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편. 범주와 방법론의 문제 2장. 변증법적 방법 1.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hwp (34.00 KB) 다운받기]

 

 

 

 

 

 

2장

변증법적 방법

 

 

1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현실은 그것의 개념보다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다. 왜냐하면 현실 속에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등이 언제나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종종 개념은 그것의 실재 그 자체보다 더욱 근사하게, 더욱 ‘현실적’으로 실재의 본질을 모사할 수 있게 된다. 이때 개념은 이미 단순한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은 단순한 역사적인 것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 속에서 논리적인 것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샤골로프는 ‘지식의 체계’로서의 논리와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역사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역사적 사실의 체계화’로서의 논리, 혹은 ‘모든 비전형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된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이론을 역사적 실재와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구별은 결코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상호의존과 상호침투 속에서 인간의식의 변증법적 합법칙성을 표현하는 범주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거의 통일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언제나 변증법적 합법칙성으로 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통일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자연발생적으로 관철된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관철되기 위해서는 방법론적 원칙으로서 의식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방법론으로서의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통일은 논리적인 방법과 역사적인 방법의 통일로서 나타난다. 물론 이 양자의 통일은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모두’라고 말하는 것이 변증법은 아니다. 연구와 서술의 목적에 따라서 때로는 논리적인 것이 중심적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역사적인 것이 중심적이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연구의 목적을 분명히 인식함과 아울러 그 목적에 부합되는 형태의 양자의 통일을 추구하는 문제이다.

 

논리적인 방법이 중심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연구의 목적이 대상의 본질과 법칙을 가능한 한 명료하고 순수한 형태로 서술하는 데에 있을 때이다. 반면에 역사적인 방법이 중심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연구의 목적이 그러한 현실을 합법칙적인 발전과정에 대해 가능한 한 포괄적인 전체상을 제시하는 데에 있을 경우이다. 물론 이때의 ‘역사적’이라는 말은 ‘논리적’이라는 것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역사적’인 것이지, 장구한 역사적 편연기를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한 근거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방법의 탁월한 모범은 바로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맑스가 『자본』에서 자본주의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들을 규명하고자 했을 때에는 논리적인 방법이 중심이었다. 여기에 대해 맑스는 매우 풍자적으로 대비하기를, “화폐 소유자가 실천적으로 사실에 집착하듯이, 우리는 이론적으로 사실에 집착한다.”물론 맑스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것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통일 속에서 논리적인 방법을 가장 훌륭하게 사용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들을 밝혀 냈다.

 

경제학 비판은 이미 획득한 방법에 따를 때조차도 두 가지 방식으로, 역사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착수될 수 있었다. 즉 역사에서는 그의 저술상의 반영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발전이 대체로 가장 단순한 관계로부터 가장 복잡한 관계로 진전되므로, 정치경제학의 문헌사적인 발전은 비판이 실마리로 삼을 수 있는 자연적인 길잡이를 제공해 주었으며, 이때 대체로 경제적 범주는 논리적 전개에서와 동일한 순서로 현상할 것이다. 이 형태는 분명히 실제적인 발전이 추적되므로 외견상으로는 더욱 명료하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사실상 그럼으로써 지극히 통속적이 될 것이다. 역사는 자주 비약적이고 지그재그로 진행되며 이때 어디에서나 모든 점이 추적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럼으로써 중요하지 않은 많은 자료가 수용될 뿐만 아니라 사유과정이 자주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이밖에 경제학의 역사는 부르조아 사회의 역사 없이는 기술될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예비작업이 없으므로 작업은 무한할 것이다. 그리하여논리적 논의방식만이 적당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사실상 역사적 형태와 방해적 우연성들을 제거했을 뿐이다.

 

엥겔스는――물론 맑스도――논리적인 방법만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엥겔스는 논리적인 방법은 결코 역사적인 방법을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포섭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논리적인 방법이 구체적이고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적인 방법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방법에서는 논리적 전개가 순전히 추상적인 영역에 머무르도록 전혀 강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반대로 논리적 전개는 역사적 예시를, 현실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앞서 엥겔스가 논리적 방법만이 적당했다고 말한 것은 결코 역사적 방법의 의의 그 자체를 부정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특정한 연구목적을 위해서는 오직 논리적인 방법만이 적당했다는 뜻이었음이 명백해졌다. 여기서의 이 특정한 목적이란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합법칙적 본질을 가장 명료하고 순수한 형태로 서술하고 자 하는 목적이다.

