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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의 글 하나

우연히 발견한 자료...2000년 [현장에서 미래를] 57호에 실린 글...필자는 이재준(민중의료연합 사무처장)

 

의료보험 제도의 위기와 기로

7월 1일에는 그동안 직장․지역조합으로 나뉘어져 있던 의료보험조합이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으로 통합 일원화되어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이름으로 운용된다. 정부는 의료보험의 통합으로 “보험료 부담의 형평이 이루어지며 사회보장제도 확충의 큰 걸음을 내딛게 된다”며 우리나라 의료보장의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이 제고되고, 보험 혜택은 크게 확대되고, 보다 신속하고 편리한 민원서비스가 이루어지며, 관리 운영이 효율적으로 바뀐다는 정부의 장밋빛 홍보 문구는 우리 노동자․민중에게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얘기로만 느껴진다. 그것은 의료보험 제도가 그동안 군사독재 및 지배정권의 유지와 홍보를 위한 도구로 쓰여졌다는 역사적․정치적 경험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노동자․민중에게는 높기만 한 병원 문턱이 여전하며, 의료비에 대한 부담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의료보험 통합은 의료보험 운영 방식을 조합에서 통합으로 바꾸는 것이지만, 민중운동 진영에서 통합을 그토록 주장했던 원래 취지는 급여의 확대였다. 조합방식으로는 보험적용 확대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조직을 통합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여 보험급여 확대의 걸림돌을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즉, 전 사회적으로 노동자․민중의 전면적 의료보장을 실현하기 위한, 즉 ‘연대와 형평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한 방도로서 통합이었다.
그러나 국민건강보험은 본래의 취지인 보험급여 확대와 노동자․민중간의 사회적 연대는 가려진 채 관리 운영의 효율성만이 강조되어 추진되고 있다. 지역의료보험조합 가입자와 직장의료보험조합 가입자간의 보험료 부담의 불형평성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형평성 개선이 아니라 못 가진 자 내부의 문제로 국한되어 버렸다. 또한 불형평성의 문제보다는 보험료 부과 방식의 합리성 문제로 변질되어 효율과 합리화의 원리만이 강조되었다. 즉 ‘연대와 형평의 원리’라는 얼굴과 ‘효율과 합리화의 원리’라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닌 것이 현재의 의료보험 통합 일원화로 출범한 건강보험의 모습이다.
한편 7월 1일부터 의약분업이 실시된다. 7월 한 달 동안은 계도기간으로 이전과 같이 병․의원에서 약을 조제하거나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조제가 가능하지만, 논리상으로는 어쨌든 7월부터 의약분업이 시행되는 것이다. 의약분업은 의약품 오남용의 주원인이었던 주사제가 예외로 인정되는 등 그 원칙이 심각하게 훼손된 것은 차치하고라도, 결과적으로 민중의 부담을 크게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의사 폐업에 대한 정부의 회유책으로 처방료 등이 인상되었고, 수가 추가 인상으로 그 부담 또한 노동자․민중의 부담으로 전가되어 보험료 인상으로 돌아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 글에서는 의료보험이 부닥치고 있는 위기와 정부와 자본의 위기 해결 방안을 검토해 보고, 진정한 위기 극복인 의료보장의 실현을 위해 노동자․민중이 주장해야 할 요구를 짚어보겠다.


