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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봄 평전, “홉스봄, 역사와 정치”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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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봄, 역사와 정치>> (HOBSBAWM, History and Politics)

지은이: 그레고리 엘리어트 (Gregory Elliott)

Pluto Press, 2010

옮긴이: 신기섭

그린비, 2012 (한국어판)

 

 

 

 

 

 

 

 

 

 

옮긴이 후기

 

학자가 아닌 번역자는 언제나 두려운 마음으로 일을 대한다. 이 두려움이 가장 커지는 때는 후기를 쓸 때다. 무지한 탓에 오역을 쏟아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건, 책에 대해 촌평이라도 달아야 하는 두려움에 비할 바 못된다. 가뜩이나 이 책은 에릭 홉스봄이라는 역사학계 거물을 다룬 책이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번역자로선 평할 만한 것이 아예 못된다 싶다.

설상가상으로 홉스봄은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는 공산주의의 등장과 몰락 같은 격변의 20세기를 상징하는 역사학자이고, 공산주의의 최후까지 그 대의에 충실했던 공산주의자이며, 맑스와 그람시를 추종하는 현실 개입형 지식인이다. 역사학자임을 강조하면 전투적인 공산주의자의 면모가 약해지고, 공산주의자라는 데 눈을 고정하면 영국 정치 현실에 폭넓게 영향력을 행사한 면모와는 뭔가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국 학자 그레고리 엘리어트의 이 책은 이렇듯 다양한 면모를 갖춘 홉스봄한테 일반인도 큰 어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게 도와준다. 엘리어트가 보여 주는 것들은 첫째 홉스봄이 전투적인 공산주의자이자 맑스주의 역사가로 형성되는 과정, 둘째 진보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그의 관심 주제, 셋째 20세기에 대한 홉스봄의 시각 요약 및 검토다. 이 세가지 주제로 들여다볼 때 홉스봄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일관된 특징은 완고하다 싶을 만큼 투철한 계몽주의다. 홉스봄은 근대 계몽주의를 잇는 마지막이자 정통성 있는 후계자가 맑스주의라고 믿는다. 그리고 20세기 공산주의 혁명에서 진보와 계몽의 미래를 본다. 이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후회하지 않는다. 대책 없는 구시대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야만을 넘어서는 진보에 대한 믿음에는 쉽사리 폄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곰곰이 따져보기를 기대하고픈 대목이다.

 

엘리어트가 그려 보여 주는 홉스봄은 이념에 충실한 원칙주의자만은 아니다. 황당하다 싶을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도 있다. “클린턴이 특이한 방식으로 말한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가 본능적으로 전통적인 좌파의 가치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걸 뜻한다. ......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그는 미국 좌파의 가장 바람직한 전통을 따르는 민주당원처럼 보였다.”(『새로운 세기』, 1999, 107쪽) 정통 공산주의자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다른 좌파 인사가 말했다면 “변절자”, “노망” 따위의 딱지가 바로 붙었을 것이다. 영국 공산당 소속이면서도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 정권에 맞서기 위해 노동당 개혁에 개입한 행태도 “후회하지 않는 공산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도 있다. 홉스봄은 나치의 파시즘에 맞서 문명을 지켜낸 반파시즘 투쟁이 20세기 공산주의의 중요한 공헌이라고 본다. 그리고 야만과 어둠의 세력에 맞설 유일한 세력으로서 공산주의(또는 맑스주의)가 선택한 방법은 반파시즘 연합(인민전선)이었다. 이 인민전선은 계몽의 마지막 후계자 홉스봄한테는 거의 절대적인 정치 전술이었고 이 신념은 20세기 후반부에도 별로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미국의 클린턴과 민주당, 영국의 노동당에서 레이건과 대처의 반동에 맞설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로 해석한다면, 홉스봄의 이런 태도는 과잉일지언정 일탈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기대하고픈 두번째 쟁점이 이 대목이다. 문명이든, 진보든, 또는 민주주의든, 양심 세력이 품은 이상을 위협하는 세력에 맞서는 연합 전선은 어디까지 유효하고 그 한계는 뭘까? 마침 “반엠비” 기치를 내건 야권 단일화가 실패로 끝난 한국 상황에서 이 질문은 한가한 이들의 이론적 고민거리만은 아닐 수 있겠다.

