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편. 범주와 방법론의 문제 2장. 변증법적 방법 2 현상으로부터 본질로.hwp (26.00 KB) 다운받기]

 

 

 

 

 

2

현상으로부터 본질로

 

 

잠시 『자본』으로 되돌아가자. 『자본』의 머리글에서 맑스는 자신이 왜 상품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분석을 시작했는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더구나 갖가지 경제형태에 대한 분석에서는 현미경이나 화학적 시약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맑스가 당시로서는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였던 영국을 중요한 예증으로서 이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연과정을 관찰할 때에 물리학자는 가장 내용이 충실한 형태에서, 그리고 교란적인 영향으로 말미암은 불순화가 가장 적은 상태에서 관찰하거나, 과정의 순수한 진행을 보증하는 조건들 아래에서 실험을 한다. 이 저서에서 내가 연구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및 그 양식에 상응하는 생산관계와 교역관계이다. 그것들이 전형적으로 나타는 곳은 오늘날의 영국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자연법칙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정도의 높고 낮음이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법칙 자체, 곧 철의 필연성etherner Notwendigkeit을 갖고 작용하며 자신을 관철해 가는 그 경향이 문제이다.

 

추상이란 이와 같이 대상을 “교란적인 영향으로 말미암은 불순화가 가장 적은 상태에서” 고찰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가장 순수하고 명료한 형태로 환원시키는 사유방법이다. 현실 속에서 대상들은 다른 존재들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된 채로가 아니라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대상들은 그 가장 순수한 본래의 형태대로가 아니라 언제나 교란되고 때로는 전도된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따라서 모든 과학연구 에서 대상의 추상화는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요구이다. 추상이란 그 본래의 의미에서는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사유방법이다. 그런 한에서 추상은 귀납적 방법의 본성과도 부합된다. 그러나 추상이 곧 귀납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추상은 대상들의 외적인 것으로부터 어떤 추상적 명제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상들에게 내적으로 공통된 것을 부각시키고 고정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시대의 생산에는 어떤 공통된 특징과 규정이 있다. 생산 일반은 하나의 추상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공통된 측면을 부각시키고 고정시켜 우리로 하여금 반복의 수고를 덜어 주는 한 그것은 합리적 추상이다.

 

또 다른 곳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물들은 외적인 것과 구별되는 중요하고 내적이며 결정적인 요소인 그 사물들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통일적인 것이 그에 걸맞게 표현된 것들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즉 서로 다른 사물들은 그것의 내적인 본질이 상이한 조건들에 걸맞게 서로 다른 형태들로 발현한 것이라는 뜻이다. 본질이란 내적인 것, 여러 사물들에 공통된 것, 그것들의 운동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거품’이 하천의 저 밑바닥에 있는 ‘깊은 흐름’과 같은 것이다.

 

존재의 진리는 본질이다.

존재란 직접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知)가 존재의 즉자대자적인 참모습〔진리—인용자〕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는 결코 직접적인 존재나 그의 구정에 머무르는 일이 없이 분명히 이 존재의 배후에는 존재 그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있음으로써 바로 이 배후에 자리잡은 것이야말로 존재의 진리를 이룬다고 하는 전제 하에서 그 직접적인 것을 꿰뚫어 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상들에게 공통된 특징과 규정이 반드시 그것들의 본질인 것은 아니라는 항변도 충분히 있음직하다. 그 본래의 의미에서 개념과 범주들은 현실에 실재하는 대상들의 본질을 포착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대상들에 공통되는 어떤 비본질적이고 외적인 특징들로부터도 범주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귀납적 방법은 합리적인 추상에 의해 매개될 때에만 변증법적이라고 믿는다.

 