 

그런데 역사적인 것은 그 자체로서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반면에 논리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올바른 추상’을 통해서만 구체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방법에서는 당연히 서술하고자 하는 범주의 연관을 어떻게 편제해야 올바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인 방법에서는 범주들이 실제의 역사에서 결정적이었던 순서와 그것들의 서술 순서는 일치하며 또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논리적인 방법에서는 그와 같은 서술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설사 가능하더라도 오류이다.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경제학적 범주는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결정적이었던 순서에 따라 차례로 배열하는 것은 실행이 불가능하며 또한 오류이다. 오히려 그 순서는 그것들이 근대 부르조아 사회에서 상호에 대하여 갖는 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며,이 관계는 자연 그대로의 순서에 따라 나타나는 것 또는 역사적 발전의 계열에 상응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여기에서는 경제적 관계가 여러 가지 사회형태의 계기 속에서 역사적으로 차지하는 관계가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또한 (역사 운동의 희미한 표상인) ‘관념에 있어서’(프루동)의 관계의 순서가 문제로 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근대 부르조아 사회 내부에서 이 관계가 어떻게 편제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들의 편제는 단순히 역사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 정신 따위의 관념적인 것의 자기운동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이 범주들이 다름아닌 부르조아적 생산양식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따라 규정된다. 그것을 맑스는 상이한 사회구성체에서 토지소유 및 농업의 지위와 역할이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도 또한 예의 그 특정한 목적, 즉 부르조아 사회의 본질과 법칙을 규명하고자 하는 우리의 목적을 전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역사 • 사회 과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제학적 범주의 전개의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점을 언제나 명심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즉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머리 속에서도 주체, 즉 여기서는 근대 부르조아 사회가 이미 주어져 있으며 따라서 이들 범주는 이 특정 사회의, 이 주체의 현존재형태 또는 실존규정을, 종종 단순히 그 개개의 측면에 지나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때문에 이들 범주는 과학 위에서도 또한 그것이 처음부터 그 자체로서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을 명심해 두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그것은 곧 (경제학의) 편별구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에 논란이 되는 것은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외견상으로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또 양자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면 애당초 이러한 구분 자체가 무의미했을 것이다. 정작 문제의 본질은 논리적인 것이 왜 역사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느냐고――실은 논리적인 것이 역사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따져 묻는 논자들일수록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가령 논리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시도한다든지 또는 역사적인 것으로부터 아무런 매개, 즉 합리적 추상 없이 논리적인 것으로 비약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오직 자신들의 ‘철학의 빈곤’을 그대로 폭로한다.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로의 이행은 그 전제로서 거대독점자본으로의 자본의 집중과 금융자본, 금융과두제의 형성, 혹은 자본의 수출 등의 문제, 즉 독점자본주의의 형성과 독점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의 격화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른바 원조경제의 파탄으로 허덕이던 한국 자본주의에는 이러한 전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 존재할 수도 없었다.

 

한기영씨가 ‘그 전제’라고 제시하는 지표들이 과연 옳은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직 우리의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씨는 그 전제들이 논리적인 것인가 역사적인 것인가를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무지는 꽤 광범하게, 꽤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여러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국독자 단계의 독점은 산업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성립한 것이지만, 한국의 독점은 처음부터 국제적 영역하에서 독점자본으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독점은 국독자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의 독점은 ‘국독자의 것’이 아니라 ‘노예제의 것’이거나 ‘반봉건의 것’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논리적인 것으로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그것이 어떤 특수적인 (독점)자본주의인가를 분석해야 할 문제이지,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산업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성립한” 독점의 문제로서 고찰될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명백히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하나의 단계로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산업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성립한 것이 아니라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일 수 없다고 한다면, 남한의 자본주의는 아직도 산업자본주의 단계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를 지양하지 않은 독점 자본주의’는 비역사적-비논리적인 것이고,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산업자본주의’는 역사적-논리적인 것인가? 논쟁이 서로 정치경제학의 ABC를 아느니 모르느니 하는 수준에까지 떨어지게 되면 이처럼 정말 정치경제하의 ABC조차 모르는 사람까지도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고 나서기 마련이다.

 

결국 논란의 원인은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논리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으로 고찰되기 이전에 그것 자신의 논리적인 연관에서부터 고찰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일반과 독점자본주의 사이의 연관은 역사적 연관으로서의 산업자본주의/독점자본주의라는 연관과 구별되는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연관이며, 이때 독점자본주의가 특수이론으로서의 위치를 갖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일반과 독점자본주의라는 논리적 연관 속에서이다.

