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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24
    가난한 이들의 건강과 인권을 침해하는 의료급여개악(2)
    시다바리
  2. 2007/01/24
    신자유주의 시대에 공장 안팎의 경계가 어딨나
    시다바리

가난한 이들의 건강과 인권을 침해하는 의료급여개악

 

지난 연말부터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료급여개악을 밀어붙이고 있다. 개악안을 확정짓고, 이후 규개위 제출-법제처 심사-국무회의제출 확정 등의 과정을 거쳐 2월 중순에 공고를 하고 시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참 나쁜' 장관이고 '참 나쁜' 정책이다.

아래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요청을 해와 작성한 글이다.

 

 



가난한 이들의 건강과 인권을 침해하는 의료급여 개악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은 신년사에서 “‘사람’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소홀”히 한것을 반성하면서 올해 목표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대한민국’을 목표로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기에 언급된 ‘사람’에 ‘의료수급권자’는 제외되어 있는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저소득층의 의료이용을 합리화한다는 명분으로 추진하고 있는 의료급여제도혁신이 그것이다. 혁신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입원이나 외래진료때 본인부담이 없던 의료급여 1종 수급자에게 본인부담금 1000원, 약국이용시 500원을 부담지우고 건강생활유지비를 한달에 6000원 지급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월 2만원 이상이면 초과액의 50%를 지원하는 본인부담보상제와 월 5만원 초과금액은 전액을 지원하는 본인부담상한제로 환불을 받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급여일수가 365일을 초과하는 경우 급여를 제한할 수 있는 수급자를 대상으로 선택병의원제도를 도입한다. 셋째, 의료급여증을 플라스틱카드로 바꾸어 수급자의 의료급여기관 이용실태를 실시간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이런 정책을 실시하게 된 배경으로 의료급여비용의 급증을 들고 있다. 실제로 의료급여 진료비는 2005년 3조 2370억원으로 2001년 1조9495억에 비하면 66%가 증가하였다. 건강보험이 같은 시기에 39% 증가한 것에 비하면 두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의료급여비용이 이렇게 늘어난 이유는 정부가 차상위계층 중 희귀난치성 질환자, 만성질환자, 그리고 아동을 의료급여 대상자로 지정하는 바람직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정부는 또 다른 이유로 의료급여수급자가 필요 이상으로 병원이용이 너무 잦고, 한번 이용할 때 많은 진료비를 소요하는 것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의료급여 수급자들이 필요 이상으로 의료를 과잉이용한다는 것은 왜곡된 것임을 정부 스스로 실토한 바가 있다. 작년 12월 입법예고안을 발표할 때 의료급여환자가 건강보험 환자보다 3.3배나 병원이용을 자주한다고 밝혔었다가, 올해 1월 1일 보도자료에서는 3.3배가 아니라 1.4배에 불과하다며 잘못된 통계였다고 정정한 바가 있다. 의료수급자들은 대부분이 노인이어서 여러질환을 갖고 있거나, 희귀난치성 질환 등 중증질환을 가진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 건강보험 환자보다 더 많이 병원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정부는 이를 의료수급자의 ‘도덕적 해이’ 때문이라고 언급하면서 의료수급자를 마치 범죄자로 간주하고 책임을 지우는 오도된 사고에서 의료급여혁신을 강행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럼 정부의 의료급여혁신 내용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첫째, 의료수급자의 의료이용을  제한하여, 치료접근권을 침해할 것이라는 점이다. 일 예로 캐나다의 경우 의료이용에 있어 무료였다가 본인 부담을 지운 결과 20%이상이나 의료이용이 감소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다른 예로 본인부담이 없다 하더라도 고소득층에게 건강보험 50%의 본인부담을 지우는 것과 유사하며, 본인부담 25%를 지우면 고소득층에게 본인부담 95%를 지우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낳는다는 연구도 있다. 의료수급권자에 경제적인 문제는 아무리 작은 액수라도 의료이용에 있어 무엇보다 큰 장벽인 셈이다. 의료급여제도가 존재하는 일차적 이유는 저소득층에게 의료이용의 장벽을 없애고 적절한 진료를 통해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한정된 재원에서 재정의 운영을 하는데 있어서도 지켜야 할 원칙이다. 보건복지부의 혁신내용은 의료급여제도 존재의 원칙을 스스로 훼손하는 대책인 셈이다. 정당하고 필수적인 의료이용마저 가로막는 장벽을 설치하는 것이다. 건강생활유지비 6천원을 지급한다고 하나 실효성이 얼마나 있을지는 의문이다. 더군다나 정부는 의료수급자에게 본인부담을 지움으로써 절감되는 재정규모에 대한 조사나 실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제출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둘째, 의료급여일수가 365일을 초과하는 수급자를 대상으로, 약물오남용으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고자 하는 취지로 선택병의원제도를 도입한다고 하면서, 이를 주치의 제도와 비슷한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하지만 주치의 제도는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의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일차의료제도의 하나로 간주되는 것이지, 여러 개의 병원이용을 제한할 목적으로 한 제도가 아니다. 실제로 의료급여일수가 365일을 초과하는 사례는 흔하다. 퇴행성관절염, 두통 등 여러 가지 질환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는 노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들을 약물오남용의 당사자로 지목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다. 더군다나 만개 이상의 파스를 이용하는 사례를 들면서 파스를 의료급여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조치까지 취하려 하고 있다. 이는 의료급여수급자에 대한 명백한 사회적 차별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으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플라스틱 카드의 도입은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적 차별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2003년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증을 건강보험카드로 대체하려다가 개인정보를 유출하고, 재정 소요가 많이 될 우려가 있다는 시민사회단체의 반대에 부딪혀서 좌절된 바가 있다. 플라스틱 카드의 기능은 1종인지 2종인지, 본인부담대상자인지 여부, 선택병의원제 대상 여부 등을 확인할 목적으로 도입한다고 한다. 건강보험 대상자에게 이를 도입하는 것도 문제일뿐더러, 의료수급자에게 도입하려 한다는 것은 사회적 낙인 효과를 불러일으킬 게 뻔하게 예상되는 사회적 차별 조치이다.


