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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파는 '지킬과 하이드'의 얼굴들

인권오름에 세번째 기고(청탁받은 건가?)글이다. 실제로 실린 글은 제목도 바뀌고, 분량이 많아서 상당부분 짤리고, 약간 수정이 된 글이 실렸을 것이다.

 

 

 

가난을 파는 '지킬과 하이드'의 얼굴들

 

지난 1월 말 모방송사에 원탁대화란 이름으로 출연하여 대통령은 기초생활보장예산이 줄었다는 패널의 지적에 ‘기초생활수급자는 줄어들수록 좋다’ ‘일자리를 만들어 기초생활수급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라고 언급하였다. 그 이후 비상경제대책회의가 청와대 지하벙커가 아니라 지상으로 나와 열린 직후 기초생활지원, 긴급 복지지원에 대한 상담업무를 담당하는 129콜센터를 방문하여, 청와대에 편지를 보낸 모녀와 통화를 하는 광경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쓰지도 못하는 봉고차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 탈락한 모녀를 위해 긴급복지지원과 일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말도 전파를 탄 것은 물론이다.

 

‘일자리가 복지다’란 평소 대통령의 소신과 철학 때문인지 몰라도 올해 기초생활보장예산은 작년보다 1만명 줄어든 158만명으로 편성되었다. 보건복지가족부는 실질 수급대상이 작년 11월에 153만명이므로 실제로 올해는 이보다 5만명 늘어난 것이라고 강변한다. 2008년 편성된 대상이 159만명인데 153만명으로 줄어든 이유는 위의 모녀의 예처럼 자동차 등의 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하는 기준, 부양의무자기준 등을 까다롭게 적용하여 탈락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산편성이 작년보다 적게 이루어졌는데 올해 말 실제 수급빈곤층의 숫자가 2008년보다 늘어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대통령이 말했듯이 전 세계적인 경제침체와 역사상 세 번째로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되는 올해 한국경제 여건에서 빈곤층의 증가는 확실하다. 그리고 이미 최저생계비 이하의 빈곤층이지만 기초생활수급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는 비수급빈곤층은 300만명에 달한다. 대통령의 배려(?)와 언론보도로 모녀는 수급권을 가지거나, 일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몇백만에 달하는 빈곤층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언론에 보도되는 대통령의 모습만큼 피부에 와 닿는 것이 없다.

 

여기에 더하여 의료급여 수급권을 가진 차상위계층 21만명에 대하여 오는 4월부터 의료급여를 중단하고 건강보험에 포함시킨다고 하고 있다. 1년동안은 보험료와 본인부담금을 면제한다지만, 이들의 소득이 1년 사이에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으므로 결국 일년 후에는 보험료를 내지 못하여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도 3개월 이상 보험료를 내지 못한 체납가구는 100만가구를 훨씬 넘는다. 당연히 이들은 건강보험과 의료급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고스란히 의료비를 전액 부담하거나, 의료비를 감당못하는 경우 치료를 포기할 것이다.

 

정부가 얘기하는 ‘일자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대통령이 원탁대화에서 칭찬한 사례인 주택공사의 ‘잡 쉐어링’ 사례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주부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사회취약계층을 위한 제도개선이자, 주거복지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라고 하지만, 본격적으로 시행하기도 전에 비판받고 있는 상황이다. 환자 수발 등 돌봄서비스를 주 업무로 하는 이 일자리는 고용기간이 고작 6개월에 불과하고, 임금도 최저임금에 훨씬 못 미치는 월 60만원에 불과하다. 극도의 저임금에 불안정한 일자리란 얘기이다. 기존의 안정적인 좋은 일자리를 나누는 ‘잡 쉐어링’이 아니다. 그런데 현 기초생활수급자격기준 때문에 이걸 선택하게 되면, 수급권자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크다.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 탈락하게 되면 주거급여, 의료급여에서도 탈락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임대아파트 입주자격도 상실하게 될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화되면 대통령이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줄어들고, 일자리는 늘어나긴 한다. 하지만 일자리가 제공되는 6개월이 지나고 그 이후에는? 주택공사에서는 이러한 지적이 있자, 보완책을 마련한다고 한다. 하지만 현 기초생활보장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보완책은 없다. 수많은 비수급빈곤층을 만들어내는 부양의무자기준을 없애고, 소득인정액 기준을 대폭 완화하지 않는 이상 보완책은 단지 말에 그칠 뿐이다. 아울러 다른 소득이 있을 경우 이를 생계급여에서 삭감하는 ‘보충급여의 원칙’이 수정되어야만 기초생활수급권자의 선택의 여지도 넓어질 것이다. 지금의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권리를 가진 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제한한다. 노동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조건부 수급’이라는 명목하에 아주 낮은 임금의 노동을 강요하고, 수급권을 가진 이들에게는 다른 소득활동을 선택할 수 없게 한다.

