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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님의 [죽음의 책임을 묻자] 에 관련된 글.


처음에 "죽음의 책임을 묻자"라는 제목을 봤을때 어떤 죽음일까 했다. 버지니아의 죽음인지, 여수의 죽음인지, 하얏트 앞의 죽음인지, 이라크에서의 죽음인지, 전기가 끊긴 집에서 촛불을 켜고 자다가 불에 탄 죽음인지... 열어보니 일터에서 일하다가 맞는 죽음이었다. 나는 살아있는데, 나의 주변에는 죽음이 둘러싸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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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죽인 숫자다.
2006년 한국의 일터에서 노동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2454명이나 된다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멀쩡하게 일하고 있던 사람이 일터에서, 내가 고향에 다녀온 어제 7명의 사람이 죽었고, 내가 휴가를 내고 쉰 오늘 7명이 죽고 있고, 내가 출근하게 될 내일 7명이 죽을 것이라는 얘기다. 모레도 글피도 일주일 뒤도,  한달 뒤도 계속 이어질 날들에 화답하듯 죽음의 행렬도 이어질 태세다. 일하다 죽는 노동자가 이렇다면 일하다 다치는 노동자는 도대체 몇이란 말인가?

현장의 조직

노동자의 건강을 의제화 한 행동을 조직하자. 죽임이 자행되는 일터에서 살아있는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 동료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를, 자신에게 닥칠 미래의 죽음과 부상에 대한 우려를 그냥 잊혀지게 해서는 안된다. 각 사업장과 공정에서 노동자의 건강을 앗아가는 원인을 파악하고 사측에 이의 변화를 촉구하고 거부시 단체 행동으로 맞서야 한다. 노동강도와 작업속도와 성과가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한다는 것을 일상적으로 선전해야 한다.  기조직 사업장에서는 노동자의 건강이 임금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선전하고, 미조직 사업장에서는 생명권과 건강권을 의제로 노동자를 조직해야 한다. 노동자는 조직됐을때만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노동자와 자본간의 대립에서 그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힘이었다.


현장의 싸움을 모아서 한 줄기로- 기업살인

각 사업장에서의 싸움만을 통해서는 각 사업장의 노자 역관계에 따라 어느 정도 노동자 건강권을 쟁취하는 사업장이 있는가 하면 계속해서 악화일로를 걷는 사업장도 있을 수 밖에 없다.  각 현장의 싸움의 경험과 성과를 모아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는  기업살인법을 마련하고 사업주에 대한 형사처벌을 가능케 하여 죽음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질 수 있게끔 하는 요구와 투쟁이 필요하다. 부르주아 의회제 국가인 한국에서 법안을 쟁취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노동자의 건강문제가 전체 노동자의 문제임을 견지해야 한다.



노동자 건강권 투쟁으로 자본주의에 균열을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노동자의 죽음은 끊기지 않았고, 따라서 자본주의가 지속되는동안 노동자의 죽음을 멈추게 하기는 근본적으로 힘들것이다. 자본주의를 끝장낸 후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온전하게 획득할 수도 있겠지만, 내일 당장 이를 행하기는 객관적 조건도, 주관적 역량도 보시다시피이다. 

반대로, 노동자들의 건강권 쟁취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잔혹한 특성을 폭로하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 불황과 위기일때 자본은 노동자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며 비정규직 양산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죽음 역시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격의 산물이다. 양자가 물러설 수 없는 지경으로 향해 치닫고 있는 지금, 살기 위해 물러설 수 없는 노동자 건강권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고 한발 더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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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덩어리 빛깔의 안도

어제, 일요일 FTA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세종로 왕복 8차선? 10차선? 하여간 너른 길을 경찰과 대치한 채 점거하고 연설을 듣고 구호를 외쳤다.

지난번 집회때 기자들 때린 것 때문에 한방 먹은 경찰은 이날 무대응으로 일관했고,  덕분에 집회대오는 세종로를 점거했고, 광화문 사거리의 모든  방향은 닭장차로 막혀 교통이 전면 통제되었다.

