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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으로 알아보는 동티모르

스티븐 샬롬, 노엄 촘스키, 마이클 알버트

<제트 매거진> 1999년 9월

 

오랜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한 학살의 현장 동티모르, 그 역사와 학살의 배경, 미국 등 서구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등을 문답으로 정리해놓은 글입니다. 이 글 하나로 동티모르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모두 해소될 것입니다. 류석원님이 번역해 주신 것을 약간 손봤습니다.



 

 

1. 1975년 이전까지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무엇이었나?

 

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국가들의 아시아 식민지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것이었다. 즉, 그 지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좌익이었던 곳에 대해서는 (베트남에서처럼) 유럽의 식민통치 강화를 지원하였던 반면에,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이 좌익적이지 않았던 곳(예를 들면, 인디아)에서는 미국과 경쟁하는 세력의 독점적 지배권을 제거하는 방법의 하나로 그들의 독립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자들이 그다지 (미국에) 순응적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의 도움도 받는) 영국군은 역시 미국의 도움으로 무장한 네덜란드군이 복귀하는 길을 트기 위해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적대적 행동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1948년에 수카르노(Sukarno) 휘하의 인도네시아 온건파 민족주의자들이 좌익의 쿠데타 기도를 분쇄하자, 미국은 인도네시아 독립을 받아들임으로써 수카르노와 화해하도록 네덜란드군에게 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국은 수카르노가 위험한 중립주의자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아이젠하워 정부는 인도네시아의 허약한 민주 정부를 전복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 -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최대 비밀공작 - 이 수포로 돌아가자, 미국은 당시 대중적 기반을 갖추고 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대항할 세력으로 군대를 육성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가 약 50만명에서 100만명에 이르는 공산주의자, 좌파 의심자, 평범한 농민들을 학살한 끝에, 수카르노를 실각시키고 그 자리에 수하르토(Suharto) 장군을 앉히는 군부 쿠데타를 함으로써, (미국의) 이러한 전략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 쿠데타를 환영하고 자카르타에 무기를 쏟아부었으며, 심지어는 그들에게 공산당원들의 리스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군부는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체포하고 학살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연구에 따르면, "학살된 사람의 수를 놓고 보면" 1965년부터 1966년까지의 인도네시아 대학살극은 "20세기 최악의 대량 학살의 하나로 기록된다." 미국은 수하르토 정권과 군사, 경제, 정치적으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2. 인도네시아가 침략하기 이전 동티모르는 어떤 곳이었나?

 

17세기부터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티모르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이 작은 섬은 매릴랜드주(미국 동부 대서양 연안의 주 = 옮긴이)보다 약간 크며, 필리핀 남쪽 1,000마일, 오스트레일리아 북서쪽 400마일 정도에 있다. 결국에 두 식민지배 세력은 티모르를 분할하여 서부는 네덜란드가 차지해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옮긴이)의 일부로 편입시켰고, 동부는 포르투갈이 차지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가 인도네시아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자 서티모르는 이 신생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동티모르는 1970년대 중반 곧 포르투갈이 자신의 식민제국을 결국 해체하기로 결정한 때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동티모르는 종교, 언어, 수백년의 식민지 역사의 경험 등이 인도네시아와는 다르다.

 

3. 어떻게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 개입하게 되었나?

 

포르투갈이 동티모르를 통치하는 동안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에 대한 공격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정부가 동티모르에서 철수할 뜻을 선언하자, 수하르토 정권은 이를 자국의 영토와 천연자원을 확대할 기회로 봤다. 1975년 당시 동티모르의 인구가 70만명이었던 것에 비해 인도네시아의 인구가 1억3600만명이었던 사실로 볼 때, 동티모르는 손쉬운 목표물로 보였던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처음에 동티모르 지역 내의 쿠데타를 지원함으로써 동티모르의 독립을 막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도네시아는 치안유지를 핑계삼아 1975년 12월 동티모르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식 선전문구 - 이는 서구 언론이 자주 반복한 것인데 - 는 동티모르에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내전"(civil war)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인도네시아가 침략하기 이전에도 잠깐 내전이 있긴 했다. 하기야, 최근 25년 동안에도 나치가 유럽을 정복했던 것과 같은 '내전'이 있긴 했으니까.

 

4. 인도네시아가 1975년 12월 침략할 때 미국은 어떻게 기여했나?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략하기 전날 밤, 제럴드 포드(Gerald Ford) 미국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미국 외무(국무)장관은 자카르타에서 수하르토를 만나고 있었다. 키신저는 나중에, (그 회동에서) 동티모르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거짓말로 드러났다. 사실상 미국 정부는 수하르토에게 침략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인도네시아 군대가 침략 때 쓴 무기의 90%가 미국제였으며(침략의 목적에 군사지원을 하는 것을 미국 국내법이 금지하고 있음에도), 대 게릴라용 군사장비를 포함한 무기 공급이 비밀리에 늘었다.(이 점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해석할 때 꼭 명심해야할 것이다.) 미국은 또한 침략자를 외교적으로 지지했다. 미 유엔 대사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Daniel Patrick Moynihan)이 그의 자서전에서 자랑했듯이, 그는 국제기구가 인도네시아의 침략에 대처하는 데 무기력하다는 점을 국제연합안에 성공적으로 확신시켰다. 스스로 인권대통령임을 선언한 지미 카터(Jimmy Carter) 정부에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는 훨씬 더 늘었다. 1975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10억달러어치가 넘는 군수물자를 판매했다.

 

5. 인도네시아의 침략은 어떠한 영향을 미쳤나?

 

인도네시아의 침략 및 이후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은 약 20만명의 동티모르인들을 죽음 - 대량 학살과, 굶주림과 질병에 의한 죽음 - 으로 내몰았는데, 이 숫자는 동티모르 인구 전체의 4분의 1이 넘는 숫자이며, 전체 숫자로 볼 때 근대사 최대 유혈사태에 속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도네시아 군대는 고문과 강간, 대규모 강제 이주에도 개입했다.

 

6. 인도네시아의 1975년 침략에 대해 국제사회는 어떻게 반응했나?