 

따라서 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연구가 산업자본주의 등과 같은 독점 이전의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없이 불가능한 것은 전혀 아니며, 나아가 후자가 존재하지 않는 독점자본주의를 상정할 수 없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일반과 분리된 독점자본주의는 생각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산업자본주의 없는 독점자본주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남한 또는 그 이전의 식민지 조선에서 산업자본주의 단계가 실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게――즉 그것의 실재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부정하든 긍정하든 간에 그것이 논의의 주체가 아니라는 뜻이다――매우 정당하다. 물론 역사적 • 구체적 • 실천적인 것과 논리적 • 추상적 • 이론적인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이분법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속물들에게야 이러한 설명은 매우 부당한 궤변으로 들리겠지만, 이런 속무들은 ‘역사적’이니 ‘구체적’이니 ‘실천적’이니하면서 마냥 떠들어대기만 하면 곧 ‘유물론적’이며 ‘변증법적’이며 ‘맑스주의적’인 줄로 착각한다. 이 속물들 가운데 가장 저속한 부류는 자신들에게 맑스주의를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관념적’인 맑스주의 대신에 ‘실천적인’(?) 맑스주의를 창조해 내는 이들이다. 그들은 마치 맑스가 오직 역사적인 방법만이 과학적인 인식 방법이라고――그야말로 정반대로――말한 듯이 주장함으로써 맑스주의를 실증주의의 역사관 따위로 대체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들〔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자들—인용자〕이 오늘의 한국 경제의 본질을 국독자로 규정함으로써그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딱한 사정에는 동정이 가지 않는 바도 아니어서, 한 마디 충고를 아낄 수는 없다. 경제발전단계론은 하나의 사회구성체의 형성 • 발전 • 몰락의 과정을 역사적,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며, 단순한 추상론도 아니요 형태분류학도 아니다. 신식국독자론이 그 고질병을 고치려면, 이론에 현실을 뜯어 맞춤으로써 얻어진 현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포기하고, 경제발전단계론을 일반이론의 수준에서 해결하려는 방법론적 오류를 반성하여야 한다.

 

안병직씨가 말하는 ‘경제발전단계론’――이것은 씨가 얼마나 철저하게 부르조아 경제학적 개념들에 길들여져 있는가 하는 증거이다――이란 아마 사회구성체론을 일컫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씨는 ‘방법론적 오류’라고 비난하지만, 하나의 사회구성체를 형성 • 발전 • 몰락의 과정을 역사적,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맑스의 이론은 곧 일반이론이지 않은가? 안병직씨가 의미하는 것이 ‘남한 사회구성체’의 형성이거나 ‘미국 사회구성체’의 발전, ‘러시아 사회구성체’의 몰락 등이 아니라면, 하나의 즉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형성 • 발전 • 몰락의 과정을 가장 역사적, 구체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방법은 곧 ‘논리적인 방법’이다. 씨는 일반(보편)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에 대해 전혀 무지하며, 역사적 • 구체적인 것과 논리적 • 추상적인 것을 단지 형이상학적으로 대립시킨다.

 

요컨대 ‘한국 경제의 본질을 국독자로 규정하는 것’과 ‘그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인과관계도 없다. 설령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자들이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경제의 역사적 발전과정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는 있어도 한국 경제의 본질을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도대체 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명제가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안병직씨는 “일반법칙의 특수한 현상형태들과 해당 사회구성체, 즉 특정한 역사적 생산양식을 표현해 주는 특수한 구체적인 법칙들을 탐구”할 것에 대한 맑스의 요구를 역사과정에 대한 실증들의 탐구로 대체시킴으로써 자기자신의 ‘철학의 빈곤’을 명백히 드러내고 말았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방법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유방법인가? 우선 첫째로 그것은 귀납과 연역이다. 원래 귀납과 연역은 형식논리학의 가장 중요한 사유방법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오랫동안 변증법적 사유의 방법이 될 수 없다고 오해되곤 했다. 그러나 형식논리학도 그것이 변증법적 사유의 법칙을 배반하지 않는 한은 변증법적 사유의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연역은 주어진 명제들로부터 다른 명제를 도출하는 방법으로서, 논리적 증명과정은 연역의 특수한 형태이다. 연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주어진 명제들이 참인가 거짓인가는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그것들로부터 다른 명제를 도출해 내는 것만이 중요시된다. 그러나 논리적 증명에서는 참인 명제들로부터 참인 명제를 얻는 것이 그 목적이 된다.

