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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사(膳友辭)(선우는 '반찬 친구'라는 뜻이다) #
낡은 나조반1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2이 소리를 들으며 단단이슬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3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 2>> 중 58~59쪽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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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었다. 개별적인 살기들을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달려드는 적 앞에서 고착은 곧 죽음이었다. 달려드는 적 앞에서 나의 함대는 수없이 진을 바꾸어가며 평치고 오므렸고 모이고 흩어졌다. 대장선이 후미에 있을 때 이물 너머로 바라보면 함대는 적과 마주잡고 쉴새없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무도자처럼 보였다.
나를 이동시키면서 고정된 적을 조준하는 일은 어려웠고 나를 고정시키고 이동하는 적을 조준하기도 어려웠다. 나를 이동시키면서 이동하는 적을 조준하기는 더욱 어려웠으나, 모든 유효한 조준은 이동과 이동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내가 적을 조준하는 자리는 적이 나를 조준하는 표적이었다. 함대가 이동할 때, 적을 겨누는 나의 조준선은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 2>> 중 55~56쪽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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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더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 때, 나는 죽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고 나는 늘 살아 있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각오되어지지 않았다.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 2>> 중 48~49쪽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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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 1>> 중 143쪽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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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맞서는 배의 저항은 물에 순응하기 위한 저항이다. 배는 생선과 같다. 배가 물을 거스르지만, 배는 물에 오래 맞설 수 없고, 물을 끝끝내 거절하지 못한다. 명량의 역류를 거슬러 나아갈 때도, 배를 띄워주는 것은 물이었고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도 물이었다. 생선의 지느러미가 물살의 힘과 각도를 감지하듯이 노를 잡은 격군들의 팔이 물살의 함과 속도와 방향을 감지한다. 장수의 몸이 격군의 몸을 느끼고, 노 잡은 격군의 몸이 물을 느껴서, 배는 사람의 몸의 일부로서 역류를 헤치고 나아간다. 배는 생선과도 같고 사람의 몸과도 같다. 물 속을 긁어서 밀쳐내야 나아갈 수 있지만, 물이 밀어주어야만 물을 따라 나아갈 수 있다. 싸움은 세상과 맞서는 몸의 일이다. 몸이 물에 포개져야만 나아가고 물러서고 돌아서고 펼치고 오므릴 수 있고, 몸이 칼에 포개져야만 베고 찌를 수가 있다. 배와 몸과 칼과 생선이 다르지 않다.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 1>> 중 155쪽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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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이었다. 지금 명량 싸움에 대한 기억도 꿈속처럼 흐릿하다. 닥쳐올 싸움은 지나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낯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경험론의 한계에서 비롯되다..
이순신을 그리는 역사소설 <<불멸의 이순신>>(김탁환 지음, 황금가지, 2004) 중 4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함(270~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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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 "예, 큰 스님!"
(휴정) "나는 널 안다. 네가 원하는 것은 승병이 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 정도가 아니지. 너는 이 나라를 불국토로 바꾸고 싶은 게 아니냐? 어쩌면 이번 전쟁을 기회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허나 내가 보기에 너는 다만 공맹의 무리들이 싫은 것이다. 정작 네가 원하는 불국토를 위해서는 아직 탑 하나도 쌓지 못하고 있어."
월인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오래전부터 꿈꾸어 왔던 일입니다. 이미 탑은 충분히 쌓았습니다."
휴정이 답을 미루고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월인도 그 눈길을 받자 더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어떤 경우를 당해서라도 마음이 흔들리리지 않는 것을 태어나지 않음이라 하고, 태어나지 않는 것을 생각 없음이라 하며, 생각이 없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느니라. 그동안 너를 곁에 둔 것은 네가 이 이치를 깨닫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한데 이제 보니 넌 바람이 불어오기도 전에 먼저 흔들리는구나. 그렇게 흔들려서야 네가 쌓았다는 탑이 무너지지 않을 도리가 있겠느냐?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너는 네가 쌓았다는 그 탑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것을 볼 게다. 엉절거리지(작은 소리로 원망스럽게 자꾸만 군소리를 내는 것) 마라. 네가 한 번 성낼 때마다 백만 가지 바람이 불어온단다. 월인아!"
"예, 큰스님!"
"서두르지 마라. 손 내미는 자가 있더라도 덥석 쥐지 마라. 가장 늦게까지 서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 오랜 인연을 접을 때가 가까웠느니라."