 

인도네시아의 침략은 국제법과 자결권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는 침략을 비난하고, 인도네시아에게 동티모르에서 병력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국제연합 총회는 동티모르를 자국의 27번째 주로 포함시키는 인도네시아의 합병안을 거부했으며, 동티모르인들이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허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유일한 예외인 오스트레일리아를 뺀 어떤 국가도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많은 나라에서는 도덕성과 예의를, 인도네시아와 긴밀한 경제관계를 맺을 때 얻는 이익과 인도네시아의 많은 인구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압도했다. ("나는 인도네시아 -1억 8천만명이 살고 있고, 평균 연령이 18살이며, 이슬람교의 음주 금지조치가 내려져 있는 적도상에 있는 나라-를 생각하면,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 것같다." 코카콜라사의 회장이 1992년에 이렇게 말했다.) 또 인도네시아 군부에 무기를 팔 수 있을거라는 기대와 동남아시아에서 작은 규모에 속하는 나라(동티모르 = 옮긴이)와 관계를 맺는 것보다 가장 큰 나라(인도네시아 = 옮긴이)와 연합함으로써 얻는 지정학적 이득 역시 도덕성과 예의를 압도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원은 앞에서 이미 지적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인도네시아에 군사적 원조를 했고, 유일하게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동티모르 근해 석유매장을 나눠 가질 것을 기대하면서. 영국은 최근 인도네시아에 대한 최대 무기수출국이었으며, 일본은 최대 경제원조 및 해외투자국이었다. 캐나다는 경제 및 군사분야 모두에서 원조를 실시해왔으며, 네덜란드와 독일 역시 주요 무기 수출국이었다.

 

7. 티모르인들은 그동안 어떻게 저항했나?

 

티모르인들은 진정으로 고무적이고 용기있는 투쟁을 벌여왔다. 그들은 압도적인 적들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비폭력 저항을 만들어 냈으며 수동적인 저항을 벌였다. 학생들과 가톨릭교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방법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무기를 직접 들기도 하고, 게릴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시위에 참가하거나, 조직원들을 숨겨주는 식으로 말이다. 인도네시아가 끔찍하게 억압하면서 동시에 많은 자국민을 동티모르로 이주시켰지만, 동티모르인들은 계속 자결과 자유에 열정적으로 헌신했다.

 

8. 그동안 동티모르 외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대가 어떻게 진행되었나?

 

한동안은 작고 외로운 목소리만 울려퍼졌다. 예를 들어, 아놀드 코헨(Arnold Kohen)은 처음부터 줄곧 동티모르에 대한 연대행동의 중심에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에는 동티모르에 주의를 환기시키려 노력한 작은 단체들이 있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그 숫자와 행동은 늘어났다. 1991년 발생한 딜리(Dili) 대학살 - 인도네시아 군대가 평화적인 장례 행렬을 공격해 270명 이상이 학살된 사건(좀 더 정확한 자료를 살펴보면, 사망 271명, 실종 250명, 부상 3백82명으로 집계되었다. - 구수환, 월간 말 1998년 10월호, 148쪽 = 옮긴이) - 에 대한 상당한 분노의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학살은 미국의 자유기고 언론인 에이미 굿맨(Amy Goodman)과 앨런 나이른(Alan Nairn)(그는 최근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숨질 지경까지 갔었다), 그리고 학살장면을 비밀리에 찍은 한 영국 텔레비전 카메라기자에 의해 공개되었다. 종교단체와 인권단체들은 활발히 움직이게 되었고, 동티모르 행동연대(East Timor Action Network)가 찰리 샤이너(Charlie Scheiner) 주도로 구성되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많은 나라에서 견고한 조직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들은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동티모르 문제는 마침내 주류 언론에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언제나 정확한 내용은 아니더라도. 동티모르 활동가들의 열성적인 로비활동으로 미국 의회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점점 더 제한했다. 종종 미국 정부가 이를 교묘히 피해가기는 했지만. 1996년에 대외적으로 동티모르를 대표하던 호세 라모스 오르타(Jose Ramos Horta)(그는 당시 동티모르 저항국민회의(CNRM) 의장이기도 했다 = 옮긴이)와 동티모르의 정신적 지도자인 카를로스 필리페 시메네스 벨로(Carlos Filipe Ximenes Belo) 주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동티모르 사태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다.

 

9. 최근 실시된 국민투표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이며, 또 그 결과는 어떠했나?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대중집회 이어지고 경제위기와 거대 부패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수하르토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B. J. 하비비(Habibie)는 총선과 동티모르의 장래를 묻는 국민투표 실시 요구를 받아들였다. 인도네시아 총선에서 제1 야당 지도자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Megawati Sukarnoputri, 52살인 그는 수카르노의 맏딸로 현재 인도네시아 민주투쟁당 당수이다. = 옮긴이)가 승리했다. 그러나 만약 그가 11월에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해도(하지만 그 이는 10월20일 대통령 선거에서 하비비가 사퇴했음에도 당선되지 못했음 = 신기섭), 인도네시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안전기구(national security apparatus)를 해체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동티모르의 장래를 묻는 국민투표의 조건에 대한 협상에서, 국제사회는 결국 인도네시아의 기본 원칙을 따르기로 합의하였다. 국민투표는 권력을 쥐고 있는 인도네시아가 실시하기로 하였다. 국제연합은 수백명의 비무장 선거감시요원들을 파견하기로 결의하였지만, 이들에게는 준군사조직("민병대")의 행동을 멈추게 할 수단이 없었다. 이들 민병대는 인도네시아 군대가 조직했고, 군대의 지시와 직접 개입 아래 대규모 테러를 저질러왔다. 특히 그들의 특공대(코파서스, Kopassus)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훈련을 시킨, 무자비한 폭력과 잔인성으로 악명높은 군사 조직이다. 클린턴 정부는 국제연합이 (이 지역에서) 더욱 실질적인 힘을 확보하도록 압력을 넣기는커녕, 선거감시요원의 파견을 사실상 늦추었다. 국제연합은 테러가 계속되자 국민투표를 몇차례 연기했다. 이 테러는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인도네시아에 남는 쪽에 투표하도록 위협하기 위해 군대가 저지른 것이 명백하다. 1999년 8월 30일, 놀라운 용기를 과시하며 동티모르 인구의 대부분이 투표에 참여하였고(투표율은 98.6%로 집계되었다. - 문화일보 98년 8월 31일자 1면 = 옮긴이), 5명 가운데 4명이 독립을 찬성했다.(찬성률은 78.5%로 집계되었다. - 한겨레 99년 9월 7일자 11면 = 옮긴이)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주민들을 협박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는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으며, 이로 인해 수십만명이 집을 떠났고, 집계된 수치는 없지만 확실히 수천명은 숨졌으며, 방화와 약탈이 자행되었다.

