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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1,2

 

** 예전부터 진보에 관해 주저리 주저리해 보려고 했는데, 지금사 약간의 것을 정리해 보았다.

아래에 있는 목차대로 주저리 주저리해 보면 뭐가 보일까 아니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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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


1. 아리송한 진보의 정체.

2. 노동자로서 나는 진보적 존재인가 또는 아닌가?

3. 계급투쟁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4. 당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5. 진보는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의 끊임없는 과정

6. 진보와 혁명의 관계-전략, 전술의 측면에서 

7. 진지전과 기동전의 통일로서의 진보.


1. 아리송한 진보의 정체.

예전에 진보라는 말은 ‘빨갱이’, ‘좌익’과 동의어였다. 그래서 진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도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진보라는 말은 진부하다고 할 만치 여기저기서 쓰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진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진보, 그것은 ‘유령’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인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주사파도 진보라고 하며, 심지어 노무현 정권도 진보라고 이름을 갖다 붙인다. 다른 한편 일반 대중들은 대통합민주쉰당이 딴나라당보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진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진보라는 말이 ‘중산층’, ‘서민’(우리는 이들을 보통 민중이라 부른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사용된다는 것이다. 중산층, 서민이라는 말은 ‘피지배 계급’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이제 ‘진보’의 정의를 내려 보자면 <중산층, 서민을 위하는 것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의심해 볼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정의가 사실 참된 것인지 자꾸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어떤 정권도 피지배 계급을 위하지 않는다는 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첫째 물음과 관련하여, 도대체 중산층, 서민은 과학적으로 어떤 계층을 가리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위의 정의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면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2. 노동자로서 나는 진보적 존재인가 또는 아닌가?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계급처럼 질적인 차이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만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자면 양적인 소득 차이와 재산 소유 정도 차이만을 나타내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양적 차이는 실제로 그 경계가 아주 불분명하다. 명확하게 어떤 기준으로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을 가를 수 있을까? 그 기준은 대단히 자의적이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연 소득 2,000만 원 이하이면 서민층이고 2,010만 원이면 중산층인 것인가? 이러한 자의성과 임의성은 명확한 질적 차이를 드러내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 즉 계급 지배에 따른 착취와 억압의 관계를 은폐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산층, 서민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관계를 은폐시키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지닌 개념이 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곧바로 서민,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일반 대중들의 심리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엄연히 현실적으로는 계급지배가 일어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는 일반 대중들은 지배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는 것이 너무나 비참하고 고달프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가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맞아 떨어지게 됨으로써 일반 대중들은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라 본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질서 속에서 지배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것이 또한 일반 대중들 대부분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생각하도록 만들며, 자신은 대부분 노동자이고 비슷한 처지이면서도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자기를 구분시키고자 한다. 노동자 대부분은 도시빈민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화이트칼라는 블루칼라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주관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서민, 중산층을 위하네 어쩌네 하면서 서민, 중산층을 들먹거리는 것을 진보라 칭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무늬만 진보인 ‘사이비 진보’이다. 진보는 질적인 차이를 지닌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을 통해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적인 차이를 지닌 계급지배를 나타내는 개념들은 노동-자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본 개념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느냐 또는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르는, 즉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 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즉 노동자를 위한다고 해서 모두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서민, 중산층은 계급의 측면에서 볼 때 피지배계급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의 대부분은 노동자이다. 서민, 중산층으로서 이 노동자들은 어떤 물적 토대를 가지며 살고 있는 존재인가? 그들 삶의 물적 토대는 무엇인가? 맑스는 생산하는 ‘인간’ 자신이 생산력이라고 했으며, 이 인간은 생산관계의 총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삶의 물적 토대는 노동자 자신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 그 임금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는 존재이다. 이때 노동자는 두 가지의 측면으로 정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다는 측면이다. 두 번째는 임금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간다는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의 측면에서 노동자는 <자본의 대상>이 된다. 두 번째의 측면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는 대상과 주체의 측면 모두를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이 모순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모순이다. 이 모순은 자본가-노동자의 갈등과 투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노동자 대중은 이러한 모순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자체로 진보적이지 않다. 그들의 생존의 물적 토대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자신의 생존을 모두 자신 혼자 떠맡게 된다.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무한한 적대 경쟁에서 물리쳐야 할 적이다. 노동자 대중은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 그들은 ‘힘’이 있는 쪽, 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는 쪽으로 붙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노동자의 첫 번째 측면, 즉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게 팔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장자 에셔가 죽 한 그릇에 자신의 영혼을 파는 것”처럼 이렇게 노동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자본에 맡긴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어떤 사상, 신념, 개념, 언어 등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을 사용하게 될 때 자신의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은 자본주의의 비밀을 폭로하며, 자본주의를 해체시킬 수 있는 과학적 개념인 ‘노동자’를 사용하는 대신에 자본의 비밀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는 말인 ‘근로자’, ‘국민’, ‘서민’, ‘중산층’이라는 말을 쓰며, 그 말에 아주 익숙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삶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두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으로 제쳐놓고서 돈 버는 것 자체를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게끔 만든다.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삶을 자본의 영역과는 전적으로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생산관계 속에서 영위해 나가려는 기획을 가지고 실천활동을 해 나가는 순간에서부터 노동자 대중은 진보적인 존재가 된다. 이는 두 번째 측면이 첫 번째 측면을 지양해 나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진보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생산관계, 인간관계를 창출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맑스가 말한 대로 “각각의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대하는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끊임없는 운동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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