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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22/03/21
    메모 17.
    곰탱이
  2. 2022/01/28
    메모 16.
    곰탱이
  3. 2021/12/13
    내 딸랑 하나뿐인 선배 00형..(2)
    곰탱이
  4. 2021/12/02
    어린아이들-백석 시
    곰탱이
  5. 2021/12/02
    제3인공위성-백석 시
    곰탱이
  6. 2021/09/18
    메모15.
    곰탱이
  7. 2021/09/18
    메모14.
    곰탱이
  8. 2021/09/18
    메모13.
    곰탱이
  9. 2021/09/18
    메모12.
    곰탱이
  10. 2021/08/28
    그리운 산동네 의풍리.
    곰탱이

메모 17.

부르주아 사회(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치 체제는 근본적으로 대의제이다. 대의제는 신적인 존재인 ‘국가’(그리고 이 국가는 추상적인 개별적 국민과 일치한다. 이는 근대 이후의 개별적 개인들이 신의 이성을 공유함으로써 신의 뜻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신과 대등하게 독대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의 뜻과 의지를 대신할 매개자(또는 대리자, agent)로서의 ‘지배계급’의 신분을 호명하는 것이다.

 

대리자로서의 지배계급은 국가의 대리자이면서도 추상적인 국민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적인 국민은 ‘현실적으로’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에 사로잡혀서 아직 ‘신적인’ 보편성을 현실화시키지 못한 ‘시민사회’의 일원일 뿐이다. 대의제에 의해 호명된 지배계급은 현실적인 국민을 신적인 존재의 의지와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계몽한다. 그런데 이 계몽은 이중적인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현실적인 국민의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국가에 요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보편적인 의지와 뜻을 현실적인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 계몽을 통해 시민사회의 일원이었던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국가의 보편적인 의지와 뜻과 일치시키면서 시민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을 무화시키고 자신의 이익과 일치되는 한에서만 이러한 이익을 충족시킨다.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에 매몰돼 있는 현실적인 국민을 자신의 이익과 일치시키고 또한 이를 국가의 의지와 뜻으로 일치시키는 지배계급은 중세시대의 ‘사제’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는 선거를 통해 호명되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 사회에서 호명된다는 차이이다. 그러나 이 차이도 형식적인 요소인 선거를 빼고 나면 하등 다를 게 없다.

 

우리는 흔히 대의제에 기반한 대의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의미로, 또는 대체될 수 있는 것의 의미로 직접 민주주의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의 민주주의나 직접 민주주의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왜냐하면 신적인 존재인 국가의 대리자를 ‘선거’를 통해 호명하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나 직접 민주주의라는 두 항을 넘어서는 것은 ‘만장일치’이다. 만장일치는 부르주아 식의 (보통)선거를 통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선거’ 자체에는 이미 ‘소수에 대한 배제’와 ‘소수에 대한 다수의 복종의 강요’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거는 시민사회의 개별적인 집단적인 이해관계(집단적 이기주의)의 충돌의 장이며, 특수한 이해가 보편적인 이해로 세탁되는 장의 이데올로기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개인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하게 개별적이고 원자화된 개인을 근본적인 전제를 깔고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은 개별적 개인의 대립항으로서의 ‘집단적 또는 공동체적’ 개인이 아니라 이 대립된 두 항의 개인을 넘어서는 초월론적인 개인으로서의 ‘사회적’ 개인이다. 사회적 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개인이다. 그런데 자기가 하고 싶다는 욕구는 단순히 감각적이고 즉자적인, 즉 개별적 개인 또는 집단적 개인의 이해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개별적인, 특수한 또는 일반적인 욕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즉자대자적인 욕구, 다시 말해서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을 결코 수단으로만 다루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도 다루라’는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욕구이다.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욕구는 맑스에게서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하는 사회”를 생산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리고 ‘계급의식적’ 욕구이다. 이 욕구는 자기 자신을 ‘새로운 인간’으로 생산하고자 하는 생산력을 총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욕구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만장일치이며, 이 만장일치를 ‘의식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사회가 사회주의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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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6.

데카르트의 의심은 맑스의 계급투쟁과 연결되고, 데카르트의 생각은 계급의식과 연결된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생각은 맑스의 생산 개념과 연결된다.

데카르트의 생각은 의심하는 나에 의한 실천활동(계급투쟁)의 생산물이며, 생산력이다.

그러므로 생산 또는 생산력은 기존의 경험론(유물론)-합리론(관념론)의 관계구조를 넘어섬(해체함)과 동시에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 방식을 의식적으로 창조해내는(혁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천은 해체와 창조를 동시에 내포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 역시 규정되지 않은 것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관계구조(경험론-합리론)를 초월하는 것임과 동시에 억압되지 않고 배제되지 않는 새로운 관계구조를 ‘의식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이다.  

