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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상으로부터 본질로

 

 

잠시 『자본』으로 되돌아가자. 『자본』의 머리글에서 맑스는 자신이 왜 상품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분석을 시작했는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더구나 갖가지 경제형태에 대한 분석에서는 현미경이나 화학적 시약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맑스가 당시로서는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였던 영국을 중요한 예증으로서 이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연과정을 관찰할 때에 물리학자는 가장 내용이 충실한 형태에서, 그리고 교란적인 영향으로 말미암은 불순화가 가장 적은 상태에서 관찰하거나, 과정의 순수한 진행을 보증하는 조건들 아래에서 실험을 한다. 이 저서에서 내가 연구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및 그 양식에 상응하는 생산관계와 교역관계이다. 그것들이 전형적으로 나타는 곳은 오늘날의 영국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자연법칙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정도의 높고 낮음이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법칙 자체, 곧 철의 필연성etherner Notwendigkeit을 갖고 작용하며 자신을 관철해 가는 그 경향이 문제이다.

 

추상이란 이와 같이 대상을 “교란적인 영향으로 말미암은 불순화가 가장 적은 상태에서” 고찰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가장 순수하고 명료한 형태로 환원시키는 사유방법이다. 현실 속에서 대상들은 다른 존재들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된 채로가 아니라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대상들은 그 가장 순수한 본래의 형태대로가 아니라 언제나 교란되고 때로는 전도된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따라서 모든 과학연구 에서 대상의 추상화는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요구이다. 추상이란 그 본래의 의미에서는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사유방법이다. 그런 한에서 추상은 귀납적 방법의 본성과도 부합된다. 그러나 추상이 곧 귀납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추상은 대상들의 외적인 것으로부터 어떤 추상적 명제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상들에게 내적으로 공통된 것을 부각시키고 고정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시대의 생산에는 어떤 공통된 특징과 규정이 있다. 생산 일반은 하나의 추상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공통된 측면을 부각시키고 고정시켜 우리로 하여금 반복의 수고를 덜어 주는 한 그것은 합리적 추상이다.

 

또 다른 곳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물들은 외적인 것과 구별되는 중요하고 내적이며 결정적인 요소인 그 사물들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통일적인 것이 그에 걸맞게 표현된 것들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즉 서로 다른 사물들은 그것의 내적인 본질이 상이한 조건들에 걸맞게 서로 다른 형태들로 발현한 것이라는 뜻이다. 본질이란 내적인 것, 여러 사물들에 공통된 것, 그것들의 운동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거품’이 하천의 저 밑바닥에 있는 ‘깊은 흐름’과 같은 것이다.

 

존재의 진리는 본질이다.

존재란 직접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知)가 존재의 즉자대자적인 참모습〔진리—인용자〕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는 결코 직접적인 존재나 그의 구정에 머무르는 일이 없이 분명히 이 존재의 배후에는 존재 그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있음으로써 바로 이 배후에 자리잡은 것이야말로 존재의 진리를 이룬다고 하는 전제 하에서 그 직접적인 것을 꿰뚫어 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상들에게 공통된 특징과 규정이 반드시 그것들의 본질인 것은 아니라는 항변도 충분히 있음직하다. 그 본래의 의미에서 개념과 범주들은 현실에 실재하는 대상들의 본질을 포착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대상들에 공통되는 어떤 비본질적이고 외적인 특징들로부터도 범주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귀납적 방법은 합리적인 추상에 의해 매개될 때에만 변증법적이라고 믿는다.

 

개념이란 이미 그 정의에서부터 대상들의 불변적인 징표를 반영하는 것이다. 본질은 그 대상이 더 이상은 그것이 아닌 다른 무엇, 즉 새로운 질로 전화하기 이전에는 불변적이다. 그러나 현상은 대상이 본래의 질을 잃지 않았다 하더라도 단순히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념이란 어디까지나 본질의 개념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반면에 대상들의 비본질적인 징표들로부터 파악된 현상의 개념은 일시적 • 잠정적 • 조건부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아직 그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대상들의 참다운 본질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을 때에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직 그것들을 저마다의 본질적 범주에로 올바로 포섭시키지 못했을 동안에만 한정된 의의를 가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현상의 개념을 본질의 개념으로, 현상적 범주들을 본질적 범주들로 혼동하는 데에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혼동은 다만 그가 현실로부터 본질적인 것을 분석해 낼 만한 지적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왜냐하면 “현상형태라는 것은 보통의 사유형태로서 직접적 • 자연발생적으로 재생산되지만, 그 배후에 있는 것은 과학에 의해서 비로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 범주에서는 대상들의 공통된 그 본질이 언제나 그 범주의 내포를 형성한다. 그러나 현상적 범주에서는 단지 대상들의 외형적인 유상성이 그 내포를 형성한다. 본질의 범주와 현상의 범주를 혼동함으로써 상이한 본질로부터 발현된 현상들을 그것들의 외형적인 유사성에서만 파악하여 동일한 범주로, 즉 본질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오류는 남한의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대단히 광범하게 발견되는데, “주체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오해받는” 이정로씨 역시 그 한사람이다.

 

농민들의 고통스러운 하향적 몰락은 광범위하게 계속되었지만 이들 토지를 겸병하여 대경영의 농업자본가가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탈농화하여 도시로 이주해 버리거나 또는 지주-소작제라는 반봉건적 생산관계를 재생시키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특유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소작제 재생현상은 70년대 중반 이후 널리 나타나서 고미가-이중곡가제가 농업개방정책으로 변천함에 따라 가속적으로 확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농민들의 하향적 몰락, 즉 농민의 토지소유로부터의 소외는 광범위하게 계속되었지만 이들 토지를 겸병한 농업자본가가 창출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이정로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토지들은 모두 황무지가 되었거나 도시로 이주하는 농민들이 짊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광범한 농민대중이 탈농화하여 도시로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토지소유가 그에 비례하여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들 이주농민들의 대부분이 잠재실업의 형태로 농촌에 있던 반프롤레타리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하지만 씨는 ‘지주-소작제=(반)봉건적 생산관계’라는 주체주의자들의 무지를 그대로 반복한다. 게다가 더욱 고약한 일은 불과 몇 줄 아래에서는 또 이정로씨 자신이 “한국 지주의 봉건성은 상실되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물에서도 살고 뭍에서도 사는 양서동물처럼 이정로씨는 식민지 반봉건론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사이에서 자신의 동요성과 무원칙성이 빚어내는 곡예를 즐기고 있다. 그러나 지주-소작관계가 곧 (반)봉건적 생산관계는 아니다. (이정로씨는 이 말많은 ‘반봉건’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따로 정의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명확한 개념 정의를 요구한다면 아마 그는 이미 내놓았던 강철 동지와 김민철씨 등이 내놓았던 그 우스개소리들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봉건적생산관계가 사라진 현실과 ‘지주-소작관계=(반)봉건적 생산관계’라고 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이론적 무능력의 모순이 씨로 하여금 한국 지주의 봉건성은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지만 반봉건적 생산관계는 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요술을 부리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다.

 

위 논문〔「성격과 임무」—인용자〕은 한편에서는 지주의 봉건성이 상실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지주-소작관계는 반봉건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지주-소작제도 자체가 곧바로 반봉건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장 자본주의적 농업 경영이 발달했던 미국에서 이를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 소작제도였다.……구체적 역사적 환경 속에서 지주-소작제가 수행하는 역할을 규정함이 없이 지주-소작관계가 곧바로 반봉건적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고이다.

 

단지 남한에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일반에서 지주-소작관계, 즉 농업경영을 위한 토지임차대관계는 존재한다. 지주-소작관계가 곧 (반)봉건적 생산관계는 아니라는 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다. 그런데 남한에서 (반)봉건적 생산관계는 재생되고 있지 않지만, 이정로씨의 무지는 틀림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것도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농업문제의 본질이 예속독점자본의 농민지배에 있다는 것과 농업부문이 자본주의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자본주의화의 본질은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자본-임노동 관계의 창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남한 농업에서 나타나는 토지문제는 여전히 반봉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주요계급으로서의 지주는 신식민지로의 재편과정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예속독점자본의 지배하에서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에 있는 소작관계는 경작농민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이윤 보장을 허용하지 않는 반봉건적 성격의 것이다. 이로부터 농민의 토지에의 요구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농업에서든 공업에서든 문제의 본질은 생산관계에 있다. 이 점을 부정한다면 누구이든 간에 그 순간부터 그는 이미 사적 유물론과는 ‘숭고한 결별’을 선언한 셈이다. 다만 우리의 임무는 그 본질 즉 기본적인 생산관계로부터 다양한 현상의 문제들을 규명해 내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정로씨와 그의 충실한 ‘동지’는 농업문제의 본질(?)과 농촌에서의 생산관계를 분리시킨다. 농촌에서의 생산관계는 (반)봉건적 지주-소작관계이지만 농업문제의 본질은 예속독점자본의 농민지배에 있다; 더군다나 그 (반)봉건적 지주는 이미 봉건적 성격을 거의 상실하고 있으며, 더 이상 주요계급이 아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변증법이다. 그러나 이들은 예속독점자본이 농민을 지배하고 있다고 단지 선언할 뿐이지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반)봉건적 지주-소작관계가 남한의 농촌에서의 생산관계라면 남한의 농민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예속독점자본이 아니라 (반)봉건적 지주계급이어야 옳다. 물론 이정로씨가 이 ‘지배’라는 말에 그야말로 심오하기 짝이 없는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면. 더군다나 남한의 소작관계는 경작농민에게 이윤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반)봉건적이라는 데에는 참으로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남한에서 봉건적 지주-소작관계가 이미 사라졌다는 말은, 그 현상형태는 소작농이지만 이미 그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또는 반프롤레타리아라는 뜻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윤보장을 허용하는 그러한 자본주의도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본다. 이정로씨와 그의 ‘동지’들은 확실히 요술쟁이의 능력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오직 공장프롤레타리아트만 프롤레타리아트인 줄 알 만큼 순진한 요술쟁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째서 인신매매가 횡행하는 남한의 현실로부터 (반)노예적 생산관계가 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발견해 내지 못했는지 그 점만은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토지문제’라느니 ‘농민의 토지에의 요구’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이정로씨 등은 농업문제, 즉 예속독점자본의 농민지배를 오직 가격문제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미 「성격과 임무」에서부터 이정로씨는 남한에서 지주-소작관계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까닭은 저곡가정책, 교역조건의 악화, 그리고 농산물수입에 따른 가격하락이라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김환씨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격과 임무」의 남한 농문제의 성격분석은 식반론적인 농업인식과 날카롭게 대립하였다.〔글쎄? 〕 식반론은 남한 농업문제의 기본성격을 반봉건제의 온존에서 오는 지주-소작노인과의 대립으로 파악하였고 남한 사회의 반봉건성의 근거를 농업 내부의 반봉건적 생산관계에 연원하는 것으로 보았다.〔이정로씨도 그렇게 보고 있다.〕이에 대해 「성격과 임무」는 남한 농업문제의 본질이 〔반봉건제는 온존하고 있지만!〕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예속독점자본의 축적의 결과 형성된 것〔무엇이 ?〕으로 분석하고 농업에서의 주요한 대립관계를 독점자본과 농민 일반과의 대립으로 파악하였다.〔어떻게 대립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저임금정책의 유지를 위한 저곡가정책과 농공간의 부등가교환, 미국 농산물 시장으로의 전략은 남한의 농민들에게 이윤실현의 기회를 박탈하였으며 전반적인 하강몰락을 강요하였다. 이것은 농업발전의 위로부터의 길도 아니며 아래로부터의 농민적 발전의 길도 아닌 농업몰락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NDR론 몰락의 길’이었다. 아무튼 농업문제, 그것이 토지문제이든 가격문제이든 간에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본래의 주제는 아니다. 우리는 다만 이른바 NDR론자들이 현상의 범주를 본질의 범주와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뿐이다.