유시민 장관은 작년 10월에 낸 ‘의료급여혁신에 대한 국민보고서’에서 ‘의료서비스의 오남용을 막기 위하여 일정하게 권한을 제한하는 것은 부당한 차별이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다른 국민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는 사람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 또 1월 12일에 진행된 시민사회단체 대표와의 면담에서 복지는 ‘사회적 최소수준’을 보장하는 것이 자신의 철학이라고 얘기한 바가 있다. 이러한 인식은 전근대적이고 반인권적이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복지는 모든 국민들이 필요에 따라 경제적, 성별, 사회적 처지에 구애받지 않고 건강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국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는 가난한 이와 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이러한 권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사회적 최소수준’을 보장하는 것이 복지라는 인식은 천박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서 통용되었던 철학이다.


잘못된 철학에 기반한 잘못된 처방은 ‘혁신’이 아니라 ‘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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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시대에 공장 안팎의 경계가 어딨나

쥐어 짜는 글은 언제나 힘들다..그리고 내용에서 티가 난다.

참세상에 오랫만에 쓴 글이다.

제목 카피는 편집국에서 달아줬다...

 

 



 

‘현장’에 대한 두가지 왜곡된 시선


이 글은 노동조합운동의 ‘외부인’이 노동조합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사회운동의 시선이라고 보면 별 무리 없을 듯 싶다. 그리고 이른바 ‘현장’에 몸담고 있지 않은 이의 시선이기도 하다. 어쩌면 ‘현장’을 규정하는 두가지 왜곡된 시선에 대한 교정의 목적을 담고 있기도 하다. 두가지 시선의 하나는 ‘현장’의 절대성에 대한 의미 부여이다. 또 다른 하나는 ‘현장’의 상대화에 대한 지나친 강조이다.


전자의 입장에선 ‘현장권력 쟁취’가 주된 목표가 된다. 물론 이때의 ‘현장’은 공장 안이다. 생산과정의 유연화, 노동의 수량적․기능적 유연화, 공장의 일상생활에 대한 자본우위에 대해 노동자 현장통제의 중요성과 현장 장악이 핵심이다. 노동조합운동의 위기는 바로 현장에서 자본에 일방적으로 노동측이 밀리는 데서 시작했다는 데에 그 근원을 둔다. 그리하여 ‘현장’에서의 노동자통제와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제안이 제출된다. 현장소모임 강화, 현장통제를 위한 노동보건활동, 작업장통제와 감시에 대한 대응,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작업장 혁신을 제안하기도 한다. 작업장 혁신에 대한 제안의 문제의식은 이 입장의 주류적 흐름은 아니긴 하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연대’와 관련한 이러저러한 주장과 흐름에 대해선 ‘정규직 양보론’ ‘노동자 책임론’ ‘사회적 합의주의’ 등으로 비판적 견해를 유지한다. 이렇다 보니 사회의제에 대해선 ‘정치’의 과제로 치부한다. 노동조합운동의 ‘정치화’, 노동계급정치의 활성화가 핵심 대안으로 제기된다. 결국 ‘정치’는 현장과 분리된다. ‘현장정치’의 상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뜬구름을 쫓듯 손에 잡히는 것은 별로 없다. 