생산력에 의하여 기존의 생산관계(경험론-합리론 관계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생산관계가 수립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확립은 당연히 기존의 상부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상부구조를 생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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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랑 하나뿐인 선배 00형..

내 딸랑 하나뿐인 선배 00형이 코로나 돌파 감염으로 지난 주 목요일에 가셨다.. 

허망하고 원통하고 슬프다... 

 

이제 누가 있어 나와 같이 순대국밥을 먹을 것이며, 

소주잔을 토닥토닥 기울일까... 

이제 누가 있어 아픈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줄까... 

이제 누가 있어 내가 아플 때, 

"아.. 또 왜?"라며 내 아픔을 위로해줄까... 

이제 누가 있어 내가 외로울 때, 

"어이 당구 한판 어때? 오늘 넌 나의 밥이다" 하며, 

기꺼이 달려와 나를 위안하고 달래줄까... 

이제 누가 있어 나의 괴로울 때, 

나와 어깨동무 하며 같이 노래 한자락 해줄까... 

 

형이 힘들고 외롭고 아프고 외로울 때, 

형처럼 같이 살아야 했는데... 

그런데 울음도 안 나오고 눈물 한방울 안 나오는데... 

형은 단톡방에서 가시기 전에 

"날 위해 많이 울어주라" 했는데... 

 

이제 누가 있어 

내 딸랑 하나뿐인 형과 같이 살까... 

 

형!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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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백석 시

# 『시인 백석-백석 시 전집』 (송준 엮음, 흰당나귀, 2012) 중에서 #

 

- 백석 지음 -

 

[어린아이들] 

 

바다에 태어난 까닭입니다.

바다의 주는 옷과 밥으로 잔뼈가 굴른 이 바다의 아이들께는 그들의 어버이가 바다으로 나가지 않는 날이 가장행복된 때입니다. 마음 놓고 모래장변으로 놀러 나올 수 잇는 까닭입니다.

굴 깝지 우에 낡은 돋대를 들보로 세운 집을 지키며 바다를 몰으고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자라는 그들은 커서는 바다으로 나아가여야 합니다.

바다에 태어난 까닭입니다. 흐리고 풍낭 세인 날 집 안에서 여을의 노대를 원망하는 어버이들은 어젯날의 배ㅅ노리를 폭이 되엇다거나 아니 되엇다거나 그들에게는 이 바다에서는 서풍 끝이면 으레히 오는 소낙지가 와서 그들의 사랑하는 모래텀과 아끼는 옷을 적시지만 않으면 그만입니다.

 

밀물이 쎄는 모래장변에서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고 바다에 싸움을 겁니다. 물결이 그들의 그 튼튼한 성을 허물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더욱 승승하니 그 작은 조마구들로 바다에 모래를 뿌리고 조악돌을 던집니다. 바다를 씨멸식히고야 말듯이.

그러나 얼마 아니하야 두던의 작은 노리가 그들을 부르면 그들은 그렇게도 순하게 그렇게도 헐하게 성을 뷔이고 싸움을 버립니다.

해질무리에 그들이 다시 아부지를 따러 기슭에 몽당불을 놓으려 불가으로 나올 때면 들물이 성을 헐어버린 뒤이나 그때는 벌써 그들이 옛성과 옛 싸움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바다의 아이들은 바다에 놀래이지 아니합니다. 바다가 그 무서운 헤끝으로 그들의 발끝을 핧아도 그들은 다소곤이 장변에 앉어서 꼬누를 둡니다.

지렁이 같이 그들은 고요이 도랑츠고 밭가는 역사를 합니다. 손가락으로 많은 움물을 팟다가는 발뒤축으로 모다 메워버립니다. 바다물을 손으로 움켜내어서는 맛도 보지 않고 누가 바다에 소금을 두었다고 동무를 부릅니다. 바다에 놀래이지 않는 그들인 탓에 크면은 바다로 나아가여야 하는 바다의 작은 사람들입니다.

- 남이두시기해빈 南伊豆枾崎海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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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공위성-백석 시

# 『시인 백석-백석 시 전집』 (송준 엮음, 흰당나귀, 2012) 중에서 #

 

[제3인공위성]

 

- 백석 지음 -

 

나는 제3인공위성

나는 우주 정복의 제3승리자

나는 쏘베트 나라에서 나서

우주를 나르는 것

 

쏘베트 나라에 나서

우주를 나르는 것

해방과 자유의 사상

공존과 평화의 이념

위대한 꿈 아닌 꿈들......