 

현상은 본질보다 풍부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현상의 다양하고 복잡한, 때로는 혼란되고 전도된 듯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외양과 가상들 속에서 그것의 본질을 추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현상들을 그것의 본질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임무이다. 현상에서의 모순들을 본질에서의 모순으로, 고립된 것인 양 보이는 현상들을 연관된 것으로, 분리된 것인 양 보이는 현상들을 통일된 것으로, 개별적이고 우연적으로 일어난 것인 양 보이는 현상들을 그것의 내적인 필연성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종교와 신비가 과학을 대신하게 된다.

 

바로 외적인 현상들에 대한 이러한 고착과 겉에서 인식될 수 있는 비본질적인 측면들을, 그것들의 본질적이고 내적인 연관, 즉 통일성을 알아내기 위하여 추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현실적인 사태를 왜곡시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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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변증법적 방법

 

 

1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현실은 그것의 개념보다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다. 왜냐하면 현실 속에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등이 언제나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종종 개념은 그것의 실재 그 자체보다 더욱 근사하게, 더욱 ‘현실적’으로 실재의 본질을 모사할 수 있게 된다. 이때 개념은 이미 단순한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은 단순한 역사적인 것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 속에서 논리적인 것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샤골로프는 ‘지식의 체계’로서의 논리와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역사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역사적 사실의 체계화’로서의 논리, 혹은 ‘모든 비전형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된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이론을 역사적 실재와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구별은 결코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상호의존과 상호침투 속에서 인간의식의 변증법적 합법칙성을 표현하는 범주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거의 통일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언제나 변증법적 합법칙성으로 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통일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자연발생적으로 관철된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관철되기 위해서는 방법론적 원칙으로서 의식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방법론으로서의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통일은 논리적인 방법과 역사적인 방법의 통일로서 나타난다. 물론 이 양자의 통일은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모두’라고 말하는 것이 변증법은 아니다. 연구와 서술의 목적에 따라서 때로는 논리적인 것이 중심적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역사적인 것이 중심적이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연구의 목적을 분명히 인식함과 아울러 그 목적에 부합되는 형태의 양자의 통일을 추구하는 문제이다.

 

논리적인 방법이 중심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연구의 목적이 대상의 본질과 법칙을 가능한 한 명료하고 순수한 형태로 서술하는 데에 있을 때이다. 반면에 역사적인 방법이 중심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연구의 목적이 그러한 현실을 합법칙적인 발전과정에 대해 가능한 한 포괄적인 전체상을 제시하는 데에 있을 경우이다. 물론 이때의 ‘역사적’이라는 말은 ‘논리적’이라는 것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역사적’인 것이지, 장구한 역사적 편연기를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한 근거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방법의 탁월한 모범은 바로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맑스가 『자본』에서 자본주의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들을 규명하고자 했을 때에는 논리적인 방법이 중심이었다. 여기에 대해 맑스는 매우 풍자적으로 대비하기를, “화폐 소유자가 실천적으로 사실에 집착하듯이, 우리는 이론적으로 사실에 집착한다.”물론 맑스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것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통일 속에서 논리적인 방법을 가장 훌륭하게 사용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들을 밝혀 냈다.

 

경제학 비판은 이미 획득한 방법에 따를 때조차도 두 가지 방식으로, 역사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착수될 수 있었다. 즉 역사에서는 그의 저술상의 반영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발전이 대체로 가장 단순한 관계로부터 가장 복잡한 관계로 진전되므로, 정치경제학의 문헌사적인 발전은 비판이 실마리로 삼을 수 있는 자연적인 길잡이를 제공해 주었으며, 이때 대체로 경제적 범주는 논리적 전개에서와 동일한 순서로 현상할 것이다. 이 형태는 분명히 실제적인 발전이 추적되므로 외견상으로는 더욱 명료하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사실상 그럼으로써 지극히 통속적이 될 것이다. 역사는 자주 비약적이고 지그재그로 진행되며 이때 어디에서나 모든 점이 추적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럼으로써 중요하지 않은 많은 자료가 수용될 뿐만 아니라 사유과정이 자주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이밖에 경제학의 역사는 부르조아 사회의 역사 없이는 기술될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예비작업이 없으므로 작업은 무한할 것이다. 그리하여논리적 논의방식만이 적당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사실상 역사적 형태와 방해적 우연성들을 제거했을 뿐이다.

 

엥겔스는――물론 맑스도――논리적인 방법만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엥겔스는 논리적인 방법은 결코 역사적인 방법을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포섭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논리적인 방법이 구체적이고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적인 방법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방법에서는 논리적 전개가 순전히 추상적인 영역에 머무르도록 전혀 강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반대로 논리적 전개는 역사적 예시를, 현실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앞서 엥겔스가 논리적 방법만이 적당했다고 말한 것은 결코 역사적 방법의 의의 그 자체를 부정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특정한 연구목적을 위해서는 오직 논리적인 방법만이 적당했다는 뜻이었음이 명백해졌다. 여기서의 이 특정한 목적이란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합법칙적 본질을 가장 명료하고 순수한 형태로 서술하고 자 하는 목적이다.

 

그런데 역사적인 것은 그 자체로서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반면에 논리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올바른 추상’을 통해서만 구체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방법에서는 당연히 서술하고자 하는 범주의 연관을 어떻게 편제해야 올바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인 방법에서는 범주들이 실제의 역사에서 결정적이었던 순서와 그것들의 서술 순서는 일치하며 또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논리적인 방법에서는 그와 같은 서술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설사 가능하더라도 오류이다.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경제학적 범주는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결정적이었던 순서에 따라 차례로 배열하는 것은 실행이 불가능하며 또한 오류이다. 오히려 그 순서는 그것들이 근대 부르조아 사회에서 상호에 대하여 갖는 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며,이 관계는 자연 그대로의 순서에 따라 나타나는 것 또는 역사적 발전의 계열에 상응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여기에서는 경제적 관계가 여러 가지 사회형태의 계기 속에서 역사적으로 차지하는 관계가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또한 (역사 운동의 희미한 표상인) ‘관념에 있어서’(프루동)의 관계의 순서가 문제로 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근대 부르조아 사회 내부에서 이 관계가 어떻게 편제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들의 편제는 단순히 역사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 정신 따위의 관념적인 것의 자기운동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이 범주들이 다름아닌 부르조아적 생산양식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따라 규정된다. 그것을 맑스는 상이한 사회구성체에서 토지소유 및 농업의 지위와 역할이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도 또한 예의 그 특정한 목적, 즉 부르조아 사회의 본질과 법칙을 규명하고자 하는 우리의 목적을 전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역사 • 사회 과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제학적 범주의 전개의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점을 언제나 명심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즉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머리 속에서도 주체, 즉 여기서는 근대 부르조아 사회가 이미 주어져 있으며 따라서 이들 범주는 이 특정 사회의, 이 주체의 현존재형태 또는 실존규정을, 종종 단순히 그 개개의 측면에 지나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때문에 이들 범주는 과학 위에서도 또한 그것이 처음부터 그 자체로서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을 명심해 두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그것은 곧 (경제학의) 편별구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에 논란이 되는 것은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외견상으로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또 양자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면 애당초 이러한 구분 자체가 무의미했을 것이다. 정작 문제의 본질은 논리적인 것이 왜 역사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느냐고――실은 논리적인 것이 역사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따져 묻는 논자들일수록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가령 논리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시도한다든지 또는 역사적인 것으로부터 아무런 매개, 즉 합리적 추상 없이 논리적인 것으로 비약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오직 자신들의 ‘철학의 빈곤’을 그대로 폭로한다.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로의 이행은 그 전제로서 거대독점자본으로의 자본의 집중과 금융자본, 금융과두제의 형성, 혹은 자본의 수출 등의 문제, 즉 독점자본주의의 형성과 독점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의 격화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른바 원조경제의 파탄으로 허덕이던 한국 자본주의에는 이러한 전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 존재할 수도 없었다.

