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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맑스-레닌주의 혁명이론의 기초

 

 

 

 

 

 

 

 

 

 

 

 

 

 

 

 

 

 

 

 

 

 

 

 

 

 

 

 

 

 

 

 

 

 

 

1장

개요 : 혁명의 정의, 혁명의 성격과 단계,

혁명운동의 전략과 전술

 

 

모든 실천적인 이론의 최종적인 귀결점은 언제나 혁명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혁명이야말로 “역사를 추진해 온 힘”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역사를 실어 나르는 기관차이다.

 

국제 노동계급 운동의 역사,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역사로부터 이미 우리는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인 운동은 없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국제 노동계급 운동의 역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진출의 시기에는 언제나 진정한 혁명적 이론과 함께 온갖 기회주의적 혁명‘이론’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운동 진영으로 유입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보여 분다. 이 기회주의적 혁명이론들의 논리는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지만, 그것들의 공통적인 본질은 쁘띠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이다. 그것들은 혁명운동 진영 내의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에 의해 선전되며, 때로는 그럴듯한 혁명적 구호와 현란한 수사학에 힘입어 광범하게 확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쁘띠부르조아 이데올로기들이 궁극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계급화해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투항에 불과하다. 그 온갖 구호와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실천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진에 심각한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쁘띠부르조아적 혁명‘이론’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프롤레타리아트만이 수행할 수 있는——특별한 역사적 임무와 인류의 역사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합법칙적인 필연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혁명이란 “항상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그리고 사회적인 법칙들의 작용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보다 높은 사회발전 단계로의 질적인 이행”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발전 및 해체와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의 각 부문의 발전이나 인간의 인식의 발전 등 인간의 사회적 생활에 근본적인 의미를 지닌 모든 사회변혁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에서 혁명 개념은 사회혁명이라는 개념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이때의 혁명은 곧 낡은 사회적 관계의 해체와 그것의 보다 진보적인 관계로의 대체를 의미한다.

 

인간은 그들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그들의 물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수준에 조응하는 일정한, 필연적인,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한 관계, 생산관계를 맺는다. 이 생산관계 전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현실적 토대를 이루며, 이 위에 법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그 토대에 조응한다. 물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일체를 조건지운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적 생산력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그것이 지금까지 그 안에서 움직였던 기존의 생산관계, 또는 이것의 단지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와 모순에 빠진다. 이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형태들로부터 질곡으로 전환된다. 그러면 사회적 혁명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전체의 거대한, 상부구조가 변혁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혁명, 즉 낡은 사회적 관계의 해체와 그것의 새로운 관계로의 대체 없이는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은 불가능하다. 혁명이란, 결국 동어반복이 되겠지만, 사회적 관계의 근본적인 변혁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일상적으로 혁명이라는 개념의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는 이 ‘변혁’과 ‘혁명’의 개념상의 차이는, 혁명이란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전면적이며 가장 철저하게 수행되는 변혁이라는 데에 있다. 낡은 사회적 관계의 변혁이 반드시 혁명이라는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모순과 그 모순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사회적 생활의 모든 발전상의 문제들이 적대적 계급사회라는 조건 아래서는 계급들 사이의 적대적인 이해관계와 갈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사회변혁의 요구가 일어나지만, 계급사회라는 조건 아래에서 이 변혁은 지금까지 사회를 지배해 온 계급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역사상 어떤 지배계급도 자신들의 배타적인 특권과 지위를 자발적으로 표기한 적이 없으며, 그들은 언제나 국가기구의 물리적 강제력과 반동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또 공고히하려고 시도해왔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는 사회의 변혁이 치열한 계급투쟁과 혁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혁명——기존 권력의 타도와 낡은 관계의 해체——이란 하나의 정치행위이다. 그러나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를 실행하지 못한다. 사회주의가 파괴와 해체를 요구하는 한, 위에서 말한 정치행위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조직한 활동이 시작되고, 그것의 자기목적, 그의 정신이 나타나게 되면 사회주의는 정치적인 베일을 벗어 던진다.