 

한편 빈곤층을 대상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빈곤비지니스’도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학생 63만명이 이용하고 있는 정부 보증 학자금 대출 금리는 연 7.3%로 전 학기보다 0.5%포인트 떨어지는데 그쳤다고 한다. 대출금리 기준이 되는 국고채 금리가 1.7% 포인트나 떨어졌는데도 시중은행들이 가산 금리를 2배 이상 높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학자금 지원을 명분으로 저소득층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돈놀이’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부업을 하는 회사들의 고금리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일자 대부회사보다 이자율을 싸게 해준다면서 다른 대출보다 두배 이상 높게 책정된 저소득층에 대한 소액대출을 상품으로 출시하는 경우도 있다. ‘빈곤비지니스’의 형태 중 대표적인 것이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대출이다. 빈곤층은 대출에 따른 원금과 이자를 부담하느라 고통을 겪었고, 결국 집마저 잃게 된 게 미국의 현실이었다. 한국에서도 높은 금리로 대출을 받고, 졸업 후 취직은 어려워지고, 결국 학자금 대출금을 받지 못해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부담은 가중되면서 가난의 악순환은 지속되는 상황을 예견케 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정부 대책은 전무하다. 아니 오히려 조장한다. ‘일자리’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가난’을 대하는 정부와 기업등의 태도는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나의 얼굴은 선하고 따뜻한 배려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강요와 부담, 억압의 얼굴이다. 가락동 시장 할머니에겐 목도리도 선물해주고, 모녀를 위해서는 수급권자가 될 수 있도록 ‘홍보’도 해주면서 기초생활보장 예산은 줄이고, 20만명에 달하는 의료급여 수급권자에 대한 책임은 나 몰라라 한다. 학자금을 지원해준다면서 더 비싼 이자를 씌운다. 일자리를 마련해준다면서 낮은 임금을 강요한다.

 

이러한 예는 서울시가 ‘빈곤의 대물림을 끊겠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희망플러스 통장' 사업에서도 관찰된다. '희망플러스 통장'은 서울에 사는 주민이 가입해 3년동안 5~20만 원을 매월 저축하면, 서울시와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이 같은 금액을 추가로 지원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이 사업의 혜택을 받으려면 가족 중 채무불이행자도 없어야 하고, 빚도 없어야 한다. 이 조건을 맞출 수 있는 빈곤층은 거의 없다. 서울시는 몇십만 명 중에 고작 1천명을 선정하는 사업을 하면서 생색을 내고 있다. 이는 청년실업대책으로 실시하고 있는 행정인턴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실효성과 지속성에서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판명났는데, 숫자늘리기에 급급한 일자리 마련정책을 포장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위와 같은 두 얼굴은 하나의 몸통을 지닌다. 그것은 ‘가난은 나랏님도 해결 못한다’라는 낡은 봉건제적 의식이기도 하고, ‘권리의 주체가 아닌 시혜와 배려의 대상’으로만(!) 남아 있어야 하는 빈민을 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과 시선은 대통령이 “어려울 때는 어려운 사람이 더 어렵지, 있는 사람은 어려움을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있는 사람은 평소처럼 돈을 써줬으며 좋겠다. 어려운 사람은 우리가 그렇게 대책을 세우는데, 그래도 어려울 때는 정부 힘으로 다 막을 수 없다. 종교단체나 기업이나 나눔의 문화가 확산돼야 하지 않을까 부탁도 좀 드린다”라고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철거민들이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결성한 단결체인 ‘전철연’에 대해 “가난을 파는 운동, 절박한 이들을 내세워 잇속을 챙기는 사익적 운동행태”라는 망언을 한 바가 있다. 사실 이 말은 정부와 한나라당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야 할 말이다. 스스로 가난을 팔면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지 않고 있는지, 가난한 빈민을 자신의 이미지 홍보용 들러리로 내세우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 볼 일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몫’을, 힘을 합쳐서 모아진 행동으로 주장해서는 안되는 존재인가? 그러했기에 가난에 처하게 된 철거민이 자신의 살아갈 권리를 외치자 돌아온 대답이 죽음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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