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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5/01/24 나? 냉정한 엄마.그리고 못된 딸년. (2)
  2. 2005/01/23 어디선가 우연히 만나게 될때..
  3. 2005/01/22 빈민탁아에서 보육노조건설까지 (3)
  4. 2005/01/12 관계맺기..우리가 아이들에게 배워야 할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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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냉정한 엄마.그리고 못된 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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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본능..그거 사실 아닌거 같다.

사회과학적 진실뭐 이런거 다 떠나서 나만봐도.

 

난 냉정한 엄마다.

내가 너무 중요해서 아들보다 내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나도 아침에 쭌이 밥먹이려고 애쓴다.

여섯살되서 저 혼자 밥먹기로 약속했는데.어느 순가 무의식적으로 밥 떠먹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쭌이가. "엄마 왜 밥 먹여줘요. 혼자먹기로 했잖아요."한다. 물론 지 혼자 먹을 의사도 없으면서.

근데 내가 왜 밥을 떠먹이나 생각해보면.

밥먹는게 느리 넘이. 게다가 많이 도 먹는 넘이.어린이집에 가면 제대로 못먹을 것이 분명하기에 아침이라도 든든이 먹여야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리고 그 행동에는 같이사는 친정엄마 눈치보기도 있다.

사실은  바쁜 아침시간에 삼십분씩 늘어져서 밥먹는 꼴을 못보겠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내가 아이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경우가 그렇다.

아이를 '위한' 마음과 내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경우, 나의 불편을 줄이려는 이유가 공존한다.

그래서 뭐가 진실인지 나 조차도 헷갈릴때가 많다.

 

난 나쁜 딸이다.

칠순이 너머 팔순이 다되어가는 엄마한테 뻑하면 신경질이다.

나가면 성격좋다는 얘기도 듣곤 하는데 엄마한테는 그게 안된다.

왜그러는지 잘모르겠는데.. 엄마가 내 얘기를 두번만 연속해서 못알아들으면 짜증이 난다.

그래도 엄마는 그 짜증을 잘도 받아낸다.

어느 순간.

왜 나한테 신경질내냐? 고 반항할 때가 있긴 하지만.-그럴땐 진짜 뻘쭘하다. 이유를 댈 수 없으니까..

 

우리 쭌이도 그런다.

가끔 지 할머니한테 하는 꼴을 보면. 민망하다. 내가 하는 꼴을 보고 배운듯 싶어서.

 

하루는 할머니가 쭌이에게 넌 왜 할머니한테만 그렇게 화내냐 ? 하고 물으니까

쭌이 말한다. "할머니는 나한테 화 안내잖아"

허걱.

 

냉정하고 논리적인 지 애미는

합당하지 않은 화에 대해서는 받아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쭌이는 화를 잘 참는다. 나중에 병될까봐 걱정스러울 정도로.

 

가끔은 쭌이에게 외할머니가 있어서 참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모성의 신화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외할머니가 냉정한 엄마가 채워주지 못하는 구석들을 채워주고 있으니까. 근데 그렇게 살아온 우리 엄마가 행복했는지 어떤지는 안물어봤다.

 

애 키우는 일은 정말 어렵다. 어떻게 해도 정답은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찾아낸 내 마음을 위로하는 말은 이거다. "다 지복이지"

 

'아이는 길을 묻는 손님이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부모의 역할은 그저 내게 길을 묻는 이에게 친절히 길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메시지의.

그래서 과도한 책임감과 아이에 대한 소유의식을 좀 버려야 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나 늘 망설이고 헷갈린다. 부모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서는...

 

오늘밤 우리 쭌이가 잠들면서 한마디 한다.

"엄마 늦게까지 컴퓨터 하지 말고 자세요" 크으..역할이 전도된것 같은 모자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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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4 01:33 2005/01/24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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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우연히 만나게 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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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연한 장소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만날때

아주 반갑거나 아주 불편하거나 하다.

 

오늘 그랬다.

아주 우연한 장소에서 그러니까 내가 스믈네살이었던 때

탁아소에서 돌보던 아이의 엄마를 만났다.

그 아이는 고3이 되었다고 한다.

 

영화예매 시간이 10분밖에 안남아

서둘러 인사하고 명함 주고받고 급히 일어서려는데

 

미지 엄마가 말한다.

선생님들이 너무 잘해주셔서..

미지 학교가서 반항 많이 했어요..

다들 자기한테 그렇게 해줄거라고 생각했었나봐요.

 

짧은 말끝에 어..예.. 대답하고 서둘러 일어서 헤어졌다.

 

여러가지 생각이 난다.

 

아이를 키우는데서 최선은 없나보다.

