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편. 범주와 방법론의 문제 1장. 개념 사유의 기본요소.hwp (84.00 KB) 다운받기]

 

 

 

편집자의 서문

 

먼저, 출판이 지연된 데 대하여 필자와 독자들에게 편집부의 유감을 전한다. 필자는 이 글을 작년 말과 올 해 초에 집필했고 편집부는 올 해 3월에 원고를 받았다.

 

편집부는 이 글의 가치와 중요성을 이른바 ‘(NL)PDR’, ‘NDR’ 이론에 대하여 그것들의 방법론적 오류들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글이라는 데에서 찾는다. 필자가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은 남한의 ‘사회구성체 논쟁’의 쟁점들을 둘러싼 범주와 방법론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주요하게는 남한 사회의 당면 혁명에 대하여 이른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민족민주 혁명론으로 불리우면서 정식화된 혁명‘이론’들이 근거하고 있는 방법론을 맑스주의 변증법에 비추어 비판하는 것이다.

 

현실의 혁명에 대해서 체계화된 하나의(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이론을 정립하는 것은 남한 혁명가들의 절대적이며 시급한 임무이며, 그럼으로 독자들의 주목이 이 글에서의 비판의 결과로부터 명확한 대안의 제시라는 것으로 쏠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혁명의 ‘이론’은 없어야 한다! ――이른바 ‘이론’으로써 ‘이론’을 구성하는 ‘이론’, 현실 역사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고 또한 그럼으로써 현실 역사의 운동의 불가피한 귀착을 예견하지 못하는 ‘이론’은 다만 격렬한 계급투쟁의 현실로부터 사유하지 못하는 고립된 ‘연구자’들의 화려한 수식어들의 정돈된 배열, 또는 그저 혁명적 분위기에만 휩싸인 ‘조직가’들의 단순한 선동문구일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 ‘이론’들은 상호에 대해 비판이라는 이름하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지상(紙上)에서 대립하다가 지상(地上)으로 하향(상승 !)하자마자 현실과 대립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최근 2년 동안의 남한 혁명운동이 보여주는 진실이다.

 

역사로부터 추상되었기에 그것에 조응하는 논리, 현실에 대립하지 않고 정확하게 그것을 반영하는 이론일 때에만 우리는 그것을 혁명의 이론이라 부를 수 있고, 자본주의 사회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의 전망으로 무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맑스주의 변증법의 방법론의 기초할 때에만 정립될 수 있다는 것은 이성의 소유자라면 상식으로부터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이 명백히 이러한 임무의 교두보를 구축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판의 결과로부터 명확한 대안’으로 향하는 혁명적 맑스-레닌주의자들의 바로 다음의 과제는 보다 더 구체적인 논증과 현실에 비춘 실증의 작업으로 현재의 ‘민중주의적’ 체계를 지양하고 프롤레타리아적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다.

 

나아가 남한 혁명운동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이러한 현실로부터, 지나간 시대의 수정주의적 무지에서 유래하는, 두 개념의 완전한 질적인 차이를 보는 데 실패하고 혼란(‘PDR’이 곧 SR이다)과 절충(‘PDR’은 SR를 포괄한다)을 범하는 단순하고 불철저한 사람들과의 선명한 경계선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사회경제적 의미로 말한다면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개념을 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 범주의 내포는 풍부하게 체계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의 그 빈약함이 아직도 ‘민중민주주의혁명’ 또는 ‘민족민주혁명’이라는 개념들의 존속을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1990년 12월

 

전 진 편 집 부

 

 

 

Ⅰ편

범주와 방법론의 문제

 

 

 

 

 

 

 

 

 

 

 

 

 

 

 

 

 

 

 

 

 

 

 

 

 

 

 

 

 

 

 

1장

개념 : 사유의 기본요소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운동법칙을 분석한 자신의 『자본』에서 특별히 ‘상품’이라는 범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 것을 매우 타당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상품이야 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사회의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 집적 ungeheure Warensammlung’으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 부터 시작한다.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NL)PDR, NDR론의 방법론 비판”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개념”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개념이야말로 “모든 이성적 사유의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 그 자체로부터 우리의 ‘철학 비판’을 시작할 수는 없다.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들은 모두 하나의 ‘서술’들이며, 과학의 서술방법은 그 연구방법과는 다르다는 맑스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그 ‘서술’들은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념의 비판에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철학 비판은 직접적으로 현실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철학 비판은 곧 현실 비판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현실에 대해 비판적――혁명적인 비판은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념의 비판으로부터 우리의 비판을 시작한다고 해서 그것이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개념의 변증법’을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고자 분석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곧 그러한 작업들이 바로 현실에서부터,즉 현실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과제는 당연히 그와 같은 연구와 분석들――우리가 ‘사회구성체 논쟁’이라고 부르는――이 얼마나 현실에 근사한 것인가, 얼마나 현실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한 맑스주의 연구자는 또 이렇게 강조한다.

 

개념의 변증법은 실재 세계의 변증법을 반영한다. 이것이 『자본』에서 포괄적으로 설명된 맑스주의 인식론의 근본명제이다.

 

우리의 사유는 현실을 인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인식한다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현실의 사물과 현상들은 고립된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보다 다양하고 복잡하며 때로는 도착된 듯 보이는 관계들 속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내용과 형식, 질과 양, 가능성과 현실성, 필연성과 우연성, 보편성과 특수성,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등의 통일로서 존재한다. 현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물과 현상들의 본질과 필연적인 연관들을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 줄 때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서술이 현실에 대해 전도된 관념을 불러일으킬 때 그것을 ‘신비’라고 부른다. 모든 비과학적인 서술은 대상의 다양하고 복잡하며 변증법적인 측면들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개념의 명료함과 타당함이 모두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서술의 전제가 되는 것도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개념과 범주를 인식의 결절점이나 근거지로 이해한다.