 

한기영씨가 ‘그 전제’라고 제시하는 지표들이 과연 옳은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직 우리의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씨는 그 전제들이 논리적인 것인가 역사적인 것인가를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무지는 꽤 광범하게, 꽤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여러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국독자 단계의 독점은 산업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성립한 것이지만, 한국의 독점은 처음부터 국제적 영역하에서 독점자본으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독점은 국독자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의 독점은 ‘국독자의 것’이 아니라 ‘노예제의 것’이거나 ‘반봉건의 것’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논리적인 것으로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그것이 어떤 특수적인 (독점)자본주의인가를 분석해야 할 문제이지,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산업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성립한” 독점의 문제로서 고찰될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명백히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하나의 단계로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산업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성립한 것이 아니라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일 수 없다고 한다면, 남한의 자본주의는 아직도 산업자본주의 단계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를 지양하지 않은 독점 자본주의’는 비역사적-비논리적인 것이고,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산업자본주의’는 역사적-논리적인 것인가? 논쟁이 서로 정치경제학의 ABC를 아느니 모르느니 하는 수준에까지 떨어지게 되면 이처럼 정말 정치경제하의 ABC조차 모르는 사람까지도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고 나서기 마련이다.

 

결국 논란의 원인은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논리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으로 고찰되기 이전에 그것 자신의 논리적인 연관에서부터 고찰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일반과 독점자본주의 사이의 연관은 역사적 연관으로서의 산업자본주의/독점자본주의라는 연관과 구별되는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연관이며, 이때 독점자본주의가 특수이론으로서의 위치를 갖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일반과 독점자본주의라는 논리적 연관 속에서이다.

 

따라서 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연구가 산업자본주의 등과 같은 독점 이전의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없이 불가능한 것은 전혀 아니며, 나아가 후자가 존재하지 않는 독점자본주의를 상정할 수 없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일반과 분리된 독점자본주의는 생각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산업자본주의 없는 독점자본주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남한 또는 그 이전의 식민지 조선에서 산업자본주의 단계가 실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게――즉 그것의 실재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부정하든 긍정하든 간에 그것이 논의의 주체가 아니라는 뜻이다――매우 정당하다. 물론 역사적 • 구체적 • 실천적인 것과 논리적 • 추상적 • 이론적인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이분법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속물들에게야 이러한 설명은 매우 부당한 궤변으로 들리겠지만, 이런 속무들은 ‘역사적’이니 ‘구체적’이니 ‘실천적’이니하면서 마냥 떠들어대기만 하면 곧 ‘유물론적’이며 ‘변증법적’이며 ‘맑스주의적’인 줄로 착각한다. 이 속물들 가운데 가장 저속한 부류는 자신들에게 맑스주의를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관념적’인 맑스주의 대신에 ‘실천적인’(?) 맑스주의를 창조해 내는 이들이다. 그들은 마치 맑스가 오직 역사적인 방법만이 과학적인 인식 방법이라고――그야말로 정반대로――말한 듯이 주장함으로써 맑스주의를 실증주의의 역사관 따위로 대체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들〔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자들—인용자〕이 오늘의 한국 경제의 본질을 국독자로 규정함으로써그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딱한 사정에는 동정이 가지 않는 바도 아니어서, 한 마디 충고를 아낄 수는 없다. 경제발전단계론은 하나의 사회구성체의 형성 • 발전 • 몰락의 과정을 역사적,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며, 단순한 추상론도 아니요 형태분류학도 아니다. 신식국독자론이 그 고질병을 고치려면, 이론에 현실을 뜯어 맞춤으로써 얻어진 현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포기하고, 경제발전단계론을 일반이론의 수준에서 해결하려는 방법론적 오류를 반성하여야 한다.

 

안병직씨가 말하는 ‘경제발전단계론’――이것은 씨가 얼마나 철저하게 부르조아 경제학적 개념들에 길들여져 있는가 하는 증거이다――이란 아마 사회구성체론을 일컫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씨는 ‘방법론적 오류’라고 비난하지만, 하나의 사회구성체를 형성 • 발전 • 몰락의 과정을 역사적,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맑스의 이론은 곧 일반이론이지 않은가? 안병직씨가 의미하는 것이 ‘남한 사회구성체’의 형성이거나 ‘미국 사회구성체’의 발전, ‘러시아 사회구성체’의 몰락 등이 아니라면, 하나의 즉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형성 • 발전 • 몰락의 과정을 가장 역사적, 구체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방법은 곧 ‘논리적인 방법’이다. 씨는 일반(보편)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에 대해 전혀 무지하며, 역사적 • 구체적인 것과 논리적 • 추상적인 것을 단지 형이상학적으로 대립시킨다.

 

요컨대 ‘한국 경제의 본질을 국독자로 규정하는 것’과 ‘그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인과관계도 없다. 설령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자들이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경제의 역사적 발전과정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는 있어도 한국 경제의 본질을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도대체 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명제가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안병직씨는 “일반법칙의 특수한 현상형태들과 해당 사회구성체, 즉 특정한 역사적 생산양식을 표현해 주는 특수한 구체적인 법칙들을 탐구”할 것에 대한 맑스의 요구를 역사과정에 대한 실증들의 탐구로 대체시킴으로써 자기자신의 ‘철학의 빈곤’을 명백히 드러내고 말았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방법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유방법인가? 우선 첫째로 그것은 귀납과 연역이다. 원래 귀납과 연역은 형식논리학의 가장 중요한 사유방법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오랫동안 변증법적 사유의 방법이 될 수 없다고 오해되곤 했다. 그러나 형식논리학도 그것이 변증법적 사유의 법칙을 배반하지 않는 한은 변증법적 사유의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연역은 주어진 명제들로부터 다른 명제를 도출하는 방법으로서, 논리적 증명과정은 연역의 특수한 형태이다. 연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주어진 명제들이 참인가 거짓인가는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그것들로부터 다른 명제를 도출해 내는 것만이 중요시된다. 그러나 논리적 증명에서는 참인 명제들로부터 참인 명제를 얻는 것이 그 목적이 된다.

 

반면에 귀납은 주어진 개별 사실들로부터 어떤 명제를 추리해 내는 방법이다. 흔히 수학에서는 완전한 귀납(수학적 귀납법)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수학처럼 순수하게 논리적인 학문이 아닌 다른 일반과학에서는 완전한 귀납이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귀납적 추리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추리가 아니라 경험적인 추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귀납이 되려면 존재하는 모든 개별적 사실이 완전히 주어져야만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귀납적 추리는 일정한 개연성을 지닌 일반적 명제 내지는 가설만을 유도해 낼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귀납적 가설은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 다시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매우 정당하게도 레닌은 “물론 우리는 실천이라는 기준이, 사물의 본질상, 인간의 표상을 완전히확증하거나 반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귀납적 방법은 그것이 전제로 하는 개별적 사실들로부터가 우리의 한정된 실천과 경험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한정된 개별적 사실들로부터 얻어진 진리는 불충분한 것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과학에서는 순수하게 연역적 방법만을 사용하는 추리도 순수하게 귀납적 방법만을 사용하는 추리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논리적 증명이 주로 연역에 의거하는 까닭에 형식논리학과 연역적 방법은 오랫동안 동일시되어 오기도 했다. 글서 귀납과 연역, 특히 연역은 단지 형식논리학의 방법일 뿐 변증법적 논리학에서는 사용될 수 없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형식논리하의 수많은 인식방법들은 발전의 원리, 질적 변화의 원리, 대립물들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 등과 같은 변증법적 논리학으로 전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논리학에서는 귀납적 방법이나 연역적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형식논리학적 귀납과 구별되는 변증법적 귀납, 형식논리학적 연역과는 구별되는 변증법적 연역이 있다.

 

맑스의 『자본』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그의 적들은 맑스가 ‘연역의 과잉’에 빠져 있다고 비난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는 지금 맑스가 마주 싸웠던 것과 동일한 적들을 만나고 있다. 그들은 바로 귀납법만을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는 귀납만능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 것도 논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오직 귀납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귀납’이라고 부르는 대신 ‘실천 속에서 검증된 사실들’이라는 등의 표현을 즐겨 쓴다.) 그러나 엥겔스는 바로 그들 범귀납론자들(Den Alinduktionisten)에게 “관찰로부터 얻어진 경험만으로는 결코 필연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것 다음(Post hoc)이지만 이것 때문(Propeter hoc)은 아니다.” 이것은 아주 올바르기 때문에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이 계속적인 일출로부터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제 어느날 아침 태양이 뜨지 않을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필연성의 증거는 인간의 활동, 실험, 노동에 있다. 만약 내가 이것 다음에(Proper hoc)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것 때문에(Propter hoc)와 동일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실천은 귀납된 진리를 검증해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납된 진리가 완전한 절대적 진리라고 확증할 수는 없다. 진리는 오직 그것이 필연적임이 증명될 때에만 진리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천박한 실증주의나 경험주의와 다른 것은, 후자가 제한된 상대적 진리나 아직 가설에 불과한 진리를 절대적 진리라고 간주하고 나아가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리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전자는 인간이 그러한 상대적 진리들을 통해서 절대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만 절대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때로 극단적인 형식논리학적 귀납은 오히려 극단적인 형식논리학적 연역이 된다. 가령 오직 하나의 경험적 사실로부터 어떤 명제를 유도해내는 극단적으로 한정된 근거로부터의 귀납은――바로 주체사상의 ‘혁명적 수령관’이 그러하다――선험적으로 전제된 형이상학적 공리로부터 또다른 형이상학적 공리를 직접적으로 연역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도된 명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를 논증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참이라고 간주되고 그렇게 주장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귀납은 그릇된 방법이며 연역은 올바른 방법이라는 뜻은 아니다. 올바른 연역은 올바른 귀납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모든 연역은 일정한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고 시작되는데, 이 출발점이 되는 명제를 다시 다른 명제로부터 연역해 내고 또 이 명제를 또다른 명제로부터 다시 연역해 내는 그러한 방법으로는 실제로는 어떠한 증명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연역은 어디에선가 최초의 출발점을 가져야 하는데, 이 출발점은 연역을 통해서는 얻어지지 않으며 오직 올바른 귀납으로만, 즉 인간 실천의 결과를 일반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유방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요컨대 변증법적 논리학에서의 귀납과 연역은 서로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결합이며, 또 상호결합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은 상호결합의 가장 모범적인 예는 물론 『자본』이다.

 

귀납은 변증법적 사유의 한 방법일 수 있으나 연역은 그럴 수 없다는 범귀납론자들의 오해가 그릇된 것이듯이, 마치 맑스가 그의 『자본』에서 귀납적인 방법을 주로 “간접적이고 매개적으로” 사용했다고 해서 곧 『자본』에는 “귀납적 연구와 증명이 직접적으로 적용된 예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자본』 속에서 이런 종류의 예들을 많이 발견한다. 수많은 일련의 명제들을 맑스는 귀납적으로 정초하고 증명한다.