그 아이는 자기가 받은 사랑이 항상적이지 않다는 것에 화가 났었을까?

언제 한번 만나보고 싶다.

 

미지 엄마는 미지 학교보내면서 속썩을때 마다

그 생각을 했겠지?

선생님들이 너무 예뻐해서 ...그렇게 원망하면서..

그러니 십년도 더 지나 첫만남에 그 이야기가 젤 먼저 튀어나왔겠지..

 

쭌이를 키우면서도 그렇다.

난 최선을 다해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그 아이에게 최선인지 누가 알랴..

 

작년엔 몇몇이 모여 돌봄에 대한 공부를 했다.

요즘은 몇몇이 모이 아동인권 공부를 한다.

그때 그 어린 선생이었던 내가 했던 실수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른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정말로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최대한 눈을 열고 귀를 열고 찾아내는 것 뿐인듯 싶다.

 

아이 키우는 일 참 어렵고 힘들다.

내 아이건 남의 아이건.

그리고 두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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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3 04:34 2005/01/23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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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탁아에서 보육노조건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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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본 탁아운동의 역사

-빈민탁아에서 보육노조 건설까지-


 

1990년은 내가 학교를 졸업하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3월9일에는 다섯 살, 네 살 먹은 혜영이 용철이 남매가 연기에 질식해 죽은 바로 그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파출부와 경비로 일을 나가야 했기에 아이들은 잠긴 방안에 있었습니다.


진로를 고민하며 찾아간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 남영동 사무실에는 최선희 선배가 있었습니다. 이제 막 졸업한 새내기가 탁아활동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을 때. 선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광도 없고, 사회적 주목도 없으며, 오랜 헌신만이 있는 이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부천 오정동에서 탁아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엄마에게 일할 권리를! 아이들에게 보호 교육받을 권리를!


부천에 단 세 개뿐인, 동네에 단 하나뿐인 탁아소에서 하루 12시간을 일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엄마들을 만나며, 어린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돌보는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맘 편히 일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때 선배들은 탁아법 제정을 위해 치열하게 준비했고, 탁아소 막내인 나 역시 부천 역에서 엄마들과 함께 피 세일을 하고, 서명을 받고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꿈이 모여진 탁아법안은 정부의 책임성을 삭제당한 채 1991년 민자당에 의해 날치기 통과되었습니다.

이제 제도적 공간으로 들어 온 탁아는 보육이라는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고, 정부의 여성인력활용이라는 정책적 필요에 따라 민간시장에 맡겨진 채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보육의 질은 보육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


마구 양산되던 보육시설은 수익성 있는 여성부업 정도로 인식되어 방송은 앞다투어 보육시설 운영의 투자성에 대해 홍보하였고, 많은 여성들은 단기과정을 통해 보육교사로 양성되었습니다.

1997년 한국보육교사회로 전환한 우리의  슬로건은 보육의 공공성 확보! 영유아보육법을 개정! 보육의 질 향상! 이었습니다.

이제 어린이집은 아이를 맡기는(탁아) 곳이 아니라 보호하고 교육(보육)하는 곳이라고 불립니다. 때문에 보육교사들은 이름에 걸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동네마다 어린이집 놀이방 간판이 즐비하지만, 여전히 언론에서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는 부모들의 인터뷰가 나옵니다. 대부분이 영세한 민간자본으로 운영되는 보육사업은 여전히 보육교사들에게 직업적 헌신을 강요하고 있고, 보육교사들의 노동시간은 내가 일하던 때인 10여 년 전보다 겨우 2시간 정도 줄어들어 하루 10시간을 육박합니다.


행복하게 자랄 권리! 행복하게 일할 권리!


2004년 1월 영유아보육법이 개정되었습니다. 법 제정에 걸린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보육교사의 현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육교사의 질 관리를 위해 양성과정을 강화하겠다고는 하나, 보육교사의 처우는 별다른 고려의 대상이 못되는 모양입니다. 여전히 조금만 더 참아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참아야 하는지 좀 헷갈립니다.

이제는 보육의 질은 보육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는 말에 많은 분들이 동의합니다. 그러나 보육교사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들이 배우고 있는 교과 과정뿐 아니라, 그들이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시간,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2001년부터 시작한 조직논의 끝에 우리는 작년 한해를 보육노조 건설에 올인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1월 행복하게 자랄 아이들의 권리와 행복하게 일할 보육교사와 부모들의 권리를 모두 담아 전국보육노조가 출범하였습니다.


다시 혜영이와 용철이를 생각하며


지금 내 아이 또래였을 혜영이와 용철이를 생각합니다.

