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2003년 8월

정부의 고용허가제도가 국회를 통과했다.

제도 실행을 앞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을 강제 추방 하겠다는 뉴스가 신문에서도 나오고

심지어 라디오 에서도 경고음과 함께 방송했다.

길거리 가로등에 미등록이주노동자 강제 추방 관련 현수막도 거기 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90년도 초에 산업연수제도로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을 기술을 배우러 온 연수생이라고 불러주면서 밤 낮 갈리지 않고 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 저임금을 주고 때로 그 저임금마저 받지 못 하고 욕설과 폭행에 지친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 이탈을 했다. 그래서 미등록 이주노동자 수가 증가 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안보고 노동력만 보니 문제가 발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부는 미등록이 많다는 이유만 해결하려고 하고 왜 이들이 뭐 때문에 이 꼴로 당했는지에 대한 지금도 그렇고 그 때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과정에 대한 관심이 없고 결과에만 집증한다면 참 위험한 사고다. 처음부터 투명하게 노동자라고 불러주고 노동 권리를 보장해 주면서 국가에 필요한 노동력을 떳떳하게 받았다면 모두에게 기쁜 일만 있을 것이다.

 

좋다. 허약한 제도로 사람을 착취했었다고 해도 이제 더 이상 그런 창피한 모습을 그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좋은 제도를 만들겠다면 그 동안 고생했던 이주노동자들은 이런 변함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 줄 수 있는데...

 

이주노동자들은

그 힘들었던 외환위기 때 함께 극복해 줬고

그 기뻤던 월드컵 때 함께 응원을 해 줬고

힘들 때나 기쁠 때나 함께 있어줬던 진정한 친구들인데. 무슨 죄가 있나?

 

나는 우리는 죄가 없다는 것을 생각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이에 대해 행동을 보여주고자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나처럼 행동으로 보여주자 하는 이주민들과 함께 우리의 권리를 요구하는 농성장에 참여하는 것 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11월 15일 저녁에 농성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사장님에게 지금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농성하겠다고 말했다.

돈을 벌고 싶든 꿈을 꾸고 싶든 이루어지고 싶은 것이 있는 사회약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바른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다고 생각해서 이런 결정을 하게 됐다고 얘기 했지만

사모님이 나에게 이런 사회운동을 해서 나중에 너에게 남는 게 없다고 했다.

 

사회운동 하는 것이 개인을 위해 뭘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이 세상에 늘 있는 아픈 것들을 함께 고치고 올바른 길을 안전하게 든든하게 함께 갈 수 있도록 바르게 노력하는 행동이자 또 하나의 나눔이다.

 

하지만 우리 사장님과 사모님은 나의 말을 이해 못 했다.

그들의 생각은 본인들의 일을 평생 해 주기 위해 내 어머니가 나를 낳아 줬다는 것뿐이다.

 

나는 회사를 그만 두기를 결정 했고 내가 8년 동안 일했던 것에 대한 받아야할 권리에 대해 사장님에게 물어보자 사장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 했다.

너는 불법체류자인데 왜 내가 퇴직금을 줘야 되냐?

 

나는 이런 말을 듣자 너무나도 놀랬다.

내가 불법체류자라서 사장님에게 못 해 준적도 없고

그 어느 불법체류자도 일하러 오지 않은 지옥 같은 이 공장이 천상으로 올라 갈 수 있게 함께 노력해 줬고

중고 소나타2를 타는 사장이 새차 소나타3을 탈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일해 줬던 것뿐인데.

 

나는 사장님의 배신 때문에 서운하고 화도 많이 났다.

그래서 회사에서 나오는 날에 편지를 써서 경리에게 주고 나왔다.

 

그편지에는 나는 사장님이 그 동안 나에게 한 약속을 믿고 성실하게 일을 해 왔지만 결국 사장님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한국인들에게고 배신하고 한국인의 이미지까지 망쳤다. 나에게 사장님과 사모님이 늘 하는 말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 같이 있을 때는 그것을 잘 표현 못 하지만 마지막에 떠날 때는 엄청 잘 해 준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이라고 하는 우리 사장부부는 정이 많은 약속을 잘 지키는 한국인은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나는 8년 동안 일을 열심히 일 했던 것. 함께 있었던 것에 정말 후회 했다고 편지에 썼다. 나는 내가 가는 마지막 시간에 만약 이렇게 배신하지 않고 2, 3달 워치 월급만 줘도 퇴직금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살 어린 시절 때부터 함께 있었던 것에 하나도 감사하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는 사장님에게는 용서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래서 나의 권리를 당당하게 받기 위해 노동부에 진정서 내겠다고 편지에 썼었다.