 

그러나 맑스는 그의 절친한 동지와 마찬가지로 결코 귀납의 의의를 반드시 요구되는 것 이상으로 강조하지 않았으며, 그것의 한계를 명확히 주의하기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앞의 연구자는 다시 이렇게 강조한다.

 

그러나 맑스에게 있어서 귀납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과대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자본』 속에서 이 논리적 인식방법의 일정한 계기들이 발견된다고 할지라도,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맑스에게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변증법적 방법이며 그 중에서도 현상들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인 분석이다.

 

이때의 ‘분석’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종합’의 대립항인 분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변증법적 방법의 핵심이자 합리적 추상인 분석을 의미한다. 합리적인 또는 과학적인 추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상 속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판별해 냄으로써 대상의 본질적인 연관과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며, 또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역사적인 것 속에서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을 판별해 냄으로써 대상의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연관과 법칙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다음 절의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더 자세히 논하지 않기로 하자.)

 

논리적인 것은 반드시 역사적인 것이다. 논리적인 것의 역사적인 것으로의 발현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논리적인 것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필연적인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은 반드시 논리적인 것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것 속에는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의 현상형태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논리적인 것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역사적인 것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역사적인 것으로서 논리적인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논리적인 것은 그것이 논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것인 동시에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은 그것이 역사적인 것일때에만 논리적인 것일 수 있다.

 

보다 단순한 범주는 비교적 미발전한 전체의 지배적인 관계 또는 비교적 발전한 전체의 종속적인 관계――그 전체가 보다 구체적인 범주로 표현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에 앞서 이미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한 한에서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가장 복잡한 것에로 상향하여 가는 추상적 사유의 방법은 현실적인 역사과정에 상응한다.

 

어째서 논리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에 데에 반해 역사적인 것은 다문 구별되지 않는 논리적인 것일 뿐인가? 논리적인 것은 바로 역사적인 것의 총계, 총화, 결론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한층 더 극명하고 일반적인 형태로 이와 같은 사실을 서술한다.

 

논리학은 사유의 외적 형식에 관한 학설이 아니라 “모든 물질적, 자연적, 정신적 사물들”의 발전법칙, 즉 세계의 총체적인 구체적 내용 및 그 인식의 발전에 관한 학설이다. 다시 말해서, 논리학은 세계에 대한 인시의 역사의 총계, 총화, 결론이다.

 

역사에 있어서 발전은 논리적인 철학의 발전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상 속에서 본질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 속에서 논리적인 것을 추출해내는 것이 올바른 추상이라면, 이와 반대로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인 양, 비논리적인 것을 논리적인 것인 양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추상이다. 말로써 역사적 • 구체적 • 실천적인 것을 강조한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실천적이지도 않은 까닭은 그것이 그릇된 추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것을 강조하는 논자들, 즉 논리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논자들일수록 오히려 개념과 범주의 역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 증거이다.

 

개념과 범주가 대상의 변화발전을 반영한다는 것은 곧 개념과 범주 그 자체도 변화발전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념을 그것의 발전 속에서 고찰할 때에만 현실의 운동을 더욱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개념 그 자체의 내포와 외연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다. 개념의 내포와 외연은, 현실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형태들을 개념 안으로 포섭해 낼 때에는 외연의 확대가 내포의 심화로, 또 내포의 심화가 외연의 확대로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지만, 현실의 운동으로부터 유리된 개념에 있어서는 그것의 내포와 외연이 단지 형식논리학적으로 서로를 배척하게 된다. 개념을 현실의 운동으로부터 유리시켜 버리면, 또는 같은 말이지만 현실의 운동을 그것의 개념으로부터 유리시켜 고찰하고자 시도한다면, 현실의 운동이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을 현실에 맞서게, 즉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그러한 귀결로써 새로운 개념이나 새로운 범주, 새로운 법칙 따위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헛된 노력이 나타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들은 논리적 범주 대신에 역사적 범주를, 추상적 범주 대신에 구체적 범주를 이론적 범주 대신에 실천적 범주를, 그리고 흔히 주장되는 것처럼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나 적용되는 범주 대신에 남한적인 범주를 창조해 냈다고 선전하며 다닌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은 단지 변증법적 유물론에 맞서는 상대주의적 유형론일 뿐이다. 그것들은 전도된 범주들이다. 거기서는 비본질적인 것들이 본질적인 것인 양 행세하며, 비논리적인 것들이 논리적인 것을 추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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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편. 범주와 방법론의 문제 1장. 개념 사유의 기본요소.hwp (84.00 KB) 다운받기]

 

 

 

편집자의 서문

 

먼저, 출판이 지연된 데 대하여 필자와 독자들에게 편집부의 유감을 전한다. 필자는 이 글을 작년 말과 올 해 초에 집필했고 편집부는 올 해 3월에 원고를 받았다.

 

편집부는 이 글의 가치와 중요성을 이른바 ‘(NL)PDR’, ‘NDR’ 이론에 대하여 그것들의 방법론적 오류들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글이라는 데에서 찾는다. 필자가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은 남한의 ‘사회구성체 논쟁’의 쟁점들을 둘러싼 범주와 방법론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주요하게는 남한 사회의 당면 혁명에 대하여 이른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민족민주 혁명론으로 불리우면서 정식화된 혁명‘이론’들이 근거하고 있는 방법론을 맑스주의 변증법에 비추어 비판하는 것이다.

 

현실의 혁명에 대해서 체계화된 하나의(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이론을 정립하는 것은 남한 혁명가들의 절대적이며 시급한 임무이며, 그럼으로 독자들의 주목이 이 글에서의 비판의 결과로부터 명확한 대안의 제시라는 것으로 쏠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혁명의 ‘이론’은 없어야 한다! ――이른바 ‘이론’으로써 ‘이론’을 구성하는 ‘이론’, 현실 역사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고 또한 그럼으로써 현실 역사의 운동의 불가피한 귀착을 예견하지 못하는 ‘이론’은 다만 격렬한 계급투쟁의 현실로부터 사유하지 못하는 고립된 ‘연구자’들의 화려한 수식어들의 정돈된 배열, 또는 그저 혁명적 분위기에만 휩싸인 ‘조직가’들의 단순한 선동문구일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 ‘이론’들은 상호에 대해 비판이라는 이름하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지상(紙上)에서 대립하다가 지상(地上)으로 하향(상승 !)하자마자 현실과 대립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최근 2년 동안의 남한 혁명운동이 보여주는 진실이다.

 

역사로부터 추상되었기에 그것에 조응하는 논리, 현실에 대립하지 않고 정확하게 그것을 반영하는 이론일 때에만 우리는 그것을 혁명의 이론이라 부를 수 있고, 자본주의 사회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의 전망으로 무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맑스주의 변증법의 방법론의 기초할 때에만 정립될 수 있다는 것은 이성의 소유자라면 상식으로부터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이 명백히 이러한 임무의 교두보를 구축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판의 결과로부터 명확한 대안’으로 향하는 혁명적 맑스-레닌주의자들의 바로 다음의 과제는 보다 더 구체적인 논증과 현실에 비춘 실증의 작업으로 현재의 ‘민중주의적’ 체계를 지양하고 프롤레타리아적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다.

 

나아가 남한 혁명운동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이러한 현실로부터, 지나간 시대의 수정주의적 무지에서 유래하는, 두 개념의 완전한 질적인 차이를 보는 데 실패하고 혼란(‘PDR’이 곧 SR이다)과 절충(‘PDR’은 SR를 포괄한다)을 범하는 단순하고 불철저한 사람들과의 선명한 경계선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사회경제적 의미로 말한다면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개념을 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 범주의 내포는 풍부하게 체계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의 그 빈약함이 아직도 ‘민중민주주의혁명’ 또는 ‘민족민주혁명’이라는 개념들의 존속을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1990년 12월

 

전 진 편 집 부

 

 

 

Ⅰ편

범주와 방법론의 문제

 

 

 

 

 

 

 

 

 

 

 

 

 

 

 

 

 

 

 

 

 

 

 

 

 

 

 

 

 

 

 

1장

개념 : 사유의 기본요소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운동법칙을 분석한 자신의 『자본』에서 특별히 ‘상품’이라는 범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 것을 매우 타당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상품이야 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사회의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 집적 ungeheure Warensammlung’으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 부터 시작한다.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NL)PDR, NDR론의 방법론 비판”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개념”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개념이야말로 “모든 이성적 사유의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 그 자체로부터 우리의 ‘철학 비판’을 시작할 수는 없다.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들은 모두 하나의 ‘서술’들이며, 과학의 서술방법은 그 연구방법과는 다르다는 맑스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그 ‘서술’들은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념의 비판에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철학 비판은 직접적으로 현실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철학 비판은 곧 현실 비판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현실에 대해 비판적――혁명적인 비판은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념의 비판으로부터 우리의 비판을 시작한다고 해서 그것이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개념의 변증법’을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고자 분석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곧 그러한 작업들이 바로 현실에서부터,즉 현실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과제는 당연히 그와 같은 연구와 분석들――우리가 ‘사회구성체 논쟁’이라고 부르는――이 얼마나 현실에 근사한 것인가, 얼마나 현실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한 맑스주의 연구자는 또 이렇게 강조한다.

 

개념의 변증법은 실재 세계의 변증법을 반영한다. 이것이 『자본』에서 포괄적으로 설명된 맑스주의 인식론의 근본명제이다.

 

우리의 사유는 현실을 인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인식한다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현실의 사물과 현상들은 고립된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보다 다양하고 복잡하며 때로는 도착된 듯 보이는 관계들 속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내용과 형식, 질과 양, 가능성과 현실성, 필연성과 우연성, 보편성과 특수성,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등의 통일로서 존재한다. 현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물과 현상들의 본질과 필연적인 연관들을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 줄 때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서술이 현실에 대해 전도된 관념을 불러일으킬 때 그것을 ‘신비’라고 부른다. 모든 비과학적인 서술은 대상의 다양하고 복잡하며 변증법적인 측면들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개념의 명료함과 타당함이 모두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서술의 전제가 되는 것도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개념과 범주를 인식의 결절점이나 근거지로 이해한다.