월인이 깜짝 놀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소승에겐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큰스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언젠가 헤어질 날이 오리라 생각은 했지만,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월인은 이미 휴정이 승병을 일으키리라는 밀서를 내리면 그것을 들고 팔도를 돌아다니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큰스님이 전면에 나설 수 없다면 그 수족 노릇을 제대로 할 사람이 필요하다. 맡겨 주시면 성심을 다하리라.'
의주로 오는 동안 월인은 이 결심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다. 그런데 휴정은 도와달라는 말 대신 인연을 접자고 한다. 승병을 일으키는 일에서 아예 손을 떼라는 것이다.
"정녕 모르겠느냐? 전쟁이 끝나면 나는 살아남더라도 나를 따른 문하 중 몇은 크게 곤욕을 치를 게다. 더구나 너는 더욱 큰 생각을 품고 있지 않느냐? 내 일을 돕다가 탑을 쌓기도 전에 세상 눈에 띌까 걱정이구나."
"그래도 전국에 밀서를 보내려면....... 큰스님 뜻을 충분히 아는......."
"염려를 거두어라.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너는 날이 밝는 대로 떠나라. 전쟁이 이 나라 백성들을 얼마나 참혹하게 만드는지 네 눈으로 직접 보아라. 백성들 곁에 머물며 그 아득한 절망과 눈물과 한숨을 끌어안아라. 싸우고 싶으면 무기를 들고, 달아나고 싶으면 달아나라. 아무도 네 언행에 트집 잡지 않을 게다. 나와 함께 지낸 시절은 잊어라. 누가 묻더라도 내 법명을 내밀지 마라. 월인아! 이제 혼자 힘으로 부딪혀 보는 게다. 가거라. 당장!"
월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정은 벽을 보며 다시 돌아누웠다. 월인은 휴정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큰스님!
눈 감았다가 뜨면 한 삶이 다 흘러가고 또 눈 감았다 뜨면 겨우 기침 한 번 뱉는 순간이라 하셨지요. 모기가 무쇠로 된 소 엉덩이에 주둥이를 찔러 넣듯 정진하라고도 하셨습니다. 저놈은 늘 달아날 궁리만 하는 놈이라고, 망아지처럼 날뛰다 제 명에 죽지 못할까 염려하여 데리고 있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이제 큰스님께서 스스로 우리 문을 열어 주시니 한 걸음 내딛는 것도 벅찹니다. 달은 지고 오경(五更) 깜깜한 밤입니다. 당신의 가늘고 긴 손 어지러이 움직이는 가락을 따라 어두운 숲도 곧잘 돌아다녔습니다만, 이제 마음만 아지랑이처럼 어지럽고 길은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큰스님!
그 깊은 뜻을 어렴풋이 느낄 것도 같습니다. 잊고 또 잊으며, 되새시고 또 되새겨, 몸도 마음도 의지할 곳 없는 순간을 찾으라는 것이겠지요. 죽음의 자리에서, 치욕과 번민의 자리에서, 저만의 탑을 쌓아 올리라는 것이겠지요. 첫 마음 잃지 않고 큰스님 가르침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나날을 쌓아 가겠습니다. 불국토를 이루는 길을 꼭 찾겠습니다.'
이순신을 그리는 역사소설 <<불멸의 이순신>>(김탁환 지음, 황금가지, 2004) 중 3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함(74~75쪽),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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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한발 물러났다.
"듣고 보니 좌상 대감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떤 마음으로 성학(성왕을 배우는 학문)을 닦아야 하겠습니까?"
류성룡은 미소를 띠며 편안한 음성으로 답했다.
"반성하면서도 다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속에 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내가 나 스스로를 이기는 것을 '강(彊)'이라고 하옵니다. 소생은 이 셋을 항상 마음에 담고 지냅니다마는, 나리께서는 그 중에서도 강에 마음을 두심이 어떠하온지요?" (74~75쪽)
"천하의 눈으로 사물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로 들으면 들리지 않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지혜로 생각하면 알지 못할 것이 없다." (97쪽)
허균의 혁명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허균, 최후의 19일>>(김탁환 지음, 민음사, 2009) 중 상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함(268~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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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박치의도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만 묻겠네."
"뭔가?"
"자네가 세상을 바꾸려는 진짜 이유가 뭔가?"
교산(허균의 호)! 그 이유를 몰라서 던진 질문이 아니라네. 자넨 너무 멀리, 너무 깊게,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최초의 마음만 생각하게. 무륜당의 봄과 변산의 낙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허허허, 오 년 전에 이미 다 보여 주었는데,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묻나?"