인식과정의 산물들은 개념 및 범주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일반화되고 확정된다.

 

그렇다면 이제 개념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자.

개념이란 우선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해 보면, 어떤 개체들 또는 집합들의 불변적인 징표, 즉 그것들의 불변적인 성질이나 관계들을 기초로 하여 그 개체들 또는 집합들의 집합을 사고상으로 반영한 것이다. 개념은 명제와 함께 모든 이성적 사유의 기본요소를 이룬다. 명제가 어떤 사태의 반영인 반면에 개념은 사태의 구조를 이루는 개개의 요소들, 즉 개별자, 성질, 관계 등을 모사한다.

 

개념들 가운데서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개념을 범주라고 한다. ‘철학적 범주’들은 물질과 그 발전의 가장 본질적인 규정들을 반영하는 가장 일반적인 개념들이다. 철학적 범주들은 인식의 마디점으로서 모든 과학에 대해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특수적이거나 개별적인 과학들에는 또 그 과학의 특수한 범주들이 있다. 맑스에 의하면 “경제적 범주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추상시킨 이론적 표현일 뿐이다.”법칙은 일반적으로 이 범주들 사이의 관계로써 표현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개념과 범주를 구분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개념들은 거의가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개념의 문제에서 제일 먼저 부딪히고 또한 가장 중요하며 본질적인 문제는 개념과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도 관념론과 유물론은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관념론적 변증법, 즉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개념이야말로 운동의 진정한 힘이며 자립적인 실체라고 주장한다. 헤겔에 의하면 개념은 존재의 부정인 본질의 부정으로서 부정의 부정이며, 존재와 본질의 통일이다.‘변증법적 운동=변증법적 논리학’의 출발적인 절대자인 이념의 ‘있음(존재)’이다. 그러나 본질, 즉 ‘참 있음’이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이 존재는 단지 하나의 가상인 것으로 된다. 개념은 본질을 다시 부정한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존재의 회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념은 최초의 존재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존재와 본질이 통일된 회복이다. 개념은 존재와 본질의 진리로서 자립하고 자기발전하며, 그러므로 자유이다. 헤겔은 “개념은 실체〔실재하는 본질―인용자〕의 진리”가 되며, ‘마침내 개념속에서는 자유의 왕국이 열리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개념(존재와 본질의 통일로서의 개념)도 처음에는 단순한 주관성(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이 추상적 개념은 자기자신의 운동에 의하여객관 속에 일시적으로 머무른다. (이때의 객관이란 곧 객관적 현실 또는 자연 등을 말한다.) 즉 개념의 他在(=외타적 존재)가 바로 객관성(실재적 개념)이다. 그러나 개념은 이 객관성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일에 이르른다. 이와 같은 주관성과 객관성이 통일이 바로 이념이다. 헤겔에 있어서 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은 이념에서 출발하여 이념에 도달함으로써 완전하게 전개된 진리로서 나타나게 된다.

 

개념은 내용과 형식, 본질과 현상, 보편과 특수 등을 분리된 각각의 계기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종합으로서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념은 실재를 반영 또는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실재에 내재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직관Anschauung이나 표상Vorstel-lung과는 달리,총체적이면서 구체적이다.헤겔 변증법에서의 개념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인 힘, ‘구체적인 보편’이다. 그래서 헤겔은 또 “개념은 그보다 앞서 간 모든 규정들, 즉 존재의 범주나 반성규정〔본질의 범주―인용자〕의 근저이자 또한 총체성이기도 한 까닭에 모름지기 개념은 구체저이고도 또한 그 내용이 가장 풍부한 것”이라고 말한다. 개념의 규정은 단지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질적으로도 구별된다. 또한 개념의 규정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외면적인 상관관계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헤겔의 의하면 “개념은 이 모든 것을 다 합쳐 놓은 것 이상의 그 어떤 것이다. 즉 그의 모든 규정은 규정적인 특정한 개념이긴 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바로 그 모든 규정의 총체성이라고 해야만”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개념, 즉 총체적이며 구체적인 보편인 개념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헤겔은 “개념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오직 정신에 의해서만 파착될 수 있으려니와, 더우기 이것은 오직 정신의 소유물이며 또한 이 정신의 순수한 자기이기도 한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헤겔은 개념 바로 그것을 자립적 실체이자 자기전개하는 변증법적 운동의 근저에 있는 힘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 또한 개념 자신의 변증법적 전개, 즉 ‘개념의 변증법=변증법적 논리학’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개념의 자기외화 또는 개념이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타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개념을 현실의 반영, 그것의 모사라고 간주한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 운동하는 것, 변화발전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며, 개념은 다만 현실의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구조 • 성질 • 관계 등을 표상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개념의 변증법’과 ‘실재의 변증법’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대립이며, ‘철학의 근본 문제’가 ‘근본 문제’로서의 의의를 부여받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맑스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매우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표현한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근본적으로 헤겔의 그것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오히려 정반대이다. 헤겔에게서는 그가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자립적 주체로까지 전화시킨 사유과정이 현실적인 것의 창조자이고, 현실적인 것은 다만 외적 현상을 이룰 뿐이다. 나에게는 그와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환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개념은 우리의 사유 속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수하게 관념적인 것도 아니며 자립적인 힘이나 실체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념 밖에 있는 것, 인간의 의지나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현실의 실재적인 관계들이 인간의 사유속에 반영된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관념적이다. “실재하는 관계들이야말로 인간의 개념들에 대한 객관적 토대이다.”