며칠 후 노동부에서 나와 사장님을 노동부로 오라고 했다.

나는 나를 배신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부천 노동부로 갔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노동부로 안 나타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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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8 10:02 2010/10/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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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나에게 김포 지역 다문화 강의를 맡아 달라고 김포이주여성 센터 소장님께서 연락이 왔다.

 

김포...

95년도. 내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부터 8년 동안 일했던 곳이다.

그때는 김포읍 이였었는데 이젠 김포시로 변했다.

내가 일했던 곳도 그때 작은 마을 같았는데 이젠 높은 건물들로 꽉 찬 동이 됐다.

마을버스밖에 안 다녔던 그 곳에 이젠 커다란 버스들이 정신없이 다니고 있고

좁았던 도로도 이젠 지하 지상 도로로 서로 눈치 보필 없이 바꿨다.

95년도부터 2003년까지 8년 동안 내가 일했던 언덕에 있는 작은 회사도 이제 어떻게 됐을까. 너무 궁금해서 김포 첫 강의 끝난 후 거기로 찾아 가봤다.

 

오랫동안 살았던 곳인지

내가 지냈던 도로,

내 친구들이 일했던 공장,

외국인들하고 같이 목요하기 싫다는 한국인들의 항의 때문에 우리를 거부했던 사우나,

회식 할 때 늘 갔던 고기 집 등등

하나하나의 앞에서 서서히 지나 갈 때마다 왠지 애인과 첫 만남을 하러 갈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은 슈퍼도 큰 슈퍼로 변했고 늙은 아주머니도 늙은 할머니가 되셨다.

내가 일했던 공장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자 심박 수가 더욱더 빨라진다.

참 신기하다.

15년 전 김포에 처음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그때 2명의 아주머니가 김포에 있는 내가 일할 곳으로 승용차로 데려다 줬다.

높은 건물. 재밌을 것 같은 곳이 많은 서울을 떠나 논밭 밖에 없는 김포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19살 어린나이에 시골 같은 곳보다 볼게 많은 서울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주말마다 나는 서울에 꼬박꼬박 올라가서 서울에 있는 친구들 공장에 놀러 갈거나, 동대문시장이나 광화문교보서점 등에 구경하러 갔었다. 아마 한국 드라마 에서 본 대도시에 거주하지 못하고 시골에서 살게 된 어린 결혼 이주여성들도 나와 같은 기분일 것 같아. 누가 재미없는 곳에 살고 싶겠나.

드디어 도착.

내가 8년 동안 일했던 일터, 먹고 잤던 집이 있는 공장.

이젠 이미 이사 가버려서 공장은 완전 폐쇄 상태다.

나는 한참동안 공장 앞에 서 있었다.

공장 내 내가 일했던 자리. 내가 생활했던 낡은 집. 출입국단속반에 잡혀간 내 소중한 친구들이 열심히 일했던 자리. 하루에 15시간 이상 우리와 함께 수고했었던 낡은 기계. 이젠 쓸모없어서 버리고 갔네.

우리공장. 종이 상자를 만든 작은 공장.

이곳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아무도 일하러 오지 않았던 곳 이였다.

사장님의 동생도 며칠 일하다가 그만뒀고 일이 아주 힘들다는 선박에서 일했던 내 친구도 일주일 일하다가 말없이 도망갔던 이 곳. 그는 나한테도 왜 그 지옥 같은 공장에서 계속 있냐고 했었다. 그의 질문에 내 대답은 아주 단순했다. 첫째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나쁘지 않아서. 둘째 월급 제때 줘서. 셋째 힘들어서 포기한다면 더 이상 해 낼 것이 없을 것 같아서. 넷째 내 역사에 포기했었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원치 않아서...

 

하지만 거기서 계속 일하게 된 이유 중 큰 이유하나는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 할 곳은 그런 곳 밖에 없다는 것. 또한 그런 곳들의 필요성 때문에 우리들이 한국에 들어 와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도, 이주노동자들도 아무도 오랫동안 일을 해주지 않아서 나는 아주 일 잘하는 내 친구3명을 회사에 소개 해줬고 나와 내 친구들의 노력함으로 작은 공장이 큰 공장으로 변했다.