 

그러나 낡은 사회적 관계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혁명이 요구되는 까닭은 단지 낡은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즉 기존의 지배계급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혁명을 수행할, 다시 말해 근본적이고 철저한 변혁을 통한 낡은 권력의 타도와 낡은 사회적 관계의 해체를 새로운 권력의 수립과 보대 진보적인 사회적 관계의 건설로까지 추동해 나갈 혁명적 계급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이러한 공산주의 의식이 대규모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도, 또한 그 목적 자체의 승리를 위해서도 광범위한 인간 변혁이 필요한데, 이 변혁은 오로지 실천적인 운동 즉 ‘혁명’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혁명이 필요한 까닭은 단지 지배계급이 달리 타도될 ‘방법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타도를 수행하는’ 계급은 오직 혁명 속에서만 낡은 찌꺼기를 떨쳐버리고 사회를 새롭게 건설할 능력을 몸에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직접적으로는 한 계급의 지배가 다른 계급의 지배로 대체되는 것을 의미하고, 근본적으로는 사회구조가 필연적으로 보다 높은 사회발전 단계로 바뀌는 사회적 변혁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혁명의 문제를 이 두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두 측면의 구별은 단지 이론적 편의를 위한 것일 뿐, 현실에서는 결코 분리시킬 수도 분리될 수도 없다. 혁명은 근본적으로는 낡은 사회구성체로부터 새로운 사회구성체로의 이행을 의미하며, 한 계급으로부터 다른 계급으로의 권력의 이동은 이 이행의 상부구조에서의 반영, 즉 그것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혁명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일어나는가? 혁명의 객관적, 물질적 전제는 언제나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회의 토대로부터 찾아져야 한다.

 

이와 같은 ‘소외’——저 철학자들이 해하기 쉬우리라 생각되는 용어를 사용한다면——는, 두말할 나위없이, 두 개의 실제적 전제조건이 주어질 때에만 지양될 수 있다. 즉 그것이 하나의 ‘견딜 수 없는’힘으로,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항하여 인간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될 그런 힘으로 되기 위해서는, 첫째 그것은 반드시 광범한 대중을 완전한 ‘무산자’ 상태에 처하게 함과 동시에, 둘째 그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부(富) 그리고 문명세계와 모순에 처하게 되는 상태로 빠지게 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전제조건은 모두 생산력의 고도의 발전수준을 다시 그 전제로 한다. 한편 이 생산력의 발전(이는 동시에 인간이 지역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세계사 속에서 현실적으로 경험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포한다)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실적인 전제이다. 즉, 첫째로는 생산력의 발전 없이는 단지 궁핍만이 일반화될 뿐이고, 따라서 궁핍과 함께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이 다시 시작되지 않을 수 없어, 온갖 해묵은 더러운 일들이 다시 발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둘째로는 생산력의 세계적 발전과 함께 비로소 인간의 보편적 교류가 확립되고, 따라서 한편으로는 ‘무산자’ 대중이라는 현상을 모든 국가 속에서 만들어 내고(보편경쟁), 다른 한편으로는, 각 국가는 다른 국가의 혁명적 변화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결국에는 지역적으로 국한된 개인들을 세계사적이며 동시에 경험적으로도 보편적인 개인들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발전은 인류 역사에서의 모든 진보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이며 그 척도이다. 그러나 계급사회라는 조건 아래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보다 광범위한 대중들을 ‘무산자’로 만들고 그들을 궁핍으로 내몬다. 그럼으로써 이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은 낡은 생산관계와 적대적인 모순에 들어가게 된다. 혁명이란 이 모순의 전면적이고 폭력적인 해소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은 혁명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혁명의 객관적 전제조건은 주어진 사회 안에서 이 모순이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는 가장 극단적인 관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회구성체는 그 내부에서 발전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에는 멸망하지 않으며, 새로운 보다 높은 생산관계는 그들의 물적 조건들이 낡은 사회 자체의 품에서 부화되기 전에는 결코 대신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류는 그가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제기한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과제 자체가 그 해결의 물적 조건이 이미 주어져 있거나 또는 적어도 생성과정에 처해 있는 고세서만 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의 객관적 전제를 위해서는 토대에서의 이 모순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 토대에서의 이 모순은 반드시 계급들 사이의 대립과 투쟁으로 현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예를 든다면, 가령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 사이의 모순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의 대립으로 현상한다”따라서 진정한 맑스주의자라면 마땅히 토대에서의 낡은 생산관계의 위기로부터 서로 적대하는 계급들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의 위기를 연역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의 대립은 계급에 대한 계급의 투쟁이며, 그것의 최고의 표현은 총체적 혁명이다. 실제로 계급대립에 토대를 둔 사회가 무자비한 모순으로까지 치닫고 그 마지막에 해결책인 인간에 대한 인간의 충돌로 치닫는 것이 놀라운 일이겠는가?