1. 의료보험은 왜 위기인가

현재의 의료보험 제도는 누구에게나 불만족스럽다. 의료공급자(병의원, 의사)는 낮은 의료수가로 인한 불만, 민중들은 의료비 부담이 줄지도 않은 상황에서 보험료 부담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으며, 정부는 재정의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 와중에 자본은 상업적 성격의 의료보험 상품 시장을 더욱 확대해 나가 공적 의료보험을 위협하고 있다. 즉 현재의 공적 의료보험 제도는 위기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 위기의 첫 번째 측면은 재정의 위기이다. 지역의료보험조합은 1999년 한 해만 해도 5천여억 원의 적자가 났으며, 올해에는 8천억 원 이상의 적자가 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더구나 지역조합의 적립금은 1999년 말엔 한 달치 지급액에도 못 미치는 3천9백억 원에 불과했으며, 올해 말에는 4천여억 원의 적자가 예상되어 재정 파탄에 이를 것으로 보이고 있다. 직장의료보험조합도 그 동안 누적된 적립금은 2조원에 이르렀지만, 1999년부터 적자 운영을 해오고 있다.
위기의 둘째는 의료보험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의료보험의 보장성이 극히 취약하여 ‘진료비 할인제도’의 성격밖에 지니지 못해 불신의 근원을 제공하고 있다. 1998년에 진료비의 본인부담금은 외래 60%, 입원 47%에 이르는 등 사회보험으로서의 성격을 온전히 지니고 있지 못하다. 생명보험회사를 비롯한 영리성 의료보험(개인건강보험)에 가입하고 있는 인구가 1천만 명을 넘어는 등 자본의 이윤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의료보험이 활용되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
세번째로 의료보험 재원의 사회적 성격이 취약하다. 현재 의료보험 재정은 직장의료보험을 포함하여 개인부담 보험료가 45.8%, 국고부담 13.2%, 사용자 부담 19.0%, 기타 수입 22.0%에 이르는 등 개인 부담 비중이 과도하다. 지역의료보험에 대한 국고부담 비율은 1989년 51%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99년에는 26%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특히 수입에 관계없이 일정한 비율의 보험료가 매겨지는 방식을 택하고 있어 소득 재분배의 효과가 떨어질 뿐더러, 오히려 역진적인 효과까지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현 의료보험 위기의 본질은 의료보험 제도가 경제적 부담을 덜면서 누구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건강권을 실현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의료보험의 위기의 근원은 민간 중심적 의료체계 자체에 있다. 민간 중심적 의료체계는 이윤 추구를 기본적 동기로 가질 수밖에 없으며, 더구나 우리나라는 의료공급자가 제공하는 서비스 하나하나에 대해 가격을 매기고 그 비용을 지불하는 행위별 수가제를 채택하고 있어서 의학적 필요 이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공급자의 공급 행태를 근본적으로 제어할 방법이 없다. 최근 의료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 보수 지불제도의 개편을 비롯한 여러 가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서구의 경험으로 볼 때 최근의 노력들이 이렇다 할만한 실효를 거두리라 기대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이윤 추구를 기본적 동기로 하는 의료체계의 부정적 효과는 의료보험 재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고 그 비용을 실제로 부담하는 민중들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민중들이 건강하게 살 권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2. 정부와 자본은 어떻게 위기를 해결하려 하는가

의료보험 통합 이후 현재의 위기를 겪으면서 의료보험 제도는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가? 그리고 그 해결은 어디서부터 찾아나가야 할 것인가?
정부는 보험급여의 포괄성 보장,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 실현, 제도운영의 효율성․투명성 확보, 의료자원의 효율적 활용과 의료서비스의 질 향상, 보험재정의 건전성 확보라는 방향 아래 현재의 ‘저부담․저급여 구조’에서 ‘적정부담․적정급여’ 구조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재정 안정화의 문제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고 있다. 즉, 부담의 형평성 확보, 적정수준의 보험료 부담, 보험 재정의 안정적 확보와 효율적 운영, 적정 수준의 보험급여 제공이라는 단계적 수준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보험 재정의 안정화를 위한 전 단계로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과 더불어 적정수준의 보험료 부담을 상정하고 있는데, 결국 의료보험 재정을 노동자․민중의 개인 호주머니에서 충당하겠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최근에는 현행 공적 의료보험을 보완하는 민간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키로 방침을 정하고 올해 말까지 구체적 시행 계획을 마련토록 함으로써 현행 의료보험의 문제와 위기를 정부와 사회의 역할을 강화함으로써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메커니즘의 도입을 가속화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려 있다. 민간의료보험 도입은 의료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발상으로써 자본의 이윤추구의 도구로 의료보험이 활용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자본의 의도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우리나라 독점자본의 결집체인 전경련은 ‘사회보장을 통한 경제안정은 개인이 갖는 자율의 폭을 줄이고, 사회보장의 부담과 수익의 형평성을 고려할 때 국민의 동기유발을 저해함으로써 경제적 효율성을 낮추게 된다’면서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민간 제도로서 정부의 공공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며 사회보험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민영화 방안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할 지점에 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의료보험과 관련하여 전경련은 ‘정부와 민간이 협업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의료보험 관리 운영에 경쟁 시스템 도입과 효율화, 민간보험 도입, 공적 의료보험 외에 의료저축계정(Medical Saving Account: MSA)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정부와 자본의 의료보험 개편 방향은 한 개인이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본적 권리로서의 건강권을 ‘경쟁과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탐욕에 종속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자본은 기본적 권리를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른 선택의 문제로 변질시키고 있다. 또한 민간보험의 도입으로 의료보장 확대의 책임을 완전히 포기하려 하고 있으며, 자본은 보험시장의 확대를 통해서 사회보장의 영역에서까지 이윤을 창출하려는 탐욕의 본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3. 왜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려 하는가