 

6년 후 나도 주임이 됐다. 나보다 3년 늦게 회사에 들어온 내가 일을 가르쳐줬던 한국인 후배가 계장이 됐다. 내 후배이지만 그는 한국인이니까 그게 가능 할 수 있다고 마음 편히 생각 해 줬다. 하지만 그는 그 후에도 나에게 일을 계속 배워가면서 했었고 가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했다. 그러 때마다 나는 참 불편했다.

 

내키 만한 입구를 가진 작은 공장에서 큰 공장이 되어 우리 사장님도 사장다운 사장이 됐다. 그는 새벽에 일이 끝나고 야식 할 때마다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전에 내가 데려온 친구들이 일이 힘들어서 그만둘 때마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서 친구들이 가도 나는 오랫동안 여기서 있어라. 내가 버마갈 때 뭘 해주겠다고 진지한 모습으로 약속 했다. 나는 그 뭘 해주겠다는 것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 약속 때문에 거기서 8년 동안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장님에게 정도 들고 나에게 형제 같이 잘 해 준 한국 분들, 나 때문에 참고 일하고 있는 내 친구들 때문이다.

 

내가 일 잘 한다는 소문이 나서 우리공장에 방문한 몇 몇 사장님들은 나에게 다가와 30만원 더 줄 테니 우리 회사 와서 일 해주겠냐고 물어 볼 때마다 나는 거부했었다. 왜냐면 돈 때문에 정을 끊고 좋은 친구들을 배신하기 싫어서 그랬다.

하지만 우리 사장님은 약속을 안 지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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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11:55 2010/10/2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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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요즘 나는 정말 바쁘다. 학교와 여러 단체들에 이주관련 강연과 공연, 그리고 MWTV 활동으로 정말 몸이 두 개, 세 개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작년 말 회사를 그만 두고 나니 사장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 참 행복하다. 15년 동안 평일활동이 있는 날이면 사장이나 상사한테 거짓말로 이유를 대고 나오곤 했다. 정말 싫은 일이다. 또한 회사에서 내가 맡은 일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면서 활동하는 것도 나를 힘들게 했다. 특히 주5일 근무제라면서 토요일마다 일을 시키는 부장한테 활동이나 공연 때문에 토요일에 일을 못한다고 매번 얘기하는 것에도 지쳤다. 그리고 내가 맡은 일을 할 줄 아는 직원이 없어 토요일에 작업할 일을 전날에 미리 해놓으려고 2배 속도로 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젠 돈은 회사일 할 때처럼 못 벌지만 왠지 맘이 편하고 참 좋다.

한국인들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시기에 돈 안 되는 활동을 한다며 나오는 것은 이주노동자인 나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선택이었다. 200만원이 체 되지 않는 월급이 한국 사람에게는 작을지 몰라도 이주노동자인 나에게는 정말 큰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5년 동안 일과 활동을 병행 하면서 너무도 답답했기에 자유롭게 활동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집회에도 나가고, 아무 때나 공연도 하고 싶었다. 부족한 공부도 해서 보다 나은 활동도 하고 싶었다. 특히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정확하게 보고 내일을 가늠해 보고 싶었다. 결국 사장은 나에게

“회사를 선택 할래? 활동을 선택 할래?”
라고 물었다. 나는 당당하게
“활동가로서 계속 살아 갈 것입니다”
라고 답 할 수 있었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본보다 인간의 소중함을 소중히 하는 활동가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고 나부터 그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주 쓰는 ‘그리 당첨되기 어렵다는 로또도 매주 한 명 정도는 나오는데, 이주민활동가는 10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합니다.’는 말이 과도한 것 같지 않다. 가진 것 없는 이주민이 오래 동안 살아가기 어려운 한국에서 활동을 하겠다는 이주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혹 마음이 있더라도 활동가를 적으로 보는 이런 상황에 오랫동안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어느 날 법무부 관계자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을 조직해서 사회를 흔들고 있는 너 같은 사람을 어떻게 난민으로 받아 주겠냐? 난민으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우리랑 같이 살아가도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내가
“저도 버마에 민주화를 위해서만 활동을 집중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들께서 한국 사회의 구성원인 이주민들이 임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사회, 한국말을 알아 들지 못 해서나 다른 이유로 발생한 사업장 폭행. 욕설이 없는 사회, 다른 피부색, 다른 문화와 가난이 죄가 되어 무시당하는 것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주실래요? 책임 맡아 주실래요?”
라고 말하자 그는 그냥 웃으면서 나를 보고만 있었다.