 

그렇다면 변증법에서 개념과 형식논리학에서의 개념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은 어디에 있는가? 형식논리학은 개념을 고정된 것, 불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점은 맑스 이전의 경제학자들――고전 경제학자들이든 속류 경제학자들이든 간에――에게 공통된 것이기도 하다. 맑스에 의하면 그들은 “부르조아적 생산관계, 분업, 신용, 화폐 등을 고정된, 불변하는, 영속적인 범주로 설정한다.”이것은 단지 개념, 즉 사유의 문제라기 보다는 더욱 근원적인 문제라고 해야 한다. 형식논리학은 개념의 근저에 있는, 개념이 바로 그것을 모사하고 있는 현실의 관계들을 항구적인 것,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제 트로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관계 속에서 어떻게 생산이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관계 그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즉 이러한 관계를 낳게 한 역사적 운동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산관계의 역사적 운동――범주는 그것의 이론적 표현에 불과하다――을 추구하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든 사상의 근원을 순수 이성의 운동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헤겔의 관념변증법과는 구별되는 맑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방법은 이것과는 정반대의 방법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은 “모든 생성된 형태를 운동의 흐름 속――곧 그것의 경과적인 측면――에서 파악”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법은 당연히 현실 그 자체의 변화와 발전을 쫓아 개념도 또한 변화발전하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단지 그〔맑스 비판지의 한 사람인 파이어맨―인용자〕의 얘기는 모두 맑스가 자신의 논의과정에서 어떤 정의를 내리고자 했다는 오해, 즉 일반적으로 맑스에게서 어떤 확정되고 고정된 그리고 모든 경우에 타당한 정의를 끌어 내고자 하는 잘못된 인식 위에 출발하고 있다. 사물들과 그것들의 사상(思像)과 개념들도 동시에 변화되고 변화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얘기이다. 즉 우리는 이것들을 화석화되어 버린 정의로 묶어 버릴 것이 아니라 그것의 역사적이고 논리적인 형성과정을 따라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맨처음에 내렸었던 개념의 정의, 즉 개념이란 대상들의 ‘불변적인’ 징표, 그것들의 불변적인 성질이나 관계들을 기초로 한다는 것과 상반되지 않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데에 실은 관념변증법과 맑스-레닌주의의 유물변증법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모든 물질의 존재의 본질은 운동한다는 데에 있다 “운동은 물질의 존재양식”이며, “운동 없는 물질은 물질 없는 운동과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없다.”따라서 개념 또한 대상을 운동 속에서, 그것의 변화와 발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대상 ‘그 자체’의 운동이라는 말을 덧붙여 두기로 하자. 대상의 운동과 대상이 운동하는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는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경의 변화도 대상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이 대상의 운동에 어떤 새로운 질적 규정을 부여해 주지 않는 한 그것은 비본질적이며 부차적인 조건이 될 뿐이다.)

 

그런데 헤겔의 경우에는 정지 또한 운동의 특수한 형태라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그는 변증법과 형식논리학을 절대적으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형식논리학적으로 대립시키고 만다. 반면에 유물변증법에서는, 비록 그와 같은 개념의 고정성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임을 명확히 전제한 위에서지만, 결코 개념의 고정성 그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유물변증법은 변화하고 발전하는 대상의 운동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적인 징표들을 발견해 내고 그것을 개념으로 반영한다. 우리가 오직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인과적인 현상들에서만 어떤 법칙을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개념의 고정성이 전제되지 않은 서술로부터는 현실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들을 수 없다. 개념의 고정성이 그것이 상대성 속에서만 올바른 것이 되듯이, 이와 같은 개념의 상대적 성격 또한 그것의 고정성 안에서만 올바른 것이 된다. 만약 대상의 운동이 기존의 불변적인 징표들까지도 변화시키게 되는 새로운 질에 이르른다면, 개념의 고정성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역시 새로운 개념을 요구하게 된다. 이것은 곧 대상의 운동에 작용하는 변증법적 법칙――양질전환의 법칙이,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개념에 대해서도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개념의 상대적 고정성이란 그것이 반영할 수 있는 대상의 운동의 한도이다. 이 한도를 넘어서는 대상의 운동은, 대상 그 자체에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개념을 요구한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대상의 질적 변화와 무관하게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헛된 시도는 단지 그 자신의 “정신적 빈곤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헤겔은 개념 그 자신의 운동을 통해서 객관적 세계의 운동을 파악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은 개념을 대상의 운동 속에서 고찰한다. 흔히 사회과학적 범주들에서 대상의 운동은 그것의 역사성으로 반영된다. 개념은 자기자신의 역사성 속에서만 일정한 고정성을 가질 수 있다. 실은 개념이 역사적으로 형성된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개념을 자의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그것의 고정성이 나타난다. 개념은 그 자신의 역사성과 고정성, 상대성과 불변성의 통일이다. 흔히 형식논리학에서는 개념을 단지 그 고정성에서만 파악한다. 따라서 형식논리학으로써는 대상의 운동과 변화발전을 올바로 반영할 수 없다. 반대로 개념으로부터 그것의 고정성을 배제시켜 버리는 것 또한 옳지 않다. 그와 같은 시도는 필연적으로 상대주의적 불가지론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굳이 플레하노프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변증법이란 ‘어디서 태어났느냐’는 질문에 ‘여기저기서’라고 대답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와 같은 개념의 상대적 불변성, 또는 같은 말이지만 그것의 역사적 고정성을 통하여 우리는 현실과 개념 사이의 변증법적 조응 관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념이란 현실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들의 구조 • 성질 • 관계 등을 반영한다는 데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개념으로써, 즉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개념에 비추어 봄으로써’ 현실을 인식하기도 하다. 이것은 물론 관념적인 것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주관적 관념론과도, 정신이 현실을 정립한다는 헤겔류의 객관적 관념론과도 무관하다. 다만 우리는 현실을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선취하고 있는 개념들――물론 그것들도 또한 현실의 반영이다――이 없이는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의 사유는 단지 현실로부터 개념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식된 개념들로써 다시 현실을 인식한다.