 

혁명의 객관적, 물질적 조건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혁명적 계급의 존재 그 자체이다. 우리는 현존하는 생산력의 담지자이면서도 계급사회라는 조건 아래에서 무산자의 상태로, 절대적인 궁핍으로 내몰리는 계급의 존재에 주목해야 한다.

 

생산력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단계가 도래하는 바, 그때 생산력 및 교류수단은 기존의 관계들 아래에서는 단지 재하만을 야기시킬 뿐 더 이상 생산적이지 못한 파괴적인 힘(기계체제와 화폐)으로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와 결부되어 하나의 계급이 전면에 부상하는데, 이 계급이야말로 사회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사회의 무거운 짐들을 다 짊어지고 있으며,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다른 모든 계급들과 가장 날카롭게 대립하지 않을 수 없는 계급이다. 이 계급은 사회 전구성원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이 계급으로부터 근본적인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인식, 즉 공산주의 의식이 발생되어 나온다. 물론 이런 의식은 이 계급의 상태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통하여 다른 계급들 속에서도 형성될 수 있다.

 

이것이 맑스-레닌주의 혁명이론의 출발점이다. 이상의 결론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피압박계급은 계급적대에 토대를 둔 모든 사회에 지극히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피압박계급의 해방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사회의 창조를 내포한다. 피압박계급이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이미 획득된 생산력과 현존하는 생산관계가 더 이상 공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필수적이다. 모든 생산수단 중에서 가장 강력한 생산력은 혁명적 계급 그 자체이다. 혁명적 요소를 하나의 계급으로 조직하는 일은 낡은 사회의 내부에서 발전할 수 있는 모든 생산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적대하는 두 계급의 투쟁은 혁명으로 현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에 대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혁명의 또 한 측면, 즉 권력의 문제에 주목하게끔 한다. 모든 계급은 자신들의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한 계급의 지배를 다른 한 계급의 지배로 대체하고자 시도할 뿐인 부르조아지에게는 물론이고, 계급지배 그 자체를 철폐하고자 목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오히려 그렇기 때문에——더욱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이로부터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국가 내부에서의 모든 투쟁들, 즉 귀족제, 군주제, 민주주의 사이의 투쟁, 참정권을 쟁취하려는 투쟁 등등은 단지 환상적인 형태들——일반 이익이란 공동이익의 환상적 형태에 불과하다——에 지나지 않으며, 그 환상적 형태 속에서 실제 진행되고 있는 것은 각기 다른 계급들 사이의 현실적 투쟁들이다. 그러므로 나아가서는, 무릇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하는 그 모든 계급은——비록 그 계급의 지배가 마치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에서와 같이 모든 낡은 사회형태와 지배 그 자체를 폐지해 버리는 데에까지 나아가는 경우에 있어서조차——자기 계급의 이익이야말로 보편적 일반 이익이라고 선언할 수 있기 위해서는——일반 이익이란 애시당초 강요되는 것이다——무엇보다도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모든 혁명의 근본 문제는 권력의 문제이다.(물론 여기서 ‘근본적’이라는 말은 일차적, 근원적이라는 의미나 또는 객관적 과제의 의미에서는 아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이라는 의미에서, 또 혁명의 주체들이 그것을 가장 핵심적인 과제로 목적하고 계획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에서는 그렇다.)

 

모든 혁명의 핵심적 문제는 의심할 바 없이 국가권력의 문제이다. 어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가 하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혁명의 근본문제는 권력의 문제이다. 혁명의 성격, 그 경과와 결말은 권력이 누구의 수중에 있는가, 어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가에 전적으로 규정된다. 이른바 권력의 위기란 바로 권력을 목표로 하는 계급투쟁의 외면적인 표현이다. 원래 혁명시대가 놀라울 정도로 굉장한 것은, 이 시기에 권력을 향한 투쟁이 가장 첨예하고 노골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위기, 즉 “권력의 위기”는 그것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 전국적인 위기가 아니면 안된다.