 

10. 국민투표 이후 지금 인도네시아와 민병대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인도네시아 군부가 노리는 것은 들고 일어날지 모를 (다른 지역)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그 대가는 너무나 심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과시하려는 것같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수하르토가 권력을 쥔 1965년∼66년 학살 당시에도 바로 이런 과시를 했는데, 온 나라를 협박하는 이런 행위는 몇년동안 계속됐고 그 이후에도 여러번 반복됐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일반적으로 미국과 서방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현재 인도네시아의 여러 곳에서는 (연방)탈퇴주의(secessionist, 사전에는 분리주의적 또는 연방탈퇴주의적이라고 나오는데 바로 뒤의 separatist와는 뜻을 구별해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임 = 신기섭)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 달리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은, 나치 지배에 대한 프랑스의 저항이 "분리주의적"(separatist)이라고 불린 것과 같은 의미로 "분리주의적"이라고 불린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동티모르의 독립이 다른 분리주의 운동을 촉진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같다.

또, 자카르타의 민간 권력을 약화시키고 수하르토 퇴진 이후에도 군대가 지배권을 틀어쥐려는 의도도 있을 것같다. 단순한 보복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티모르인들은 지난 25년동안 엄청난 용기와 완벽함으로 저항하였기에 이제 학살과 파괴라는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은, 군부와 수하르토 일가가 동티모르의 천연자원 대부분을 강탈했으며 이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는 티모르 협곡(Timor Gap)의 석유 재산을 누가 관리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11. 국제연합의 구실은 무엇인가?

 

국제연합의 구실을 말하는 것은 약간 오도하는 것이다. 국제연합은 추상적인 실체로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세계 국가들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도 거의 힘이 없다. 그 대신 주로 미국을 뜻하는 강대국들이 권한을 주는 경우에 한해서만 행동할 수 있다.

국제연합은 평화유지군을 자체 상비군으로 둘 수 없기 때문에, 특정 작전마다 군대를 파견할 의지가 있는 나라들을 찾아야 한다. 국제연합은 미국이 분담금을 계속 미납하고 있기 때문에 극심한 자금부족에 시달린다. 동티모르에 파견된 모든 평화유지군들은 아마도 국제연합군이 되지 못할 전망이다. 미국 의회가, 국제연합 평화유지군 활동을 미국 정부가 승인하기 앞서 15일간 유예기간을 두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워싱턴이 그런 활동에 소요되는 자국의 분담금을 내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향력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장 크지만, 총회나 경제, 사회 문제를 다루는 기구에서는 식민지 해방시기 이후 제 3세계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정책은 국제연합을 약화시키고 주변화하는 것이다. 국제연합은 국제 문제에서 중요한 구실을 해야 하나, 미국과 다른 주요국가들의 정책은 국제기구를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정책결정자의 관점에서 볼 때, 국제연합은 한가지 중요한 기능이 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국제연합이 희생양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동티모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학살은 지난 4반세기동안 그 곳에서 벌어진 잔혹행위들을 막을 책임을 미국과 서구 강대국들이 저버렸다는 데 직접적인 원인이 있으나, 국제연합은 아마도 그 비난을 대신 뒤집어쓰게 될 것 같다.

 

12. 국민투표 실시 이후, 현재 미국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 미국이 노리고 있는 것은 예전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현재의 권력관계를 무너뜨릴 위험을 최소화하고 특히 대중의 자각과 반대의 확산으로 나타나는 방해를 최소화하면서, 미국 기업 및 정치 엘리트의 힘과 경제적 이익을 키우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무자비한 독재자들과 친분을 지속시키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잔학행위를 열렬히 편들지 않는다면 모른 척 하되,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불안과 불복종을 독재자가 과도하게 유발했다고 결론이 나는 시점에서 관계를 끊는 것이다. 그래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란의 군부가 대중시위 억압 문제로 분열할 것같아 보일 때까지 이란의 샤(the Shah) 왕조를 지지하였으며, 레이건 대통령은 필리핀에서 군부가 분열하고 수많은 민중이 거리로 나섬으로써 미국의 이해가 위기에 처할 때까지 마르코스(Marcos)를 감싸안았다.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에서도, 미국은 대중적 폭발이 자국의 경제적, 지정학적 이익을 위협할 것처럼 보일 때까지 수하르토를 지지했다.

그리고 미국은 자국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일 경우에 한해서만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정책을 - 무기공급과 훈련과 외교적 지원을 통해서 - 지지하였다. 동티모르 문제가 전면에 떠오르지 않는 한에서 워싱턴은, 자카르타에 자율권을 주는 데 만족해 했다. 그러나 이젠 잔학행위에 관한 뉴스가 억제될 수 없게 되었다. 몇몇 용기있는 언론인들과 독립적인 감시자들, 그리고 몇몇 국제연합 직원들은 동티모르를 외면하길 거부하였으며, 활동가 연대조직이 이 사태를 널리 알려냈다. 이것으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에 대한 테러리즘을 계속 관용으로 대하는 미국 정부의 대가가 더 커졌다. 하지만 워싱턴은 여전히 인도네시아에서 경제적 이해관계를 지키며 인도네시아 군부와 유대관계를 지속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13. 미국이 동티모르에서 할 수 있었던 긍정적인 구실은 어떤 것인가?

 

미국과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은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군수산업이 많지 않아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무기 공급자들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미군과 합동훈련을 하고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합동훈련은 1999년 8월 30일 국민투표가 있기 바로 일주일 전에 실시되었다.

또 인도네시아의 경제는 미국과 다른 선진국, 그리고 이들 부자 나라들이 좌지우지하는 국제통화기금의 경제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런 원조가 중단된다면, 인도네시아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말라버릴 것이고 국내 자본은 해외로 도피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인도네시아는 미국 정부와 다른 서구 선진국들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도네시아 정부에게 국제평화유지군을 받아들이도록 만든 압력같은 것을 동티모르에서 학살과 파괴를 중지하도록 강제하는 데 썼다면, - 그리고 이런 압력은 여전히 사용될 수 있다 - 이것은 평화유지군 파견보다도 훨씬 더 동티모르인들의 생명에 결정적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여전히 평화유지군이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이며, 평화유지군은 인도네시아의 테러 위험이 여전한 서티모르로 옮겨가는 동티모르인들에게는 큰 도움이 못될 것이다.) 평화유지군은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산속으로 숨어들어 굶어죽을 위험에 있는 수십만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대량지원이 필요하다.) 또 해산하라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는 민병대를 제지하는 데도 유용한 구실을 할 수 있다.