인식과정의 산물들은 개념 및 범주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일반화되고 확정된다.

 

그렇다면 이제 개념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자.

개념이란 우선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해 보면, 어떤 개체들 또는 집합들의 불변적인 징표, 즉 그것들의 불변적인 성질이나 관계들을 기초로 하여 그 개체들 또는 집합들의 집합을 사고상으로 반영한 것이다. 개념은 명제와 함께 모든 이성적 사유의 기본요소를 이룬다. 명제가 어떤 사태의 반영인 반면에 개념은 사태의 구조를 이루는 개개의 요소들, 즉 개별자, 성질, 관계 등을 모사한다.

 

개념들 가운데서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개념을 범주라고 한다. ‘철학적 범주’들은 물질과 그 발전의 가장 본질적인 규정들을 반영하는 가장 일반적인 개념들이다. 철학적 범주들은 인식의 마디점으로서 모든 과학에 대해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특수적이거나 개별적인 과학들에는 또 그 과학의 특수한 범주들이 있다. 맑스에 의하면 “경제적 범주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추상시킨 이론적 표현일 뿐이다.”법칙은 일반적으로 이 범주들 사이의 관계로써 표현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개념과 범주를 구분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개념들은 거의가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개념의 문제에서 제일 먼저 부딪히고 또한 가장 중요하며 본질적인 문제는 개념과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도 관념론과 유물론은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관념론적 변증법, 즉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개념이야말로 운동의 진정한 힘이며 자립적인 실체라고 주장한다. 헤겔에 의하면 개념은 존재의 부정인 본질의 부정으로서 부정의 부정이며, 존재와 본질의 통일이다.‘변증법적 운동=변증법적 논리학’의 출발적인 절대자인 이념의 ‘있음(존재)’이다. 그러나 본질, 즉 ‘참 있음’이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이 존재는 단지 하나의 가상인 것으로 된다. 개념은 본질을 다시 부정한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존재의 회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념은 최초의 존재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존재와 본질이 통일된 회복이다. 개념은 존재와 본질의 진리로서 자립하고 자기발전하며, 그러므로 자유이다. 헤겔은 “개념은 실체〔실재하는 본질―인용자〕의 진리”가 되며, ‘마침내 개념속에서는 자유의 왕국이 열리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개념(존재와 본질의 통일로서의 개념)도 처음에는 단순한 주관성(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이 추상적 개념은 자기자신의 운동에 의하여객관 속에 일시적으로 머무른다. (이때의 객관이란 곧 객관적 현실 또는 자연 등을 말한다.) 즉 개념의 他在(=외타적 존재)가 바로 객관성(실재적 개념)이다. 그러나 개념은 이 객관성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일에 이르른다. 이와 같은 주관성과 객관성이 통일이 바로 이념이다. 헤겔에 있어서 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은 이념에서 출발하여 이념에 도달함으로써 완전하게 전개된 진리로서 나타나게 된다.

 

개념은 내용과 형식, 본질과 현상, 보편과 특수 등을 분리된 각각의 계기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종합으로서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념은 실재를 반영 또는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실재에 내재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직관Anschauung이나 표상Vorstel-lung과는 달리,총체적이면서 구체적이다.헤겔 변증법에서의 개념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인 힘, ‘구체적인 보편’이다. 그래서 헤겔은 또 “개념은 그보다 앞서 간 모든 규정들, 즉 존재의 범주나 반성규정〔본질의 범주―인용자〕의 근저이자 또한 총체성이기도 한 까닭에 모름지기 개념은 구체저이고도 또한 그 내용이 가장 풍부한 것”이라고 말한다. 개념의 규정은 단지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질적으로도 구별된다. 또한 개념의 규정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외면적인 상관관계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헤겔의 의하면 “개념은 이 모든 것을 다 합쳐 놓은 것 이상의 그 어떤 것이다. 즉 그의 모든 규정은 규정적인 특정한 개념이긴 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바로 그 모든 규정의 총체성이라고 해야만”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개념, 즉 총체적이며 구체적인 보편인 개념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헤겔은 “개념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오직 정신에 의해서만 파착될 수 있으려니와, 더우기 이것은 오직 정신의 소유물이며 또한 이 정신의 순수한 자기이기도 한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헤겔은 개념 바로 그것을 자립적 실체이자 자기전개하는 변증법적 운동의 근저에 있는 힘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 또한 개념 자신의 변증법적 전개, 즉 ‘개념의 변증법=변증법적 논리학’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개념의 자기외화 또는 개념이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타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개념을 현실의 반영, 그것의 모사라고 간주한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 운동하는 것, 변화발전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며, 개념은 다만 현실의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구조 • 성질 • 관계 등을 표상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개념의 변증법’과 ‘실재의 변증법’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대립이며, ‘철학의 근본 문제’가 ‘근본 문제’로서의 의의를 부여받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맑스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매우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표현한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근본적으로 헤겔의 그것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오히려 정반대이다. 헤겔에게서는 그가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자립적 주체로까지 전화시킨 사유과정이 현실적인 것의 창조자이고, 현실적인 것은 다만 외적 현상을 이룰 뿐이다. 나에게는 그와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환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개념은 우리의 사유 속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수하게 관념적인 것도 아니며 자립적인 힘이나 실체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념 밖에 있는 것, 인간의 의지나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현실의 실재적인 관계들이 인간의 사유속에 반영된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관념적이다. “실재하는 관계들이야말로 인간의 개념들에 대한 객관적 토대이다.”

 

그렇다면 변증법에서 개념과 형식논리학에서의 개념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은 어디에 있는가? 형식논리학은 개념을 고정된 것, 불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점은 맑스 이전의 경제학자들――고전 경제학자들이든 속류 경제학자들이든 간에――에게 공통된 것이기도 하다. 맑스에 의하면 그들은 “부르조아적 생산관계, 분업, 신용, 화폐 등을 고정된, 불변하는, 영속적인 범주로 설정한다.”이것은 단지 개념, 즉 사유의 문제라기 보다는 더욱 근원적인 문제라고 해야 한다. 형식논리학은 개념의 근저에 있는, 개념이 바로 그것을 모사하고 있는 현실의 관계들을 항구적인 것,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제 트로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관계 속에서 어떻게 생산이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관계 그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즉 이러한 관계를 낳게 한 역사적 운동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산관계의 역사적 운동――범주는 그것의 이론적 표현에 불과하다――을 추구하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든 사상의 근원을 순수 이성의 운동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헤겔의 관념변증법과는 구별되는 맑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방법은 이것과는 정반대의 방법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은 “모든 생성된 형태를 운동의 흐름 속――곧 그것의 경과적인 측면――에서 파악”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법은 당연히 현실 그 자체의 변화와 발전을 쫓아 개념도 또한 변화발전하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단지 그〔맑스 비판지의 한 사람인 파이어맨―인용자〕의 얘기는 모두 맑스가 자신의 논의과정에서 어떤 정의를 내리고자 했다는 오해, 즉 일반적으로 맑스에게서 어떤 확정되고 고정된 그리고 모든 경우에 타당한 정의를 끌어 내고자 하는 잘못된 인식 위에 출발하고 있다. 사물들과 그것들의 사상(思像)과 개념들도 동시에 변화되고 변화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얘기이다. 즉 우리는 이것들을 화석화되어 버린 정의로 묶어 버릴 것이 아니라 그것의 역사적이고 논리적인 형성과정을 따라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맨처음에 내렸었던 개념의 정의, 즉 개념이란 대상들의 ‘불변적인’ 징표, 그것들의 불변적인 성질이나 관계들을 기초로 한다는 것과 상반되지 않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데에 실은 관념변증법과 맑스-레닌주의의 유물변증법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모든 물질의 존재의 본질은 운동한다는 데에 있다 “운동은 물질의 존재양식”이며, “운동 없는 물질은 물질 없는 운동과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없다.”따라서 개념 또한 대상을 운동 속에서, 그것의 변화와 발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대상 ‘그 자체’의 운동이라는 말을 덧붙여 두기로 하자. 대상의 운동과 대상이 운동하는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는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경의 변화도 대상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이 대상의 운동에 어떤 새로운 질적 규정을 부여해 주지 않는 한 그것은 비본질적이며 부차적인 조건이 될 뿐이다.)

 

그런데 헤겔의 경우에는 정지 또한 운동의 특수한 형태라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그는 변증법과 형식논리학을 절대적으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형식논리학적으로 대립시키고 만다. 반면에 유물변증법에서는, 비록 그와 같은 개념의 고정성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임을 명확히 전제한 위에서지만, 결코 개념의 고정성 그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유물변증법은 변화하고 발전하는 대상의 운동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적인 징표들을 발견해 내고 그것을 개념으로 반영한다. 우리가 오직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인과적인 현상들에서만 어떤 법칙을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개념의 고정성이 전제되지 않은 서술로부터는 현실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들을 수 없다. 개념의 고정성이 그것이 상대성 속에서만 올바른 것이 되듯이, 이와 같은 개념의 상대적 성격 또한 그것의 고정성 안에서만 올바른 것이 된다. 만약 대상의 운동이 기존의 불변적인 징표들까지도 변화시키게 되는 새로운 질에 이르른다면, 개념의 고정성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역시 새로운 개념을 요구하게 된다. 이것은 곧 대상의 운동에 작용하는 변증법적 법칙――양질전환의 법칙이,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개념에 대해서도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개념의 상대적 고정성이란 그것이 반영할 수 있는 대상의 운동의 한도이다. 이 한도를 넘어서는 대상의 운동은, 대상 그 자체에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개념을 요구한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대상의 질적 변화와 무관하게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헛된 시도는 단지 그 자신의 “정신적 빈곤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헤겔은 개념 그 자신의 운동을 통해서 객관적 세계의 운동을 파악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은 개념을 대상의 운동 속에서 고찰한다. 흔히 사회과학적 범주들에서 대상의 운동은 그것의 역사성으로 반영된다. 개념은 자기자신의 역사성 속에서만 일정한 고정성을 가질 수 있다. 실은 개념이 역사적으로 형성된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개념을 자의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그것의 고정성이 나타난다. 개념은 그 자신의 역사성과 고정성, 상대성과 불변성의 통일이다. 흔히 형식논리학에서는 개념을 단지 그 고정성에서만 파악한다. 따라서 형식논리학으로써는 대상의 운동과 변화발전을 올바로 반영할 수 없다. 반대로 개념으로부터 그것의 고정성을 배제시켜 버리는 것 또한 옳지 않다. 그와 같은 시도는 필연적으로 상대주의적 불가지론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굳이 플레하노프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변증법이란 ‘어디서 태어났느냐’는 질문에 ‘여기저기서’라고 대답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와 같은 개념의 상대적 불변성, 또는 같은 말이지만 그것의 역사적 고정성을 통하여 우리는 현실과 개념 사이의 변증법적 조응 관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념이란 현실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들의 구조 • 성질 • 관계 등을 반영한다는 데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개념으로써, 즉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개념에 비추어 봄으로써’ 현실을 인식하기도 하다. 이것은 물론 관념적인 것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주관적 관념론과도, 정신이 현실을 정립한다는 헤겔류의 객관적 관념론과도 무관하다. 다만 우리는 현실을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선취하고 있는 개념들――물론 그것들도 또한 현실의 반영이다――이 없이는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의 사유는 단지 현실로부터 개념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식된 개념들로써 다시 현실을 인식한다.