허균은 잠시 말을 끊고 오른손을 들어 도성의 불빛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저 소박한 백성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었네. 그들을 불행에 빠뜨린 왕실과 조정에 분노했지. 잠깐이지만 금상이 왕위에 올랐을 때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네. 전쟁의 상처를 씻어 내고 새 살이 돋는 공경을 상상하곤 했으니까. 허나 아무리 군왕이 훌륭해도 그 아래가 온통 썩고 병들었다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겠는가. 왜 세상을 바꾸려느냐고 물었나? 이대로 대충 당상관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금강산이나 변산에서 말년을 보내고 싶지는 않은가 이 말이지?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네. 허나 나는 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 더 이상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그래! 오십 평생 나는 인간이라는 족속에게 실망만 하며 살아왔네. 왜란을 겪은 이십 대, 이리저리 외직을 떠돈 삼십 대, 그리고 다시 도성으로 돌아와 관송의 개로 지낸 사십 대까지, 모조리 실망뿐이었네. 나는 마지막으로 인간이라는 족속을, 그리하여 나 자신을 믿어 보고 싶어.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고 욕하고 죽이기 위하여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는 인간을 보고 싶으이. 그날을 향한 갈망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자네와 함께 할 걸세."
박치의가 허균의 손을 굳게 마주 잡았다.
허균의 혁명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허균, 최후의 19일>>(김탁환 지음, 민음사, 2009) 중 하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함(370~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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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과 여인 이재영의 대화 중에서..>
"백성들을 위해서 세상을 바뀨겠다고?" (여인)
"...... 꼭 그것만은 아니지. 자넨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 나는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갖지 못했다......" (허균)
"그게 무슨 말인가?"
"배고픔과도 같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걸세. 젊었을 때에는 세상에 반대하는 것으로 희망의 근거를 찾았지만, 이제는 누구를 반대하거나 누구를 도와주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어서라면 이해하겠나?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배불리 먹고도 허기가 지는 것처럼, 쭉 그렇게 지내 왔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나의 이 지독한 배고픔이 모두 해결되는 순간을 보고 싶네."
여인!
자네도 그렇지 않나? 깊은 밤 홀로 깨어 나의 몸과 마음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 늙고 병든 한 사내가 오들오들 떨며 엎드려 있다네. 세상의 온갖 불행이란 불행이 사내의 두 어깨에 얹혔고, 사내에게는 그 무게를 지탱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삶이라고나 할까? 그럴 때 자넨 그 사내에게 무슨 이야길 하겠는가? 어떤 시가 그 사내를 위로할 수 있을까? 그 밤, 나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네. 세 치 혀가 만들어 내는 넋두리조차 사내에겐 또 다른 짐일 테니까. 다만 나는 사내에게 두꺼운 이불과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고 싶었을 뿐이야. 하룻밤이라도 사내에게, 이 순간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선물하고 싶었거든. 여인! 우린 그 사내보다도 훨씬 가여운 족속이라네. 배가 고픈데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고 사지가 바들바들 떨리는데도 추위를 염려하지 않는 족속이지. 나는 그들에게, 하여 나 자신에게 삶의 냉혹함을 가르쳐 주고 싶다네. 눈부시게 행복한 순간으로부터 처참한 지난 날을 돌이키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그런 순간이 올까?"
"올 걸세. 점점 그 순간을 향해 가고 있어."
"도대체 자네가 만들고픈 세상은 어떤 건가?"
허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나의 풍경이 떠오르는군. 서당에서 함께 서책을 읽고, 그 서책에 적힌 대로 이 세상이 살아 볼 만한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아이들! 동틀 무렵 들판으로 나가 황혼이 찾아들 때까지 땀 흘려 일하는 어른들! 죄수를 가두는 감옥은 텅 비었으되 곡식을 쌓아 두는 곳간은 차고 넘치는 나라! 누구나 창고로 들어가서 원하는 만큼의 곡식을 꺼내 올 수 있으며, 태어난 곳이 북삼도나 전라도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첩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당하지 않는 나라! 중국을 섬기지 아니하고 외침을 받기 전에 군법을 철저히 시행하는 나라! 밤에는 들일에 지친 몸을 편히 누이고 휘영청 둥근 달을 바라보거나, 청주 한잔을 곁들인 노랫가락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좋겠지."
"참담한 현재를 견디려는 기만책은 아닌가?"
"기만책이라고? 지평선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차근차근 옮기자는 게 어떻게 기만책이겠는가? 이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면 일러 주게. 자넬 따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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