현재 인도네시아 정부를 죄고 있는 그러한 압력이 일주일전, 또는 2주전에 잔학행위를 멈추는 데 활용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로 하여금 민병대를 해산하게 하고, 그들의 테러를 중지시키는 데 6개월 전에 그러한 압력이 사용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25년전 바로 그 당시에 인도네시아 정부가 동티모르에서 철수하도록 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었으며, 1975년 12월 인도네시아의 침략을 미리 막도록 사용될 수도 있었다.

 

14. 미국은 동티모르에서 뭔가 긍정적인 일을 할 것인가?

 

미국 정부는 인도적 관점에서 행동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 경제 엘리트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잔인한 행동에도 기꺼이 관용을 베푼다. - 심지어는 반기기도 한다.

하지만 때때로 미국의 엘리트들은,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을 때의 사회적 대가가 급격히 커지면 긍정적인 행동을 하도록 압력을 받을 수도 있다. 폭발하는 인도주의적 요구들을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고려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중단시킨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인들의 저항과 미국내의 분열로 전쟁을 지속하는 비용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에 중단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대중적 압력이 가해져 학살을 계속 부추기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이 상승하는 때에 한해서, 동티모르에 대하여 긍정적인 일을 할 것이다. -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끔찍스러운 부정적인 일을 그만둘 것이다.

이제 미국의 동티모르 정책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나, 미국의 정책을 좀 더 폭넓게 바꾸려는 사람에게나 전략은 똑같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도덕적 설득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반응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미국 정부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이해관계를 변화시킬 환경을 창출해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정한 조건(미국의 정책을 바꾸려면 필요한 것 = 신기섭)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그들(엘리트들 = 신기섭)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을 위협할 반대(세력)를 조직하는 것이다. 계획적인 티모르의 대량학살극을 부추기거나 방관함으로써 미국 엘리트들의 입지가 강화되고 그들의 돈궤짝이 두둑해진다면, 또 이런 행동(의 이익 = 신기섭)을 상쇄하는 비용이 없다면, 이 일은 계속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전략에 입각한 대중 운동이 현재의 고요함과 일상적인 거래를 위협하기 시작한다면, 또 이런 운동이 성장하고 확대되어서 동티모르 사태 뿐 아니라 이런 사건의 배후에 있는 기본적인 조직 문제를 위협적으로 제기한다면, 그것은 진짜 위험한 비용이며 미국의 엘리트들은 그것을 매우 잘 이해한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나? 많이 알려고 노력하라. 다른 이들을 교육시키려 노력하라. 다른 의견을 가시화하려는 노력들을 도우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연구와 위원회에 기부를 해 재정적으로 돕든, 조직화에 필요한 시간과 노동을 제공하든 말이다. 이 문제는 복잡하지 않다. 티모르 사태건, 코소보건, 걸프전이나 니카라과 사태나 베트남 전쟁이건 답은 똑같다. 기업에 맞서 파업을 승리로 이끌려고 할 때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뒤집거나, 차별에 맞서는 적극개입행동을 유지하고자 (또는 우선적으로 승리하려고) 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외정책을 추구할 때도 답은 같다. 미국의 엘리트들에게 타격을 입히려면, 당신이 중단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행위의 사회적 비용을 급격히 높여서, 스스로를 누그러뜨리는 것 외엔 그들이 선택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것이다.

 

 

원문: www.zmag.org/CrisesCurEvts/Timor/qanda.htm

번역: 류석원

2004/07/15 17:55 2004/07/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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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디니스타 운동의 위기 심화

빌마 누네스 데 에스코르샤

<시류에 거슬려> 2000년 7/8월호

원 제목 = (The Deep Crisis of Sandinismo)

 

선거에 패배해 권력을 잃은 아마도 유일한 좌파 정권이 아닐까 싶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을 기억하십니까? 이미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졌지만 이들은 여전히 니카라과에서 활동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이 세력이 선거 패배 이후 급격한 조직적, 윤리적 위기를 맞았으며, 이 위기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답니다. 산디니스타의 전사인 글쓴이는 조직원의 민주적인 의견 수렴보다는 지도층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 문제, 지도부의 윤리적 타락, 법에 대한 경시, 현 정권과 타협 등을 지적하면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번역본은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picis.jinbo.net)가 번역해 인터내셔널뉴스 105호에 실은 것입니다.


 

 

소모사 독재정권을 전복하고 혁명(1979)을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을 통해 수행했던 투쟁은 인권을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산디니스타 활동가로서와 인권운동가로서의 내 활동을 구분짓는 것은 항상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인권을 위한 투쟁을 그 자체로 혁명적인 것으로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투사이다. 학생시절에 소모사 독재정권에 맞선 투쟁에 참여했으며, 봉기가 있기 훨씬 전에 민족해방전선에 투신했다. 1979년에는 투옥되기까지 했다. 대법원 부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나는 여전히 수감중이었으며, 혁명 정부는 아직 코스타리카에 있었다.

 

니카라과 인민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도록 사법부를 재조직하는 작업은 혁명 기간 동안의 내 인생 전부를 요구했다. 1980년대 내가 당에서 차지했던 지위라고는 내가 속한 현장위원회의 정치비서였을 뿐이다. 나는 현장의 투사였던 것이다. 민족해방전선 지도체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 어떤 연계도 없었다.

 

1990년 당이 선거에서 패배하고 미망에서 깨어난 이후, 그리고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 당구조의 최전선에서 복무했던 이들을 포함, 많은 산디니스타 전사들이 탈당하거나 활동을 그만둔 이후에야 지도부는 그들이 이전에 간과했던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 지도부는 나를 불러 임무를 맡기고 당의 공식적인 몇몇 활동들에 관여하도록 요구했다.

 

게릴라에서 정부로 (From Guerrilla to Government)

민족해방전선은 권력을 쥐고 있는 동안에도 결코 정치 정당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정치적 군사 운동으로서 무장투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게릴라 조직으로부터 한 나라를 통치하는 정부로 곧바로 나아갔던 것이다. 민주적인 지도체제와 참여 양식을 공고화할 수 있게끔 정치 조직을 건설하고 정당을 만들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여러 가지 일상에 짓눌렸기 때문인지, 혹은 그럴만한 의지가 없었는지 또한 아니면 최고 지도자들이 그런 것들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누가 알겠는가? 어쨌거나 미국의 침략 전쟁을 내세워 그릇된 하향식의 비민주적 지도체제를 끝없이 정당화하려 했던 것은 심각한 오류였다.