 

물론 서술방식은 형식상 연구방식과 구별될 수밖에 없다. 연구는 소재를 자세히 탐구하여 그 상이한 발전 형태를 분석하고 그 발전 형태의 내적 관련을 찾아 내어야만 한다. 이 일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그에 상응하여 현실적 운동이 서술될 수 있다. 이것에 성공하여 이제 소재의 생명 활동이 관념적으로 반영되면, 마치 선험적 구성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서술방식과 연구방식에 관한 맑스의 이 설명은 매우 강조되고 있으며 또 그러한 강조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만약 우리가 일정하게 고정된 개념들을 선취된 것으로 전제하지 않는다면, 실은 이와 같은 구분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하향과정과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과정은 다같이 개념에 의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하향과정은 개념으로써 현실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반면에 상향과정은 인식된 현실을 개념으로써 서술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서술은 오히려 마치 개념이 자기운동을 통해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과학의 목적은 현실의 운동을 보다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흔히 우리는 과학은 현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물론 옳다. 그러나 단 우리에게 일정한 개념들과 그것들의 체계가 선취되어 있을 때에만 그것은 옳다. 단지 철학자인 체 할 뿐인 천박한 무리들은 ‘현실로부터!’ 하고 떠들어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현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현실을 관찰하여 처음에는 그것으로부터 ‘물질’이라는 범주를 찾아 내고, 이어서 ‘운동’을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주를 발견해 냄으로써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관찰하여 처음에는 ‘생산력’이라는 범주를 찾아 내고, 이어서 ‘생산관계’를, ‘계급’과 ‘상부구조’와 그밖에 ‘잉여가치’와 ‘이윤율 저하의 법칙’ 등을 발견해 냄으로써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그와 같은 시도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인류의 지식과 사유능력이 발전해 온 전과정을 처음서부터 되풀이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지식들의 총화와 가장 높은 수준으로까지 발전된 사유방법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맑스-레닌주의의 범주들과 그것들의 체계들인 맑스-레닌주의의 방법론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개념을 ‘자립적 실체’로 간주하는 헤겔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 개념이 그 자체로서 실존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개념이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것, 관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의 실존형태는 단어이다. 물론 개념과 단어 사이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상이한 단어들이 동일한 개념의 존재형태일 수도 있으며(이음동의어), 반대로 동일한 단어가 상이한 개념들의 존재형태일 수도 있다(동음이의어), 그러므로 서술이 논리적이고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념과 단어 사이에 분명한 可逆的 대응관계가 성립하여야 한다. 이 관계는 내포와 외연으로 표현된다.

 

개념은 반드시 그 내포와 외연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개념의 외연은 그것이 적용되는 개체들 또는 개체들의 집합을 반영한다. 이에 반해 개념의 내포는 그에 상응하는 개념의 외연 내에서 반영되는 모든 사물들의 공통되는 징표들의 복합을 반영한다. 예를 들면 ‘해금’과 ‘깡깡이’는 그 내포에 있어서 동일한 개념들이다. 반면에 ‘등변 삼각형’과 ‘등각 삼각형’은 내포는 서로 다르지만 그 외연에 있어서는 동일한 개념들이다. 흔히 형식논리학에서는 개념의 외연만을 고찰하고 서로 비교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논리학에서는 개념의 내포도 또한 연구대상이 된다.

 

우선 형식논리학에서의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개념들 사이의 외연적 관계는 대개 포함 관계 • 選言 관계 • 교차 관계로 나누어진다.

 

포함 관계란 한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모든 사물들이 다른 개념의 외연에도 속하는 경우이다. 이때 포함하는 개념을 ‘類 개념’, 포함되는 개념을 ‘種 개념’이라고도 한다. (세 개념 사이의 포함 관계에서는 유 개념 • 종 개념 • 개체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동일성은 포함 관계의 특수한 경우이다. 두 개념의 외연이 일치할 때―― ‘등변 삼각형’과 ‘등각 삼각형’의 경우처럼――이 개념들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동일성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두 개념의 외연이 어떠한 공통적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해금’과 ‘등변 삼각형’의 경우처럼――이들은 선언관계에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교차 관계는 두 개념의 일부 요소들만이 공통적인 경우, 다시 말하자면 두 개념의 공통된 요소들과 어느 개념에만 속하는 요소들이 있을 때 이들은 교차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개념들 사이의 관계는 셋 이상의 개념들에 대해서도 물론 적용되어진다. 그러나 셋 이상의 개념들 사이에서는 관계들이 서로 중첩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듯 형식논리학에서는 주로 개념들의 외연적인 관계만을 고찰한다. 그러나 플레하노프의 지적처럼 “정지가 운동의 특수한 경우인 것처럼, 형식논리학의 원리를 따르는 사유는 변증법적 사유의 특수한 경우이다.”무엇보다도 우리는 한 이론체계 내에서의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그 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독자적인 사회유형으로는 될 수 없다.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제국주의의 생명선인 식민지 사회의 한 체제인 것만큼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사회의 외연 속에 포괄되는, 즉 자본주의 사회유형에 속하는 특정한 사회체제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유형이란 아마 외연적으로 사회구성체와 동일한 개념이 될 것이다. 반면에 사회체제라는 개념은 사회유형이라는 개념에 포함된다. 즉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체제는 자본주의 사회유형 속에 포함된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동시에 식민시 사회(유형? 체제? 또는 성격? )의 한 체제라는 점이다.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와 식민지 사회에 대해 각각 포함 관계에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식민지는 서로 어느 쪽도 다른 쪽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교차 관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식민지 반자본주의를 공통적 요소로 하면서 서로 교차 관계에 있는 두 포함 관계의 계열을 내올 수 있다. 하나는 ‘식민지 반자본주의 → 자본주의 → 사회구성체’이며, 다른 하나는 ‘식민지 반자본주의 → 식민지 반봉건(사회유형) → 식민지’이다. 두 계열의 개념들의 포함 관계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두 계열 사이의 교차 관계는 더욱 엷어지고, 따라서 두 계열의 대립되는 성격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면 대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전자의 ‘식민지 반자본주의’ 대신 ‘(신식민지 또는 종속국)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위치지워 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즉 ‘남한 → 국가독점자본주의 → 자본주의 → 사회구성체’와 ‘남한 → 식민지 반자본주의 → 식민지 반봉건 → 식민지’가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맑스-레닌주의의 방법론이며 후자는 부르조아 민족주의의, 주체주의의 방법론이다.