‘차별하지 말라고, 평등하게 함께 살자고, 사회의 약자도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나와 이주민 활동가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함께 사는 다문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은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것 보다 더 이루어지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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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9 00:33 2010/10/19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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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모뚜, 안녕하세요!
 
 몇 주 전,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에 오셨었잖아요.
둥그런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학생들 중 한명인 고담이라고 해요.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소모뚜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어요.
  
 한 달동안의 네팔 여행을 앞두고, 소모뚜를 처음 만난 어느 상쾌한 아침.
 
낯선 사람 소모뚜는 시선을 확 사로잡았어요.
낯설어서가 아니라, 소모뚜만의 매력으로요.
소모뚜가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요.
 
그날 제가 만난 소모뚜는, 꿈과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어요.
소모뚜가 하고 있는 일들이 쉬운 것들은 결코 아닐텐데,
소모뚜는 굉장히 행복하고 즐거워보였어요.
  

 이전에도 이미 들어보았던 이주노동자의 '불행한 이야기'들.
만약 그 뿐이었다면 제 맘이 그렇게 울렁거리진 않았을 거에요.
 
 그러한 불행한 이야기가 어떠한 '결말'이 아닌, '시작점'에 놓여졌다는 것,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이 훨씬 더 많고, 그러기 위해 소모뚜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온 몸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들이 제 맘을 다 후끈거리게 했어요. 정말 뜨거웠어요.
 
 제 머릿속,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수동적인 이주노동자의 그림을 뒤엎는
마이크를 손에 쥐고 목소리를 외치는 능동적인 그들의 모습들이
너무나 좋았어요. 전에는 전혀 몰랐던 버마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음이 아팠어요.
특히 우리나라가 버마가 아닌 '미얀마'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과,
인간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대한민국과 '미얀마'의 두 정부.
 
 앞으로 기회가 되면 버마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어요.
 
 우리나라와 흡사한 버마의 역사를 들으니,
옛날 우리나라에 어려움이 있었을 때 외국에 나가 여기저기 다니며 운동했던 과거의 역사적인 인물들의 모습이 현재 내 앞에 있는 소모뚜에게 겹쳐지는 게 재미있었어요. 지금까지 내가 국사 교과서 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과거의 그 사람들이,현재의 소모뚜인 거에요.후에 버마의 아이들이 역사 교과서에서 만날 인물을 내가 지금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정말 네팔에 가기 싫었어요.
따뜻한 물로 세수를 못 한다든지, 난방도 되지 않는 곳에서 옷을 껴 입고 자야한다든지 하는 사소한 불편함들과'저개발국가'하면 막연히 연상되는 치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요.
 그런데 소모뚜를 만나고 나서,
네팔에 가면 만날 미누, 씨티 버럴, 어르준은 어떤 사람일까가 궁금해지고, 어서 만나보고 싶어지는 거에요.
그렇게 네팔여행에 처음으로 맘을 열게 되었어요.
  그리고 오늘 저녁, 드디어 네팔 여행을 떠나요.
가기 싫다고 칭얼대었던 게 다 거짓말처럼,
이제는 네팔에 빨리 가보고 싶어요. 정말, 너무너무 설레요. 여행이 기대되요.
 다행이지요!
 그 날, 후끈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정말 정말 멋있었던 소모뚜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요.
 소모뚜를 알게 되어 기뻐요.
 
 소모뚜.
 언제나 건강하세요.
 
고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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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7 01:26 2010/10/07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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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추운 겨울.
서울시 성공회 성당 앞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반대와 전면 합법화 요구 농성장.
버마, 네팔, 방글라데시,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중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이주민지원 단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오래된 친구들을 내쫓지 말라고
소리 높였다.

나도 공장에서 나와 농성장에 참여했다.
우리의 주장은 우리는 한국경제의 필요한 밑바탕 역할로 최선을 다해 성실히 일해 왔고
97년도 외환위기 때도 한국을 떠나가지 않았고 한국 경제 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해왔고
2002년도 월드컵 때도 한국 축구팀을 무조건 힘찬 응원했다.
슬플 때나 기쁠 때 함께 했었던 진정한 친구 역할을 했었는데
이렇게 정을 끊고 눈을 감아 무조건 내쫓는 것보다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현대판 노예제도인 산업연수제도를 폐쇄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허가제를 요구한 것이었다.