 

선거 패배는 또한 민족해방전선이 야당 구실을 수행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렇게 적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피냐타(piñata)"에 이르러 버린 패배는 민족해방전선 내부 부패 과정의 근본적인 중요한 단계를 대표하는 많은 후회스런 행위들을 은폐하고 있다. (피냐타는 국가 소유의 자산들을 개인적, 혹은 당적 이익을 위해 전용하는 민족해방전선 관료들을 지칭한다. -ATC 편주, 피냐타의 사전적인 뜻은 '생일잔치 등에서 쓰기 위해 과자같은 선물을 채워넣은 허수아비': 신기섭)

 

1980년대의 국가와 당 사이의 혼란을 돌이켜보면, 당이 받았던 많은 기부가 자동적으로 국가로 흘러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선거 패배 이후 민족해방전선의 재산들이 당을 생존하게 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생각은 국가-당 재산의 특정 부분을 당의 전면에 선 특정 개인들에게 분배하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원래 당의 재산인 것으로 인정되었던 것들은 곧 몇몇 사람들의 손에 집중되게 되었다.

 

초기의 재산 재분배를 적법화하지 못한 실수를 만회하려는 뒤늦은 시도(아래에서 설명하다시피 토지 개혁 시기 벌어졌던 것이 그 예임-ATC 편주)인 85호 및 86호 법률은 또한 특정 개인들이 재산을 자의적 용도로 전용하는 데 동원되었다. 이 법들의 보호 아래 몇몇 최고위 지도자들과 중간직 당관료들이 자행한 직권 남용은 적법한 재산 재분배를, 특히 도시 지역에서 왜곡시켰다.

 

새로운 환경에 부합하는 정치 조직의 결여와 재산 재분배를 둘러싼 부패, 그리고 선거 패배 이후 스며들기 시작한 불안과 개인주의 등은 민족해방전선 지도부의 붕괴를 나타내주는 세 가지 토대이다.

 

1990년 이후 역대 민족해방전선 지도자들의 태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소원해지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였다. 비록 전체주의나 나머지 인사들의 투명성 결여와 관련을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했지만, 뉴스 기사 속에서 그는 새로운 신자유쥬의적 경제 모델에 맞선 투쟁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현장과 "함께"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행동들의 이면에 정치 지도자로서 그의 지위를 유지하고 당내에서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속셈이 숨어있었음을 알고 있다.

 

혁명적 법률인가, 영원한 권력인가? (Revolutionary Laws or Eternal Power?)

나는 마지막까지도 민족해방전선 내부에서 공공연하게 비판되던 하향식의 독재적 지도 체제가 혁명 시절 이후 계속 개발되고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혁명 시기 동안 사법부 및 법적, 제도적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던 나는 그러나, 형성중인 정부가 법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지 않으며, 사법적 절차라는 것도 거의 의미가 없음을 처음부터 깨닫고 있었다.

 

다른 어떤 이유 중에서도, 혁명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혁명적 정부가 항상 권좌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 대법원에서 로베르토 아르구엘로(Roberto Argüello) 판사와 나는 오류투성이인 많은 법제도의 변화들에 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가 언제나 맞닥뜨린 것은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법 제도들은 혁명 자체가 탄생한 현실 법 체계 외부에서 만들어졌다. 법을 존중하고 현실 환경에 대한 그 적용을 옹호하던 우리 중 몇몇은 그런 태도와 결정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에 시달렸고, 형식에 구애되는 반동으로 비춰졌으며, 심지어는 거부되고 불신받았다. 우리의 혁명적 자질은 항상 의문시되었다. 더 철저한 법 준수를 확고하게 하려던 우리의 지속적인 시도는 끝없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마침내 선거 패배는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예를 들어, 만약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토지와 주택이 적법화되었다면, 그리고 소유권을 제때에 올바르게 인정해주었다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사회정의를 세우려는 혁명 정부의 시도를 일정 정도 불법화시키고, 몇몇 사람들이 그 상황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부를 추구할 수 있게 만든 막바지의 그런 법들에 의존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1990년 이후 민족해방전선은 정치 정당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으며, 1991년에는 그 첫 당대회(Congress)를 열었다. 당시 전국 집행위원회(National Directorate)는 내게 민족해방전선의 선거관리위원회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나는 당의 첫 규약과 첫 강령을 승인하고 당대회가 뽑는 첫 번째 당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데 참여했다.

 

당대회에서 나는 또한 스스로 추천하지도 않았고, 그럴 의향도 없었지만, 첫 번째 윤리위원회의 조정자로서 일할 것을 제안받아, 당대회 대의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윤리위원회는 "피냐타"를 둘러싸고 이미 제기되고 있던 몇몇 당 지도자들의 행위에 대한 의문점들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윤리적 위기 (The Ethical Crisis)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 최고 지도부의 부패와 그 도덕적 붕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 온 것이다. 나는 윤리위원회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런 현상을 바로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윤리적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기 시작했다.

 

당시 민족해방전선의 재산 문제를 둘러싸고 온갖 종류의 질문이 제기되었다. 예컨대, 재산에는 뭐뭐가 있는가, 누가 그것들을 관리하고 있는가,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등등의 질문들이었다. 혁명 국가의 일부 재산을 민족해방전선으로 이전시킨 데는 정치적 정당화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디니스타 개인 활동가가 집단의 재산을 사적 이익에 전용한 것은 그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었다.

 

당대회는 엔리 루이스(Henry Ruiz)를 민족해방전선의 새로운 재정부장으로 선출했다. 재정부장은 당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위였다. 하지만 그는 명목상의 재정부장일 뿐이었다. 결코 당 재정을 책임질 수 없었고, 심지어는 재정을 둘러싸고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유명한 말이 등장한다. "나는 재정없는 재정부장인 것이다."

 

우리는 윤리위원회 내에서 민족해방전선의 재정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고, 재정부장의 기능과 직위 수행력을 제대로 세우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시도에서 가로막혔으며, 전국 집행위원회는 우리에게 그러한 정보를 제공할 정치적 의지가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자산 관리에 책임이 있는 그 어떤 지도자도 대의원 대회에서 결의된 바 있는 청렴 선언을 윤리위원회에 제출할 의지가 없었다. 알레만(Alemán) 대통령이 회계감사국(Office of Comptroller General)에 그의 재산 명세를 제출하는 것을 거부할 때, 그들은 어떤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질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우리를 믿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피냐타"에 점점 더 비판적이 되어가고 있는 국제적 연대와 국내적 여론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윤리위원회를 만들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민족해방전선의 재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우리는 목록에 오른 자료들을 조사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적"이 그 정보를 볼 수 없도록 재정부장은 그 목록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윤리위원회에 있는 우리가 마지못해서이기는 하지만 이런 주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제 민족해방전선이 어떤 기업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재산도 없다는 다니엘 오르테가의 선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잡해 보인다. 1992년의 민족해방전선의 소유 재산을 기록한 최소한의 자산 목록에는 30개 이상의 대기업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원회에서 우리는 모든 층위의 산디니스타 동지들이 극도로 심각한 부패에 관련되어 있다는 제소를 다뤄야만 했다. 이들이 민족해방전선의 재산을 남용했다는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국 집행위원회에 정보를 요청했을 때, 그들은 언제나 방해를 했으며, 정보를 감추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가 산디니스타 회의에서 위원회의 보고서를 발표해야 했을 때, 많은 동지들이 일어서서 내가 "그런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지도자들의 이미지를 손상하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우리는 윤리위원회에 제출된 혐의들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을 기회도 없었으며, 우리가 몇몇 사건들을 대중에 공표해야 했을 때, 전국 집행위원회는 우리의 임무 수행에 항의하고 우리를 비판했다.