 

모든 혁명들과 특히 20세기에 일어난 러시아의 세 혁명 모두에서 확인된 혁명의 기본법칙이란 다음과 같다 :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대중들이 예전의 방식으로는 생활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착취자들이 예전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생활할 수 없고 지배할 수도 없는 것이 필요하다. “하층계급들”이 옛 것을 원하지 않고, “상층 계급들”이 더 이상 예전의 방식대로 할 수 없을 때, 바로 그때에야 비로소 혁명은 성공할 수 있다. 이 진리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피착취자와 착취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전국적인 위기가 없이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첫째, 노동자 대다수(혹은 의식이 있고 생각이 깊으며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노동자 대다수만이라도)가 혁명이 필요하다고 완전히 깨닫고 혁명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이다. 둘째, 지배계급들이 통치의 위기를 겪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통치의 위기는 가장 후진적인 대중들까지도 정치에 끌어 들이고(모든 진정한 혁명적 징후란, 지금까지는 잠잠하였던 억압받는 노동대중의 지도자들이 그 규모에 있어서 열 배, 아니 백 배까지도 급속하게 증가되는 것이다). 정부를 약화시킴으로써 혁명가들이 그 정부를 신속하게 타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혁명의 객관적 조건들의 성숙이 곧 혁명적 정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일차적인——그러한 의미에서만 근본적인——조건들을 의미할 뿐이다. 혁명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이 객관적 조건들의 성숙 위에 주관적(주체적)인 조건들이 성숙돼 있어야만 한다. 혁명의 주체적 조건들의 성숙 여부는 바로 혁명적 계급의 의식성, 조직성, 그리고 헌신성 등에 의해 결정된다. 역사 일반과 마찬가지로 혁명은 인간행위의 산물, 즉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개인들의 산물이다. 따라서 혁명적 계급은 가능한 한 자신의 역사적 임무에 대해 가장 명료한 의식과 독자적이고 확고한 조직을 가져야 하며, 통일된 계획을 따라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운동에서 맑스-레닌주의 당에 의한 대중의 지도 필연적인 전제조건이 되는 것도 이때문이다.

 

여기서 맑스-레닌주의 당에 관한 모든 논의를 다 전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혁명운동에서 노동계급의 맑스-레닌주의 당은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투쟁에 과학적인 전략과 전술을 제시하여야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혁명은 우리를 가르칠 것이며 인민대중들을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전투적 당이 대면하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혁명에게 어떤 것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회민주의 학설의 올바름, 혁명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각인을 찍고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서 혁명을 진정하고 결정적인 승리로 이끌며 민주주의적 부르조아지의 불안정성, 소심함, 배반행위를 마비시킬 오직 철저하게 혁명적인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와 우리 사이의 결속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혁명운동의 전략(Strategie)은 혁명의 성격과 단계, 그 혁명의 사회경제적 내용과 그것이 해결하여야 할 과제에 관한 것이다. 즉 혁명의 전략이란 그 혁명의 전과정을 규정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행동의 목표이다. 따라서 그것은 혁명운동의 전과정에 걸쳐 일관되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혁명운동의 전략은 일반적으로 맑스-레닌주의 당의 강령으로 집약적으로 표현된다.

 

이에 비해 혁명운동의 전술(Taktik)은 매시기의 새로운 상황과 문제에 대해 노동계급의 정치적 행동의 방향과 구체적인 투쟁의 내용과 형태에 관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운동에 있어서 전술의 의의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강조한다.

 

현재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대중들을 지도함에 있어 올바른 전술적 슬로건을 가지는 것은 예외적으로 중요하다. 혁명적 시기에 원칙적으로 철저한 전술적 슬로건의 중요성을 하찮게 여기는 것보다 더 위험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반적으로 전술은 당 대회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당의 전술이란 당의 정치적 지도, 즉 당의 정치활동의 성격, 방향, 방법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전술적 결의는 새로운 임무와 관련하여, 또는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당의 정치적 지도 전반을 정확하게 규정하기 위해 당 대회에 의해 채택된다.