 

물론 이와 같은 파악은 단지 개념의 외연만을 고찰한 것이다. 주체주의자들의 논리는 더욱 심오한 주장을 담고 있다.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비록 외연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유형에 속하지만 “그의 고유한 사회정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두 개념의 내포가 일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동일한 근거가 요구된다. 그러나 식민지 반자본주의라는 규정은 한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근거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른바 사회구성체, 즉 그 사회의 가장 일반적인 면모를 파악하는것만으로는 사회의 구체적 성격이 규명될 수 있는 것도, 또 정확히 밝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호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마땅히 사회구성체로서의 사회유형 구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련이 현실이 반영된 사회체제로서의 한국 사회의 성격이 옳게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사회구성체’가 아니라 ‘사회체제’이다? 아무튼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체제는 외연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포함되지만 내포적으로는 남한 사회의 식민지성에 근거하고 있다. 앞의 인용문을 다시 한번 주의깊에 읽어 보자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식민지 사회의 한 체제인 것만큼……자본주의 사회의 외연 속에 포괄되는” 사회이다. 도대체 식민지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에 포괄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종잡기는 어려우나, 분명한 것은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단지 외연적으로만 자본주의 사회에 포괄될 뿐이다. 그것은 내포적으로는 ‘식민지 사회의 한 체제’이다. 주체주의자들은 하나의 개념을 그 외연과 내포를 분리시켜 고찰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대립시킨다. 어쩌면 주체주의자들이 보기에 맑스-레닌주의는 ‘외연주의!’일런지도 모른다. “남한의 식민지적 내포를 부정하는 외연주의자들 !” 하고 그들은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고찰하면서 우리는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비판한다.

 

첫째, 개념이란 그 내포와 외연의 통일이다. 내포 없이는 외연이 있을 수 없듯이 외연 없는 내포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식민지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식민지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라는 개념의 내포와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의 외연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곧 식민지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서로 다른 두 개념의 외면적인 결합에 불과한 절충적 개념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둘째, 어떤 한 개념이 다른 한 개념에 외연적으로 포함된다고 해서 반드시 내포적으로 그에 상응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자본주의라는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내포와 외연의 통일이다. 그런데 주체주의자들의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단지 외연적으로만 포함될 뿐이며, 내포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반‘자본주의’여야 할 까닭이 없다. 그것은 반‘자본주의’ 또는 반‘봉건’이 아니라, 반‘노예제’거나 반‘공산주의라고 하더라도 전혀 무관하다. 반’자본주의‘든 반’공산주의‘든 간에 “식민지는 그 사회체제의 내적인 법칙에 따라 합법칙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후진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의 산물이며, 외적 힘의 강요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은 한 사회를 그것의 ’내적인 법칙에 따라‘ 고찰하는 방법론으로서의 사회구성체론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그것의 내적인 법칙과 무관한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맑스와 엥겔스의 것이 아니라 베버나 슘페터의 자본주의다. 주체주의자들의 반’자본주의‘라는 이름은 그것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이는 곧 주체주의자들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일정한 내포와 외연의 통일된 개념을 단지 편의에 의해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폭로해 준다.

 

주체주의자들의 예에서 보았듯이, 개념의 실존형태가 단어라는 사실은 곧잘 단어, 즉 대상의 ‘이름’을 그것의 개념과 혼동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물의 이름과 개념은 전혀 다른 것이다. 설령 우리가 사물의 이름을 변화시킨다 하더라도 사물 그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 한 사물의 개념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의 이름과 개념 사이의 관계는 논리학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로 표현된다.

 

헤겔 이후에 많은 철학자들은 그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기도 했고 맹목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헤겔을 비판한 최초의 철학자는 포이에르바하였다. 포에르바하는 헤겔이 주어와 술어를 전도시켜 놓고 있음을 폭로했는데, 이 점에 관한 한 그는 맑스와 일치한다.

 

사유와 존재의 진정한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존재는 주어고 사유는 술어다. 사유는 존재에 의해 조건지어지나, 존재의 사유에 의해서 조건지어지지 않는다. 존재는 자기자신에 의해 조건지어지며……자기자신 속에 그 근거를 갖는다.

 

여기서 비판의 핵심은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대한 헤겔의 전도된 체계에 있다. 헤겔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자연을 단지 이념의 외타적 존재로밖에 간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이 사유와 존재를 동일한 것으로 혼란시켜 놓았음을 폭로한다. “유물론은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인정하지, 결코 그 동일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유가 단지 사유 자체에 대한 주어가 아니라, 현실적(즉 물질적) 존재의 술어인 경우에만 사유는 존재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체계가 아니라 그 방법, 즉 변증법적 논리학에 주목하고자 한다. 헤겔이라고는 읽어 본 적도 없으면서 ‘Hegelian’이니 ‘헤겔적’이니 하고 무턱대고 헤겔을 비난하기만 하면 자신의 임무를 다한 것으로 믿는 자칭 ‘유물론자’들로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겠지만, 사실 변증법적 논리학에서의 주어와 술어의 관계에 대하여 처음 설명한 사람은 바로 헤겔이다.