 

물론 서술방식은 형식상 연구방식과 구별될 수밖에 없다. 연구는 소재를 자세히 탐구하여 그 상이한 발전 형태를 분석하고 그 발전 형태의 내적 관련을 찾아 내어야만 한다. 이 일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그에 상응하여 현실적 운동이 서술될 수 있다. 이것에 성공하여 이제 소재의 생명 활동이 관념적으로 반영되면, 마치 선험적 구성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서술방식과 연구방식에 관한 맑스의 이 설명은 매우 강조되고 있으며 또 그러한 강조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만약 우리가 일정하게 고정된 개념들을 선취된 것으로 전제하지 않는다면, 실은 이와 같은 구분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하향과정과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과정은 다같이 개념에 의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하향과정은 개념으로써 현실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반면에 상향과정은 인식된 현실을 개념으로써 서술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서술은 오히려 마치 개념이 자기운동을 통해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과학의 목적은 현실의 운동을 보다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흔히 우리는 과학은 현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물론 옳다. 그러나 단 우리에게 일정한 개념들과 그것들의 체계가 선취되어 있을 때에만 그것은 옳다. 단지 철학자인 체 할 뿐인 천박한 무리들은 ‘현실로부터!’ 하고 떠들어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현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현실을 관찰하여 처음에는 그것으로부터 ‘물질’이라는 범주를 찾아 내고, 이어서 ‘운동’을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주를 발견해 냄으로써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관찰하여 처음에는 ‘생산력’이라는 범주를 찾아 내고, 이어서 ‘생산관계’를, ‘계급’과 ‘상부구조’와 그밖에 ‘잉여가치’와 ‘이윤율 저하의 법칙’ 등을 발견해 냄으로써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그와 같은 시도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인류의 지식과 사유능력이 발전해 온 전과정을 처음서부터 되풀이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지식들의 총화와 가장 높은 수준으로까지 발전된 사유방법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맑스-레닌주의의 범주들과 그것들의 체계들인 맑스-레닌주의의 방법론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개념을 ‘자립적 실체’로 간주하는 헤겔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 개념이 그 자체로서 실존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개념이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것, 관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의 실존형태는 단어이다. 물론 개념과 단어 사이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상이한 단어들이 동일한 개념의 존재형태일 수도 있으며(이음동의어), 반대로 동일한 단어가 상이한 개념들의 존재형태일 수도 있다(동음이의어), 그러므로 서술이 논리적이고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념과 단어 사이에 분명한 可逆的 대응관계가 성립하여야 한다. 이 관계는 내포와 외연으로 표현된다.

 

개념은 반드시 그 내포와 외연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개념의 외연은 그것이 적용되는 개체들 또는 개체들의 집합을 반영한다. 이에 반해 개념의 내포는 그에 상응하는 개념의 외연 내에서 반영되는 모든 사물들의 공통되는 징표들의 복합을 반영한다. 예를 들면 ‘해금’과 ‘깡깡이’는 그 내포에 있어서 동일한 개념들이다. 반면에 ‘등변 삼각형’과 ‘등각 삼각형’은 내포는 서로 다르지만 그 외연에 있어서는 동일한 개념들이다. 흔히 형식논리학에서는 개념의 외연만을 고찰하고 서로 비교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논리학에서는 개념의 내포도 또한 연구대상이 된다.

 

우선 형식논리학에서의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개념들 사이의 외연적 관계는 대개 포함 관계 • 選言 관계 • 교차 관계로 나누어진다.

 

포함 관계란 한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모든 사물들이 다른 개념의 외연에도 속하는 경우이다. 이때 포함하는 개념을 ‘類 개념’, 포함되는 개념을 ‘種 개념’이라고도 한다. (세 개념 사이의 포함 관계에서는 유 개념 • 종 개념 • 개체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동일성은 포함 관계의 특수한 경우이다. 두 개념의 외연이 일치할 때―― ‘등변 삼각형’과 ‘등각 삼각형’의 경우처럼――이 개념들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동일성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두 개념의 외연이 어떠한 공통적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해금’과 ‘등변 삼각형’의 경우처럼――이들은 선언관계에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교차 관계는 두 개념의 일부 요소들만이 공통적인 경우, 다시 말하자면 두 개념의 공통된 요소들과 어느 개념에만 속하는 요소들이 있을 때 이들은 교차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개념들 사이의 관계는 셋 이상의 개념들에 대해서도 물론 적용되어진다. 그러나 셋 이상의 개념들 사이에서는 관계들이 서로 중첩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듯 형식논리학에서는 주로 개념들의 외연적인 관계만을 고찰한다. 그러나 플레하노프의 지적처럼 “정지가 운동의 특수한 경우인 것처럼, 형식논리학의 원리를 따르는 사유는 변증법적 사유의 특수한 경우이다.”무엇보다도 우리는 한 이론체계 내에서의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그 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독자적인 사회유형으로는 될 수 없다.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제국주의의 생명선인 식민지 사회의 한 체제인 것만큼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사회의 외연 속에 포괄되는, 즉 자본주의 사회유형에 속하는 특정한 사회체제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유형이란 아마 외연적으로 사회구성체와 동일한 개념이 될 것이다. 반면에 사회체제라는 개념은 사회유형이라는 개념에 포함된다. 즉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체제는 자본주의 사회유형 속에 포함된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동시에 식민시 사회(유형? 체제? 또는 성격? )의 한 체제라는 점이다.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와 식민지 사회에 대해 각각 포함 관계에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식민지는 서로 어느 쪽도 다른 쪽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교차 관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식민지 반자본주의를 공통적 요소로 하면서 서로 교차 관계에 있는 두 포함 관계의 계열을 내올 수 있다. 하나는 ‘식민지 반자본주의 → 자본주의 → 사회구성체’이며, 다른 하나는 ‘식민지 반자본주의 → 식민지 반봉건(사회유형) → 식민지’이다. 두 계열의 개념들의 포함 관계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두 계열 사이의 교차 관계는 더욱 엷어지고, 따라서 두 계열의 대립되는 성격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면 대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전자의 ‘식민지 반자본주의’ 대신 ‘(신식민지 또는 종속국)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위치지워 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즉 ‘남한 → 국가독점자본주의 → 자본주의 → 사회구성체’와 ‘남한 → 식민지 반자본주의 → 식민지 반봉건 → 식민지’가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맑스-레닌주의의 방법론이며 후자는 부르조아 민족주의의, 주체주의의 방법론이다.

 

물론 이와 같은 파악은 단지 개념의 외연만을 고찰한 것이다. 주체주의자들의 논리는 더욱 심오한 주장을 담고 있다.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비록 외연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유형에 속하지만 “그의 고유한 사회정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두 개념의 내포가 일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동일한 근거가 요구된다. 그러나 식민지 반자본주의라는 규정은 한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근거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른바 사회구성체, 즉 그 사회의 가장 일반적인 면모를 파악하는것만으로는 사회의 구체적 성격이 규명될 수 있는 것도, 또 정확히 밝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호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마땅히 사회구성체로서의 사회유형 구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련이 현실이 반영된 사회체제로서의 한국 사회의 성격이 옳게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사회구성체’가 아니라 ‘사회체제’이다? 아무튼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체제는 외연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포함되지만 내포적으로는 남한 사회의 식민지성에 근거하고 있다. 앞의 인용문을 다시 한번 주의깊에 읽어 보자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식민지 사회의 한 체제인 것만큼……자본주의 사회의 외연 속에 포괄되는” 사회이다. 도대체 식민지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에 포괄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종잡기는 어려우나, 분명한 것은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단지 외연적으로만 자본주의 사회에 포괄될 뿐이다. 그것은 내포적으로는 ‘식민지 사회의 한 체제’이다. 주체주의자들은 하나의 개념을 그 외연과 내포를 분리시켜 고찰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대립시킨다. 어쩌면 주체주의자들이 보기에 맑스-레닌주의는 ‘외연주의!’일런지도 모른다. “남한의 식민지적 내포를 부정하는 외연주의자들 !” 하고 그들은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고찰하면서 우리는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비판한다.

 

첫째, 개념이란 그 내포와 외연의 통일이다. 내포 없이는 외연이 있을 수 없듯이 외연 없는 내포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식민지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식민지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라는 개념의 내포와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의 외연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곧 식민지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서로 다른 두 개념의 외면적인 결합에 불과한 절충적 개념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둘째, 어떤 한 개념이 다른 한 개념에 외연적으로 포함된다고 해서 반드시 내포적으로 그에 상응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자본주의라는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내포와 외연의 통일이다. 그런데 주체주의자들의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단지 외연적으로만 포함될 뿐이며, 내포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반‘자본주의’여야 할 까닭이 없다. 그것은 반‘자본주의’ 또는 반‘봉건’이 아니라, 반‘노예제’거나 반‘공산주의라고 하더라도 전혀 무관하다. 반’자본주의‘든 반’공산주의‘든 간에 “식민지는 그 사회체제의 내적인 법칙에 따라 합법칙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후진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의 산물이며, 외적 힘의 강요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은 한 사회를 그것의 ’내적인 법칙에 따라‘ 고찰하는 방법론으로서의 사회구성체론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그것의 내적인 법칙과 무관한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맑스와 엥겔스의 것이 아니라 베버나 슘페터의 자본주의다. 주체주의자들의 반’자본주의‘라는 이름은 그것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이는 곧 주체주의자들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일정한 내포와 외연의 통일된 개념을 단지 편의에 의해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폭로해 준다.