 

고무 도장 찍는 산디니스타 회의 (A Rubber Stamp Assembly)

처음 나는 상당한 인식과 동기를 가지고 윤리위원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당 생활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나는 당의 강령과 규약, 위원회의 규정들에 따라 활동함에 있어서 무력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1994년 민족해방전선의 두 번째 당대회에서 위원회의 그 어떤 지위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며, 공식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위원회 활동이 내가 당에서 가장 좌절했던 활동이었다고 말이다. 당시 나는 최고 득표로 산디니스타 회의에서 선출되었다.

 

이론상으로 당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산디니스타 회의에 참여하게 되자마자 나는 이 지도 구조가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단지 고무 도장을 찍고 이미 결정된 것을 지지할 뿐이었다.

 

때때로 그들은 우리 말에 귀를 기울였고, 우리는 우리 의견이 받아들여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환상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은 점점 더 공고해져서 다니엘 오르테가는 자주 항의 시위때나 기자 회견장에서 어떤 결정을 공표하고 산디니스타 회의에 나와 이미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우리들에게 말하고는 했다. 이러한 지도 체계는 민주적 체제와 당 체계에 진정한 참여를 열망하는 산디니스타 회의 성원들을 점점 더 미망에서 깨어나도록 했다.

 

양치기소년의 기만 폭로 (Crying Wolf about Fraud)

1996년 선거가 다가오면서 나는 민족해방전선이 다니엘 오르테가를 후보로 내세워서는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또한 민족해방전선 내외곽의 나에 대한 신임에도, 만약 당 권력층이 나를 반대한다면 당선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많은 활동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많은 남녀 활동가들이 내게 민족해방전선의 내부 "협의(consultation)"에 나설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 "협의"는 당의 새로운 실험으로서, 구속력있는 진정한 예비선거는 아니었지만 민주주의의 훈련장으로 기능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결정을 내리면서 나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그 하나였으며, 두 번째는 민족해방전선 지도부가 떠들어대고 있는 민주주의가 과연 진실한 것인지 증명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승리보다는 민족해방전선의 민주화와 더 큰 권리 및 참여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주장을 옹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나의 예비 선거 출마를 민족해방전선을 민주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는 결코 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용서할 수 없는 불경으로 보고, 지도자로서 그의 지위를 흔들리게 할 수도 있는 최악의 무시로 간주했을 뿐이다. 그 "협의"를 겪으면서 나는 민족해방전선을 민주화하는 새로운 노력을 펼쳐야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게 됐다.

 

민족해방전선의 1996년 선거 패배는 연속된 두 번째의 패배로서, 민족해방전선이 사법 제도를 진정으로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새롭게 확인해 주었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협잡이 있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지만, 민족해방전선은 비록 아주 부분적이더라도 선거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장치를 활용하는 데 실패했다. 그들이 했던 모든 것은 선거 협잡에 욕설을 퍼붓고 떠들어대는 것뿐이었다.

 

변칙적인 선거 과정을 워싱턴에 있는 미주인권위원회에 제소한 것은 니카라과 인권센터(CENIDH)였다. 미주인권위원회는 일년 후 우리의 고발을 검토하고 심리를 열었다. 당시 우리는 위원회에 변칙적인 선거 과정을 드러낼 수 있는 정보와 증거를 민족해방전선에서 구했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정보와 증거를 우리에게 숨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 정보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 협약의 전례 (A Precedent for Today's Pact)

1996년의 선거 기간 동안 당 체계의 활동은 전혀 조직적이지 않았다. 유일한 관심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고, 캠페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민족해방전선이 패배한 한 가지 이유라고 생각한다. 패배에 책임이 있는 것은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 자신들이었는데도, 그들은 패배에 놀랐다.

 

그 패배는, 당 최고 지도부가 1990년 이행 협약을 통해 얻은 이익에 대한 분석과 함께 현재의 협약 체결을 불렀다. 당시 이행 협약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선거 패배가 있고나서 물러나게 된 산디니스타 정부와 비올레타 차모로(Violeta Chamorro)의 차기 정부 간에 체결됐던 것이다.

 

민족해방전선 지도부는 둘 간의 차이가 있지만 아르놀도 알레만(Arnoldo Alemán)의 새 정부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지분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차모로와 체결했던 협약과 같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이제 1997년 1월 12일 알레만이 취임하고 이틀 후, 그와 오르테가가 처음으로 은밀히 만났으며 이후에도 여러번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선거 협잡에 대한 격분이 여전히 남아있었는데도 그 날 산디니스타 최고 지도부와 알레만 정부간에 그 협약이 체결될 수 있는 첫 씨앗이 뿌려졌다. 이것은 민족해방전선 지도부의 정치적 윤리적 붕괴를 나타내주는 가장 최근 표식 중의 하나이다.

 

당 지도부가 인민들의 주장과 산디니스타 현장에서 유리된 지 수 년이 지났다. 그들은 이제 야당 구실을 포기했으며, 그들의 현실 권력 지분을 유지하고 여타 이익에 대한 접근권을 얻기 위해 소모사 스타일의 정부와 동맹하고 있다.

 

탁자 밑에서 오간 것 (What's Under the Table)

그 협약의 내용은 자유당과 산디니스타 최고 지도부가 법적, 제도적 변혁에 동의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밀한" 협약이며, 오르테가 형제와 그 동맹 세력들의 경제적 권력을 보장해주기 위한 발표되지 않은 거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억측이 아니다. 이 협약 이면의 진정한 동기는 다른 모든 것 중에서도 당의 지도부에게, 현재 협동조합들의 수중에 있거나 노동자자산지역(APT)의 일부로 형성되어 있는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 재산들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협약 자체가 보여주다시피 새로운 사회주의 계획으로서 몇몇 산디니스타 이론가들이 추진했던 노동자자산지역 계획은 사실상 파묻혔으며,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들의 불신을 받았다. 그들은 그 계획을 실패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실패하게 만들려고 꽤나 애를 썼다.

