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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east must go on! - 몸으로 읽은 요한복음(3)

VERONESE, Paolo, The Marriage at Cana, 1563, Oil, Musée du Louvre, Paris

 

 

 요한복음 2장에 대한 묵상입니다.

 

1.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행한 첫 번째 표적은 흔히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이야기의 제목을 다르게 붙이고 싶습니다. "혼인 잔치가 계속되게 하신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혼인잔치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모든 행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기쁘고, 축하 받는 일입니다.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고, 세대를 이어가는 일이 이 혼인잔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근동지방의 문화에선 혼인잔치란 며칠씩 이어지는 마을의 큰 축제였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때로는 이웃마을의 친지들도 초청하기도 했었나 봅니다. 가나 마을의 잔치에 나사렛 마을 사람 예수와 그의 어머니, 그의 제자들까지 초대된 것을 보면 말입니다.(2, 3절)

 

그러나 이 혼인잔치는 이내 중단될 위기에 처합니다. 혼인잔치에 쓰일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포도주는 잔치와 식사에 결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음료수였습니다. 포도주가 없으면 잔치는 중단되고, 모인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작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 예수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기적,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2.

예수는 어떻게 이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는 앞선 글에서 이야기 했듯이 '신통력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좀 다른 차원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예수가 가진 신통력을 가진 이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것은 그의 기적이 아니요, 그의 사물과 상황과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즉, 예수의 시각에서는 물과 포도주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 기적이야기에서 제가 보고 싶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포도주로 바뀐 물은 유대 율법에 따라 밖에서 집으로 들어온 이들이 손과 발을 씻는 물이었습니다. 자신과 남을, 그리고 모든 만물을 분별과 차별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포도주와 씻는 물은 너무나 먼 것이었습니다. 포도주는 포도주고, 물은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물과 포도주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이 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에게서 그것들은 본질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쓰임에 의해서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잔치를 지속하는데 쓰이면 그것은 포도주이고, 손과 발을 씻는데 쓰이면 그것은 물인 것입니다. 기적은 예수의 이러한 새로운 시각을 겉으로 드러내준 표면에 불과합니다.

 

사람에 대한 예수의 시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이 기적이 다른 곳이 아닌 '갈릴리 가나'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복음서들을 살펴보면 -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 예수가 일으키는 기적이나 표적의 내용이 두 부분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치유하고, 회복하고, 잔치를 벌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심판과 파괴와 멸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자의 것은 주로 갈릴리에서 보이시고, 후자의 것은 주로 수도 예루살렘에서 보이시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잘 모르기에 갈릴리나 예루살렘이나 다 같은 '유대', 혹은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의 농촌 지방이 예루살렘 도성의 제사장가문이나 왕들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 이전 1세기 정도부터라고 합니다.(물론 더욱 고대시기에는 하나의 이스라엘이었을 것입니다만…) 즉, 갈릴리는 유대에 병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땅의 운명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역시 100년 전에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강제 병합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기존 유대인들과 로마인들로부터 이중의 차별과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지배자들은 갈릴리의 민중들을 "죄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과 로마의 지배자들을 위한 세금을 마련하느라 안식일도 쉬지 못하고 일할 때가 많았고, 문맹으로 인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갈릴리인과 유대인은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 '죄인'과 '의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치유하고 회복하는 사역은 이 갈릴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에게 있어 '갈릴리 죄인들'은 '예루살렘 의인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되고, 그것으로 인해 차별 받아 마땅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물과 포도주가 그에게 있어 다른 것이 아니었듯이, 갈릴리인들도 유대인들과 다른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에게는 갈릴리인들도 혼인잔치가 계속되도록 쓰임 받는 '포도주'였습니다. 예수가 갈릴리의 공동체들과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과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3.

잔치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별과 차별의 눈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리고 여기에서 생겨난 이기심이나 열등감을 갖고 있는 이상 잔치는 중단되고 맙니다. 잔치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예수가 본 것을 우리도 보아야 합니다. 물과 포도주가, 갈릴리인과 예루살렘 의인들이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근동 지방의 혼인 잔치는 중단되곤 합니다. 지난 2004년 5월 19일 이라크 국경지대의 한 마을에서는 혼인잔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신부가 어여쁜 드레스를 입고 입장했고, 아이들과 어른들은 한데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잔치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미군 헬기가 100개도 넘는 포탄을 결혼식이 열리는 가옥 두 채에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이라크 인들이란 본질적으로 '테러리스트'였기 때문입니다.

 

이라크에서, 혼인잔치는 계속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에 의해 자신의 땅을 잃은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들의 잔치를 이어갈 수 있을까요. 차별과 배제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세계의 이주자들, 여성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땅을 빼앗긴 원주민들, 그리고 여러가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흥겨운 잔치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잔치가 중단된 여러 곳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그리스도가 되고 싶습니다. 잔치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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