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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13
    규범 윤리학에 대하여 주저리 주저리 2^^...
    곰탱이
  2. 2010/10/13
    규범 윤리학에 관해 주저리 주저리 1^^...(8)
    곰탱이

규범 윤리학에 대하여 주저리 주저리 2^^...

** 근대 윤리학 1 : 칸트의 윤리학

- 중세 봉건 공동체가 해체되고 근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각 개인들은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게 되었다. 이것은 곧 각 개인들의 생존이 각 개인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 다른 어떤 누구에게도 간섭 받거나 침해 받을 수 없음을 뜻한다.

- 이러한 생존의 법칙은 타인을 완전히 배제하는 배타적 특성을 가진 사적 소유의 원리가 된다. 모든 합리적인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신만의 부를 소유․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시대의 <자유> 이념이며, 누구나 이러한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시대의 <평등> 이념이다.

- 자기 자신만의 생존을 위하는 근대 인간은 곧 만인 대 만인 투쟁 상태, 즉 먹지 않으면 먹히고 마는 정글 법칙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 이러한 상태는 여타의 다른 동물들이 사는 자연 세계와 똑같은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윤리’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가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피쿠로스학파에게서처럼 칸트에 오게 되면 고대의 전통인 <과학(합리성 또는 이성) = 윤리>라는 도식이 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정글법칙에 따라 사는 이 현실의 삶이 왜 그러한지를, 즉 신의 뜻을 이 현실 속에서 찾아봐야 정글법칙이 그 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글법칙은 정확하게 말해서 신의 뜻이 아니다.

- 정글의 법칙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배타적인 사적 소유의 원리, 즉 적대적인 무한 경쟁의 원리로서 이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만드는 원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사회성, 즉 협력과 단결, 연대와 우애라는 특성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제 인간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간의 사회성을 회복시켜야만 하는 의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안 하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의무의 영역은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적 현상의 영역, 즉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객관적 ‘사실’의 영역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당위’ 또는 ‘도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 이러한 의무․의지를 칸트는 ‘선 의지’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지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그러한 의지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답게, 즉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사회성(연대와 협력, 그리고 우애와 단결)을 실현시키며 살아가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 칸트의 이러한 <선 의지>는 <정언명령>이라는 정식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 위와 같은 내용을 고찰해 볼 때 칸트의 ‘선 의지’, ‘정언명령’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처럼 <자발성>에 기초한 윤리 법칙이라 할 수 있다.

- 그런데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와 칸트의 <선의지>와의 차이점은 아마도 칸트의 선의지가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 방향을 구체적으로 설정하였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유의지의 발현방향을 <선>으로 구체화하였다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 이러한 윤리 법칙은 국가들 간의 윤리적․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UN과 비슷한 <국가연합>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 근대 윤리학 2 : 공리주의

- 에피쿠로스학파와 칸트의 윤리학이 자발성에 기초해 있다고 한다면 공리주의는 비자발성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수로서의 나의 이익이 다수로서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충돌이 일어나게 될 때, 공리주의는 다수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지지하게 되며, 소수로서의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법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는 <적대적인 무한 경쟁>을 생존 원리로 삼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가 이 생존 경쟁으로부터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는 칸트가 말하는 선의지, 즉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이런 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즉 비합리적인 것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

- 윤리는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리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윤리관을 통해 공리주의가 성립한다. 그런 점에서 공리주의는 <경험주의적>이다.

- 공리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다시 말해서 <적대적인 무한 생존 경쟁> 원리를 이미 그 바탕에 깔고 있다. 그 경쟁에서 탈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자는 경쟁 구조 속에 다시 뛰어들 수 없는 죽은 자(또는 비존재)이다.

-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는 경쟁 이전의 전체의 측면에서 볼 때 <최대 다수>이다. 왜냐하면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에는 애초부터 경쟁에서 승리한 자뿐만 아니라 패자부활전 같은 것을 통해서 다시금 경쟁 체제에 편입될 수 있도록 구원 받은 자들과 앞으로 경쟁 체제에 들어올 예비 경쟁자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일단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킨 <행복한 자들>이다.

- 그러므로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의 원리는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 된다.

-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그 특성상 <배제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경쟁에서 탈락한 소수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다른 한편 경쟁은 단 1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한하게, 그것도 적대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계속 최대 다수 중에서 경쟁에 탈락한 소수가 배제되고 결국에 가서는 <1등 혼자만이> <최대 다수>가 되고, <최대 다수>인 경쟁자는 <최대 소수>가 된다.

- 이렇게 해서 공리주의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 결국에 가서는 1등만을 위한 윤리법칙이 되고 만다.

- 또한 공리주의 경제지상주의(경제적인 이익이 커져야만, 즉 파이가 커져야만 각 개인에게 돌아갈 이익도 커진다는 논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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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 윤리학에 관해 주저리 주저리 1^^...

# 규범 윤리학 #

 

- 의미 : 당위에 관한 학문이라는 의미.

‘~을 해야 한다’, ‘~이어야 한다’ 등의 도덕 판단으로 표현.