또 다른 시선인 후자의 입장에서의 주된 목표는 ‘시장임금’이 아닌 ‘사회임금’의 쟁취이다. 계급연대는 사회적 연대와 사회임금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장 안에서의 투쟁을 넘어서 이제 노동자 투쟁은 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본에 대해 공세적인 것처럼 읽힌다. 더 이상 공장 안에서 임금인상과 같은 소극적, 제한적 의제에서 탈피하여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사회의제로 전면적으로 자본․국가와 대항할 때 비로소 노동자계급이 복원이 이루어지며, 사회변혁의 중심에 설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제 임금연대, 소득연대, 사회연대 등으로 전략을 보다 구체화하고 있는 중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사회개혁 쟁취’를 내세웠던 소위 ‘국민파’가 초기 주류였다면 이젠 평등파라 여겨지던 이들이 비슷한 조류로 수렴되어 가는 양상을 띠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역시 ‘현장’은 공장 안을 의미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그리고 공장 안과 밖을 기계적으로 분리한다. 노동자의 노동력이 원천인 시장임금과 사회임금을 애초 원천이 다른 것처럼 대립시킨다. 결국 노동자의 주체적 결정과 행동은 뒷전으로 밀리고 자본, 국가와의 교섭이 핵심전략으로 대두된다. 알려져 있다시피 신자유주의하에서 노사정 협의의 의제는 의제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이다. 노동자적 의제를 설정할 필요성을 국가와 자본은 느끼지 못한다. 그리하여 노사정 협의테이블에서 이들이 관철시키려 하는 사회의제는 둘러리와 보완적 성격을 지닐 뿐이다. 이마저도 언제나 자본과 국가의 의지에 좌우되어 내팽겨쳐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들은 공장 안과 밖을 실용성에 따라 왔다갔다 한다.


신자유주의시대, 공장 ‘안’과 ‘밖’의 경계는 있는가?

 

노동조합운동이 처한 주체적․객관적 조건이 변화하고 있다는 건 새삼스런 언급이 아니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구조적 안착을 계기로 노동자내부의 분할과 위계, 대립, 갈등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원리를 무색케 한다.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남성/여성, 국내/이주 등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노동자 내부의 분할과 위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고용형태가 일반화됨으로써 ‘노동자성’을 부정받는 노동자도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이에 반응하여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가 새삼스럽게 노동조합운동의 핵심과제로 대두된다. ‘산업별 노조를 정착시켜야 한다’ ‘사회임금쟁취를 중심에 둔 투쟁전략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계급적 원칙과 사회변혁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사회운동적 의제와 결합한 노동자운동이 필요하다’ 등의 주장과 대안이 모색되고 실천을 전개중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근에는 ‘지역’을 강조하는 경향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산별노조의 근간은 지역이어야 한다’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대가 모색되어야 한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제 주장과 대안의 공통점은 모두 비정규직을 포함한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투쟁의 발전이 변화환 조건아래에서 노동조합운동의 성패를 갸름하는 핵심지점이라는 데에 있다.


앞에서 공장의 담벼락을 경계로 두가지 왜곡된 시선을 지적했다. 생산-유통-소비-문화-일상생활 등 자본은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더군다나 이젠 ‘자본엔 국경이 없다’란 오래된 명제를 증명이라도 하듯, 국가간 경계를 넘나든지 오래이다. 그러나 현재 노동조합운동은 아직 이 경계를 넘나드는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실제 노동자의 처지는 IMF이후 급격하게 이런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자본에게 있어 이 경계의 넘나듦은 ‘이윤’을 의미하지만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고통과 삶의 추락을 의미한다. 생산에 있어서는 노동시간, 노동강도의 강화로 자기 ‘몸’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린지 오래이며, 유통부문에선 이에 더하여 이젠 자본 의식과 몸으로 단장할 것을 요구받는다. 특수고용이란 이름이 그것이다. 소비-문화-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역이란 공간은 이미 개발과 성장이란 자본의 지상명령 앞의 포로가 되었다. 공장 유치를 위해, 핵쓰레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전쟁무기를 설치하기 위해 산을 허물고, 밭을 갈아 엎고, 살던 이를 내쫓고 결국 남은 이들의 삶도 피폐해져간다. 이 모든 것에서 배제되어 거리를 배회하거나,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하루살이 일감을 찾는 노동자의 숫자는 늘어만 간다. 밥을 굶는 아이도 늘어가고, 단전이 되어 촛불을 켜다 화재로 사망하는 이도 늘어난다.        