 

이 책이 보여 주는 홉스봄한테는 재미있는 구석들도 꽤 있다. 재즈에 심취해 록 음악을 깎아내리고 비틀스가 잠깐 유행하다가 사라질 거라는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예측을 한 인물이다. 68혁명 이후 프랑스 좌파,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맑스주의자, 마오쩌둥의 중국,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싫어한 반면 이탈리아공산당에 대해서는 무한에 가까운 애정을 보여 준 인물이다. 또 1970년대 초 아옌데의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다가 막상 쿠데타가 터진 뒤에는 시치미 뚝 뗀 전력도 있다.

 

짤막한 글을 맺으며 번역 문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번역자의 이전 번역물들에 비하면 훨씬 ‘읽기 쉽게’ 만들려 애쓴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많은 독자들한테는 불친절하고 난해한 글일 것이다. ‘읽기 쉽고 훌륭한 번역문’은 이 번역자 능력 밖의 일이니 어쩔 수 없다. 다만 오역이나 쏟아내지 않았다면 다행이겠다. 그나마 출판사 편집자가 여러모로 애를 쓴 덕분에 이 정도의 결과물이 나왔다. 번역자로서 바라는 바를 덧붙여도 괜찮다면, 긴 문장을 짧게 나누고 더 쉽게 풀어 옮기지 않은 의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품는 독자가 혹시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런 독자한테는 번역자의 블로그(blog.jinbo.net/marishin) 방문을 추천한다.

이 책이 독자들한테 이런저런 도전을 제기한다면, 번역자한테는 더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2012년 4월
신기섭

#번역은 늘지도 않는다, 창피하게...

2012/05/16 10:01 2012/05/16 10:01
6 댓글
  1. EM 2012/05/16 16:36

    링크겁니다^^ 옮긴이와의 대화.
    http://socialandmaterial.net/?p=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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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EM 2012/05/25 15:42

    간만에 뵈어 반가웠고, 수고 많으셨어요. 고맙습니다. 책은.. 주신건 다른 친구에게 양보했고, 저는 새로 샀으니 저는 "자격" 있는거죠? ^^ 하지만.. 읽어야 할텐데..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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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9/07 17:14

    나는 홉스봄을 싫어한다.

    홉스봄은 알려진 것과 달리 백인 남성 우월주의자다. 이 사람 글을 보면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아주 하찮게 여기고(그는 식민주의자다) 페미니스트들을 아주 경멸하고 게이와 같은 성소수자들을 아주 혐오하고 흑인운동을 무시하는 철저히 유럽중심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는 백인 남성 마르크스주의자가 홉스봄이다.

    너무 그런 거는 모르고 우리 학계에서는 이른바 진보 또는 이른바 보수 학자 전부 다 홉스봄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거 같다. 그러니까 말이다.

    어쨌든 홉스봄은 그런 사람이다. 책을 면밀히 읽으면 그런 것을 알 수 있고 파악이 되는데 왜들 그렇게 홉스봄이라면 늘 난리들을 부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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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뽀삼 2012/09/10 14:26

    엘리어트의 책이 쾅님이 언급한 모두를 다루지는 않지만, 제가 볼 때는 홉스봄에 대해서 과도할 정도(?)로 비판적으로 접근한다고 느꼈는데요. 그리고, 홉스봄 싫어하는 사람들도 꾀 있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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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홉스봄, 역사와 정치 출간 기념 역자와의 대화 먼 댓글 보내온 곳 가갸거겨고교구긔! 2012/06/03 00:44

    제목과 같은 행사가 5월 24일 목요일 7시 반에 있었다...; 너무 뒤늦게 적는 후기 ㅜㅜ 홉스봄 스펠도 쓸 줄 모르던 나인데다 책 읽은 것도 없고... 홉스봄에 대한 내 관심사라면 딱 두 가진데 하나는 단연 90살 넘도록 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뭔가 등등이고 다른 하나는... 얼굴이다 -ㅁ-;; 검색해서 젤 첨에 나온 사진임 ㅇㅇ 나 안티 아님 얼굴이 못 생겼다고 뭐 디스하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그렇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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