- 이러한 도덕 판단의 기초, 토대 : <이성>

- 그런데 <이성>의 의미나 그 기능(또는 작동 방식)은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성>의 의미나 작동 방식은 시대적인 인간의 삶․문화 형태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인간의 삶․문화 형태는 <이성>의 <대상>인 <인간 자신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그런데 세계에 대한 이성의 파악은 궁극적으로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법칙성, 즉 필연성을 파악하는 데 있다. 이러한 필연성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가지 형태로 나뉘게 되는데, 그 하나는 인간 삶의 필연성, 즉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당위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법칙이 가지고 있는 필연성, 즉 사실관계가 가지고 있는 필연성에 관한 것이다.

-고대에서는 이 둘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즉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후로 가게 되면 인간이 자연 존재이면서도 여타의 다른 자연 존재들과는 구별된다는 특성에 따라서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 관계에 초점을 두게 된다. 이는 인간을 여타의 다른 자연 존재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을 강조하게 되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그 특성을 ‘자유의지’로 보았다.

-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방점을 두고서 대체로 윤리의 보편성, 절대성을 강조하는 목적론적 윤리설과 법칙론적 윤리설, 공리주의 등의 규범 윤리학에서 나타난다.

- 다른 한편으로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방점을 두고서 대체로 윤리의 특수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는 상대론적 윤리설 등의 메타윤리학에서 나타난다.

- 아래에서는 규범 윤리학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 고대 그리스 윤리학 1 : 플라톤

- 플라톤의 윤리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 <이성>은 이데아 세계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인간은 바로 그 진리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이데아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하는 현실 세계의 원본이면서도 이 현실계와 분리되어 있다.

- 그렇다면 <이성>은 이 이데아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이성은 현실세계를 분석하고 쪼개고 따져서 이데아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데아 세계는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오로지 도를 깨치듯이 아는 방법, 즉 직관을 통해서 이데아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그 당시의 <신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그런데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당시의 인간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도시국가(폴리스)의 시민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 고대 그리스 윤리학 2 : 아리스토텔레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비판하였다.

예) ‘개(dog)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범신론적이고 경험론적인 형상론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 <이성>의 목적은 <순수형상>, 즉 <신>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신>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이 <신>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이 <신>은 이데아 세계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이 <신>은 <직관>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분석하고 쪼개고 따지는 연역적 방법>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직관>은 그것이 참된 것이니, 거짓된 것인지 확인․증명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개인 또는 몇몇이 신의 뜻을 빌러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인간의 삶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 이 <신>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 인간 삶(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 이르는데, 이 행복은 현실 세계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연역적으로 파악하는 <이성적 활동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 그리고 이러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중용이란 현실 세계의 이런 저런 변화에, 그리고 그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임의적인 주관에 휘둘리지 않는,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불변의 이성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질적인 삶에 휘둘려 살지 않고 <과학적인 태도>의 삶을 견지하는 것을 말한다.

- 그런데 이런 변화의 현실은 필연적인 신의 뜻이므로, 당시의 모든 정치․경제․계층적 삶은 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 고대 로마의 윤리학 1 : 스토아학파

- 고대 로마의 문명은 고대 그리스의 문명을 계승․발전시킨 문명이다. 그러므로 고대 로마의 윤리학 역시 고대 그리스 윤리학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러한 고대 로마의 윤리학 가운데 하나가 스토아학파가 내세우는 윤리학이다. 스토아학파가 내세우는 윤리학은 금욕의 윤리학이다.

- 고대 그리스의 윤리학의 쟁점은 참된 진리가 어느 정소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이성의 작동 방식이 달라지는 데 있다. 그런데 스토아학파가 문제 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이성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였다.

- 스토아학파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 작동 방식이 암묵적으로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의 물질적인 변화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 이것은 곧 물질적인 측면에서 금욕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금욕주의를 통해 마음의 평정, 고요함(부동심)을 얻은 후에야 이성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과학적 태도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 과학적 태도․실천은 곧 윤리적 태도․실천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고대 로마의 윤리학 2 : 에피쿠로스학파

- 절제와 평정을 강조했던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주장했다.

-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은 <자유의지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 에피쿠로스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을 거부하는 비결정론적인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의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신의 의지, 뜻(자연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인간 이외의 여탸 다른 생명체와 인간 사이의 어떠한 구별․분리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의’ ‘윤리’는 성립될 수 없다. ‘인간의’ ‘윤리’가 성립되려면 인간 이외의 여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될 수 있는 특성이 인간에게 존재해야 한다. 그러한 특성이 바로 ‘자유의지’라 하겠다.

- 자유의지는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능력 이외의 것이다.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능력은 자연을 분석하고, 쪼개고, 따져서 그 본질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이렇게 해서 파악된 여러 개별적인 자연법칙 그 자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결론적으로 동물의 삶의 방식과 구별되지 않는다. 인간은 단순히 이러한 법칙들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법칙들을 자신의 삶의 목적에 맞게 종합․통일시킨다. 이렇게 종합․통일시켜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현실화하는 것이 자유의지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런데 자유의지의 실현은 이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학파의 윤리학 역시 이성을 통한 자유의지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이성은 분석하고, 쪼개고 따지는 능력이 아니라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능력이 된다.

- 또한 동시에 이러한 능력은 과학적 실천의 기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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