집회 막바지, 종로 경찰서장은 손수 해산 명령을 하는 수고를 해줬고, 무대차에서는 중간쯤 연설을 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인사드리겠습니다~'라며 인사를 하는 연사의 연설을 포함한 여러 연설들이 계속되고, 시커먼 전의경들 및 지휘관들은 칙-칙- 거리는 무전기에 귀를 기울이며 거기서 나오는 명령에 응할 준비태세를 하고 있었다. 나는 몇몇 친구들과 경찰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집회 막바지의 몇십분간의 나의 심리에 관해서이다.

7~8분 간격으로 종로경찰서장의 1차 해산명령 2차 해산명령(센스쟁이 종로경찰서장은 두번째 해산명령을 하면서 '마지막 해산명령'이라며 한번을 꿀떡 챙겨 잡쉈다) 3차 해산명령, 4차 해산명령이 시꺼럽게 귀를 성가시게 했다. 같은 시간 연설은 계속되고 있었다. 또 같은 시간 나의 마음속에는,

"빨리 집회를 마쳐서 충돌 없이 끝났으면 좋겠다. 경찰이 방패 날리며 침탈 안했으면 좋겠는데...해산 명령도 벌써 네차례나 했는데, 저 놈들이 계속 말만 하지는 않을텐데..." VS  "도로를 계속 점거하고 있어야 저 놈들이 더 답답할텐데..그래야 FTA에 반대하는 힘을 놈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저  경찰의 폭력성이 드러날텐데.."

곧이어 집회 사회자가 승리를 다짐하며 집회를 마칠 것을 선언했고, 칙-칙- 거리고 있는 무전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안도했다. 경찰들도 피곤한 일과를 마치고 복귀해서 쉰다는 생각 때문인지 웃음이 번졌다.

나는 함께 참여한 친구들과 근처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담배를 피며 농담을 하고 웃다가 집에 왔다. 그날, 다행이 집회에서 폭력은 없었고 평화로왔으며, 경찰도 웃었고, 나도 안도했다. 하지만, 나의 그 안도의 빛깔은 내 안의 두려움을 한번 더 확인시킨 회색의 무거운 납덩어리의 빛깔이었다.

일요일 서울 도심의 교통이 몇시간 정체되었고, FTA협상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진행될 것이다.
이렇게 안도의 순간들을 보내며, 우리의 회색빛 미래의 색깔을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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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나에게 이렇게 묻는 사람은 드물고, 내가 남에게 이와 같이 묻는 일도 거의 없다.

하 지만, 내가 어떤 사람을 알게 될 때 그 사람이 어느 대학 나왔는지는 나의 관심사다. 묻지는 못하지만, 누가 "그 사람 어느 대학 나왔대"하면 귀가 솔깃해진다. 무의식적으로 아주 짧은 순간에 아주 효과적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추측할 수 있다.

신 기하게도 어떤 사람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는 어떻게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알게된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시절의 추억을 이야기 하거나, 대학시절에 운동한 이야기, 속해있던 조직 들을 이야기 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A는 서울대를 나왔대"
'머리가 비상하구나. 뭘 하건간에 탁월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겠어'

"B는 연세대를 나왔대"
'우수하겠지만, A만 못하겠구나'

"C는 동국대를 나왔대"
'무난하겠지만, A보다는 한참 못하고 B보다도 못하겠구나'
 
"D는 대학을 안 다녔나봐"
"독특한 사람이네"

위와 같은 사고과정이 머리속에서 일어날때는 위에 서술된 것처럼 명확하고 극단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덜하고 어떤때는 심하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마치 움직이는 안개에 속의 구조물처럼 언제는 드러났다가 언제는 감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다.