 

혁명의 객관적, 물질적 전제가 그 사회의 토대에 있다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혁명의 성격또한 그 사회의 토대로부터 객관적으로 규정된다.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근거는 그것이 사회경제적으로 어떠한 과제를 해결하여야 하며 또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혁명의 성격은 사회구조 및 그 사회의 경제구조와 계급구조 그리고 계급지배의 형태와 내용을 어떻게 변혁시킬 것인가에 의해서 규정된다. 다양한 계급세력들이 혁명운동의 과정에서 어떠한 지위를 차지하며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가 하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경제적 모순과 그 발전의 필연성에 의존한다. 그러나 “오늘날 부르조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 가운데서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왜냐하면 “다른 계급들은 근대적 산업이 전진함에 따라 몰락하며 결국 사라져가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의 특수하고도 본질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혁명과정에서 모든 계급은 자신의 계급적인 본능과 이해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이 러시아 노동자 대중들에게 사회민주주의를 가르칠 것이라는 것은 조금도 의심될 수 없다. 혁명은 다양한 사회계급들의 진정한 본질을 내보임으로써, ……이 모든 환상들은 혁명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무자비하게 일소될 것이다. 처음으로, 다양한 계급들이 그들의 진정한 정치적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이 계급들은 혁명으로부터 명확한 정치적 외관을 내보일 것인데, 왜냐하면 그 계급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그들의 강령과 전술적 슬로건에서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 의한 공개적인 정치적 행동에서도 그들의 자신을 드러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들의 맑스-레닌주의 당은 혁명에 대한 이 모든 계급의 태도를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계급적 정치의식은, 단지 외부로부터만, 즉 단지 경제투쟁의 바깥으로부터만 그리고 노동자들과 고용주들 사이의 관계영역의 바깥으로부터만 노동자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영역은 모든 계급과 계층의 국가와 정부에 대한 관계라는 영역, 모든 계급들 사이의 상호관계의 영역이다.

 

그러나 혁명에 대해 각 계급들이 취하게 될 태도를 도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혁명운동의 경과와 계급투쟁의 전선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계급, 즉 쁘띠부르조아지는 그 본질에서 혁명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이다. 그러나 혁명운동의 경과가 역사벌전의 합법칙적인 필연성에 점점 더 가까이 갈수록 이들 중간계급과 반(半)프롤레타리아들, 그리고 심지어는 부르조아지의 분파들까지도 “자신의 현재 이익이 아닌 미래 이익을 수호하며,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럼으로써——또한 그럼으로써만——이들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혁명의 계급적 내용은 궁극적으로 그 혁명이 어느 계급의 이익을 표현하며, 따라서 어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 혁명이 부여한 역사적 임무를 해결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물론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혁명이 해결하여야 하고 또 해결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과제, 즉 그 혁명의 사회경제적 내용으로부터 규정된다. 그러나 역사발전의 변증법은 그 혁명의 사회경제적 내용을 대표하는 계급과 실제로 그 혁명을 선진적으로 추동해 나가는 계급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계급이”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 보지 않으면 안된다.

 

참으로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혁명은 무엇인가? 폐물이 된 정치적 상부고조의 강제적 파괴, 일정한 순간에 그 붕괴를 일으키는 폐물이 된 정치적 상부구조와 새로운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전제와 자본주의적 러시아의 전체구조 및 그 러시아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적 발전의 모든 필요성 사이의 모순은 이제 이 모순이 인위적으로 지탱되었던 긴 시기로 인해 더욱 더 격심하게 전제의 붕괴를 일으키고 있다. 상부구조는 모든 이음매가 갈라지고, 압력에 굴복하고 있으며,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극히 다양한 계급들과 그룹들의 대표자들을 통하여 인민은 지금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그들 스스로 새로운 상부구조를 건설해야 한다.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낡은 상부구조의 무용성은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된다; 혁명은 모든 사람에 의해 인정된다. 현재의 임무는 어느계급이 새로운 상부구조를 건설해야 하며, 그 계급이 그것을 어떻게건설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규정되지 않는다면 혁명의 슬로건은 현재로선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설령 경제적 관점에서 직접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완성만을 목표로 하는 혁명일지라도 부르조아지——부르조아지가 아직 진보적인 계급일 동안에는——가 그 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반면에 부르조아지가 자신의 미래의 적을 두려워하여 더 이상 전진하기를 머뭇거릴 때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혁명을 주도하게 된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혁명의 성격에 대한 교조적인 이해——부르조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사이의 단순한 반정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맑스-레닌주의 당의 의식적, 조직적, 강령적 준비 정도와 올바른 과학적 전술의 수립 여부에 있다.