물론 고통의 지속과 삶의 추락은 이에 대한 저항을 동반한다. 한국통신비정규직투쟁, 근골격계질환 집단요양투쟁, 기륭전자․하이닉스․KTX노동자투쟁, 장애인이동권투쟁, 기초생활보장투쟁, 노숙인투쟁, 철거민투쟁, 평택주민투쟁, 부안주민투쟁, 화물노동자투쟁, 청소용역노동자투쟁, 최저임금인상투쟁, 의료시장화반대․공공병원쟁취투쟁, 그리고 지금 전개되는 한미FTA저지투쟁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영역․부문이 모두 저항과 운동인 시대이다. 이미 운동의 현실이 공장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를 허물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가르려는 시선이 운동의 미래를 제대로 바라보고 열어갈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제 전통적인 공장 밖을 지칭하는 사회운동과 공장 안을 지칭하는 노동조합운동의 경계도 허물고 마주쳐야 한다. 이 속에서 ‘연대’라는 이름의 가치를 실현하고, 인권, 노동권, 사회권, 생활권 등 보편적 지향과 요구를 담아내고 풍부히 해야 할 일이다.

    

지역-현장, 운동의 관계형성을 위한 원칙


지역-현장은 거주하는 공간이나, 행정구역상의 구획을 넘어서야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라 삶의 조건이 위협받는 노동자-민중의 ‘삶의 현장’이어야 한다. 따라서 ‘지역-현장’운동은 주민운동을 넘어 정규직, 일용직, 임시직,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영세자영업자, 그리고 이들 노동자의 가족 등이 서로 연대하고, 교류하고, 소통하는 관계와 만남의 형성과정이어야 한다. 각 운동이 각개 약진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주체의 운동에 함께 하기도 하고, 나아가야 할 목표를 정해 공동으로 투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들 운동의 꼼뮨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지역-현장 운동이다. 정치-경제-생활의 분리속에 이루어지는 왜곡된 정치운동이 아니라 삶에 근거하여 정치-경제-생활의 통합속에 대안적 삶을 일구어가는 새로운 정치운동이다. 자본이 강요하는 삶을 부정하고, 반(비)자본적 삶을 형성하고 만들어가는 대안적 삶의 형성운동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진정한 대중의 권력을 세워내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산별노조운동이 본격화되는 지금, 지역이 중심이 되는 산별노조이려면 바로 위와 같은 방향을 가진 ‘지역-현장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만남, 노동자주체 형성을 통한 대안적 공동체와 대중권력의 형성 등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지역-현장운동’의 몇가지 운동의제를 제안한다면...


하나. 실질적인 노동시간단축.


주40시간제가 도입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한국의 노동시간은 세계 최장이다. 초과근무의 일상화가 노동자에게 ‘내재화’되었다. 자본이 강요해서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선택하기도 한다. ‘강요된 선택’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일예로 현대자동차의 노동자들에게 ‘젊었을 때 많이 벌자’란 의식이 팽배해 있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과정에서 노동자의 몸은 병들어가고 의식과 삶은 자본이 정한 룰에서 쳇바퀴 돌 듯 더 깊숙이 빨려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조건은 ‘실리주의’운동을 더 강화시켜나가는 토대가 된다. 결국 노동자 내부의 분할과 위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숙이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메카니즘을 깨기 위한 시작으로 이제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줄이자. 자발적으로 줄이자. 잔업특근을 하지 말자. 자본이 강요하는 노동유연화를 스스로 거부하고 불복종하자. 야간노동을 거부하고 주야간 2교대 근무를 주간 2교대 근무로 바꾸는 운동을 가장 중심적으로 전개하자. 노동시간을 줄이고 줄어드는 임금에 대해서 두려워해선 자본이 정한 룰을 벗어나기 힘들다.