나는 그 꿈들에서도 가장 큰 꿈

 

나는 공산주의의 천재

이 땅을 경이로 휩싸고

이 땅을 희망으로 흐뭇케 하고

이 땅을 신념으로 가득 채우고

이 땅을 영광으로 빛내이며

이 땅의 모든 설계를 비약시키는 나

 

나는 공산주의의 자랑이며 시위

공산주의 힘의, 지혜의

공산주의 용기의, 의지의

 

모든 착하고 참된 정신들에는

한없이 미쁜 의지, 힘찬 고무로

모든 사납고 거만한 정신들에는

위 없이 무서운 타격, 준엄한 경고로

내 우주를 나르는 뜻은

여기 큰 평화의 성좌 만들고저!

 

지칠 줄 모르는 공산주의여,

대기층을 벗어나, 이온층을 넘어

뭇 성좌를 지나, 운석군을 뚫고

우주의 아득한 신비 속으로

태양계의 오묘한 경륜 속으로

크게 외치어 바람 일구어

날아 오르고 오느는 것이여,

 

나는 공산주의의 사절

나는 제3인공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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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5.

알튀세의 자본주의 모순의 중층결정-철학적으로는 경험론과 헤겔 변증법. 

 

맑스의 유물론-비유적으로는 [원령공주]의 아시타카(주인공)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산(원령공주)는 자연법칙(시시가미 신)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반영, 수용한다는 경험론자의 모슴을 보인다. 

에보시(철 생산 마을의 지도자)는 자연을 지속적으로 자기화하여 자신의 힘을 현실 속에서 점점 더 구체화시키고 현실화시켜 나가면서 최후에는 시시가미 신(자연법칙)마저도 자기의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대상으로 삼는 절대정신의 형상을 띤다. 

그리하여 헤겔의 변증법의 모습을 보인다. 

이 둘을 초월하면서도 내적으로 통일시키는 고차적인 유물론이 바로 맑스의 유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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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4.

맑스의 자유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서로 연대하고자 하는 상대방(서로 동일화될 수 없는 타자)를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 즉 자유를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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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3.

피터 싱어의 보편성은 '양적 측면'에서의 보편성이다.

즉 동일한 원리가 양적으로 확대되어 최종적으로 모든 것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변증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자신이 주장했던 <윤리가 아닌 것>이 된다. 

질적인 측면에서의 보편성-하나의 동일한 원리가 모든 것에 적용될 경우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세계존재는 관조적으로(수동적으로) 그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을 생산한다는 <실천>의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실천의 의미가 포함될 때 과학이 성립할 수 있다. 

또한 보편성은 양적인 것을 넘어서서 질적인 것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맑스가 말한 실천으로서의 혁명이며, 질적인 측면에서의 보편적인 윤리나 정치의 원리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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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2.

과학은 주체의 실천활동(Praxis)과 직결된다. 

즉 제1원리 또는 제1원인으로서의 이념이나 법칙은 인간의 실천활동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방법은 주체의 실천활동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다. 

주체의 실천활동은 환경을 변화시키고 그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변혁적, 혁명적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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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산동네 의풍리.

밖에는 햇살 몇 조각들 모여,

가을장마의 물기 툭툭 떨어내듯

조곤조곤 안부인사를 건넨다.

토요일 오후 동네 카페에 앉아

무심히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운 산동네 의풍리> - 정기복 -

 

담론이 끝나고

철문이 내려진 거리에

스산한 겨울이 어슬렁거리면

구겨진 전단 같은 퇴색한 잎들이 날리고

이제 나는

그리움의 수배자가 된다

그 많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갔나

지워진 얼굴들 대책 없이 호명하다가

가슴에 품었던 산동네 하나 끄집어낸다

 

살얼음 진창 밟으며

사람의 하늘 열던

동학군 깃들어 짚신 고쳐매던 그곳

그믐 가시밭길 봉화 치켜들고

새벽을 밝히던 산사람들

싸릿불 지펴 감자 굽던 그곳

비탈산 불 놓아

조며 수수며 메밀 갈던

생떼 같은 화전민들 목숨 부쳐먹던 그곳

그렇게 시절에 쫓긴 땅벌들이 더덕 뿌리 흙살 박아 물 차오르던 곳

 

암울에 지쳐 병이 된

이 계절에 산동네 의풍리 떠메고 와

만나는 사람마다

한 자락씩 떼어주고 싶다

 

- 정기복 시집 <<어떤 청혼>> 중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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