 

요약하자. 혁명의 성격은 그 혁명이 해결하여야 할 과제와 그 혁명을 추동해 나갈 계급에 의해 규정된다. 도식화의 위험을 무릎쓰고 구분해 보자면,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것은 그 혁명의 사회경제적 내용이지만, 혁명의 계급적 내용은 투쟁의 형태와 방법을 규정한다.

 

혁명의 성격은 혁명의 단계를 규정한다. 혁명의 단계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혁명이 해결하여야 할 객관적인 과제로부터 규정된다. 근대 이후의 모든 혁명은, 그 현상형태는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을지라도 그 본질은 부르조아 혁명(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사회주의 혁명)이다. 혁명의 단계에 부르조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중간단계, 또는 제3의 혁명 따위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혁명의 단계에 관한 구본은 논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논리적인 것은 반드시 역사적인 것이다”라는——그러나 이와 반대로 역사적인 것이 반드시 논리적인 것은 아니다——의미에서 논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적 구분이 연속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본래의 의미에서 연속혁명에 관한 교의는 맑스-레닌주의 혁명론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상이한 두 단계의 혁명이 연속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것들이 논리적으로 구분되기——구분되어야 하기——때문이지 그 역은 아니다.(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구분이 불필요하다면 ‘연속’이라는 그 개념 또한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때로 이 두 단계의 혁명은 매우 짧은 간격을 두고 연속적으로——레닌의 표현처럼 역사에서는 10년이라는 기간도 매우 짧은 순간일 수 있다——수행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레닌지 지적하였듯이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두 혁명의 개별적, 특수적 요소들이 뒤석이게”될 수도 있다. 따라서 현상적으로는 마치 두 단계의 혁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두 단계의 혁명은 하나의 혁명으로부터 또 하나의 혁명으로, 하나의 단계로부터 또 하나의 단계로 연속적으로 수행되는 것이지 ‘하나의 혁명’으로서, 그것의 ‘두 개의 계기’이거나 ‘두 개의 과정’으로서 수행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변증법은 하나의 질적 단계로부터 또 하나의 질적 단계로의 비약이 역사의 보편적인 발전법칙임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대립하는 두 질을 하나의 질로 ‘통일’(?)시키려고 헛되이 애쓰는 것은 그 주관적인 의도와는 무관하게 단지 두 질을 ‘절충’(!)시킬 수 있을 뿐이다. 주관적인 목표설정에 의해 혁명의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는 것, 두 단계의 혁명의 과제를 하나의 과제로 절충시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두 단계의 혁명에 대하여 ‘제3의 길’따위를 제시하는 것은 모두 철학적으로는 변증법에 대한 무지이고, 이론적으로는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며, 실천적으로는 단지 쁘띠부르조아 이데올로기에의 완전한 투항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두 단계의 혁명의 각각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부르조아 혁명이란 넓은 의미에서는 봉건적 사회구성체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로 이행하는 전과정을 총칭한다. 그것은 보다 한정적인 의미에서는 또 사멸해 가는 봉건적 사회관계를 대표하는 봉건적, 반(半)봉건적 계급으로부터 발전해 가는 부르조아계급의 수중으로 국가권력이 이양되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조아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록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한 계급의 지배를 다른 계급의 지배로 대체한 데 불과할지라도, 봉건적인 인식적 구속으로부터 “모든 시민의 평등에 대한 형식적 승인과 모든 시민이 국가의 구조를 결정하고 국가의 행정가일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지녔다는 사실에 대한 형식적인 승인”——단지 ‘형식적일 뿐인 승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물론 이러한 사실은 부르조아 혁명에 역사에서 하나의 ’진보‘임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란 언제나 지배계급의 민주주의일 뿐 다른 계급에 대해서는 독재라는 본질적인 측면을 훼손시키지 못한다.)

