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 3

곰탱이님의 [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1,2 ] 에 관련된 글. 

3. 계급투쟁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뜬금없고 ‘별 미친...’이라는 말을 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급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측면, 즉 모순적인 측면들은 이런 물음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지도 않을까 싶다.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진보적이며 절대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계급이 처해 있는 상황 또는 계급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모순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오늘날 노동자 계급 투쟁이 현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모순적인 존재이다. 먼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 팖으로써 자본의 대상이 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 임금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주체로 살아가고자 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측면을 ‘즉자적’ 계급이라 하고, 두 번째 측면을 ‘대자적’ 계급이라고 한다.

즉자적 계급으로서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적대적 경쟁 이데올로기에 따라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존재로서 항상 모든 걸 자기 혼자(또는 오로지 자기 가족)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개별적인 개인에 불과하다. 이 노동자는 사회적 개인이 아니다. 이 노동자는 언제나 자기와 자기의 가족 안위만이 문제이며, 그 안위를 위해서 죽기 살기로 경쟁에 뛰어든다. 동료가 짤리든, 그 동료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자본과 싸우든 그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이런 것이 그의 생존을 위협할라치면 협력은 고사하고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하게 된다. 이 노동자는 오로지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전쟁의 살얼음판 위에서 목숨 부지에 연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계급투쟁의 형태는 기껏해야 경제주의, 조합주의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이 즉자적 계급투쟁으로는 결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자본은 노동자 집단 이기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퍼트리면서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을 촉진시킨다. 그리하여 노동자의 저항을 쉽게 분쇄시킨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에 따른 자본의 기본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즉자적 계급투쟁은 진보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

새로운 생산관계, 인간관계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대자적’ 계급투쟁이라 할 수 있겠다.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투쟁이 ‘대자적’ 계급투쟁이다. 자기 삶의 주체는 자본에 의해 개별화되고 원자화된, 그리하여 분열되어 있는 즉자적 계급을 넘어서는 데 있다. 즉 이 분열을 줄여 나가기 위한 물질적 기반과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별적이고 원자화된’ 존재에서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지닌 ‘보편적인’ 존재로 만들어 나가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존재의 생산과정은 맑스의 말마따나 동시적 과정으로서의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또는 자기 변혁의 일치” 과정이며, “혁명적 실천” 과정이다. 또한 생산력을 ‘질적’으로 변혁시키며 동시에 생산관계를 변혁시키는 과정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보’로서의 대자적 계급투쟁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