둘. 사회서비스 공공성강화


교육, 의료, 주택, 간병, 보육 등 사회서비스의 많은 부분이 시장적 방식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미 시장화가 많이 이루어진 의료․교육에 대해선 ‘더 많고 자유로운 시장’을 위하여 FTA 및 자발적 자유화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으며, 이제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간병, 보육 등에 대해서는 민간시장 활성화를 위한 조치들이 일자리 창출이란 명목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서비스에 대한 비용은 노동자에게 모두 부담이다. 부담을 할 수 없는 노동자들은 사회서비스에서 배제된다. 이러한 부담은 더 많은 노동을 하게 되고, 강요된 노동을 하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새롭게 불안정노동자를 양산하는 영역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삶에 강요되는 자본의 방식을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사회서비스에 대해서는 지역․국가가 사회적으로 공동 부담하고, 노동자들이 이러한 사회서비스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정책으로서 사회서비스 공공성강화를 넘어, 운동으로서, 주체형성과정으로 사회서비스 공공성강화 운동이 전개될 필요가 있다.


셋. 생활임금


대다수 불안정노동자들은 최저임금 근처에 임금수준을 받고 있다. 이러한 노동자가 600만명에 달한다. 최저임금 미만의 노동자도 350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언제든지 빈곤층으로 떨어질 위험을 안고 살고 있다. 이들은 또한 사회서비스로부터 배제되고, 사회보험으로부터 배제된다. 그리하여 더 열악한, 더 많은 시간의 노동을 강요받게 된다. 결국 스스로의 몸도 망가지고, 삶은 황폐화된다. 경비원, 청소용역, 장애인, 일용직, 간병노동자, 보육노동자 등 사회서비스 관련한 노동자의 상태는 더 그러하다. 그리고 이들은 노동공간이 뿔뿔히 흩어져 있고, 개별화된 노동양식이 대부분이라 뭉치기도 힘들다.

생활임금은 임금의 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임금수준뿐만 아니라, 사회권, 생활권의 보편적 권리까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까지 포함한다. 국가차원의 법, 제도의 개선에 국한되지 않은, ‘위에서 아래로’의 정책시행과정이 아닌 아래로부터 위로의 제도관철과정을 밟아나갈 필요가 있다. 이는 ‘빈곤’과 ‘저임금’을 매개로 한 불안정노동자를 조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넷. 노동자문화교육 공동체


안산 시화공단지역에서 공장 말고 가장 많은 것이 노래방, 단란주점 등 유흥업소라고 한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여기에서 보낸다. 이들에게 문화복지의 향유는 유흥문화의 소비와 동일하다. 한편 울산 등의 지역문화는 현대자본의 제공하는 서비스가 주도권을 행사한다. 노동자문화는 삶을 위한 충전과 삶을 풍부히 하기 보다는 한탕 소비에 국한되고 있으며 자본이 제공하는 문화에 가랑비에 옷젖듯이 물들어 가고 있다.

생산적이고 즐거은 노동자문화의 거점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노동자간 교류와 연대, 소통을 가능케 하며, 일상적 교육의 산실이 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이는 대안적 문화와 삶을 만들어가기 위한 과정의 일부이다.


그 외에 청소년 노동자의 노동권, 이주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권, 여성노동권, 노동자건강권 등을 의제로 하여 지역모델을 만들어 갈수 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한가지 사례를 소개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제주도에서는 ‘제주특별자치도 공공성 강화와 올바른 조례 제․개정을 위한 운동본부’가 결성되어 지금까지 주민참여조례, 친환경우리학교급식조례, 공동주택지원조례,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조례, 여성발전기본조례 등이 제정되어 사회단체, 주민 등이 공동참여하에 ‘자치정치’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이후 중증장애자립생활지원조례, 자활지원조례 등 삶에 연관된 영역과 중증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 여성권 확보 등의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과와 운동이 축적되어 간다면 대중들의 직접참여, 직접민주주의에 의한 자치권력형성의 토대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물론 현재는 법적형식의 변화를 이끌어낸 수준이고, ‘공공성 확보’라는 목표하에 다양한 영역과 부문을 아우르는 주체 형성 및 운동이 연동되는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자본이 강요하는 개발과 성장이라는 지역이데올로기와 전략, 흐름에 저항하는 운동의 동반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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