 

헤겔에 의하면 개념은 보편성(동일성의 계기) • 특수성(구별의 계기) • 개별성(동일성과 구별의 모순적 통일=근거의 계기)이라는 세 계기를 포함한다. 개념의 개별성, 즉 구체적 보편성은 개념이 그것의 동일성으로부터 자신의 외타적 존재로 이행하여 마침내 ‘판단’으로 전화하는 계기이다. 판단은 개념 그 자체에 정립되어진 이 개념의 규정성(=특수성)이다. 그런데 판단은 “주어와 술어”라고 불리우는 두 개의 자립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든 명제는 ‘문법적인 의미에서’ 주어와 술어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명제가 판단인 것은 아니다. ”제대로의 판단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술어가 세 가지 개념규정의 관계에 따라서 주어에 대한, 즉 보편으로서의 술어가 특수나 혹은 개별에 대한 관계를 지녀야만 한다“

 

헤겔은 “이 행동은 선(善)하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면서, 이것은 하나의 ‘명제’이기는 하지만 ‘판단’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여기서는 술어가 특수나 개별에 대한 보편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판단이란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다른 측면들은 모두 무시하기로 하자.)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 개별은 보편이다.

독점자본주의는 발전된 자본주의이다; 특수는 보편이다.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이것은 단지 판단의 형식을 이루는 명제이다. 그에게는 “주어가 보편으로 규정되고 반대로 술어는 특수한 개별로 규정되는”그러한 명제야말로 판단의 내용을 이룬다.

 

〈주어〉 〈술어〉

개별은 보편적이다.(형식)

보편은 개별적이다.(내용)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남한이다. 이것이 ‘개념의 변증법’, 즉 전도된 주어와 술어인데, 헤겔은 자본주의라는 보편적 개념이 자신의 구별(가령 독점자본주의라는 특수적 개념)으로 이행하였다가 다시 남한 사회라는 개별자 속에서 보편과 특수가 통일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개념의 변증법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헤겔은 주어를 존재의 이름으로, 술어를 이 존재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단지 이름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직도 무규정적인 존재일 뿐이다. 맑스의 표현처럼 “어떤 사람의 이름이 야곱이란 것을 알더라도 그 사람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존재는 그것이 술어로서 표현될 때에만 비로소 하나의 개념이 된다.

 

왜냐하면 주어가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것은 오직 존재를 개념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술어가 비로소 밝혀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혹은 이것은 어떠한 종류의 식물인가 등에 관해서 묻는다고 할 때, 여기서 물음의 표적이 되는 존재는 한낱 이름에 지나지 않거니와 사람들은 이때 그 이름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이미 그 지목된 대상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듯이 행세한다. 이것이 바로 주어의 의미하는 바에 따라서 파악된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실은 개념이나 아니면 적어도 본질 또는 보편일반을 구성하는 것은 술어일 뿐더러 결국 판단의 의미에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도 오직 이 술어에 관한 것이다――따라서 도대체 신, 정신, 자연이라는 등의 모든 것은 판단의 주어라는 점으로 볼 때 한낱 명칭에 지나지 않으려니와, 과연 이러한 주어가 개념에 비추어 볼 때어떤 성질의 것인가 하는 것은 술어를 통해서만 비로소 밝혀질 수 있는 문제이다.……바로 이 개념을 언표하는 것은 다름아닌 술어 그 자체이다.

 

존재를 그 ‘개념에 비추어’ 판단한다는 것은 단지 ‘개념의 변증법’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더욱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개념의 변증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재의 변증법’의 반영으로서 일정한 관계들을 자기자신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그와 같은 개념의 자기내용, 즉 개념의 내포에 비추어 존재를 판단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여기서는 남한이라는 개별로서의 주어가 자본주의라는 보편으로서의 술어에 의해 규정(특수화)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개념’――물론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에 비추어 남한 사회를 판단한다. 따라서 남한 사회에 대한, 또는 남한이 자본주의 사회임에 대한 우리의 모든 서술에서는 반드시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그 판단의 근저에 주어져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그 반대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남한이 자본주의 사회가 아님에 대해서 서술할 때에도 우리는 반드시 동일한 그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비추어 판단한다. 흔히 주체주의자들이 “오늘 한국 경제에서 지배적인 것은 자본주의적 경제관계”라고 말하면서도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무엇인―인용자〕 식민지 반자본주의적 성격의 사회”라고 주장할 때 간과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이다. 그들은 판단을 개념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러한 괴리는 ‘사회구성체 논쟁’을 ‘사회성격 논의’라고 부른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문제의 본질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사물의 이름과 그것의 개념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만이 사물의 이름을 변화시킴으로써――가량 ‘식민지 반봉건 사회’를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그것의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다.

 

사람들이 이름(명목)을 바꾼다고 해서 사실 자체를 변경할 수는 없다.

 

물론 개념의 실존형태는 화폐, 증기기관, 자본주의 등과 같은 ‘단어’이다. 그러나 술어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 단어는 단지 사물의 이름일 뿐이다. 형식논리학, 특히 전통논리학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단지 문법적으로만 파악한다. 여기서는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 사이의 관계가 문제된다. 그러나 형식논리학에서도 문법적인 주어 개념과 논리적인 주어 개념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형식논리학적으로 파악할 때 판단이란 단지 두 개의 개념의 결합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외면적인 결합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주어와 술어, 즉 두 개념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헤겔에 따른다면 동일성(존재의 판단) • 구별(현존재의 판단) • 필연(필연의 판단)이라는 세 계기를 거쳐 개념의 판단에 이르른다.