 

주체주의자들의 예에서 보았듯이, 개념의 실존형태가 단어라는 사실은 곧잘 단어, 즉 대상의 ‘이름’을 그것의 개념과 혼동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물의 이름과 개념은 전혀 다른 것이다. 설령 우리가 사물의 이름을 변화시킨다 하더라도 사물 그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 한 사물의 개념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의 이름과 개념 사이의 관계는 논리학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로 표현된다.

 

헤겔 이후에 많은 철학자들은 그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기도 했고 맹목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헤겔을 비판한 최초의 철학자는 포이에르바하였다. 포에르바하는 헤겔이 주어와 술어를 전도시켜 놓고 있음을 폭로했는데, 이 점에 관한 한 그는 맑스와 일치한다.

 

사유와 존재의 진정한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존재는 주어고 사유는 술어다. 사유는 존재에 의해 조건지어지나, 존재의 사유에 의해서 조건지어지지 않는다. 존재는 자기자신에 의해 조건지어지며……자기자신 속에 그 근거를 갖는다.

 

여기서 비판의 핵심은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대한 헤겔의 전도된 체계에 있다. 헤겔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자연을 단지 이념의 외타적 존재로밖에 간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이 사유와 존재를 동일한 것으로 혼란시켜 놓았음을 폭로한다. “유물론은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인정하지, 결코 그 동일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유가 단지 사유 자체에 대한 주어가 아니라, 현실적(즉 물질적) 존재의 술어인 경우에만 사유는 존재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체계가 아니라 그 방법, 즉 변증법적 논리학에 주목하고자 한다. 헤겔이라고는 읽어 본 적도 없으면서 ‘Hegelian’이니 ‘헤겔적’이니 하고 무턱대고 헤겔을 비난하기만 하면 자신의 임무를 다한 것으로 믿는 자칭 ‘유물론자’들로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겠지만, 사실 변증법적 논리학에서의 주어와 술어의 관계에 대하여 처음 설명한 사람은 바로 헤겔이다.

 

헤겔에 의하면 개념은 보편성(동일성의 계기) • 특수성(구별의 계기) • 개별성(동일성과 구별의 모순적 통일=근거의 계기)이라는 세 계기를 포함한다. 개념의 개별성, 즉 구체적 보편성은 개념이 그것의 동일성으로부터 자신의 외타적 존재로 이행하여 마침내 ‘판단’으로 전화하는 계기이다. 판단은 개념 그 자체에 정립되어진 이 개념의 규정성(=특수성)이다. 그런데 판단은 “주어와 술어”라고 불리우는 두 개의 자립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든 명제는 ‘문법적인 의미에서’ 주어와 술어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명제가 판단인 것은 아니다. ”제대로의 판단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술어가 세 가지 개념규정의 관계에 따라서 주어에 대한, 즉 보편으로서의 술어가 특수나 혹은 개별에 대한 관계를 지녀야만 한다“

 

헤겔은 “이 행동은 선(善)하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면서, 이것은 하나의 ‘명제’이기는 하지만 ‘판단’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여기서는 술어가 특수나 개별에 대한 보편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판단이란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다른 측면들은 모두 무시하기로 하자.)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 개별은 보편이다.

독점자본주의는 발전된 자본주의이다; 특수는 보편이다.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이것은 단지 판단의 형식을 이루는 명제이다. 그에게는 “주어가 보편으로 규정되고 반대로 술어는 특수한 개별로 규정되는”그러한 명제야말로 판단의 내용을 이룬다.

 

〈주어〉 〈술어〉

개별은 보편적이다.(형식)

보편은 개별적이다.(내용)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남한이다. 이것이 ‘개념의 변증법’, 즉 전도된 주어와 술어인데, 헤겔은 자본주의라는 보편적 개념이 자신의 구별(가령 독점자본주의라는 특수적 개념)으로 이행하였다가 다시 남한 사회라는 개별자 속에서 보편과 특수가 통일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개념의 변증법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헤겔은 주어를 존재의 이름으로, 술어를 이 존재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단지 이름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직도 무규정적인 존재일 뿐이다. 맑스의 표현처럼 “어떤 사람의 이름이 야곱이란 것을 알더라도 그 사람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존재는 그것이 술어로서 표현될 때에만 비로소 하나의 개념이 된다.

 

왜냐하면 주어가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것은 오직 존재를 개념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술어가 비로소 밝혀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혹은 이것은 어떠한 종류의 식물인가 등에 관해서 묻는다고 할 때, 여기서 물음의 표적이 되는 존재는 한낱 이름에 지나지 않거니와 사람들은 이때 그 이름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이미 그 지목된 대상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듯이 행세한다. 이것이 바로 주어의 의미하는 바에 따라서 파악된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실은 개념이나 아니면 적어도 본질 또는 보편일반을 구성하는 것은 술어일 뿐더러 결국 판단의 의미에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도 오직 이 술어에 관한 것이다――따라서 도대체 신, 정신, 자연이라는 등의 모든 것은 판단의 주어라는 점으로 볼 때 한낱 명칭에 지나지 않으려니와, 과연 이러한 주어가 개념에 비추어 볼 때어떤 성질의 것인가 하는 것은 술어를 통해서만 비로소 밝혀질 수 있는 문제이다.……바로 이 개념을 언표하는 것은 다름아닌 술어 그 자체이다.

 

존재를 그 ‘개념에 비추어’ 판단한다는 것은 단지 ‘개념의 변증법’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더욱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개념의 변증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재의 변증법’의 반영으로서 일정한 관계들을 자기자신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그와 같은 개념의 자기내용, 즉 개념의 내포에 비추어 존재를 판단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여기서는 남한이라는 개별로서의 주어가 자본주의라는 보편으로서의 술어에 의해 규정(특수화)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개념’――물론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에 비추어 남한 사회를 판단한다. 따라서 남한 사회에 대한, 또는 남한이 자본주의 사회임에 대한 우리의 모든 서술에서는 반드시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그 판단의 근저에 주어져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그 반대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남한이 자본주의 사회가 아님에 대해서 서술할 때에도 우리는 반드시 동일한 그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비추어 판단한다. 흔히 주체주의자들이 “오늘 한국 경제에서 지배적인 것은 자본주의적 경제관계”라고 말하면서도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무엇인―인용자〕 식민지 반자본주의적 성격의 사회”라고 주장할 때 간과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이다. 그들은 판단을 개념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러한 괴리는 ‘사회구성체 논쟁’을 ‘사회성격 논의’라고 부른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문제의 본질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사물의 이름과 그것의 개념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만이 사물의 이름을 변화시킴으로써――가량 ‘식민지 반봉건 사회’를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그것의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다.

 

사람들이 이름(명목)을 바꾼다고 해서 사실 자체를 변경할 수는 없다.

 

물론 개념의 실존형태는 화폐, 증기기관, 자본주의 등과 같은 ‘단어’이다. 그러나 술어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 단어는 단지 사물의 이름일 뿐이다. 형식논리학, 특히 전통논리학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단지 문법적으로만 파악한다. 여기서는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 사이의 관계가 문제된다. 그러나 형식논리학에서도 문법적인 주어 개념과 논리적인 주어 개념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형식논리학적으로 파악할 때 판단이란 단지 두 개의 개념의 결합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외면적인 결합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주어와 술어, 즉 두 개념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헤겔에 따른다면 동일성(존재의 판단) • 구별(현존재의 판단) • 필연(필연의 판단)이라는 세 계기를 거쳐 개념의 판단에 이르른다.

 

그렇다면 헤겔의 관념변증법과 맑스의 유물변증법 사이의 대립은 어디에 있는가? 사물의 이름과 그것의 개념을 구별할 줄 알았다는 데에 헤겔의 탁월함이 있지만, 그는 지나치에 멀리 나아가고 말았다. 헤겔은 사물의 개념을 그것의 실재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는 개념이란 단지 객관적 실재가 지닌 구조 • 성질 • 관계 등이 우리의 사유 속에서 관념적인――특히 언어의 형태로 번역된 것에 불과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거꾸로 실재란 단지 개념의 외타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헤겔에게는 이 개념이야말로 자립적인 실체이다. 따라서 개념으로부터 소외된 외부세계 그 자체, 가령 순수한 자연 등은 참다운 실재가 아니라 ‘단순한 존재(그저 있음)’일 뿐이며, 헤겔 자신의 표현을 빌면 “술어를 갖추지 않은 주어”이다. 술어를 갖추지 않은 주어는 곧 칸트의 ‘물 자체’Ding an sich와 같은 것이다. 다만 헤겔은 칸트처럼 ‘물 자체는 사실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대신 그것은 ”하나의 공허한 무규정적 근거“일 뿐이라고, 다시 말해 현실 그 자체로부터 출발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인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헤겔은 ’술어를 갖추지 않은 주어‘에 맞서서 ’주어를 갖추지 않은 술어‘를 옹호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여기서는 확실히 주어와 술어가 전도되어 있다. 헤겔은 사물 그 자체와 사물의 이름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을 결코 극복할 수 없었다.

 

결국 헤겔이 이 모순을 제거한 것은 관념론 일반과 마찬가지로 단지 모순을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 즉 존재, 물질, 자연을 제거하는 것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모순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그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 즉 사물 그 자체와 그것의 이름을 올바로 구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사물의 개념을 그것의 이름과 구별한 헤겔의 탁월함마저 훼손시키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술어를 갖추지 않은 주어’, 즉 ‘개념을 갖추지 않은 이름’에 충분히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논리적 혼란과 착종은 대상의 이름을 그것의 개념이라고 혼동한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혼동은 논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말(궤변)을 들어서게 한다.