2000년 5월 17일 정부 규제개혁위원회는 ‘국민들의 의료서비스 선택권을 확대’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의료보험을 조기에 도입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보건복지부에 연말까지 시행계획을 마련토록 권고했다.
작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암보험을 비롯한 개인건강보험의 보험료는 공적 의료보험 재정의 30%에 이르고 있다. 공적 의료보험비가 몇 천 원만 증가해도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던 국민들이 몇 배의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가입하는 모순된 현실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현재 공적 의료보험은 다양한 의료서비스에 대한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은 의료보장의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며, 높은 본인부담금을 특징으로 하는 등 매우 불구적인 모습이다. 그로 인해 국민들은 공적 의료보험에 대한 불신이 누적되어 왔고 자신의 불건강에 두려움을 다른 차원의 위험분산책을 갈망하게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즉, 포괄적 의료보험은 아니더라도 일반보험의 특약 형태로서 개인건강보험이 꾸준히 증가하게 된 것이다.
민간의료보험 도입 추진은 정부의 ‘두마리 토끼 잡기’ 의도이다. 의료보험 재정 위기를 해소하면서도 및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민간과 정부의 적정한 역할 분담'을 운운하면서 의료라는 시장을 활성화시켜 건강이라는 것도 능력별로 획득케 만들자는 것이다.
또한 의료공급자는 공적 의료보험 내에서 최대한 수가를 보장받고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수가 구조하에서 최대한의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의료보험 도입을 원하고 있다. 민간의료보험 도입은 폐업을 벌인 의사들의 주장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자본가․사업주는 보험 재정의 부담 확대를 반대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노동시간 단축, 산재보험 전사업장 확대 적용, 국민연금에 있어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직장가입자로의 편입 등은 기업의 비용부담을 가중시킨다면서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서 보험 재정의 안전성과 의료서비스의 질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저소득층을 위한 기초적 보장은 정부 주도하에 기존의 방식대로 운영하고, 의료 수요가 집중되어 있는 고소득층을 위해 양질의 진료를 차별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민간의료보험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90년대 초 우루과이라운드 때의 의료시장 개방 문제의 연장선 위에서 한미투자협정 과정을 거치면서 ‘의료보험 시장 개방’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미 89년도에 외국 생명보험회사의 국내 진입은 개방이 되었고, 푸르덴셜처럼 독자적으로, 혹은 알리안츠제일생명처럼 합자 형태로 이미 다수가 진입해 있다.