한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거의 완전히 똑같은 LEVEL TABLE을 가지고 있다.  1. 서울대 2. 연고대 하는 식의 레벨표를. 이 레벨표는 a.법대, 의대 b.경영, 컴공 하는 식의 하위카테고리도 가지고 있다.  이 레벨표상의 나의 위치는 정해져 있다. 이제 상대의 위치만 알면 나의 입에서 나오는 작게 터져나오는 감탄사(와우 혹은 음.... 혹은 에이)를 결정할 수 있고, 상대와 나 사이의 권력의 좌표도 완성된다.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자라고 있는 사람중에서 학벌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드물고 진보진영도 예외는 아니다.

"그 활동가는 관악 학생회장이었고, 그 활동가는 지방대를 다녔다더군"
"그 진보적 교수는 지방대 교수지만, 서울대를 나왔지"
"대단하시네요. 그 대학을 나왔으면 훨씬 더 편하게 살 수 있을텐데.. 운동을 하시고.. "

사실 운동권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상적으로, 또 자명하게 표출되진 않는다. 그것은 터부시 되거니와, 그것의 표출은 비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표출되지는 않되, 각자 안에서 훨씬 더 은밀하게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학벌주의가 뼛속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 직시하자! 운동권인 나도, 운동권인 당신도. 우리 머리속의 학벌주의 관념은 우리를 둘러싼 권력관계의 구조속에서 생산되어 우리에게 이식되었고, 지금 이 순간도 사회속에서, 개인 안에서 가공되고 생산되고 있다. 이것은 노력하여 없애야 할 그 무엇이다.

그것은 마치 남성 지배 구조속에서 자라난 사람이 여성주의를 학습하고, 소통하고 실천하며 내 안의 남성 중심성을 씻어내고 젠더에 기반한 권력관계를 해체해나가야 하듯이, 학벌주의 구조에서 나고 자란 우리가 내 안의 학벌주의 관념을 씻어내고 학벌에 기반한 권력관계를 없애기 위해 실천해야하는 것이다.

언어의 신중한 구사가 필요하지만, 말조심이 전부가 아닌 것  역시  젠더에 기반한 권력관계나  학벌에 기반한 권력관계나 마찬가지다.

집회를 나가면 서울대를 스스로 관악이라 칭하는 깃발을 보곤 하는데, 내가 추측하기에 그것은 대한민국 학벌주의 피라미드의 꼭지점으로서의 '서울대'라는 상징을 거부함으로써 학벌주의 그 자체를 거부하자는 취지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귀여운 애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앗, 이런 논쟁적인 발언을....ㅠㅠ)

이름을 바꿈으로써 그 본질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서울대'라는 깃발을 '관악'이라는 깃발로 바꾸어 들고 있으면, 그것을 들고 있는 이의  마음이 다를까?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다를까? 아니면, 학벌주의 구조와 권력관계가 해체되는가?

'서울대'를 '관악'이라고 바꾸어 칭하는 것은 칭하는 이들 각자 스스로가 학벌주의 관념을 머리속에서 씻어내려 노력하고, 한국의 학벌주의 구조를 바꾸려는 실천을 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학벌에 기반한 권력관계가 억압임을 직시하고 깨어 나가자. 그 노력과 실천도 다른 노력과 마찬가지로 진보진영 운동권에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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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끼는 밤

애인과 신나게 싸웠다. 휴~


식당에서 발단한 싸움을 거리에서 전개해  버스정류장에서 절정을 찍고, 훽 돌아서며 끝을 맺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귀를 방해하며 정류장 한가운데 의자에 앉아서 서로의 주장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의 0000란 말이 내겐 상처가 돼"
"0000!!"

나의 태도는 이런 식이었다. 어제 "사랑한다"라고 속삭이던 입들에서는 상대의 말을 끊으며 나를 방어하고 당신을 비꼬고 공격하는 말들이 점점 큰 목소리로 쏟아져 나왔다. 

미운 마음과 서운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과 반성으로 복잡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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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개설

스킨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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