 

민족해방전선에 있어서 두 번째의 중요한 목적은 그 협약을 통한 입헌적, 선거적 개혁으로 권력에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 협약은 혁명의 원칙 중의 하나인 민주주의와 정치적 다원주의에 대한 공격이다. 이 다원주의는 기본 법률에 공표되어 있던 것으로서 "무카쵸스(muchachos)"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이 권력을 쥐면서 함께 도입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 손에 장총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법을 들고 왔다.

 

협약은 또한 민주 제도에 대한 공격이다. 이 협약에 개입된 두 그룹의 떳떳치 못한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협약은 사법부를 정치도구화하여 바로 자신들의 이익에 순응시키고, 특정한 방식으로 법 적용을 몰아갈 것이며, 이미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입법부의 정치도구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부패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이 나라에서 신뢰를 얻고 있는 유일한 정부 조직인 회계감사국의 기능을 정지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지도부의 최종적 위기 (A Terminal Leadership Crisis)

이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고도 고통스런 일이다.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또한 위험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모든 니카라과인들이 자기 스스로의 책임감을 상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어떤 진보도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협약에 개입된 자들이 우리 스스로를 불경스럽게 다루도록 계속 그냥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협약은 민족해방전선의 내부 위기를 전적으로 새로운 수위로 가져왔다. 최고 지도부는 최종적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이 위기는 1998년 새로운 영역이 등장하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당시 "피냐타"에 대해 제기된 윤리적 질문에는 이미 지도부와 기층간의 유리가 반영되어 있었다. 기층의 투쟁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으며, 지도부는 크나큰 불신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전혀 다른 영역이 등장, 위기를 심화시켰다. 소일라메리카 나바에스(ZoìlamÈrica Narváez)가 그의 계부인 다니엘 오르테가를 고소한 것이다. 그녀의 성추행 고소는 정치 지도자로서 다니엘 오르테가의 신뢰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당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다니엘 오르테가 자신의 잘못이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 개인으로서 그에 대한 개인적인 고소인지 판단했어야 했다. 그는 고소의 사실 여부를 명확히 밝힐 수 있도록 책임있는 행동을 취했어야 했다. 대신 그는 침묵을 지켰으며, 전 민족해방전선에도 똑같이 행동할 것을 명령했다.

 

이 명령은 그 문제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소일라메리카를 믿지 말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그에 따랐다. 비록 그들이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으며, 또한 그런 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여성 투쟁을 벌여온 산디니스타 여성들이 두려움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그 명령과 모든 것을 정치적 음모로 해석하려는 공식 담론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잘 믿기지 않는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면책특권으로 자신을 방어하면서 개인으로서 그리고 정치 지도자로서 자신의 국가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산디니스타 전사들에게 무례를 범했던 것이다. 이 두 해 동안 그는 활동가들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고 이들에게 진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적으로라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민족해방전선 지도부의 전적인 도덕적 붕괴라는 흐름 속에서 이 악명높은 사건은 협약의 내용 안에 포함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혹자는 심지어 협약을 급하게 완성시키려 했던 데에는 자유당이 자신의 면책특권을 박탈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다니엘 오르테가의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한다. 협약이 고소 사건 훨씬 이전부터 추진되었지만, 다니엘 오르테가의 무책임으로 이 특정한 사건이 협약의 많은 교묘한 조처들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판은 내부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Criticism Must Come from Within)

현재 민족해방전선 전사들 사이에는 많은 고뇌와 이견,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훌륭한 동지들이 당을 떠나 산디니스타 혁신운동(MRS)를 건설했던 1994년의 고통스런 경험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가르쳐 준다.

 

공공연하게 당의 진로를 비판하는 모든 내부 그룹들 - 민족해방전선 좌파, 산디니스타 이니셔티브, 존엄성을 위한 산디니스타, 산디니스타 포럼 등과 다른 많은 그룹들 - 은 민족해방전선을 구하고 변혁시킬 투쟁, 그리고 당을 다시 한번 대중 투쟁의 담지자로 변모시킬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헤쳐나가야할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예를 들어 새롭게 부상했거나 협약을 좇아 자리잡은 상이한 비판 그룹들과 경향들 간에 여전히 은밀한 주도권 투쟁이 존재한다. 또한 단결에 대한 다른 관점들이 존재한다. 분명히 처리되어야할 많은 일들이 존재하며, 가야할 여정은 멀기만 하다.

 

나는 지금 당장의 선결 과제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족해방전선의 변혁을 가로막는 요소들 중의 하나는 당 활동가들을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이다. 신화가 깨지는 두려움, 보복이 강요한 침묵의 두려움, 또한 혁명이 많은 이들에게 제공해 준 물질적 수단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등.

 

우리를 단결시키는 것은 민족해방전선이 현재 당을 유괴하다시피 하고 있는 최고 지도자들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산디니스타들의 것이라는 믿음이다. 사실 민족해방전선은 단지 산디니스타들의 것만은 아니라 전 니카라과인들의 것이며, 당은 거기서 태어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니카라과와 세계 역사의 이 특정한 순간에 부여되고 있는 과제에 대응하고 나서는 것은 산디니스타 운동의 지상 명령인 것이다.

 

 

** 빌마 누네스 데 에스코르샤는 노련한 산디니스타 전사이며, 니카라과 인권센터(CENIDH)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이 것은 엔보이(envoi) 사무실에서 이뤄진 대담을 요약한 것이며, 이 간행물의 허락을 받아 다시 게재한 것이다.