농성이 시작하자 우리들이 외친 구호들은
“스톱크랙다운(강제 추방 증단)
노동권리 보장.
우리는 노동자
노동자는 하나다.”
이었다.

우리는 농성장 내에서도 밖에서도 그 구호들을 수십 번 외쳤다.
나는 그러다가 지루하겠다고 생각이 들어 구호들을 노래로 만들어 줬다.
노래의 제목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였다.
노래가 신나고 쉽기 때문에 농성 동안 우리는 여러 번 즐겁게 부르면서 우리의 요구를 외쳤다.
요즘도 서울지역을 포함해 지방 이주민 인권 쟁취 요구 집회 때도 이 노래를 꾸준히 틀러 부르고 있다.
얼마 전 아시아 지역 NGO활동가들이 한국에 왔을 때도 이 노래를 좋아해서 열심히 외워 공연도 해 주셨다.
노래가 신나다는 것 보다 노랫말이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노동자의 권리요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농성을 함께 하는 음악인 이주민들과 함께 “스톱크랙다운”밴드를 결성해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들을 계속 만들어서 농성장 내 이주민들에게 희망을 향한 힘을 함께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들을 농성장 주말 문화제 때 시민 단체들의 행사 때 공연을 했었다.

농성 중 어느 날.
농성단 대표가 우리밴드에게 하루 안에 녹음을 다해서 음반을 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음반을 하루 안에 녹음을 다하자는 것이 음악 하는 나에게는 반가운 일은 아니다.
마음에 들 때 까지 녹음을 꼼꼼히 해서 질 좋은 음반을 내고 싶은 게 음악인들의 욕심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음악적 욕심이 우선이 아니라
우리의 음반을 통해 우리들의 세련 된 문화적 이주운동에서 얻은 효율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안에 녹음을 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료로 녹음해줄 스튜디오는 아주 바빠 꽉 찬 일정 속에서 하루를 비워 주겠다고 하는데
그 날이 지금부터 8일째 날 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7일 동안 음반에 들어 갈 노래들을 작곡, 작사와 연습까지 다 완성해서
8일째 날에 녹음을 하루 안에 다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가능한 꿈이지만 현실주의자인 우리는 우리가 해낼 수 있을지를 확인해 봤다.

모든 멤버들이 가능하다. 해보자고 자신 있게 답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이주민지원센터 지하 쉼터에 있는 작은 방에 드럼과 각종 음향들을 이동해 7일 동안 아침부터 새벽까지 작곡, 작사와 연습을 미친 듯이 했었다. 나는 대부분 노래들을 작곡을 해야 하기 때문에 걱정과 불안, 책임을 아주 무겁게 들어 노력했었다. 몰론 한국어를 아주 잘 하는 미누형(보컬)이 작사를 해주고 맴버들의 적극적 의견들이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8일째 날.
우리는 녹음실로 가는 길에서도 계속 노래가사를 수정했다.
우리는 그날 오전10시부터 새벽1시 까지 점심과 저녁 밥 먹는 시간 외에 쉬지 않고 녹음을 했었다.
녹음이 끝난 새벽1시.
원래 기타 주자인 내가 드럼을 하루 종일 치게 되어 허리가 심하게 아팠지만
특별한 사고가 없이 녹음이 잘 끝내게 되어 아주 기뻤다.
하루 종인 쉬지도 않고 녹음을 해서 힘이 들어도 힘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밴드 멤버들이 그리 당당할 수 있었다는 이유는 우리들의 희망이 담긴 노래들에서 얻은 힘 이였다.
녹음이 끝나자마자 스튜디오 내 모든 엔지니어분들이 모여서 믹싱을 급히 했었다.
새벽 3시에 드디어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긴 첫 음반이 탄생했다.
그 음반의 이름은 “친구여 잘 가시오”이였다.
강제추방 공포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게 된 이주민들에게 잘 가시라는 뜻이었고
세월이 흘러가도 그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 헌신한 것을 잊지 말라는 이유로 음반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여기서 더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가 있었다.
바로 녹음실 주인의 이야기다.
그날이 아내 생일 이였는데 우리의 음반을 위해 아내와 함께 보낼 시간을 포기하셨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남들과 다른 아주 소중한 선물을 주셨다.
그것이 이주민들의 목소리가 담긴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희망하는 음반을 함께 만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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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18:04 2010/10/0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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