 

현존의 사회질서——이제까지는 상당히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는 오늘날의 지배계급인 부르조아지에 의해 만들어졌다. 부르조아지에게 고유한 생산양식은, 맑스 아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고 불려지고 있으나, 그것은 봉건적 질서에 존재하던 개인들 상호간의 인신적 유대뿐만 아니라 지방적 및 신분적 특권과 양립할 수 없었다. 부르조아지는 봉건질서를 산산조각내 버렸으며 그 폐허 위에 부르조아적 사회제도를 수립하였다. 자유경쟁, 거주이전의 자유, 상품소유자 사이의 동등한 권리 등, 요컨대 부르조아적 영광이 보장된 왕국이었다. 바야흐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자유로이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조아 혁명이다. 그것은 첫째, 논리적인 측면에서, 물론 민주주의 라는 개념은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될 때에는 부르조아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까지도 지칭하고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혁명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보다 더 정확한, 유일하게 올바른 개념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둘째,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말은 언제나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을 지칭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부르조아 민주주의도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아닌 제3의 민주주의——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가 발견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개념은 부르조아 혁명이 아닌 어떠한 제3의 혁명을 의미할 수도 없다.

 

그러한 이유에서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 혁명은 성격에서 부르조아적이다.

 

이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넓은 의미에서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전과정을 총칭한다. 그것은 보다 엄밀하게는 사회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부르조아지의 수중으로부터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이전의 모든 혁명은 단지 한 계급의 지배를 다른 계급의 지배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데에 반해, 계급적 지배 그 자체의 철폐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혁명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계급적 지배 그 자체를 폐지하기 위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먼저 자신의 계급적 지배,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여기에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 있다.

 

계급의 폐지는 피억압계급의 독재,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없이는 불가능하다.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물질적, 경제적 조건들은 완전히 성숙한다. 그러나 이 혁명의 경제적 특징은 부르조아 혁명의 경우와는 달리, 선행하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내부로터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생성, 발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모든 경제적 임무는 정치적 변혁 없이는 수행될 수 없다.

 

레닌은 말한다.

 

부르조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기본적인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는, 봉건주의에서 발생한 부르조아 혁명에 있어서 새로운 경제조직들이 낡은 질서의 태 내에서 점차 창출되어 봉건 사회의 모든 측면을 점차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부르조아 혁명은 이러한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요구되는 모든 거승ㄹ 완수하며 자본주의의 성장을 가속화환다.

 

사회주의 혁명과 부르조아 혁명의 차이점은 바로 후자가 기성의 자본주의적 관계를 발견하는 반면에……프롤레타리아 권력인 소비에트 권력은 그러한 기성의 형태를 물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점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에 의해 부르조아 혁명과 구별된다.

 

1) 부르조아 혁명은 대개 자본주의 질서에 속하는 다소간의 기성형태, 공공연한 혁명 이전에 봉건 사회의 태 내에서 성장하여 성숙한 형태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때에 시작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사회주의 질서에 속하는 기성 형태가 부재하거나 거의 부재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2) 부르조아 혁명의 주요한 임무는 권력을 장악하여 이미 존재하는 부르조아 경제에 적합하게 하는데 있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요한 임무는 권력장악 후에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는 데 있다.

 

3) 부르조아 혁명은 대개 권력의 장악으로 완수된다.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권력의 장악은 단지 시작일 뿐이며, 그 권력을 낡은 경제를 변혁하고 새로운 경제를 조직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4) 부르조아 혁명은 권력을 잡고 있는 한 착취자 집단을 다른 착취자 집단으로 대체하는 데 자신을 한정시킨다. 착취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낡은 국가 기구를 분쇄할 필요는 없다. 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권력에서 모든 착취자 집단을 제거하며, 피착취 근로자들의 지도자,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권력에 앉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 볼 때, 낡은 국가기구의 분쇄와 그것의 새로운 기구로의 대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할 수 없다.