 

 

원문: www.igc.org/solidarity/atc/87Escorcia.html

번역: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2004/07/15 17:45 2004/07/15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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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이그나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9년 10월호

원 제목 = Chavez

 

군인으로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으며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우고 차베스가 `대리 민주주의' 대신 `참여 민주주의'를 통한 반신자유주의 혁명을 벌이고 있답니다. 극소수의 가진자들을 위한 부패한 정치를 뿌리채 뽑아내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건설하려는 베네수엘라는 요즘 1968년 프랑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열기에 차 있다고 필자는 전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 상황은 차베스에 대한 평가가 흔들리게 만듭니다. 극적인 실권과 복권 이후에도 정국은 안정이 안되고, 2004년 그는 다시 한번 탄핵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고 차베스(Hugo Chavez)라는 이름이 요즘 라틴아메리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45살의 이 군 사령관은 1992년에 쿠데타를 기도했으며 1998년 12월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뽑혔다. 대통령 직에 오른 이후 그는 좌파와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혁명"에 착수했다. 이는 세계화를 설교하는 이들을 걱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요즘 라틴아메리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이 있다. 우고 차베스다. 45살의 이 군 사령관은 1992년에 쿠데타를 기도했으며 1998년 12월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뽑혔다. 대통령 직에 오른 이후 그는 좌파와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자신이 하겠다고 밝힌 대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혁명"에 착수했다. 이는 세계화를 설교하는 이들을 걱정스럽게 만든다.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이 욕구는 지난 40년동안 지배했던 혼란과 부패에 대한 베네수엘라인 대부분의 분노를 반영한다. 이 혼란과 부패의 책임은 그동안 권력을 나누던 두 정당 곧 사민주의당인 민주행동당(AD, Accion Democratica)과 기민주의당인 코페이(Copei)에 있다. 두 당은(누구도 그들의 민주적인 성격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불공평한 사회가 만들어지도록 했다. 작가 아르투로 우슬라르 피에트리(Arturo Uslar Pietri)는 "부자나라 가운데 이 나라처럼 단지 수백 가문이 조직적으로 자산을 소진한 나라는 드물 것이다. 이들은 수십년동안 어떤 정치적 격동에도 변함없이 엄청난 부를 자신들끼리만 나눠가졌다."고 말한다. (1)

 

잘 사는 소수와 나머지 국민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더 충격적인 것은, 세계 2위의 석유 수출국인 베네수엘라가 지난 25년동안 석유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3천억달러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 돈은 마샬플랜을 20번 이상 할 수 있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사람 절반 이상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으며, 전체 일할 수 있는 이의 4분의 1은 실업자이고, 직업이 있는 사람의 3분의 1은 밤에 부업을 해서 먹고 산다. 또 20만명 이상의 어린이가 구걸로 생을 잇고 있다.

 

그래서 놀랄 것도 아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행동당과 코페이당이 (이들은 9%도 득표를 못했다) 57%의 표를 휩쓴 차베스의 프로그램에 의해 일축당한 것이 말이다. 또 다시 놀랄 일이 아닌 것은,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해 제헌의회를 소집해 전통적인 정당들의 부패한 정권의 역사를 끝내자는 그의 제안이 지난 4월에 88%의 표를 얻은 것이다.

 

대통령궁 자신의 집무실에서 해방자 볼리바르(libertadors Bolivar)와 미란다(Miranda), 수크레(Sucre)의 초상화 옆에서 차베스는 그람시의 말을 반복한다. "우리는 동시에 죽음과 탄생을 겪으며 살고 있다. 낡고 고갈되고 혐오스러운 체제의 죽음과 새롭고 다른 정치질서의 탄생을 말이다. 이 탄생은 전체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이다.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지만 새 것은 아직 태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위기는 혁명을 낳고 있다."

 

그것은 어떤 혁명인가? 차베스는 "경제위기를 빼고도 베네수엘라는 무엇보다 지배층의 사회인식 부족 때문에 도덕적, 윤리적 위기를 겪고 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것은 특히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평등의 문제이다. 볼리바르식의 혁명 목표가 있다. 나는 가난한 이들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다른 혁명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혁명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목표를 배반했거나, 아니면 추구하기는 하되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말살시켰다."

 

국제적인 언론 일부는 (2) 재빨리 차베스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를 "급진 좌파 권위주의자" (radical-left authoritarian)라고 하거나 "독재정치로 향하고 있다" (drifting towards autocracy)거나 "쿠데타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는 길을 닦고 있다" (paving the way for a modern form of coup d'etat)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베네수엘라가 열정적인 분위기, 1968년 5월의 프랑스를 기억하게 하는 토론과 정치적 논쟁이 넘치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지만, 지금까지는 심각한 폭력도, 희생도, 정치적 반대 또는 신문과 방송에 대한 검열도 없다. 이런 반대세력은 새 대통령에 대해 종종 사악한 비판을 하는 등 위축되지 않고 있다.

 

차베스는 말한다. "비난은 상처를 입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려는 것은 대리 민주주의를 벗어나서 참여 민주주의로 향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리제가 필연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요. 우리가 목표하는 참여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권력구조의 어떤 수준(단계)에도 충분히 개입함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인권침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헌법 초안은 각 지자체에 힘과 독립성을 훨씬 많이 부여하며, 국민들이 국민투표를 청원해 실시하도록 허용하며, 대중이 원하면 (대통령을 포함해) 모든 선출직에게 임기의 절반이 지나면 재선거를 실시하도록 허용한다. 새 헌법은 오는 11월 초안이 완성되어 국민투표에 부쳐지는데, 양심에 입각한 불복종의 권리를 허용하며 경찰이 "실종"(disappearances)을 공작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중재인으로서 "공공 변호인" 제도를 만들며, 남녀 평등을 인정한다. 또 모든 종류의 부패와 학대에 맞서 싸우는 "도덕적 권력"(moral power)을 형성하는 것도 허용한다.

 

경제 측면에서, 차베스는 신자유주의 방식에서 벗어나고 세계화에 저항하려고 한다. 그는 "우리는 시장과 국가와 사회의 균형을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국가의 보이지 않는 손을 동시에 경제체제에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경제체제는 가능한 한 시장을 확대하면서도 꼭 그 만큼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유재산, 사유화, 외국인 투자는 여전히 보장된다. 물론 최우선적인 국가의 이해가 허용하는 범위안에서 이지만. 국가는 전략적인 분야를 직접 통제한다. 이 분야의 매각은 주권을 일부 넘겨주는 의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계획을 들이면서 지구화를 이끄는 세력들은 반 자유주의 혁명을 시도하는 차베스를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내려온 악마로 볼 수밖에 없을까?

 

주석

(1) Arturo Uslar Pietri, "Le Venezuela au seuil d'un grand changement", Le Monde diplomatique, December 1998. (아르투로 우슬라르 피에트리, "거대한 변화의 문턱에 선 베네수엘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8년 12월.)

(2) See, for example, The New York Times, 21 August 1999, and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 September 1999. (한 예로 다음을 보라. 뉴욕타임스, 1999년 8월21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1999년 9월1일.)

 

 

영어로 번역 : 데리 쿡래드모어(Derry Cook-Radmore)

원문: mondediplo.com/1999/10/01leader

번역: 신기섭

2004/07/15 17:38 2004/07/1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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