4. 민간의료보험,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배경 아래 도입이 추진되고 있는 민간의료보험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을까. 우선 민간의료보험의 도입은 의료이용에 있어 형평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국민을 분할시킨다. 비용부담 능력이 있는 고소득자는 민간의료보험을 따로 구비해서 고급의료서비스를 제공받고, 저소득자는 공적 의료보험에 남아 있게 되는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일류는 민간의료보험 가입, 이류는 공적의료보험 가입, 삼류는 의료보호 대상 등으로 국민을 분할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영국의 경우 민간보험 가입율이 상류층인 관리직에서는 34%, 육체노동자는 3%에 불과하고,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에서 영국과 비슷하게 관리직과 육체노동자의 민간보험 가입율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데에서 그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병원을 이용할 때에도 차별이 생기게 된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우리나라 병원은 진료수가가 높은 민간의료보험 환자를 선호할 것이며, 공적 의료보험 환자는 병원에서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실제 의료보호 환자에 대한 의료기관에서의 대우를 보더라도 쉽게 예측 가능한데, 대형병원은 민간의료보험 환자를 중심으로 병원을 운영하여 공적 의료보험 환자가 대형병원을 이용하는 데에 제한을 받을 것이다.
한편 공적 의료보험은 심각한 수준으로 위축될 것이다. 가진 자들은 이미 보완적 형태의 민간의료보험을 구매한 상태이기 때문에 공적 의료보험의 수준과 범위의 확대의 필요성을 가지지 않게 된다. 대부분의 서구 유럽 국가는 의료보험의 보장성이 80%를 넘어서고 있고, 전체 진료비의 80% 이상을 의료보험이 부담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다수 서유럽 국가가 민간의료보험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보충적’인 의미 이상을 지니지 않고 있다.
따라서 공적 의료보험의 확대를 위한 재원 확충에 대해서 정부를 비롯한 사회적 부담에 대해서 더욱 인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공적 의료보험은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서비스가 아니라 ‘최소한의’ 서비스만을 담당하는 것으로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민간의료보험을 구매할 수 없는 못 가진 자, 그리고 이른바 중산층이 보장받을 수 있는 의료서비스는 최소한으로 축소될 것이다.
게다가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이 더욱 증가한다. 정부 규제개혁위원회의 발표는 낮은 비용으로 고가의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국민의 의료이용 편리성을 들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서민들의 의료비 부담 증가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민간의료보험 도입을 찬성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는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을 낳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4인 가족인 대표적인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한다고 가정해 보자. 아빠는 슈퍼맨 건강보험, 엄마는 여성 건강보험, 할머니 할아버지는 실버 건강보험, 자녀는 꼬꼬마 자녀해상보험 등등. 상품에 다라 다르겠지만 평균 3만원씩 쳐도 수십만 원이다. 이중 부담과 비싼 보험료에도 불구하고 민간의료보험이 의료비 부담 증가에 대한 대책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으랴.
그리고 실제 의료보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돈이 있어도 민간의료보험 가입에서 제외될 수 있다. 미국의 사례를 보면 의료비용을 많이 지출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의 가입을 배제하기 위해 의료기관의 위치와 제공하는 서비스의 종류를 조정하거나, 보험 가입자가 심각한 질병에 걸릴 경우 의료보험료를 올리는 방법을 통해 보험 탈퇴를 유도하는 등의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즉, 건강하고 의료서비스 이용에 대한 지불 능력이 있을 때는 의료보험의 틀 내에 속할 수 있지만, 정작 질병에 걸려 의료보험이 가장 필요하게 될 때는 미가입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민간의료보험은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일반 기업과 마찬가지로 단기적인 수익성 측면에서 투자를 결정한다. 따라서 건강 증진이나 예방 활동 등과 같이 보험 재정에 즉각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거기에 돈을 쓰는 것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과당경쟁으로 인한 높은 관리비용 때문에 국민이 보험료로 부담하는 비용만큼 급여를 받지 못하게 된다. 1999년 우리나라 질병보장보험의 수지 현황을 보면 수입 보험료의 단지 20.6%만이 보험금으로 지급된 반면에 공적 의료보험의 경우 77.4%가 보험급여에 사용되었으며, 미국 민간의료보험의 경우 관리운영비는 10.4%로 우리나라 공적 의료보험의 7%에 비해 높은 편이다.


