶지만, 거의 대부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럴 시간에 토익 한자라도 더 공부해야 하고,

A+ 학점을 맞기 위한 공부를 한자라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렴풋이 자기가 꿈꾸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어하지만,

그러한 것을 할 시간이 없다.

늘 해야 하는 것의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도 잘 모르게 된다.

그냥 그렇게 떠밀려 대학을 떠나게 된다.

대학생들은 이러한 것을 대단히 두려워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하면서 받아들인다.

 

학생들의 공부라는 노동의 강도를 완화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이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완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이러한 노동 강도의 완화 투쟁은 졸업을 위한 이수 학점을 대폭 낮추어야 하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절반 이상으로 낮추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인간다운 대학생활을 위한 자유시간을 쟁취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시간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즉 졸업 이수 학점을 절반으로 낮추는 투쟁을 어떻게 등록금 투쟁과 연결시킬 것인가?

학교 측의 경제 논리를 역이용하면 된다고 본다.

학교 측의 논리는 대체로 등록금 인상 요인이 일반적으로 물가 상승이고, 이러한 물가 상승이 인건비의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등록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인건비의 상승이 등록금 상승의 요인이라는 것이다(그렇지만 대학 교육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시간강사의 경우 강사료의 인상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거의 20년간 강사료의 인상율은 그간의 물가 상승율에 비하면 거의 10분의 1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인건비를 낮추면 등록금을 인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졸업 이수 학점을 낮추어서 인건비를 절감하면 된다. 다시 말해서 졸업 이수 학점을 절반으로 낮춘다는 것은 그 학점에 해당하는 과목 또는 강좌를 줄인다는 것이고, 이는 곧 그 과목 또는 강좌를 담당하는 교강사를 줄이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등록금 인하 요인을 학교 측의 경제 논리를 이용하여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었을 때 당장 생존에 지장을 받는 이는 나 같은 시간강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 보장의 책임은 학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부 및 자본에게 있다. 그러므로 교강사들의 생존 보장은 학생들의 노동 강도 강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부 및 자본에 대해 요구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요구 투쟁을 할 때 학생들은 기꺼이 연대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학교 측에 공을 넘겨 버리면 학교는 분명히 <졸업 이수 학점을 낮추는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 의지의 문제이다>라고 하면서 비껴가려고 할 것이다.

학교의 답은 분명히 맞는 답이다.

사실상 졸업 이수 학점 감소 문제는 개별 학교에서 투쟁할 사안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 전체 대학생의 문제로서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답게 공부하기 위해, 즉 과도한 노동강도의 공부, 그리하여 재미 없게 된 공부의 양을 대폭 줄이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 촛불시위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학생들은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지난 번 촛불시위는 여고3학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이제는 좀더 구체적이고 절실한 삶의 문제인 노동강도의 완화로서의 졸업 이수 대폭 감소를 위한 촛불시위는 대학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충분히 시작될 수 있으리라 본다.

대학 안에 갇혀 있던 대학, 외부와 소통이 단절된 대학이 아니라 사통발달의 거리 광장의 대학,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한 대학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해 와서 발표하고 토론하며, 또한 서로 격려해 가면서 공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듦으로써 스스로 대학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대학 만듦은 자연스럽게 대학 안에 갇힌 대학에 대한 동맹 휴업으로 나타날 것이고, 휴학 투쟁으로 나타날 것이고, 졸업 연기 투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은 서서히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자본은 자기 입맛대로 노동력을 공급 받을 수 없을 텐데, 졸업하는 학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대학은 더 이상 대학에 갇힌 대학이 아니라 사통발달의 광장의 대학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할 커리큘럼을 만들기 시작하고, 이 커리큘럼대로 공부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 공부한 것을 발표하고 토론하며 서로 격려해 가는 공부의 장, 축제의 장, 소통의 장, 정치의 장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장은 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릴 것인데, 이는 기존의 축제와는 전혀 다른 학생들 스스로를 생산해 내는

생산력 발전의 축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축제는 곧 학생들 자신의 코뮌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것은 곧 등록금 인하가 아니라 대학의 무상 교육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아가 대학 입시제도도 폐지될 것이고, 누구든지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대학에 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학의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좀 더 생각이 구체화되는 대로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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