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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건설자에서 통근자로...

비밀글로 둔 지 너무 오래 돼서... 일단, 발췌만... 코멘트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될까? ^^;;;



이반 일리히, <교통의 산업화>,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미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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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기관에 부여된 에너지가 증대한다는 것은 매일 정해진 행로를 이동하는 인간의 수와 그 속도, 그리고 그 이동범위가 증대된다는 것을 뜻한다.  곧 각자의 나날의 행동반경이 확대되는 것에 의해 아는 사람의 집을 잠깐 방문한다거나, 직장에 가는 도중에 공원에 들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한편 일부의 사람들에게 극도의 특권이 부여되는 것의 대가로, 만인이 에너지에 대한 노예가 되어야 한다. 곧 한 무리의 선택된 인간들이 평생 원없이 여행하며 무제한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반면에, 대다수의 민중들은 스스로 즐기지 않는 통근에 그 생활의 대부분을 소비하고 있다. 극소수의 인간들이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지점과 지점사이를 여행하고 잠시 동안의 체류에 진귀함과 매력을 맛보는 한편, 대다수의 민중들은 통근의 거리와 시간의 증대, 통근을 위한 준비와 피로의 회복에 소비하는 시간의 증대를 강요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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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1회 이상 자신의 의지로 하늘을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은 미국 총인구의 0.2%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며, 그 정도의 제트족을 부양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이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포로가 되어 버린 통근자도, 무모한 여행자도 동등하게 수송에 의존한다. 통근자도, 여행자도 수송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보통의 승객이 어쩌다가 제트기를 타고 유명한 휴양지나 정당대회가 열리는 대도시에 가게 되면, 자신도 맹렬한 속도로 날 수 있는 지구촌 세계의 일원이 된 기분에 젖게 된다. 에너지를 고도로 소비하는 좌석에 앉아서 여러 시간을 보내는 기회가 가끔 있게 되면, 자신도 인간생활의 공간을 왜곡하는 행위의 공범자가 되어, 자기 나라의 지리를 인간중심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도리어 수송수단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싶은 기분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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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의식은 그것을 보완하는 배경으로서 인간이 움직이는 속도에 의해 통합되는 생활시간과 생활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 관계가 인간의 움직임보다는 수송수단의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면, 인간은 자기 생활의 건설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단순한 통근자로 격하되고 만다.

전형적인 미국의 남성은 자기의 차와 관련해 1년에 1600시간 이상을 소비하고 있다. 차가 달리고 있을 때에도, 정지하고 있을 때에도 그느 차 속에 앉아 있다. 차를 주차장에 넣고, 주차한 차를 찾기도 한다. 또한 차를 사기 위한 계약금과 다달이 지불해야 할 월부금을 벌어야 하고, 연료비, 고속 도로 통행료, 보험료, 세금, 교통 위반시의 벌금 등을 지불하기 위하여 노동한다. 그리하여 하루에 일어나 있는 16시간 중4시간은 차를 운전하거나 그것을 위하여 필요한 재원을 모으기 위하여 소비하고 있다. 게다가 이 숫자는 수송에 의해 강제되어 다른 활동에 소비되는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즉 사고로 병원이나 검경찰, 법원, 또는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보내는 시간, 다음에는 더 좋은 차를 사기 위해 자동차 광고를 보거나 소비자 교육집회에 참가하여 소비하는 시간등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결국 전형적인 미국인은 7500마일을 달리는데에 1600시간이나 소비하게 된다. 이는 시속 5마일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송산업이 없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시속 5마일 이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에라도 걸어서 갈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이 그 사회의 시간예산 가운데 교통에 할당하고 있는 것은 겨우 3~8%에 불과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28%에 이른다. 부유한 나라의 교통이 가난한 나라의 교통과 다른 점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활시간을 체험하는 속도가 빠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수송산업에 의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대량의 에너지를 더 많은 시간동안 소비하게끔 강제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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