 

그렇다면 헤겔의 관념변증법과 맑스의 유물변증법 사이의 대립은 어디에 있는가? 사물의 이름과 그것의 개념을 구별할 줄 알았다는 데에 헤겔의 탁월함이 있지만, 그는 지나치에 멀리 나아가고 말았다. 헤겔은 사물의 개념을 그것의 실재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는 개념이란 단지 객관적 실재가 지닌 구조 • 성질 • 관계 등이 우리의 사유 속에서 관념적인――특히 언어의 형태로 번역된 것에 불과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거꾸로 실재란 단지 개념의 외타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헤겔에게는 이 개념이야말로 자립적인 실체이다. 따라서 개념으로부터 소외된 외부세계 그 자체, 가령 순수한 자연 등은 참다운 실재가 아니라 ‘단순한 존재(그저 있음)’일 뿐이며, 헤겔 자신의 표현을 빌면 “술어를 갖추지 않은 주어”이다. 술어를 갖추지 않은 주어는 곧 칸트의 ‘물 자체’Ding an sich와 같은 것이다. 다만 헤겔은 칸트처럼 ‘물 자체는 사실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대신 그것은 ”하나의 공허한 무규정적 근거“일 뿐이라고, 다시 말해 현실 그 자체로부터 출발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인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헤겔은 ’술어를 갖추지 않은 주어‘에 맞서서 ’주어를 갖추지 않은 술어‘를 옹호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여기서는 확실히 주어와 술어가 전도되어 있다. 헤겔은 사물 그 자체와 사물의 이름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을 결코 극복할 수 없었다.

 

결국 헤겔이 이 모순을 제거한 것은 관념론 일반과 마찬가지로 단지 모순을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 즉 존재, 물질, 자연을 제거하는 것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모순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그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 즉 사물 그 자체와 그것의 이름을 올바로 구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사물의 개념을 그것의 이름과 구별한 헤겔의 탁월함마저 훼손시키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술어를 갖추지 않은 주어’, 즉 ‘개념을 갖추지 않은 이름’에 충분히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논리적 혼란과 착종은 대상의 이름을 그것의 개념이라고 혼동한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혼동은 논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말(궤변)을 들어서게 한다.

 

개념이 결여된 곳에는 말이 지체없이 들어선다.

 

이러한 혼동의 가능성은 물론 개념의 실존형태가 단어라는 사정과 관련된다. 단어는 개념의 실존형태인 동시에 사물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념이란 내용과 형식의 통일, 그것이 하나의 형태로서 나타나고 있는 단어와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객관적 실재의 구조 • 성질 • 관계 등의 통일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굳이 헤겔식으로 표현해 보면, 전자가 개념의 존재이고 후자는 개념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 양자의 통일이 바로 개념의 ‘개념’이다.

 

이제 다시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개념의 외연과 마찬가지로 그 내포를 동시에 고찰하는 변증법에서는 개념들 상호간의 관계를 개념의 생성, 변화, 발전, 그리고 개념들 속에 고정된 변증법적 모순 등으로 파악한다. 가령 두 개념의 동일성은 그것들의 내포에서도 고찰될 수 있다. 개념의 외연적 동일성이 두 개념의 외연이 적용되는 범위가 일치하는 경우라면, 개념의 내포적 동일성은 두 개념의 내포를 구성하는 징표들이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단순히 고찰해 보더라도 두 개념의 모든 징표들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동일한 개념일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이때 두 개념의 동일성은 ‘A=A’라는 동일율로써 표현된다.

 

그러나 헤겔은 단지 A=A라고 하는 “이 명제는 공허한 동어반복적 표현 이상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내용을 결한이러한 사유법칙은 아무런 진전도 가져올 수 없다”고 비판한다. 헤겔에 의하면 “본질은 곧 단순한 자기동일성”이다. 그러나 이때의 동일성은 또한 절대적 비동일성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본질 즉 존재를 정립한다는 것은 비존재와의 구별을 의미하는데, 이와 같은 동일성은 바로 자기자신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동일성은 이처럼 자기자신을 스스로의 정립의 계기로, 즉 피정립적 존재로 정립함으로써, “비로소 절대적 구별에 대립하는 자기자신과의 단순한 동등성으로 규정되는 동일성 그 자체의 된다.”

 

만약 모든 것이 자기동일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필경 상이할 리도 없고 대립될 리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럼으로써 또한 아무런 근거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피상적으로 고찰해 본다면 〔본질론〕에서의 이 동일성 • 구별 • 근거는 〔개념론〕에서의 보편성 • 특수성 • 개별성과 서로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본질이란 처음에는 자기자신과의 단순한 관계, 즉 순수한 동일성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으로 인해서 본질은 오히려 몰규정성을 의미하게 된다. 반면에 구별이란 하나의 규정이지만, 이것은 또 외면적이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구별이라는 점에서 상이성 일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상이성은 대립을 나타난다. 그러나 대립은 다시 모순으로 되면서 자기자신 내로 반성하는 가운데 그 자신의 근거로 귀착한다.

 

헤겔에게서는 매우 장황한 것으로 나타는 이러한 설명을 엥겔스는 단 몇 줄의 언급으로 요약한다.

 

낡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동일성의 법칙은 낡은 관점의 기본법칙이다 : a=a. 각각의 것은 자체와 똑같다. 모든 것은 영구적이다, 태양계, 별, 유기체. 이 법칙은 각각의 독립적인 경우에 조금씩 자연과학에 의해 논박되어 왔지만, 그것은 여전히 새로운 것에 반대하는 낡은 것의 지지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 한 사물은 그 자체임과 동시에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렇지만 진정하고 구체적인 동일성은 차별성, 변화를 포함한다는 사실은 최근 자연과학에 의해 자세하게 보여졌다――모든 형이상학적 범주들처럼 추상적 동일성은 소규모의 조건들 또는 짧은 기간이 문제되는 곳에서 일상적인효용을 충족한다. ……그러나 그 포괄적인 역할을 맡은 자연과학에 있어서 심지어 각각의 단일한 분야에서조차 추상적인 동일성은 전적으로 불충분하며, 비록 그것이 대체로 이제 실제적으로 폐지되었을지라도, 이론적으로 그것은 여전히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은 동일성과 차별성이 화해할 수 없는 대립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면적인 극단 대신에 그 진실은 오직 그것들의 상호작용, 동일성 안에서의차별성의 포함에 있다.