5. 과연 노동자․민중은 ‘적게’ 부담하고 있는가

앞에서 정부는 ‘저부담․저급여 구조’에서 ‘적정부담․적정급여’ 구조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정부와 일부 학자들은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보장성 부족이 노동자․민중이 보험료를 적게 내기 때문이고 보장성을 높이려면 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말 노동자․민중들이 건강에 관련해서 지출하고 있는 돈이 적은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노동자․민중은 다양한 방식으로 충분히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노동자․민중은 의료보험 제도를 가지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적은 공적 의료보험료를 부담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의 건강 관련 비용 지출은 공적 의료보험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의료보험의 지극히 취약한 보장성으로 인해 의료서비스 이용시 엄청난 규모의 비용을 추가로 지출하고 있다. 그리고 공적 의료보험만으로는 자신의 건강과 가계 경제를 제대로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에 엄청난 규모의 사적 보험료를 지불하고 있는 형편이다. 즉 이른바 중산층조차도 부담스러운 본인부담금과 사적 보험료를 지불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은 건강을 제대로 보호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
공식적 부문에서 의료 관련 비용 부담의 크기를 보면, 공적 의료보험료로 6조7천여억원(2000년 추정치), 병․의원 이용시의 본인부담금 9조1천억여원(2000년 추정치), 개인건강보험료 3조7천여억원(99년 4월에서 12월까지 보험료) 등으로, 모두 합해 20조원에 육박한다. 결국 공적 의료보험료의 두 배에 달하는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는 건강식품 등과 같은 비공식적인 의료서비스 비용이 제외되어 있고, 암보험 등 개인건강보험 외에도 각종 생명보험에 특약 형태로 건강 관련 보험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제 부담하고 있는 비용의 크기는 훨씬 커진다.
또한 OECD 국가를 대상으로 국가별 의료비 지출 중 공공부문 부담률을 살펴보면, 전국민의료보험이 없이 민간의료보험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에서조차도 공공부문의 부담률이 60%를 넘고 있으며,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 75%를 넘는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명색이 전국민의료보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부문 부담률이 35%에도 못 미치고 있다. 즉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때 민중들의 호주머니에서 직접 돈을 꺼내서 비용 지불을 해야 하는 정도가 그 어디에도 비견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이제 만일 개인건강보험에 지출하는 비용을 공적 의료보험에 투입한다고 가정해 보자. 작년 9개월 동안 민중들이 사적 의료보험료로 지출한 3조7천억 원을 공적 의료보험에 투입한다면, 의료보험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의료서비스 이용의 경제적 문턱을 낮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비용 부담의 총합도 줄일 수 있다.
3조7천억원이면 현재 보험적용이 되지 않고 있는 초음파, MRI, 각종 예방서비스, 각종 치과서비스(노인의치, 스케일링, 불소도포, 치아홈메우기 등), 한약제 등을 보험급여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고, 질병으로 노동을 하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평균 임금의 60%를 보상해 주는 상병수당 제도, 진료를 받을 때 10만원이 넘는 본인부담금은 전액 의료보험에서 지불하는 본인부담상한 제도 등을 당장에 도입하고도 남는 금액이다. 즉 공적 의료보험 제도를 민중의 건강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의료보장 제도로 발전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민중들은 돈은 돈대로 쓰고, 건강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6. 노동자․민중은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