개념이란 이미 그 정의에서부터 대상들의 불변적인 징표를 반영하는 것이다. 본질은 그 대상이 더 이상은 그것이 아닌 다른 무엇, 즉 새로운 질로 전화하기 이전에는 불변적이다. 그러나 현상은 대상이 본래의 질을 잃지 않았다 하더라도 단순히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념이란 어디까지나 본질의 개념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반면에 대상들의 비본질적인 징표들로부터 파악된 현상의 개념은 일시적 • 잠정적 • 조건부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아직 그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대상들의 참다운 본질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을 때에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직 그것들을 저마다의 본질적 범주에로 올바로 포섭시키지 못했을 동안에만 한정된 의의를 가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현상의 개념을 본질의 개념으로, 현상적 범주들을 본질적 범주들로 혼동하는 데에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혼동은 다만 그가 현실로부터 본질적인 것을 분석해 낼 만한 지적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왜냐하면 “현상형태라는 것은 보통의 사유형태로서 직접적 • 자연발생적으로 재생산되지만, 그 배후에 있는 것은 과학에 의해서 비로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 범주에서는 대상들의 공통된 그 본질이 언제나 그 범주의 내포를 형성한다. 그러나 현상적 범주에서는 단지 대상들의 외형적인 유상성이 그 내포를 형성한다. 본질의 범주와 현상의 범주를 혼동함으로써 상이한 본질로부터 발현된 현상들을 그것들의 외형적인 유사성에서만 파악하여 동일한 범주로, 즉 본질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오류는 남한의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대단히 광범하게 발견되는데, “주체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오해받는” 이정로씨 역시 그 한사람이다.

 

농민들의 고통스러운 하향적 몰락은 광범위하게 계속되었지만 이들 토지를 겸병하여 대경영의 농업자본가가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탈농화하여 도시로 이주해 버리거나 또는 지주-소작제라는 반봉건적 생산관계를 재생시키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특유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소작제 재생현상은 70년대 중반 이후 널리 나타나서 고미가-이중곡가제가 농업개방정책으로 변천함에 따라 가속적으로 확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농민들의 하향적 몰락, 즉 농민의 토지소유로부터의 소외는 광범위하게 계속되었지만 이들 토지를 겸병한 농업자본가가 창출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이정로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토지들은 모두 황무지가 되었거나 도시로 이주하는 농민들이 짊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광범한 농민대중이 탈농화하여 도시로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토지소유가 그에 비례하여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들 이주농민들의 대부분이 잠재실업의 형태로 농촌에 있던 반프롤레타리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하지만 씨는 ‘지주-소작제=(반)봉건적 생산관계’라는 주체주의자들의 무지를 그대로 반복한다. 게다가 더욱 고약한 일은 불과 몇 줄 아래에서는 또 이정로씨 자신이 “한국 지주의 봉건성은 상실되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물에서도 살고 뭍에서도 사는 양서동물처럼 이정로씨는 식민지 반봉건론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사이에서 자신의 동요성과 무원칙성이 빚어내는 곡예를 즐기고 있다. 그러나 지주-소작관계가 곧 (반)봉건적 생산관계는 아니다. (이정로씨는 이 말많은 ‘반봉건’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따로 정의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명확한 개념 정의를 요구한다면 아마 그는 이미 내놓았던 강철 동지와 김민철씨 등이 내놓았던 그 우스개소리들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봉건적생산관계가 사라진 현실과 ‘지주-소작관계=(반)봉건적 생산관계’라고 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이론적 무능력의 모순이 씨로 하여금 한국 지주의 봉건성은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지만 반봉건적 생산관계는 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요술을 부리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다.

 

위 논문〔「성격과 임무」—인용자〕은 한편에서는 지주의 봉건성이 상실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지주-소작관계는 반봉건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지주-소작제도 자체가 곧바로 반봉건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장 자본주의적 농업 경영이 발달했던 미국에서 이를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 소작제도였다.……구체적 역사적 환경 속에서 지주-소작제가 수행하는 역할을 규정함이 없이 지주-소작관계가 곧바로 반봉건적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고이다.

 