살아있다면 성년이 되어갈 그 아이들의 아까운 죽음과 탁아운동 선배들의 노력을 기억합니다. 처음 남영동사무실에서 내 앞에 놓여있던 삶의 불확실성에 두려워하던 스믈 넷 젊은 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앞에 놓여질 새로운 길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제는 든든한 짝이 옆에 버티고 있고, 우리는 새로운 과제를 받아 안을 것입니다.


[우리네아이들]의 첫 제호가 [함께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네아이들을 위해 함께 가는 길에 더 많이 이들과 손잡을 수 있을거란 희망찬 기대를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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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03:52 2005/01/22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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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맺기..우리가 아이들에게 배워야 할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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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의 관계맺기와 성인과의 관계맺기에서는 늘 좀 다른 점을 발견하곤한다.
아이들과는 관계맺기는 뭔가 좀 쉬운듯 싶기도 하고, 매듭이 생겨도 잘 풀리기곤 한다.
그런데 성인들과의 관계에서는 한번 생긴 매듭을 풀기가 몹시도 힘들다.

 

암튼,
문제의식은 거기에서 출발했다.

관계맺기에 관심이 많은 구성원들과 함께했던 모임에서
우린 이 문제의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갈등이 발생했을때,
그 대상이 아이들인 경우 심각한 문제가 안되는데 성인들과의 갈등은 해결하기 힘든가..하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나와 관계맺는 대상이 아이들이기에 갈등이 발생해도 나의 태도가 좀더 성숙(?)하고
여유있으며,좀더 교육적 관점에서 접근하기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했었다.

 

진행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임 리더이신 선생님이 메모지에 몇가지 단어를 적었다.

 

-기대..

-용서..

-헌신적 관계..

-완전한 신뢰..

-겉과 속이 같음..

-열려있다..

 

뭐 이런 단어들이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미루어짐작하실 수 있으실런지...

.



(그날 이야기 되었던 내용의 전부를 올곧이 옮기지 못하는게 무쟈게 아쉽다.)

 

성인들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기대가 무너졌을때, 분노하거나, 서운해 하거나, 상대방에 대해 포기하거나 하기 쉽다.
그러나 아이들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때에도 상대방에게 분노하거나 그로 인해 상대방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고..여전히 새로운 기대로 대한다.

 

성인들은 마음으로 부터 용서하는 것에 익숙치 않다. 용서보다는 냉담에 차라리 더 익숙한것 같다.
그러나 아이들은 쉽게 용서한다. 방금 치고받고 쌈하던 친구와도 시간이 좀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놀이에 열중한다. 좀 전에 자신을 야단치던, 그래서 자신을 몹시도 서운하게 했던 선생님에게도 좀 지나면 다시 맑게진 얼굴로 미소지으며 달려온다.

 

성인들은 타인과의 관계맺기에서
맘 속으로 이해득실을 따지기도하고(더러는 그게 드러나보이기도 해서 민망해지기도한다),
때론 뭔가 손해본다는 생각이 들면 관계맺기에 멈짓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세계에선 이득을 고려하여 맺는 관계는 없다. 아이들은 관계맺는 사람에 대해 온몸을 던져 애정을 보낸다. 아이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매우 헌신적이다. 아이들은 타인과의 관계맺기에서 완전한 신뢰를 보여준다.


성인들처럼 상대방이 나에게 거짓을 보여주는지, 혹은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지 기타등등 골치아픈 의심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성인들처럼 싫어도 좋은척 한다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관계를 포장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겉과 속이 같다.

 

아이들은 열려있다. 늘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이다.
성인들은 어떠한가? 타인을 완전히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많은 규정과 '나'가 있지 않은가.

 

다시 생각해 보면,
아이들과의 관계맺기가 성인과의 관계맺기와 질적으로 다른것은.
관계맺는 대상이 아이냐 성인이냐에 따라 나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타인과 관계맺기를 하는 매우 훌륭한 자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임 리더선생님의 마지막 질문은

"성인들도 아이들과 같은 관계맺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누군가의 대답은

 

"있다. 언제냐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이다." 였다.

 

우리는 아이에서 성인으로 자라면서 진실한 관계맺기의 방식을 아주 잊은건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잊고 있었고, '사랑의 대상'을 매우 한정지어 놓았던 것 같다.

 

근데 난 결론이 아주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 쫌 석연치 않았다.

 

왤까?

사방천지에 넘처나는 '사랑'의 담론에 질려서?
혹은 그 퇴색된 '사랑'의 의미들의 너덜한 모습이 떠올라서?
아님 그 상식적 대답이 허무해서?

 

그러나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사랑'이면 어떻고 '아침'이면 어떠냐.
각자의 맘 속에 소망하는 그 어떤 감정의 실체는 존재하는 것을..

 

함께한 모임성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넘처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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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2 03:53 2005/01/12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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