 

5) 부르조아 혁명은 언제까지나 수백만 피착취 근로대중을 부르조아지 주위에 결집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피착취 근로자들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강화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는 주요한 임무를 수행하려는 바로 피착취 근로자들인 그들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굳건한 동맹으로 연결시킬 수 있으며 연결시켜야 한다.

 

이외에도 부르조아 혁명은 부르조아지가 점차 권력을 나누어 가지거나 간접적인 지배(부르조아 군주제) 형식을 취하는 데 반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느 누구에게도 권력을 양보하지 않고 직접적인 지배방식만을 채택한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한편으로 주관적 조건에 의해 혁명적 계급이 자기희생적 투쟁을 전개해 나갈 뿐만 아니라 혁명적 투쟁에 기초하여 올바른 전략전술을 구사하며 혁명을 지도한다.

 

이러한 차이들에서 나타나듯이 사회주의 혁명은 일련의 보편적인 원칙들을 그 특징으로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들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의 계급적이고 역사적인 본질이 표현된다. 물론 각각의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구체적인 현상형태는 역사발전과정의 특수성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며, 이 다양성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그러나 이 다양성이 사회주의 혁명의 본질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사회주의 혁명의 주요한 보편적인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 혁명의 전과정에서 노동계급이 근로대중을 지도하는 것. 그리고 그 지도적 역할을 사회에서 확보하고 또한 지속적으로 확장시켜 나가야 할 임무를 지닌 맑스-레닌주의 당이 노동계급 및 전사회를 지도해 나가는 것.

 

2) 낡은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하고 어떠한 형태이든 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를 수립하여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확립하는 것, 특히 노동계급 당의 선도 아래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 및 관리에 대중을 포괄적으로 참여시키고 대중의 적극적 창의를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확립해 나가는 것.

 

3) 노동계급과 모든 근로자들, 특히 농민대중 및 사회주의 정신으로 교육되고 육성되어야 하는 지식인의 연합을 지속적으로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 것.

 

4) 중요한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를 철폐하고 사회적 소유를 확립하는 것. 농업을 점진적으로 사회주의적으로 변형시키는 것.

 

5) 근로자들의 물질적, 문화적 생활상태를 향상시킬 목적으로 사회주의 경제학을 발전시키고 사회주의 경제법칙을 이용하는 것.  

 

6) 최신의 과학-기술적 성과를 체계적으로 이용함으로ㅆ 생산력을 가능한 한 급속하게 발전시키는 것.

 

7) 이데올로기와 문화의 영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하고 포괄적인 사회주의, 교양체계를 발전시큰 것. 문화와 교양 및 통신의 수단을 모든 제국주의적, 부르조아적, 쁘띠부르조아적 이데올로기의 사조와 투쟁하기 위해 그리고 근로대중의 사회주의적 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배치하는 것.

 

8) 민족 억압을 철폐하고 각 민족의 권리를 평등하게 확립하는 것.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라는 원리에 따라 사회주의적 제민족과 국가 사이의 공동작업을 행하고 사회주의적 제국가와 민족들의 공동체를 창출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공고히 하는 것. 이러한 공동체의 발전을 저지하고 후퇴시키려는 모든 제국주의적 시도를 집단적인 노력으로 좌절시키는 것.

 

9)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과 국가공동체의 사회주의적 업적을 반혁명적인 내외부주의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것. 제국주의의 공격적인 음모와 그 밑바닥에 깔린 이데올로기적인 방해 책동을 폭로하고 좌절시키는 것.

 

10) 여러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계급 및 근로자들의 상호유대를 공고히 하고 국제적인 노동계급 및 그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민족들의 유대를 갖는 것.

 

모든 실천적인 이론의 최종적인 귀결점은 혁명의 문제이다. 남한 맑스-레닌주의자의 임무 또한 남한 혁명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남한 혁명의 필연저긴 합법칙성을 규명해 내는 일은 모든 기회주의적 혁명이론과의 절대 타협 없는 투쟁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회주의적 혁명이론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것들의 본질은 똑같이 쁘띠부르조아지의 계급화해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현실의——아직 ‘현재’는 아니지만 그 ‘미래’가 결코 멀지 않은——혁명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모든 기회주의적 쁘띠부르조아적 분자들로 하여금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선택을 강요할 것이다.

 

유일한선택은——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인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인가 뿐이다. 중간의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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