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2012/01/22 12:19

[서 문.hwp (19.00 KB) 다운받기]

 

서 문

 

 

 

 

 

우리는 남한 사회의 당면한 혁명(사회혁명)이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임을, 혁명으로 수립될 권력이 오직 프롤레타리아 독재임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현재 남한의 맑스-레닌주의자들은 남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의 체계를 수립해야 하는 시급한 요구에 부딪히고 있다. 사실상 그러한 요구는 어떤 의미에서는 87년 이후의 ‘혁명적 정세’의 쇠퇴 이후 끊임없이 발생하여 이제는 무성하게 우거진 저 무수하게 다양한 쁘띠부르조아 혁명 ‘이론’들의 혼돈상태(chaos)로부터 제기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남한 노동계급운동의 발전의 필연적인 귀착이다. 이제 남한 노동계급운동,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은 질적인 비약을 하지 않고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계단을 앞에 두고 있다. 실제로 대공장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노동조합운동으로 그 뿌리를 내렸고, 그 투쟁은 노동운동의 자연적 성장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단계에 이르고 있다――단 몇 개월의 ‘평화’도 없이 끊임없이 쏫아오르는 공업도시 대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전쟁을 보라. 그들은 이제 노동조합의 설립투쟁이 아니라 노동조합들 사이의 조직적 연대와 전국적 투쟁, 자신들의 운동을 지지하는 다른 계층과의 연대투쟁을 현실화시키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투쟁의 내용은 여전히 경제적 요구투쟁, 노동운동 탄압에 대한 항의 시위, 맹아적인 형태의 정치적 요구의 투쟁의 성격을 질적으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이른바 ‘운동권’은 정치적 출세주의자들의 행렬로 급속히 분해되었다. 혁명적 입장을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진채 여전히 소서클적 형태로 이합을 거듭하고 있다. 운동의 이러한 상황은 근본적으로는 혁명적 맑스-레닌주의자 진영의 미성숙으로부터, 혁명이론과 혁명전술에 대한 쁘띠부르조아적 무지와 혼란으로부터 유래한다. 급속한 분해는 혁명가들의 관심사가 아니지만, 현재의 이론적 혼란과 불일치로부터 야기되는 노동계급의 대중적 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도의 부재상태는 우리의 당면한 임무들을 지적한다.

 

노동계급 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도의 문제란 무엇인가? 맑스-레닌주의 혁명가들의 이론과 전술의 문제. 우리는 이렇게 문제를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남한 운동은 아직 바로 그 ‘이론’의 문제에서 혁명가들의 공통된 일치에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 아니 시막하게 의견을 달리하는 두 경향으로 구별이 불가피하다. 쁘띠부르조아적 (민중, 민족)민주혁명의 추종자들과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의 추종자들. 그러므로 사실상 남한의 혁명가들 사이에서 전술의 문제에 대한 논쟁은 어떤 의미에서 이후의 과제일 수 있다.(물론 전술에서의 불일치가 강령에서의 일치를 미리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외관상 두 경향의 논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래의 역사는 어느 한 경향의 실제적인 승리를 보여주겠지만, 현재 우리의 의견대립으로부터의 논쟁은 이론적, 논리적 문제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러시아와 레닌을 많이 언급하였다. 하여 ‘러시아주의자’가 된다면 맑스에 의지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는 모든 사람(맑스주의자 ! )은 ‘유럽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출판물이나 구두상의 논쟁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희극들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유감스러운 상황은 비판에 대한 답변의 회피, 악선동적 공문구 나열이다――물론 이것은 누구나 어느 조직을 도덕적으로 탓할 문제는 전혀 아니며 다만 그들의 속물적 • 기회주의적 태도의 자기 폭로일 뿐이다.

 

* * *

 

이 글은 오랫동안 준비된 원고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사건들에 대한 단순한 논평도 아니다. 정확히, 남한 사회의 당면 혁명의 이론 문제에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확신하면서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민족민주혁명론’을 주장하는 분파의 이론적 견해에 대한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서이다. “모든 실천적인 이론의 최종적인 귀결점은 언제나 혁명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것으로부터 혁명가, 혁명가의 조직이 나온다는 것은 상식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누가 ‘강단’에 있는가, 누가 ‘지하’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이 혁명의 이론 문제와는 완전히 무관한 문제이며, 그러므로 ‘강단’이니 ‘현장’이니 ‘출판’이니 하는 문제를 혁명이론과 결부시키는 것이야말로 유아적인 속물들의 자기항변에 불과하다. 오직 존재하는 필연적 진리의 체계적 정립을 둘러싼 투쟁이 있을 뿐이다.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이 투쟁을 엄연히 무자비할 수밖에 없는 계급투쟁으로서의 이데올로기 투쟁이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이데올로기 투쟁은 혁명의 종결, 다음 사회의 건설 과정에까지 계속되지만, 우리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일차적 과제는 이론, 즉 당면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로부터 혁명적 계급의 역사적 임무를 제시하는 강령의 일치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하나의 당과 또다른 하나의 당으로의 정립일 수도 있다——그러나 우리는 최대한 논쟁으로부터 어느 한 쪽의 이론적 승리와 다른 한쪽의 이론적 패배가 누구에게도 확연하게 되는 것이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좌익’ 동지들의 논평과 있을 수 있는 오류에 대한 비판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모씨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사실상 그 이름을 ‘민중민주주의 혁명론자들’들의 그리스도 역을 돌이킬 수 없이 배역받았기 때문이다.

 

1991년 5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Trackback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marxleninism/trackback/6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