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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벌어진 사건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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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emiradzki, Christ and the Samaritan Woman, 1890


요한복음 4장에 대한 묵상입니다.

 

햇볕이 가장 강하게 내리쬐는 오정 즈음에 한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 물을 뜨러 나옵니다. 니고데모와 달리 그녀는 "스스로 성전인" 사람이었기에 낮에도 거침없이 다닐 수 있었던 걸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는 "배제된 자"였기 때문에 낮 시간에 물 뜨러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근동의 정오란 그야말로 타는 목마름의 시간입니다. 물을 뜨고, 빨래를 하는 일상의 생활은 해가 넘어갈 무렵 이루어집니다. 여인들은 그 때가 돼서야 하나 둘씩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아무도 없는 환한 낮에 나와야 했습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물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부정한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과거를 짚어내면서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도 한 남자와 살고 있지만 남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근동 세계에서 남편이 없는 여성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떳떳한 삶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다섯 명의 남편을 어떻게 잃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워낙 흔했던 폭정과 전쟁으로 인해 잃었을 수도 있고,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버림받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렇게 과부된 자는 마을 공동체가 책임을 지고 보살펴야 했지만 그녀는 그런 보살핌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녀가 택한 길은 혼인 관계 바깥에서라도 남성의 도움을 받는 그런 길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 여인이 가진 불행과 고통을 참작하기보다는 정상적 삶을 박탈당한 이 여인의 삶을 비정상적 삶으로, 비난받아야 할 불결한 삶으로 비판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의 '밤'과 이 사마리아 여인의 '낮'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는 옛 말씀의 수호자요, 하나는 옛 말씀의 피해자라는 점만이 다를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삶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는 예수에게 대뜸 '예배'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쩌면 바로 이 옛 말씀의 세계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그녀는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의해 버림받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또 사마리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종교 체제는 예루살렘 체제에 대한 저항 논리를 더욱 더 율법적인 종교로 발전시켰기에 그녀는 그 안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구원을 갈망했지만, 사마리아 산에서의 예배도,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도 그녀는 드릴 수 없었고, 그녀를 구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하느님은 영이시다."(23-24절)

 

하느님은 영이시다! 이 말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전에 하느님은 곧 대제사장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예루살렘 성전이나, 사마리아 산당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종교 체제나 율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옛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을 영이라 합니다. 전에 살펴보았듯이 영은 '호흡'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영을 가진 자입니다. 하느님을 가진 자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 어떤 율법을 지키느냐가 그 사람이 하느님을 참으로 예배하고 있느냐를 판가름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판가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 숨을 쉼으로써 하느님을 예배하고, 책에 씌여진 진리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진리, "살림"을 함께 삶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이 예배의 때는 일요일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닙니다. 언제나 "지금이 바로 그 때"(23절)인 것입니다. 이 예배의 장소는 예루살렘도 아니고, 사마리아 산도 아니고 바로 우리의 몸인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가 베푸는 진리 앞에 놀랍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부정한 여인에게 예배에 대해 논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서 놀랍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예루살렘도, 사마리아도, 갈릴리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호흡을 가진 자입니다. 마치 붓다에게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나, 수드라나, 바이샤나 모두가 인연의 장에서 불성을 빚어내는 존재들인 것처럼, 예수에게도 그 어떤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 뜨러 나왔던 것도 잊은 채,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멀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마을로 돌아가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예수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진리 앞에 놀라고 감동한 여인의 '뽀스'가 그녀를 부정한 여인으로 멀리하던 마을 사람들까지 감동시킵니다. 그리하여 이제 이 마을엔 새로운 예수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2등 시민 사마리아인도 없고, 남편이 없어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부정한 여인도 없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하는 교회는 이런 예수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불행히도 오히려 교회는 "옛 말씀"의 길, 예루살렘 종교체제의 모습을 더욱 더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정한 것도, 부정한 것도 없는 예수의 길 대신 율법과 도덕이 지배하고, 스스로 자유인이 되어 예수의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들에게 교회의 교리와 조직에 충성할 것을 가르치는 교회, 영이신 하느님을 교리 속에 가두어두고, 그 교리에 세상을 끼워맞추어 심판하는(예수 천당! 불신 지옥!) 교회의 모습은 사마리아에서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예수공동체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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