 

헤겔의 탁월함은 대상을 ‘추상적인 동일성’으로서가 아니라 “대립물의 통일”로 파악했다는 데에 있다. 또한 이 대립물의 통일 즉 모순이야말로 “모든 자기운동의 원리”임을 발견해 낸 것도 헤겔의 탁월함이다.그러나 헤겔은, 정지가 변증법적 운동의 한 특수한 경우인 것처럼 추상적 동일성은 변증법적 동일성의 한 특수한 경우라는 사실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헤겔은 변증법을 이념 • 정신 • 사유 등의 자기운동으로서 고찰하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변증법의 사유의 운동의 발전에 관한 측면, 즉 논리학적 측면이 전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데에 반해 변증법의 인식론적 측면은 무시된다. 그러나 레닌의 표현을 빌리면 “변증법은 다름아닌(헤겔과) 맑스주의의 인식론이다.”그런데 변증법의 논리학적 측면만을 파악하는 헤겔은 때때로 변증법과 형식논리학을 절대적인 대립으로 간주함으로써 오히려 자기자신의 변증법적 논리에조차 철저하게 일관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레닌의 표현을 빌면, 그와 같은 헤겔주의의 추상적인 핵심을 “발견하고, 파악하고, 적출하고 순화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바로 이것을 맑스와 엥겔스가 수행하였다.”

 

이미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헤겔의 관념변증법과는 구별되는 맑스-레닌주의의 유물론적 변증법에서는 추상적인 동일성도 변증법적 동일성의 특수한 경우로 고찰함으로써 대상을 그것의 운동과 변화발전 속에서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변화발전 속에서 또한 상대적으로 고정된 질적 규정성까지를 아울러 파악한다. 우리가 객관적 실재의 잔영으로서 개념을 실재의 운동 속에서 파악하면서도 모든 개념은 일정한 고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했던 것도 바로 대상 그 자체가 변증법적인 자기운동 속에서 이와 같은 ‘정지의 계기’를 자기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정지의 계기로 인하여 우리는 상대적인 지속성을 갖는 사물이나 속성들로 이루어진 특정 집합을 우리의 사유 안에서 개념에 연관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과학적인 법칙을 통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대적으로 지속적이고 필연적이며 본질적인 연관을 인식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변증법적 동일성은 추상적인 동일성과는 달리 자기 안에 구별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별은 물론 추상적인 상이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절대적으로 동일한 두 개념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상이한 두 개념은 서로 통일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런 공통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은 두 개념은 변증법적 연관의 대상이 아니다. 모순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두 측면의 상호의존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서로 동일하면서도 서로 상이한 두 개념만이 서로 모순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순이야말로 ‘모든 자기운동의 원리’이다. 변증법적 운동이란 곧 모순의 생성, 전개, 발전, 그리고 그것의 지양이다.

 

그렇다면 모순은 어떻게 발전하며 또 그것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모순이 모든 자기운동의 원리이듯이 모순의 발전과 그것의 자양 또한 오직 이 운동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미 보았듯이 상품의 교환과정은 모순되고 상호배제적인 관계들을 포함하고 있다. 상품의 발전은, 이들 모순Widerspruche을 지양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모순이 운동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현실적 모순이 해결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한 물체가 끊임없이 다른 한 문체를 향하여 낙하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그것들로부터 달아난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타원은 이러한 모순이 실현되면서 동시에 해결되는 운동형태의 하나이다.

 

만약 개념들이 대상들을 정확하게 모사하고 있다면, 대상의 운동은 개념의 운동으로 표현될 수 있다. 최초로 동일성에서부터 출발한 개념의 운동――곧 대상의 운동――은 자기자신 안에서 구별을 만들어 냄으로써 변증법적 모순을 이루게 되며, 이 모순을 지양함으로써 다시 새로운 동일성에 이르게 된다. 이 새로운 동일성은 최초의 동일성의 회복인 동시에 그것의 부정이기도 하다. 이들 두 동일성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며, 최초의 동일성은 오직 자기자신의 부정에 의해서만 자기자신을 보전할 수 있다. 현실에서 그러한 예는 수없이 많다. 가령 하나의 예만 들어 본다면 자본주의와 독점자본주의 또한 그러하다.

 

독점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자기운동의 결과이며, 이 운동의 원리는 오직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일 뿐이다. (이것은 매우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논의 속에서는 현란한 궤변으로 위장된 채 간과된다.) 자본주의는 자기자신의 부정인 독점 속에서만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독점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의 부정이라는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의 부정이지만, 그것은 또한 경쟁과 독점의 대립을 지양함으로써 자본주의를 회복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개념의 외연만을 비교한다면 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를 포함하는 유개념이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는 자본주의라는 개념보다 훨씬 풍부한 내포를 가지고 있다. 형식논리학에서는 외연이 확대될수록 내포는 빈곤해지고 내포가 풍부할수록 외연은 축소되는 이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변증법적 논리학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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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ou_topia 2012/01/22 18:23

    "변증법적 논리학은 개념과 범주를 인식의 결절점이나 근거지로 이해한다.

    인식과정의 산물들은 개념 및 범주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일반화되고 확정된다.|"

    이 말이 맞는지 아니면

    "변증법적 논리학은 개념과 범주를 실천의 결점점이나 근거지로 이해한다.
    실천과정의 산물들은 개념 및 범주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서 일반화되고 확정된다."라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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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ou_topia 2012/01/25 16:25

    헤겔 철학이 결국 인식론인지 아니면 인식론을 뒤로 하고 새로운 지평을 연 철학인지 읽어봐야 할 것 같다.

    perm. |  mod/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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