 

개념이 결여된 곳에는 말이 지체없이 들어선다.

 

이러한 혼동의 가능성은 물론 개념의 실존형태가 단어라는 사정과 관련된다. 단어는 개념의 실존형태인 동시에 사물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념이란 내용과 형식의 통일, 그것이 하나의 형태로서 나타나고 있는 단어와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객관적 실재의 구조 • 성질 • 관계 등의 통일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굳이 헤겔식으로 표현해 보면, 전자가 개념의 존재이고 후자는 개념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 양자의 통일이 바로 개념의 ‘개념’이다.

 

이제 다시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개념의 외연과 마찬가지로 그 내포를 동시에 고찰하는 변증법에서는 개념들 상호간의 관계를 개념의 생성, 변화, 발전, 그리고 개념들 속에 고정된 변증법적 모순 등으로 파악한다. 가령 두 개념의 동일성은 그것들의 내포에서도 고찰될 수 있다. 개념의 외연적 동일성이 두 개념의 외연이 적용되는 범위가 일치하는 경우라면, 개념의 내포적 동일성은 두 개념의 내포를 구성하는 징표들이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단순히 고찰해 보더라도 두 개념의 모든 징표들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동일한 개념일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이때 두 개념의 동일성은 ‘A=A’라는 동일율로써 표현된다.

 

그러나 헤겔은 단지 A=A라고 하는 “이 명제는 공허한 동어반복적 표현 이상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내용을 결한이러한 사유법칙은 아무런 진전도 가져올 수 없다”고 비판한다. 헤겔에 의하면 “본질은 곧 단순한 자기동일성”이다. 그러나 이때의 동일성은 또한 절대적 비동일성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본질 즉 존재를 정립한다는 것은 비존재와의 구별을 의미하는데, 이와 같은 동일성은 바로 자기자신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동일성은 이처럼 자기자신을 스스로의 정립의 계기로, 즉 피정립적 존재로 정립함으로써, “비로소 절대적 구별에 대립하는 자기자신과의 단순한 동등성으로 규정되는 동일성 그 자체의 된다.”

 

만약 모든 것이 자기동일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필경 상이할 리도 없고 대립될 리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럼으로써 또한 아무런 근거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피상적으로 고찰해 본다면 〔본질론〕에서의 이 동일성 • 구별 • 근거는 〔개념론〕에서의 보편성 • 특수성 • 개별성과 서로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본질이란 처음에는 자기자신과의 단순한 관계, 즉 순수한 동일성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으로 인해서 본질은 오히려 몰규정성을 의미하게 된다. 반면에 구별이란 하나의 규정이지만, 이것은 또 외면적이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구별이라는 점에서 상이성 일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상이성은 대립을 나타난다. 그러나 대립은 다시 모순으로 되면서 자기자신 내로 반성하는 가운데 그 자신의 근거로 귀착한다.

 

헤겔에게서는 매우 장황한 것으로 나타는 이러한 설명을 엥겔스는 단 몇 줄의 언급으로 요약한다.

 

낡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동일성의 법칙은 낡은 관점의 기본법칙이다 : a=a. 각각의 것은 자체와 똑같다. 모든 것은 영구적이다, 태양계, 별, 유기체. 이 법칙은 각각의 독립적인 경우에 조금씩 자연과학에 의해 논박되어 왔지만, 그것은 여전히 새로운 것에 반대하는 낡은 것의 지지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 한 사물은 그 자체임과 동시에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렇지만 진정하고 구체적인 동일성은 차별성, 변화를 포함한다는 사실은 최근 자연과학에 의해 자세하게 보여졌다――모든 형이상학적 범주들처럼 추상적 동일성은 소규모의 조건들 또는 짧은 기간이 문제되는 곳에서 일상적인효용을 충족한다. ……그러나 그 포괄적인 역할을 맡은 자연과학에 있어서 심지어 각각의 단일한 분야에서조차 추상적인 동일성은 전적으로 불충분하며, 비록 그것이 대체로 이제 실제적으로 폐지되었을지라도, 이론적으로 그것은 여전히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은 동일성과 차별성이 화해할 수 없는 대립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면적인 극단 대신에 그 진실은 오직 그것들의 상호작용, 동일성 안에서의차별성의 포함에 있다.

 

헤겔의 탁월함은 대상을 ‘추상적인 동일성’으로서가 아니라 “대립물의 통일”로 파악했다는 데에 있다. 또한 이 대립물의 통일 즉 모순이야말로 “모든 자기운동의 원리”임을 발견해 낸 것도 헤겔의 탁월함이다.그러나 헤겔은, 정지가 변증법적 운동의 한 특수한 경우인 것처럼 추상적 동일성은 변증법적 동일성의 한 특수한 경우라는 사실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헤겔은 변증법을 이념 • 정신 • 사유 등의 자기운동으로서 고찰하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변증법의 사유의 운동의 발전에 관한 측면, 즉 논리학적 측면이 전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데에 반해 변증법의 인식론적 측면은 무시된다. 그러나 레닌의 표현을 빌리면 “변증법은 다름아닌(헤겔과) 맑스주의의 인식론이다.”그런데 변증법의 논리학적 측면만을 파악하는 헤겔은 때때로 변증법과 형식논리학을 절대적인 대립으로 간주함으로써 오히려 자기자신의 변증법적 논리에조차 철저하게 일관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레닌의 표현을 빌면, 그와 같은 헤겔주의의 추상적인 핵심을 “발견하고, 파악하고, 적출하고 순화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바로 이것을 맑스와 엥겔스가 수행하였다.”

 

이미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헤겔의 관념변증법과는 구별되는 맑스-레닌주의의 유물론적 변증법에서는 추상적인 동일성도 변증법적 동일성의 특수한 경우로 고찰함으로써 대상을 그것의 운동과 변화발전 속에서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변화발전 속에서 또한 상대적으로 고정된 질적 규정성까지를 아울러 파악한다. 우리가 객관적 실재의 잔영으로서 개념을 실재의 운동 속에서 파악하면서도 모든 개념은 일정한 고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했던 것도 바로 대상 그 자체가 변증법적인 자기운동 속에서 이와 같은 ‘정지의 계기’를 자기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정지의 계기로 인하여 우리는 상대적인 지속성을 갖는 사물이나 속성들로 이루어진 특정 집합을 우리의 사유 안에서 개념에 연관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과학적인 법칙을 통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대적으로 지속적이고 필연적이며 본질적인 연관을 인식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변증법적 동일성은 추상적인 동일성과는 달리 자기 안에 구별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별은 물론 추상적인 상이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절대적으로 동일한 두 개념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상이한 두 개념은 서로 통일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런 공통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은 두 개념은 변증법적 연관의 대상이 아니다. 모순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두 측면의 상호의존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서로 동일하면서도 서로 상이한 두 개념만이 서로 모순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순이야말로 ‘모든 자기운동의 원리’이다. 변증법적 운동이란 곧 모순의 생성, 전개, 발전, 그리고 그것의 지양이다.

 

그렇다면 모순은 어떻게 발전하며 또 그것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모순이 모든 자기운동의 원리이듯이 모순의 발전과 그것의 자양 또한 오직 이 운동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미 보았듯이 상품의 교환과정은 모순되고 상호배제적인 관계들을 포함하고 있다. 상품의 발전은, 이들 모순Widerspruche을 지양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모순이 운동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현실적 모순이 해결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한 물체가 끊임없이 다른 한 문체를 향하여 낙하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그것들로부터 달아난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타원은 이러한 모순이 실현되면서 동시에 해결되는 운동형태의 하나이다.

 

만약 개념들이 대상들을 정확하게 모사하고 있다면, 대상의 운동은 개념의 운동으로 표현될 수 있다. 최초로 동일성에서부터 출발한 개념의 운동――곧 대상의 운동――은 자기자신 안에서 구별을 만들어 냄으로써 변증법적 모순을 이루게 되며, 이 모순을 지양함으로써 다시 새로운 동일성에 이르게 된다. 이 새로운 동일성은 최초의 동일성의 회복인 동시에 그것의 부정이기도 하다. 이들 두 동일성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며, 최초의 동일성은 오직 자기자신의 부정에 의해서만 자기자신을 보전할 수 있다. 현실에서 그러한 예는 수없이 많다. 가령 하나의 예만 들어 본다면 자본주의와 독점자본주의 또한 그러하다.

 

독점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자기운동의 결과이며, 이 운동의 원리는 오직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일 뿐이다. (이것은 매우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논의 속에서는 현란한 궤변으로 위장된 채 간과된다.) 자본주의는 자기자신의 부정인 독점 속에서만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독점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의 부정이라는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의 부정이지만, 그것은 또한 경쟁과 독점의 대립을 지양함으로써 자본주의를 회복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개념의 외연만을 비교한다면 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를 포함하는 유개념이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는 자본주의라는 개념보다 훨씬 풍부한 내포를 가지고 있다. 형식논리학에서는 외연이 확대될수록 내포는 빈곤해지고 내포가 풍부할수록 외연은 축소되는 이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변증법적 논리학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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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2012/01/13 19:15

 

 

 편집자의 서문 / 7

 

Ⅰ편. 범주와 방법론의 문제 / 9

1장. 개념 : 사유의 기본요소 / 11

2장. 변증법적 방법 / 37

1.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 37

2. 현상으로부터 본질로 / 51

3. 한도 : 질과 양의 통일 / 59

3장. 특수성 : 방법론의 중심범주 / 80

1. 보편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 / 82

보론 : 오류, 형식논리학의 방법론 / 106

 

Ⅱ편. 사회구성체 논쟁의 쟁점들에 대한 비판적 정리 = 131

1장. 독점자본주의와 국가독점자본주의 / 133

1. 독점자본주의 : 특수적인 자본주의 / 133

2. 국가독점자본주의, '특성론'과 '단계론'의 현학적 대립 / 160

2장. 종속적 축적, 또는 남한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관한 이론들 / 190

1. 식민지·신식민지·종속국의 규정에 대하여 / 190

2. 독점의 강화 / 종속의 심화 - 두 개의 경향 / 213

3. 논의의 총괄 / 245

보론 : '반봉건성'에 관하여 다시 한번 더 /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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