 

반면에 귀납은 주어진 개별 사실들로부터 어떤 명제를 추리해 내는 방법이다. 흔히 수학에서는 완전한 귀납(수학적 귀납법)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수학처럼 순수하게 논리적인 학문이 아닌 다른 일반과학에서는 완전한 귀납이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귀납적 추리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추리가 아니라 경험적인 추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귀납이 되려면 존재하는 모든 개별적 사실이 완전히 주어져야만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귀납적 추리는 일정한 개연성을 지닌 일반적 명제 내지는 가설만을 유도해 낼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귀납적 가설은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 다시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매우 정당하게도 레닌은 “물론 우리는 실천이라는 기준이, 사물의 본질상, 인간의 표상을 완전히확증하거나 반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귀납적 방법은 그것이 전제로 하는 개별적 사실들로부터가 우리의 한정된 실천과 경험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한정된 개별적 사실들로부터 얻어진 진리는 불충분한 것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과학에서는 순수하게 연역적 방법만을 사용하는 추리도 순수하게 귀납적 방법만을 사용하는 추리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논리적 증명이 주로 연역에 의거하는 까닭에 형식논리학과 연역적 방법은 오랫동안 동일시되어 오기도 했다. 글서 귀납과 연역, 특히 연역은 단지 형식논리학의 방법일 뿐 변증법적 논리학에서는 사용될 수 없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형식논리하의 수많은 인식방법들은 발전의 원리, 질적 변화의 원리, 대립물들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 등과 같은 변증법적 논리학으로 전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논리학에서는 귀납적 방법이나 연역적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형식논리학적 귀납과 구별되는 변증법적 귀납, 형식논리학적 연역과는 구별되는 변증법적 연역이 있다.

 

맑스의 『자본』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그의 적들은 맑스가 ‘연역의 과잉’에 빠져 있다고 비난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는 지금 맑스가 마주 싸웠던 것과 동일한 적들을 만나고 있다. 그들은 바로 귀납법만을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는 귀납만능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 것도 논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오직 귀납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귀납’이라고 부르는 대신 ‘실천 속에서 검증된 사실들’이라는 등의 표현을 즐겨 쓴다.) 그러나 엥겔스는 바로 그들 범귀납론자들(Den Alinduktionisten)에게 “관찰로부터 얻어진 경험만으로는 결코 필연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것 다음(Post hoc)이지만 이것 때문(Propeter hoc)은 아니다.” 이것은 아주 올바르기 때문에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이 계속적인 일출로부터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제 어느날 아침 태양이 뜨지 않을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필연성의 증거는 인간의 활동, 실험, 노동에 있다. 만약 내가 이것 다음에(Proper hoc)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것 때문에(Propter hoc)와 동일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실천은 귀납된 진리를 검증해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납된 진리가 완전한 절대적 진리라고 확증할 수는 없다. 진리는 오직 그것이 필연적임이 증명될 때에만 진리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천박한 실증주의나 경험주의와 다른 것은, 후자가 제한된 상대적 진리나 아직 가설에 불과한 진리를 절대적 진리라고 간주하고 나아가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리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전자는 인간이 그러한 상대적 진리들을 통해서 절대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만 절대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때로 극단적인 형식논리학적 귀납은 오히려 극단적인 형식논리학적 연역이 된다. 가령 오직 하나의 경험적 사실로부터 어떤 명제를 유도해내는 극단적으로 한정된 근거로부터의 귀납은――바로 주체사상의 ‘혁명적 수령관’이 그러하다――선험적으로 전제된 형이상학적 공리로부터 또다른 형이상학적 공리를 직접적으로 연역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도된 명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를 논증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참이라고 간주되고 그렇게 주장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귀납은 그릇된 방법이며 연역은 올바른 방법이라는 뜻은 아니다. 올바른 연역은 올바른 귀납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모든 연역은 일정한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고 시작되는데, 이 출발점이 되는 명제를 다시 다른 명제로부터 연역해 내고 또 이 명제를 또다른 명제로부터 다시 연역해 내는 그러한 방법으로는 실제로는 어떠한 증명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연역은 어디에선가 최초의 출발점을 가져야 하는데, 이 출발점은 연역을 통해서는 얻어지지 않으며 오직 올바른 귀납으로만, 즉 인간 실천의 결과를 일반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유방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요컨대 변증법적 논리학에서의 귀납과 연역은 서로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결합이며, 또 상호결합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은 상호결합의 가장 모범적인 예는 물론 『자본』이다.

 

귀납은 변증법적 사유의 한 방법일 수 있으나 연역은 그럴 수 없다는 범귀납론자들의 오해가 그릇된 것이듯이, 마치 맑스가 그의 『자본』에서 귀납적인 방법을 주로 “간접적이고 매개적으로” 사용했다고 해서 곧 『자본』에는 “귀납적 연구와 증명이 직접적으로 적용된 예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자본』 속에서 이런 종류의 예들을 많이 발견한다. 수많은 일련의 명제들을 맑스는 귀납적으로 정초하고 증명한다.