그러면 노동자․민중은 의료보험 제도의 위기와 변화의 기로에서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할까? 의료보험의 세 가지 위기는 의료보험 재정의 안정적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선 지금까지 민중진영이 벌여 왔던 지역의료보험에 대한 국고부담 확대가 중요하며 절실히 요구되는 사안이기는 하다. 그러나 정부의 국고부담 50% 약속이 지켜진다 해도 근본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료보험이 본래 예측하지 못하는 건강상의 위험으로부터 민중의 건강을 경제적으로, 의학적으로 보호하는 사회보장 제도라고 한다면 현재의 의료보험의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도 의료보험 제도의 본질적 특성을 강화,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는 현재와 같이 ‘사적 이윤 추구’가 보건의료의 지배 논리로 존속되는 상황을 극복하는 것과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의 의료보험 제도를 노동자․민중의 건강권 실현을 위한 유력한 매개로서 강화시키는 핵심은 ‘의료의 공공성 강화’와 ‘경제적 부담의 사회화’이다.
사적인 의료 체계에 대한 공적인 의료 체계의 우월성은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 국민의료비가 전체 국민소득의 15%에 육박하는 반면 영국은 약 7% 수준이고, 국민 1인당 연간 의료비 지출 규모를 봐도 미국이 영국의 3배 이상에 이른다. 그러나 국민의 건강 수준을 비교하면 모든 항목에서 영국이 미국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즉 공적인 의료 체계가 재정을 안정화시키고 민중의 건강을 보호하는 데 훨씬 우월하다.
의료의 공공성 강화는 재원 마련의 방식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재원 마련의 방식은 건강과 의료에 대한 사회적 철학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보험이 건강상 위험으로부터 민중의 건강을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본연의 역할을 다하려면 현재의 개별 개인에 맡겨지는 경제적 부담을 사회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료보험 재정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부담을 증대시키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민중과 노동자의 세금과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정당하게 보상받는 과정일 뿐 아니라, 사회적 재원에 대한 민중과 노동자의 점유력을 높이는 과정이 된다.
따라서 완전한 의료보장 실현을 위해 노동자․민중이 외쳐야 하는 요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의료보험료 인상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정부는 의료보험 재정 위기를 주요하게 개개인의 보험료 인상을 통해서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의료보험 재정 위기의 일차적인 원인은 정부의 국고부담 50%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데에 그 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건강한 삶을 누리는 데에 한 푼도 아까워하는 정부는 더 이상 무슨 ‘국민의 정부’일 수 없다.
둘째, 정부와 사업주의 부담을 확대해야 한다. 의료보험 재정 적자는 정부의 국고부담 50% 이상, 사업주는 50%인 현재보다 사회적 책임분을 높여서 해결해야 한다. 실제 세금으로 운영되는 영국을 제외하고 독일은 630마르크 이하 노동자는 보험료를 내지 않으며, 그 이상의 사업주는 노동자보다 두 배의 보험료를 내고 있다. 프랑스도 사업주가 두 배 가까이 더 부담하고 있다. 오히려, 노동자가 보험료를 절반이나 부담하는 경우는 진짜로 드물다.
셋째, 의료비 본인부담금은 폐지되거나, 최소한으로 낮추어야 한다. 현재 의료비 본인부담금은 평균 50% 이상을 넘으며 의료보험료까지 포함하면 그 비중은 70%에 이른다. 이는 보험적용에 포함되는 의료서비스가 극히 제한적인 데에 그 이유가 있다. 보험적용을 전면적으로 확대하여, 국민 누구나 아무런 부담 없이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넷째, 민간의료보험의 도입과 확대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민간의료보험의 도입은 현행 공적 의료보험이 지극히 취약한 조건 속에서 공적 의료보험의 위축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선택권 확대’란 실은 ‘가진 자’의 선택권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민간의료보험은 공적 의료보험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게 되어 가진 자만이 양질의 보험 혜택을 누리게 되고, 수많은 민중들은 의료보험 혜택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다섯째, 의료보호와 의료보험과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의료보호는 경제적 능력이 없는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의료비 지원 제도이다. 그러나 그 대상은 점점 축소되어 왔으며, 정부 재정 지원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대다수 의료기관은 의료보호 환자를 기피하고 있다. 이 속에서 의료보호 환자들은 인간적인 차별마저 느끼고 있다. 더구나 점점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빈곤 인구가 1천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는 반면, 정부의 예산 지원이 축소됨에 따라 점점 지원 숫자도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 의료서비스는 여전히 개인이 부담하도록 되어 있다. 무엇보다 의료보험에서 보험적용을 전면적으로 확대하여 본인부담금을 폐지해 빈곤층과의 차별성이 없애고 나중에는 의료보험 제도 안에서 그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여섯째, 공공의료 체계를 확대․강화해야 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민간의료기관의 비중이 90%에 이를 정도로 높다. 민간의료기관은 본질적으로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노동자․민중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더구나 극심해져 가는 빈부 격차에 병원 한 번 가는 것도 부담스러운 이 때, 더욱 더 공공의료 체계를 강화하여 모두가 맘 편히 부담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계획에 따라 공기업 민영화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그나마 얼마 없는 공공의료기관을 축소하거나, 경쟁 시스템을 도입하여 수익성의 기준대로 운영할 것을 종용하는 거꾸로 가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중지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7월 1일 의료보험 통합을 기점으로 하여 우리나라 의료보험 제도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그것은 의료보험의 재정 확충을 위해 보험료 인상으로 노동자․민중의 부담을 더 지울 것인가, 아니면 정부와 자본의 부담을 더 늘릴 것인가 하는 기로이다. 이는 또한 포괄적이고 모든 의료서비스에 대한 급여를 확대해 노동자․민중의 건강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정책수단의 의미를 지닐 것인가, 아니면 지금 상태를 유지하거나 몇몇 항목을 개선하는 데에 그치고 시장 메카니즘의 도입을 확대할 것인가 하는 기로이다.
즉, 경제적 부담의 ‘개인화’냐 ‘사회화’냐, 의료 체계의 ‘공공성 강화’냐 ‘시장 논리의 합리화, 전면화’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이 갈림길에서 의료보험 제도가 갈 길은 전적으로 노동자․민중의 역량에 달려 있다. 한/노/정/연




》참 고 문 헌《

강동진, 「민간의료보험과 의료보장」, 2000. 5. 25
강동진, 「의료보험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고 어떻게 될 것인가」, ꡔ의료와진보ꡕ 21호 (2000년 6월호)
권미란, 「민간의료보험 도입 계획은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 ꡔ사회진보연대ꡕ 6호 (2000년 6월호)
이진석, 「민중의 건강 : 개인의 책임인가, 사회적 책임인가」, ꡔ의료와진보ꡕ 21호 (2000년 6월호)
최용준, 「노동자 보험료 절반 부담은 진짜 드물다」, ꡔ의료와진보ꡕ 21호 (2000년 6월호)
평등사회를 위한 민중의료연합, ꡔ노동자․민중의 완전한 의료보장 쟁취의 길ꡕ, 2000.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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