단지 남한에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일반에서 지주-소작관계, 즉 농업경영을 위한 토지임차대관계는 존재한다. 지주-소작관계가 곧 (반)봉건적 생산관계는 아니라는 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다. 그런데 남한에서 (반)봉건적 생산관계는 재생되고 있지 않지만, 이정로씨의 무지는 틀림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것도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농업문제의 본질이 예속독점자본의 농민지배에 있다는 것과 농업부문이 자본주의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자본주의화의 본질은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자본-임노동 관계의 창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남한 농업에서 나타나는 토지문제는 여전히 반봉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주요계급으로서의 지주는 신식민지로의 재편과정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예속독점자본의 지배하에서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에 있는 소작관계는 경작농민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이윤 보장을 허용하지 않는 반봉건적 성격의 것이다. 이로부터 농민의 토지에의 요구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농업에서든 공업에서든 문제의 본질은 생산관계에 있다. 이 점을 부정한다면 누구이든 간에 그 순간부터 그는 이미 사적 유물론과는 ‘숭고한 결별’을 선언한 셈이다. 다만 우리의 임무는 그 본질 즉 기본적인 생산관계로부터 다양한 현상의 문제들을 규명해 내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정로씨와 그의 충실한 ‘동지’는 농업문제의 본질(?)과 농촌에서의 생산관계를 분리시킨다. 농촌에서의 생산관계는 (반)봉건적 지주-소작관계이지만 농업문제의 본질은 예속독점자본의 농민지배에 있다; 더군다나 그 (반)봉건적 지주는 이미 봉건적 성격을 거의 상실하고 있으며, 더 이상 주요계급이 아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변증법이다. 그러나 이들은 예속독점자본이 농민을 지배하고 있다고 단지 선언할 뿐이지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반)봉건적 지주-소작관계가 남한의 농촌에서의 생산관계라면 남한의 농민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예속독점자본이 아니라 (반)봉건적 지주계급이어야 옳다. 물론 이정로씨가 이 ‘지배’라는 말에 그야말로 심오하기 짝이 없는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면. 더군다나 남한의 소작관계는 경작농민에게 이윤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반)봉건적이라는 데에는 참으로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남한에서 봉건적 지주-소작관계가 이미 사라졌다는 말은, 그 현상형태는 소작농이지만 이미 그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또는 반프롤레타리아라는 뜻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윤보장을 허용하는 그러한 자본주의도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본다. 이정로씨와 그의 ‘동지’들은 확실히 요술쟁이의 능력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오직 공장프롤레타리아트만 프롤레타리아트인 줄 알 만큼 순진한 요술쟁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째서 인신매매가 횡행하는 남한의 현실로부터 (반)노예적 생산관계가 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발견해 내지 못했는지 그 점만은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토지문제’라느니 ‘농민의 토지에의 요구’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이정로씨 등은 농업문제, 즉 예속독점자본의 농민지배를 오직 가격문제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미 「성격과 임무」에서부터 이정로씨는 남한에서 지주-소작관계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까닭은 저곡가정책, 교역조건의 악화, 그리고 농산물수입에 따른 가격하락이라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김환씨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격과 임무」의 남한 농문제의 성격분석은 식반론적인 농업인식과 날카롭게 대립하였다.〔글쎄? 〕 식반론은 남한 농업문제의 기본성격을 반봉건제의 온존에서 오는 지주-소작노인과의 대립으로 파악하였고 남한 사회의 반봉건성의 근거를 농업 내부의 반봉건적 생산관계에 연원하는 것으로 보았다.〔이정로씨도 그렇게 보고 있다.〕이에 대해 「성격과 임무」는 남한 농업문제의 본질이 〔반봉건제는 온존하고 있지만!〕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예속독점자본의 축적의 결과 형성된 것〔무엇이 ?〕으로 분석하고 농업에서의 주요한 대립관계를 독점자본과 농민 일반과의 대립으로 파악하였다.〔어떻게 대립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저임금정책의 유지를 위한 저곡가정책과 농공간의 부등가교환, 미국 농산물 시장으로의 전략은 남한의 농민들에게 이윤실현의 기회를 박탈하였으며 전반적인 하강몰락을 강요하였다. 이것은 농업발전의 위로부터의 길도 아니며 아래로부터의 농민적 발전의 길도 아닌 농업몰락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NDR론 몰락의 길’이었다. 아무튼 농업문제, 그것이 토지문제이든 가격문제이든 간에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본래의 주제는 아니다. 우리는 다만 이른바 NDR론자들이 현상의 범주를 본질의 범주와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뿐이다.

 

현상은 본질보다 풍부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현상의 다양하고 복잡한, 때로는 혼란되고 전도된 듯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외양과 가상들 속에서 그것의 본질을 추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현상들을 그것의 본질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임무이다. 현상에서의 모순들을 본질에서의 모순으로, 고립된 것인 양 보이는 현상들을 연관된 것으로, 분리된 것인 양 보이는 현상들을 통일된 것으로, 개별적이고 우연적으로 일어난 것인 양 보이는 현상들을 그것의 내적인 필연성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종교와 신비가 과학을 대신하게 된다.

 

바로 외적인 현상들에 대한 이러한 고착과 겉에서 인식될 수 있는 비본질적인 측면들을, 그것들의 본질적이고 내적인 연관, 즉 통일성을 알아내기 위하여 추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현실적인 사태를 왜곡시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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