 

그러나 맑스는 그의 절친한 동지와 마찬가지로 결코 귀납의 의의를 반드시 요구되는 것 이상으로 강조하지 않았으며, 그것의 한계를 명확히 주의하기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앞의 연구자는 다시 이렇게 강조한다.

 

그러나 맑스에게 있어서 귀납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과대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자본』 속에서 이 논리적 인식방법의 일정한 계기들이 발견된다고 할지라도,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맑스에게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변증법적 방법이며 그 중에서도 현상들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인 분석이다.

 

이때의 ‘분석’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종합’의 대립항인 분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변증법적 방법의 핵심이자 합리적 추상인 분석을 의미한다. 합리적인 또는 과학적인 추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상 속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판별해 냄으로써 대상의 본질적인 연관과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며, 또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역사적인 것 속에서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을 판별해 냄으로써 대상의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연관과 법칙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다음 절의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더 자세히 논하지 않기로 하자.)

 

논리적인 것은 반드시 역사적인 것이다. 논리적인 것의 역사적인 것으로의 발현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논리적인 것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필연적인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은 반드시 논리적인 것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것 속에는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의 현상형태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논리적인 것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역사적인 것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역사적인 것으로서 논리적인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논리적인 것은 그것이 논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것인 동시에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은 그것이 역사적인 것일때에만 논리적인 것일 수 있다.

 

보다 단순한 범주는 비교적 미발전한 전체의 지배적인 관계 또는 비교적 발전한 전체의 종속적인 관계――그 전체가 보다 구체적인 범주로 표현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에 앞서 이미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한 한에서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가장 복잡한 것에로 상향하여 가는 추상적 사유의 방법은 현실적인 역사과정에 상응한다.

 

어째서 논리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에 데에 반해 역사적인 것은 다문 구별되지 않는 논리적인 것일 뿐인가? 논리적인 것은 바로 역사적인 것의 총계, 총화, 결론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한층 더 극명하고 일반적인 형태로 이와 같은 사실을 서술한다.

 

논리학은 사유의 외적 형식에 관한 학설이 아니라 “모든 물질적, 자연적, 정신적 사물들”의 발전법칙, 즉 세계의 총체적인 구체적 내용 및 그 인식의 발전에 관한 학설이다. 다시 말해서, 논리학은 세계에 대한 인시의 역사의 총계, 총화, 결론이다.

 

역사에 있어서 발전은 논리적인 철학의 발전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상 속에서 본질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 속에서 논리적인 것을 추출해내는 것이 올바른 추상이라면, 이와 반대로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인 양, 비논리적인 것을 논리적인 것인 양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추상이다. 말로써 역사적 • 구체적 • 실천적인 것을 강조한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실천적이지도 않은 까닭은 그것이 그릇된 추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것을 강조하는 논자들, 즉 논리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논자들일수록 오히려 개념과 범주의 역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 증거이다.

 

개념과 범주가 대상의 변화발전을 반영한다는 것은 곧 개념과 범주 그 자체도 변화발전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념을 그것의 발전 속에서 고찰할 때에만 현실의 운동을 더욱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개념 그 자체의 내포와 외연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다. 개념의 내포와 외연은, 현실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형태들을 개념 안으로 포섭해 낼 때에는 외연의 확대가 내포의 심화로, 또 내포의 심화가 외연의 확대로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지만, 현실의 운동으로부터 유리된 개념에 있어서는 그것의 내포와 외연이 단지 형식논리학적으로 서로를 배척하게 된다. 개념을 현실의 운동으로부터 유리시켜 버리면, 또는 같은 말이지만 현실의 운동을 그것의 개념으로부터 유리시켜 고찰하고자 시도한다면, 현실의 운동이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을 현실에 맞서게, 즉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그러한 귀결로써 새로운 개념이나 새로운 범주, 새로운 법칙 따위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헛된 노력이 나타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들은 논리적 범주 대신에 역사적 범주를, 추상적 범주 대신에 구체적 범주를 이론적 범주 대신에 실천적 범주를, 그리고 흔히 주장되는 것처럼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나 적용되는 범주 대신에 남한적인 범주를 창조해 냈다고 선전하며 다닌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은 단지 변증법적 유물론에 맞서는 상대주의적 유형론일 뿐이다. 그것들은 전도된 범주들이다. 거기서는 비본질적인 것들이 본질적인 것인 양 행세하며, 비논리적인 것들이 논리적인 것을 추방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Trackback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marxleninism/trackback/3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